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공간 책세상총서 3
모리스 블랑쇼 / 책세상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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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절망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절망은 무엇에도 결정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 "절망은 언제나 당장 그 목표를 넘어선다"(카프카, <일기> 1910). 마찬가지로 글 쓰는 행위의 기원은 "진정한" 절망일 수밖에 없다. 즉 그 어느 것도 권유하지 않는 절망, 모든 것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절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글을 쓰는 자에게서 그 펜을 앗아가는 절망만이 글을 쓴다는 행위의 기원이다. 이 두 움직임의 공통점은 단지 이들 자체의 불확정성뿐이며, 오로지 이 불확정성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두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 아무도 자기 자신에게 "나는 절망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당신은 절망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아무도 "나는 글을 쓴다."라고 긍정할 수 없다. 단지 "당신은 글을 쓰십니까? 그렇습니까? 당신은 글을 쓰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카프카(-) 1912년까지 그에게 있어서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은 매우 컸었다. 이 욕망은 여러 작품을 낳았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그에게 문학적 재능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신을 주지 못했다. 아니 그 작품들은 그에게 자신의 문학적 재능보다는 오히려 그가 자신의 문학적 자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직접적인 의식을 더욱 확신하게 했다. 직접적으로 의식한 그의 문학적 자질이란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충일감의 원시적인 힘을 말한다. 그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의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였다.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힘이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느 정도까지 다른 모든 작가들과 다름없는 일개 젊은 작가에 불과했다는 가장 놀랄 만한 증거는 카프카가 브로트 Max Brod와 함께 공동으로 쓰기 시작했던 소설이다. 자신의 고독을 그렇게 공유한다는 것, 그것은 카프카가 아직도 자신의 고독 주위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일기>의 메모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아주 빨리 그는 이 사실을 깨닫는다. "막스와 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의 글이 내 앞에 있을 때, 내가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완성체로서, 그 어느 것도 도달할 수 없는 완성된 것으로서 나는 그의 글들을 감탄해 마지 않는다. 그 감탄의 양만큼 그가 소설 <리차드와 사무엘>을 위해 쓰는 문장 하나하나는 나 자신의 양보에 연결되어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나의 깊은 내면에까지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이 혐오스런 양보. 적어도 오늘만은 그렇게 느껴진다."(1911년 11월).

1912년까지 카프카는 자신을 온통 문학에 바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렇게 변명하고 있다. "나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아주 위대한 작업에 성공하지 못하는 한, 나는 아무 것도 감행할 수 없다." 1912년 9월 22일 밤, 그에게 이 성공의 증거가 찾아온다. 이날 밤 그는 단숨에 <선고>를 쓴 것이다. 이 작품은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이 표현될 수 있을 듯하고, 큰 불이 준비되어 그 불 속에 모든 것, 가장 기이한 생각들조차도 불타 사라져버리는 것같이" 여겨지는 지점으로 가까이 가게 한다. 얼마 후 그는 이 작품을 그의 친구들에게 읽어준다. 자기 작품을 육성으로 읽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굳히게 된다.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 이야기의 확실성이 입증된 것이다." (-)

이 이후로 카프카는 자기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앎은 앎이라고 할 수 없다. 글을 쓸 수 있다는 능력은 그의 것이 아니다. (-) 그가 쓴 글, 그것은 단지 접근하기 위한 작업, 확인하기 위한 작업일 뿐이다. <변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작품이 형편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나는 아주 끝장이 난 모양이다." 또 그 후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변신>에 대해 심한 혐오를 느낀다. 마지막 부분은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때 사업여행으로 방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1914년 1월 19일).


이 마지막 말은 카프카가 부딪혀 부서지고 만 갈등이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그는 직업이 있고 가족이 있다. 그는 이러한 세계에 속하며, 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시간을 준다. 그러나 그 시간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도 이 세상이다. 적어도 1915년까지 <일기>는 절망적인 생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거기에는 자살이라는 생각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자기 시간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이란 육체적인 힘, 고독, 침묵을 말한다. 틀림없이 외부적 상황이 그에게 불리했을 터이고, 그래서 저녁이나 밤에 일했을 것이다. 그래서 잠을 설치고 불안이 그를 지치게 했을 것이다. "일을 좀더 잘 조직했더라면" 갈등이 사라질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 후 병에 걸려 한가한 시간이 나게 되었을 때에도 갈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갈등은 점점 더 심각해지며, 다른 형태로 변한다. 이로운 상황이란 없다. 작품에의 의무에 "자기의 모든 시간"을 바친다 하더라도, "모든" 시간을 다 바친다 해도 그것은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문제는 작업에 시간을 바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기의 시간을 글 쓰는 것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이상 작업도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시간 속으로 이동하는 것, 시간이 상실되는 지점, 매혹과 시간의 부재가 주는 고독 속에 돌입하는 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

