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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
권내현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9월
평점 :
막동(莫同)은 몰락한 양반집의 노비였습니다. 비록 노비 신세이지만, 남의 종노릇이나 하다가 늙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어느 날 주인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 옛 주인인 송생(宋生)과 우연히 만난 '반노' 막동은 자기가 양반이 된 사연을 말합니다.
주인집을 나선 뒤 막동은 대가 끊긴 최씨(崔氏)의 집안사람인 양 행세하며 서울에서 돈을 벌었습니다. 돈을 웬만큼 모으자 시골로 이사한 막동은 양반처럼 글을 읽고, 재물을 써서 주위의 환심을 삽니다. 사족으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막동은 한 무변의 딸을 아내로 맞습니다. 심지어 과거에 급제해 동부승지까지 지낸 막동을, 마을 사람들은 '최 승지'로 부르며 유지로 대접합니다. 송생은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누린 막동의 모습에 놀라 감히 추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오히려 송생은 막동이 입막음하려고 준 돈을 받고 그의 비밀을 지켜 줍니다.
이것은 『청구야담(靑邱野談)』에 실린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도망한 노비가 신분 세탁에 성공하여 크게 출세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점에서 신분 제도가 서서히 무너지던 조선 후기의 세태를 엿볼 수 있지요. 그렇다면 막동의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을 법한 일이었을까요? 권내현 교수의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 년의 기록』을 읽으며 그 의문점을 풀어 봤습니다. 경상도 단성현에 살았던 수봉(守奉)과 그 후손들의 호적과 족보를 조사한 이 책에서 우리는 막동처럼 신분 상승을 꿈꿨던 사람들을 만납니다.

김득신의 <노상알현도>에서(우리역사넷)
17세기 중엽에 태어난 수봉은 원래 심정량(沈廷亮)이라는 양반이 부리던 노비였습니다. 당연히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노비였습니다. 수봉의 조상들이 언제부터 노비 신세가 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기 뜻과 상관없이 노비로 태어난 수봉이 노비의 굴레를 스스로 벗었다는 사실만 확실히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노비였음에도 재산을 제법 지닌 수봉은 재산 일부를 나라에 바쳐 면천합니다.
다만 막동이 곧바로 양반이 된 것과 달리 수봉은 평민이 된 것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양반을 자처하려면 수봉이 넘어야 할 장애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김(金)이라는 성을 쓰고, 아들의 이름을 고유어계에서 한자어계로 바꾸고, 납속통정대부라는 직역을 얻고, 조상들의 신분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것만으로는 양반이 될 수 없었습니다. 양반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머나먼 여정'이었습니다.
"김수봉의 후손들이 본격적으로 유학을 칭하기 시작한 것은 1831년에서 1867년 사이에 등장하는 그의 5세손과 6세손 단계에서였다. 19세기 호적은 내용이 소략한 데다 엄밀성도 이전 시기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수봉의 후손들도 기재되지 않은 사람이 많은데, 호적에 등장하는 이들의 대다수가 유학을 칭했다. 그 시기는 대개 19세기 중엽부터다. 김수봉의 후손들이 중간층의 직역을 획득한 뒤 다시 수십 년이 지나면서, 한때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유학이란 호칭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는 수봉이 노비에서 해방되고 약 2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물론 직역을 유학(幼學)으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뚜렷했습니다. 진짜 양반님네는 수봉가를 혼인 상대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반상의 구별이 점차 흐릿해져도 그들에게 수봉가 사람들은 가짜 양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수봉가는 그 벽을 뛰어넘으려고 본관을 김해에서 안동으로 바꾸거나 양반 문화를 받아들여 가계 계승을 위한 입양을 추진합니다. 족보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막동처럼 벼슬길에 나가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수봉가가 학문적 성취까지 이루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수봉과 수봉의 후손들은 당대 사회의 모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민란의 들불이 삼남 지방을 휩쓸었을 때도 수봉가가 거기에 가담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편법을 아예 안 쓴 것은 아니나, 대체로 합법적인 수단으로 지위 상승을 꾀한 그들은 시대에 순응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렇지만 양반을 향하여 나아가는 수봉가의 기나긴 도전은 충분히 인상 깊습니다. 그러한 도전이 모이고 모여 견고한 신분 제도를 무너뜨리고 역사의 물길을 바꿨다고 생각한다면, 수봉가와 같은 장삼이사들의 삶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 2016년 1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