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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 ㅣ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역사문고 28
윤선태 지음 / 주류성 / 2007년 10월
평점 :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으로 들어가려면 사비성을 둘러싼 나성을 거쳐야 합니다. 나성의 여러 성문 가운데 가장 큰 문인 나성대문은 도성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쳐서 늘 북적거리는 곳입니다. 이 날은 웬일인지 유난히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나성대문으로 몰렸습니다. 나성대문 바깥에 있는 능사(陵寺)에서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절 앞에서는 제관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제를 지내는 듯했는데, 사내의 손에는 마치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나무 막대가 들렸습니다. 축문을 외고 폐백을 바치느라 한동안 바쁘게 움직였던 제관은 갑자기 손에 든 나무 막대를 제단 위에 올렸습니다. 하늘로 우뚝 솟은 나무 막대의 모습은 영락없이 발기한 성기를 보는 것 같아서 왠지 우스웠으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웃지 않고 숨죽인 채 그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조심스레 나무 막대를 세운 제관은 등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도양(道禓)께서 일어서셨다!!!"
이제껏 제관은 길의 신[道神, 路神]인 양(禓)에게 제사를 지내던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양을 상징하는 나무 막대에도 제관이 외친 것과 같은 말이 한문으로 쓰인 게 눈에 띄었습니다. 긴장한 얼굴로 제의를 보던 사람들도 제관의 외침을 듣고 안심했다는 듯 기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관은 나무 막대를 물웅덩이에 버리면서 제사의 모든 절차를 마쳤습니다. 역병이나 잡귀처럼 도성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되는 온갖 나쁜 기운을 물에 흘려보낸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에는 정말 이와 같은 도제(道祭)가 존재했을까요? 문헌 사료 어디에도 그것을 증명하는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발굴한 목간에 적힌 글은, 백제인들이 길의 신에게 나쁜 기운을 도성 밖으로 몰아내 달라고 빌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남근형 목간의 모습(한겨레)
목간은 종이가 없던 시대에 글을 적으려고 쓰던 나뭇조각을 가리킵니다. 아무래도 나무로 만들었기에 긴 글을 적으면 종이보다 훨씬 무거워진다는 것은 목간의 단점이었지만, 어디에서나 쉽게 재료를 찾아서 쓸 수 있다는 것은 목간의 장점이었습니다. 고대에 목간은 그 쓰임새가 다양해서 문서와 편지, 글씨를 연습하는 학습장 또는 도성을 출입할 때 필요한 통행증 등으로 쓰였습니다. 심지어 종이가 보급된 뒤에도 목간은 꼬리표로 쓰일 정도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지요. 이처럼 생활 곳곳에서 쓰인 만큼 목간은 고대인의 삶을 그리는 데 빠뜨릴 수 없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목간 하나하나가 작은 역사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 목간에 주목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수만 점이 넘는 목간을 발굴해서 연구한 중국, 일본과 달리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굴한 목간은 수백 점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국목간학회가 출범한 게 2007년의 일이니 한국에서 목간학(木簡學)은 아직 걸음마 단계인 셈입니다. 그래도 2007년은 여러모로 한국 목간학의 전환점으로 기억해야 할 해입니다. 한국목간학회 창립에 힘쓴 윤선태 교수가 학회가 창립되고서 몇 달 뒤에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 책은 일반 독자에게 백제 목간뿐만 아니라 한국 목간의 이모저모를 소개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큽니다.