 카프카는 글을 이따금씩 미완성으로 "조금씩" 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9월 22일 밤, 그는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날 단숨에 씀으로써, 그는 그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하는 무한한 충동을 충분히 회복한 것이다. "이렇게 연속적으로 씀으로써만, 영혼과 육체가 이렇게 완전히 열린 상태에서만이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1914년 12월 8일). "단편적으로 쓰여진 것들이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하여, 아니면 밤을 완전히 새어서 내리달아 쓰지 않은 것보다 가치가 훨씬 덜하다는 것, 또한 나의 생활방식으로 볼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가치가 덜한 글밖에는 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포기된 채로 일기 속에 남아 있는가를 설명해주는 그 첫번째 이유를 발견한다. 카프카의 <일기> 속에는 상당한 분량의 이야기들이 중단된 채로 그대로 실려 있다. "이야기"는 대부분 몇 줄밖에는 계속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급속히 일관성을 이루고 밀도가 높아지지만 겨우 한 페이지를 메우고 중단된다. 때로 어떤 이야기는 몇 페이지 계속되어 점점 확실히 윤곽을 드러내며 전개되다가 멈추어버린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카프카는 이야기가 스스로 모든 방향으로 발전되어 나갈 수 있게 해줄 만한 충분한 폭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단편, 그리고 또 다른 단편에 불과하다. "어떻게 이 조각들을 용해시켜 비약이 가능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

카프카에게는 좀더 많은 시간과 또한 좀더 적은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람들이라면 먼저 그의 가족이 있다. 그는 이들의 구속을 잘 참아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족들로부터 해방되지도 못한다. 그 다음으로는 그의 약혼자가 있다. 이것은 이 세계 안에서 인간의 운명을 실현하며, 가족과 자식들을 갖고, 공동사회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그의 본질적인 욕망을 나타낸다. (-) F. B.와 약혼하고, 파혼하고, 재차 약혼을 하던 그 즈음, 카프카는 한결같이 점점 커져만 가는 긴장 속에서 "나의 결혼이 초래할 모든 장점과 단점"을 꾸준히 검토하면서 항상 이러한 요구에 부딪혔다. "나의 유일한 열망, 나의 유일한 소명은 ......문학이다. ......내가 이룬 모든 것은 오로지 고독의 소산이다. ......그때에는 나는 더이상 홀로 있지 못할 것이다. 이것만은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베를린에서의 약혼식에 대해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범죄자처럼 묶여 있었다. 진짜 쇠사슬로 나를 묶어 한 구석에 처박아놓고 그 앞에 헌병들을 세워놓았다 하더라도, 이것보다 더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약혼식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나를 삶으로 이끌어오고자 애썼다. 그러나 여기에 성공하지 못하자, 그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관용하려고 애썼다." 곧이어 약혼은 무효가 되나, 갈망은 그대로 남아 있다. "정상적인" 삶에 대한 욕망인 것이다. 또한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고민으로 인하여 이것은 더욱 비통하며 강한 욕망이 된다. (-) 카프카에게 있어 정상적인 삶과 평범한 행복의 포기는 올바른 삶의 확고함조차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법의 보호권 밖에 위치하게 되는 것, 그가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땅과 발판들을 잃는 것이었다. 어떤 면으로 그것은 법이 설 땅과 발판조차 박탈당하는 것이다. (-)

(-) 카프카의 경우는 모든 것이 훨씬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작품에의 의무와 자기 자신의 구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의무를 그가 융합시키려 애썼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카프카에게 고독을 선고하며, 그의 삶을 사랑도 인연도 없는 독신의 삶으로 만든 것이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글을 쓴다는 것을ㅡ적어도 자주,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ㅡ자기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으로 느꼈다. 어쨌든 그것은 고독이 그의 내면에서, 그의 밖에서 그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 절망과, 이러한 움직임과 불가분의 관계인 나약함 가운데서도 글을 쓴다는 것은 다시 충만한 삶의 가능성이 된다. 목표 없는 길이 된다. (-) 글을 쓰지 않을 때 카프카는 고독하다. 그가 야우노흐에게 말한 것처럼 "프란츠 카프카로서 고독하다". 그러나 이 고독은 불모의 차디찬 고독이다. 그가 마비라고 부르는, 화석처럼 얼어붙게 하는 추운 고독이다. 이것이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제일 큰 위협이었던 것 같다. (-) "나는 마비되었다. 나는 돌이다."라고 횔덜린은 말한다. 카프카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고, 관찰하고, 증명하고, 기억하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함께 함에 있어, 나는 무능하다. 이 무능력은 매일 더욱 커진다. 나는 돌이 된다. 내가 작업 속에서 나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희망이 없다."(1914년 7월 28일).



모리스 블랑쇼_카프카와 작품에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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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공간 책세상총서 3
모리스 블랑쇼 / 책세상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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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작가에게 모든 "자연", 모든 성격을 상실할 것을 요구한다. 그를 자기이게 하는 결단에 의해 타인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그치게 한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비인칭의 긍정이 예고되는 공허한 공간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요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의무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내용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강요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호흡해야 할 공기일 뿐이다. 이것은 그 위에 자신을 고정시켜 우리가 사랑하는 얼굴들이 보이지 않게 되는 빛의 마멸일 뿐이다. 마치 가장 용감한 사람들도 오로지 계략을 씀으로써만 위험에 과감하게 맞서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부름에 답하는 것은 진실의 부름에 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무언가 이야기할 것이 있고, 그들 내부에서 해방시켜야 할 세계가 있으며, 감당해야 할 임무가 있고, 정당화해야 할, 그러나 정당화할 수 없는 그들의 삶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예술가가 그를 격리시키고 이 격리 속에서 그를 그 자신으로부터 박탈해버리는 이 원초적인 경험에 몸을 내맡기지 않는다면, 또한 그가 오류나 무한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주의 끝없음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면, 사실 시작이라는 말은 상실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정당화는 예술가에게는 결코 떠오르지 않으며, 그의 경험 속에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러한 변명은 오히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제외된다. 예술가는 이러한 사실을 그가 일반적인 예술을 믿듯이, "일반적"인 경우로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작품은 이러한 변명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탐구 또한 이런 변명을 알지 못하며, 변명을 알지 못하는 이 무지의 고민 속에서 작품은 자신을 추구할 따름이다.



모리스 블랑쇼 _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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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 도정일 문학에세이 도정일 문학선 3
도정일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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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이켜보면, 시에는 단 하나의 이야기만이 감추어져 있는 것인지 모른다라든가 이 단 하나의 이야기를 부단히 변형시켜내는 것이 시라고 말한 대목은 상당히 과감하다. 문학작품은 하나의 이야기 아닌 복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때가 더 많다. 이야기는 작품의 비밀 속에서 발견되는 것인가 아니면 독자가, 그리고 시대가, 만들어넣는 것인가? 양쪽 모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보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가설의 유용성을 지금도 인정하고 있다. 문학은 인간의 갈망을 담은 언어구조물이다. 그 갈망은 개인의 꿈과 사회의 꿈을 함께 담고 있고, 시대 안에 있으면서 시대 바깥에 있다. 그것은 공시적인 것이면서 통시적인 것이다. 읽기의 경험들을 들어보면, 독자가 어떤 문학작품과 친해지는 것은, '옳아, 네가 지금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라면서 앞뒤 문맥을 해석하고 의미를 정리하는 일, 곧 갈망의 존재와 그 모습을 파악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작품은 독자에게 '이해'된 것이 아니다. 이때의 이해는 '완벽한 이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해는 늘 부분적인 것이거나 잠정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여기 감추어진 이야기는 이거야'라거나 '내가 이 작품을 이해했어'라고 말할 만한 순간을, 말하자면 '잠정적 종결'의 한 순간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런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가설이고 가설의 유용성이다. 작품 읽기의 이상은 최종적 읽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술래잡기를 계속하고, 수정과 재시도와 또다른 잠정적 결론의 순간에 도달해보는 일이다.