"백제목간은 신라목간에 비해 출토점수는 비록 적지만, 매우 다양한 정보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질적인 측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기존의 백제사 연구에서 불모지로 남아있었던 백제의 율령, 문서행정, 심지어 도성 내외의 경관(景觀) 등에 대해서도, 목간자료를 제대로만 활용한다면 접근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백제목간의 발굴은 백제사 연구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백제 목간에 담긴 정보를 바탕으로 글쓴이가 그린 사비성 안팎의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사비성의 한가운데에는 남북대로가 깔렸습니다. 사비성의 주작대로인 궁남로(宮南路) 북쪽 끝에는 왕궁이, 남쪽 끝에는 궁남지가 있었고, 그 사이에는 오층 석탑이 들어선 정림사가 자리 잡았습니다. 궁남로를 중심으로 남북과 동서를 가르는 여러 개의 작은 도로가 사비성을 바둑판같이 나눴습니다. 이렇게 도로가 만든 구획에 따라 도성에 상부(동부), 전부(남부), 중부, 하부(서부), 후부(북부)의 5부(部)를 뒀고, 5부 아래에는 다시 5항(巷)을 뒀습니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왕경인들을 신분에 따라 사는 곳을 달리하도록 했습니다.
이를테면 궁남지에서는 서부후항(西部後巷)에 '귀인(歸人)'이라고 불린 이들이 살았다는 목간이 나왔는데, 이것은 사비성 안에 귀화인들이 따로 모여 사는 구역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수서(隋書)』에는 백제에 신라인, 고구려인, 왜인, 중국인 등이 살았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관련 자료). 그런데 이 궁남지 목간에서 귀인을 '부이(部夷)'라고도 불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부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의 부이라는 용어는 백제인들이 백제를 중화로, 주변국을 번이로 인식한 중화사상을 지녔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백제인들은 도성 안팎에 여러 장치를 설치해 자신들의 소중화 의식을 드러냈습니다. 부이들이 사는 특수 행정 구역이 도성 안에 설치한 장치였다면, 사비성 좌우에 우이(嵎夷)와 신구(神丘)라는 지명을 붙인 것은 도성 밖에 설치한 장치였습니다. 우이는 해가 돋는 곳이고 신구는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곤륜산인데, 도교의 냄새가 짙은 이 지명들에서 우리는 사비성을 천하를 통섭하는 세계의 중심 공간으로 표상하려 했던 백제인들의 의지를 엿봅니다. 뒷날 신라와 당(唐) 제국이 '우이도행군총관'과 '신구도행군대총관'이라는 직책을 앞세워 백제로 쳐들어왔음을 떠올린다면 우이와 신구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었습니다.
"사비도성을 동서에서 수식했던 우이와 신구는 그 작명 속에 분명히 도교적인, 신비주의적인 세계관이 깃들여있다. 이러한 공간편성방식은 이 시기 백제가 사비도성을 천하의 중심으로 연출하기 위해 진행했던 일련의 작업들, 예를 들어 신선사상(神仙思想)에 바탕을 둔 사비도성 주변의 삼산(三山) 배치, 그리고 그곳 삼산에 신인(神人)이 살면서 서로 왕래하였다는 내러티브(narrative), 백제의 사방계산(四方界山)과 오악(五嶽)의 성립,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궁남지 건설, 오제(五帝)에 대한 제사체계의 성립 등과 맥락이 닿아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작업은 궁극적으로 신비주의를 통한 백제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하였다고 생각된다."
그 밖에도 백제가 신라보다 훨씬 빨리 중국의 정중제(丁中制)를 받아들였으며, 고구려나 신라와는 다른 경로로 중국의 문물을 들여왔다는 사실이 목간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중국인들이 "관리의 일도 잘 본다"라고 평가한 백제의 행정 수준도 목간으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사료가 적어 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목간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지요.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백제사의 수수께끼를 목간을 실마리로 삼아 풀어 본 『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는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 볼 만한 책입니다.
책 속에서 윤선태 교수는 "봇물 터지듯, 백제목간이 발굴"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는데, 그만큼은 아니지만, 해마다 꾸준히 백제 목간을 발굴하는 상황입니다. 특히 얼마 전에는 구구단이 적힌 구구표 목간을 확인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관련 기사). 앞으로 더 많은 목간을 찾고 연구 결과를 쌓는다면 또 다른 '백제 이야기'를 듣는 날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2016년 6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