운명? 인간의, 또는 글의 운명이 어느 때 결정되는 것인지 하느님은 모른다. 나는 이 말이 하느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인간의 삶이 어떤 모양새로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사전 지식의 완벽한 부재야말로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주재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무지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효과이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는 존재 같아 보인다. 그러므로 운명이라든가 인연이라든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인간뿐이다. 도척이 공자에게 깨우쳐주었듯이 들판의 황소는 아비를 확인하지 않고 제 고향을 연연해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이 시대에 시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우면서도 손쉽고 위험하면서도 안전하다. 시인 오규원은 이미 10년 전에 "나는 나의 믿음이 무겁다/ 정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패배를 승리로 굳게 읽는 방법을/ 믿음이라 부른다 왜 패배를/ 패배로 읽으면 안 되는지 누가/ 나에게 이야기 좀 해주었으면/ 그 믿음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여/ 나에게 화를 내시라/ 불쌍한 내가 혹 당신을 위로하게 될 터이니까"(우리 시대의 순수시,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1981)라고 노래한 일이 있다. (-)



(-) 브로드스키는 어떤 근작 시편에서 인간이 "태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지만 죽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라고 쓰고 있다. (-)



당대의 지배적 생산양식에 대한 죄의식이 증발해버린 사회에서 문학은 어떤 양태를 띠게 되는가? 그 한 가지 양태는 문학이 자기 파괴를 통해 '상징적 죽음'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또하나는 신비주의에로의 탐닉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문학의 상징적 죽음이란 수확(생산)의 축제(소비)가 더이상 생산의 폭력을 보속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때 문학 자체가 자기 파괴의 방법으로 공동체의 상징적 희생제물이 되는 경우이다. 희생제물, 또는 '카니발'로서의 문학은 자기를 해체함으로써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추방되고자 하며, 문학의 창조력을 스스로 고갈시키는 패러디로 남아 있고자 한다. 현대적 패러디는 새로운 일의 가능성과 일의 진지성을 부정한다. 이 부정은 문학이 공동체의 웃음거리, 공동체의 질병이 되어 추방됨으로써만 자신의 사회적 존재 의의를 확인하는 희생제의의 최종 절차이다.



(-) 칸트가 늘 지적했듯 인간의 미학적 진술이나 판단이라는 것은 대상의 성질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인간의) 지각 내용의 진술이고 판단이다. 예를 들어 어떤 대상을 두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 아름다움은 대상이 지닌 성질이 아니라 그 대상을 아름다운 것으로 파악하는 우리 자신의 지각을 진술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답다'라는 미적 판단은 대상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대상을 '마치as if' 아름다운 것인 양 보기로 한 우리 자신의 지각 내용을 판단한 경우이다. (-) 은유의 양식도 이 미적 판단의 범주에 속한다. "마음은 거울이다"라는 은유적 진술의 주제는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라는 판단인데 이 경우 맑고 깨끗함이란 대상(마음)의 성질이 아니라 마음을 마치 맑고 깨끗한 것인 양 보기로 한 진술자의 결정 내용이다. (-)



시가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주 장르가 아닌 것은 서사의 유무 때문이 아니라 서사의 은닉 때문이다. 시는 서사의 일종이되 그 특유의 서술양식이 갖는 수사적 책략으로 이야기의 결핍을 추구하는 서사양식이다. 이 결핍의 책략은 이야기의 추방(생략, 압축, 절단)과 변환을 수행한다. 이야기의 추방이 시의 텍스트로부터 이야기를 보이지 않는 유령의 공간에 은닉한다면 변환은 메타포모시스의 방법으로 이야기를 감춘다. 추방과 변환이 수행하는 은닉은 이야기의 감춤이지 이야기의 없음이 아니다. 이 은닉이 시의 텍스트에서 이야기가 존재하는 방식, 다시 말해 이야기가 분포되는 방식이다. 그것은 이야기를 보이지 않는 부재와 결핍의 방식으로 존재하게 하고 인지에 저항하는 변신의 모습으로 있게 한다. 이 부재와 변신을 읽어내는 한 가지 방법은 통사 층위에서 절단.은폐된 이야기를 복원하고 의미론의 층위에서 변환된 이야기를 역변환시키는 읽기이다. 복원과 역변환이라는 두 가지 작용의 동시적 수행이 통사와 의미 두 차원에서의 읽기의 통합이다. (-)


(-) 허순위의 <말라가는 희망>(고려원, 1992)에 수록된 '반달'의 경우,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

처음에는 안 돼 안 돼 소스라치다가

스르르 풀리는 햇살의 태엽

(...)

그러고도 한 사나흘 뒤 비딱한 모자 쓰고

제 낯 드러내는, 잘 가 즐거웠어, 하는 말같이

이별의 정류장 아픈 네 머리 위


<반달> 부분


첫 행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는 완결된 통사구조를 갖고 있지 않은 결핍성의 불완전 진술이다. 이 결핍문은 '내'가 '네'로 바뀐 어사 치환을 보이면서 이 시의 마지막 행에 다시 반복되고 있다. 시의 종결행 자체가 불완전 문장으로 제시되고 있고 첫 행과 종결 행 사이에는 이 결핍문을 통사적으로 완결시켜줄 어떤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들 두 행은 통사 차원에서 이미 문제를 일으키고 이 통사적 불완전성은 의미 층위에도 영향을 주어 완결된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완성된 명제가 아니기 때문에 진술 내용으로서의 이야기를 생략하고 절단한다. 이 생략된 부분을 메우는 일은 독자의 몫이 되고, 독자는 시의 텍스트 위에 반달처럼 떠 있는 제목 '반달'을 끌어다가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에 반달이 떠 있다)

이별의 정류장 아픈 네 머리 위(에 반달이 떠 있다)


로 읽어냄으로써 통사구조의 완결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같은 완결이 이루어지는 순간 독자는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는 통사적 전체성을 결핍으로 지니면서 동시에 의미의 완결성을 연기한 '반쪽 명제'이기 때문에 이 절반의 명제 자체가 '온달'이 되기를 기다리는 (그러나 그 희망이 좌절되고 연기된) '반쪽 달'의 언어적 모사, 재현, 변용이라는 읽기를 산출한다. 동시에 그 반쪽 명제들은 '나'와 '너'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반달"은 '나와 너'의 은유적 변환이 된다. 이렇게 해서 통사와 의미 두 층위에서의 읽기가 통합되면 '이야기가 없는' 단순한 서경적 진술처럼 보이는 '이별의 정류장 내/네 머리 위(에 떠 있는 반달)'가 실은 숨겨진 '어떤 이야기'(전체)의 한 구성 부분이라는 기능을 부여받는다. 그 숨겨진 이야기란 인간의 반쪽성, 전체성의 상실, 분열의 상처, 그리고 통합을 향한 그리움의 이야기이다.



시적 담론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에로스의 독법이고 발견의 해석학이다. 시의 담론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시적 담론이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엉뚱한 것으로 '뒤바꾸어 말하기 때문에' 특별히 시적 담론이다. 이 감추기와 바꾸기, 생략과 응축, 위장과 간접화의 기술을 배제한다면 시의 존재는 결정적으로 훼손된다. 그 기술은 시의 담론을 시적 실천이게 하는 시의 생산력이다. 시는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좁게는 작품 차원에서, 넓게는 역사의 큰 문맥에서, 전체성을 지향하고 완결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시의 '서사적 성질'ㅡ곧 시의 '서사성'이다. 시적 서사성의 진정한 의미는 특정의 시가 그 텍스트의 표증에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않는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총체적 서사의 한 '부분'으로서 그 서사의 완결을 지향하고 있는가 않는가의 문제이다. (-) 다만 시는 소설의 방법으로 총체 서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방법, 시의 방법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시의 읽기는 시 텍스트가 시적 담론의 방법으로 감추거나 결핍으로 남겨둔 전체성과 완결성에의 운동에 읽기 자체가 참여하는 일이다. 시와 마찬가지로 시의 읽기도 자유(완결)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다. 이 그리움을 에로스라고 한다면 그것에 의해 인도되는 시의 읽기는 에로스의 독법이다.

시는 감출 뿐 아니라 또한 바꾸고 위장한다. 아니, 시는 바꿈으로써 감춘다. 시의 담론은 '나는 굶주린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포식한다/나는 바람을 먹고 바위, 돌멩이, 흙을 먹는다'라고 바꿔 말한다. 바람/바위/돌멩이/흙은 '먹을 수 없는 것'의 범주이며 따라서 먹을 수 없는 것들을 퍼먹고 다닌다는 것은 주린 자의 포식, 그의 잔치이다. '포식'은 포식이 아니라 굶주림의 변환어이고 바람/바위/돌멩이는 '먹을 수 없는 것'의 은유 체계이면서 '굶주림'의 환유 체계이다. 은유와 환유는 시적 변환을 담당하는 대표적 수사 장치들이다. 시란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모태 명제의 끝없는 변형이 아닐 것인가? 시에는 결국 '나는 너를 그리워한다'라는 단 하나의 이야기만이 감추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적 변환은 이 하나의 이야기를 감추기 위한 은유적.환유적 위장의 기술이고 포장의 책략이며, 시 읽기란 그 위장된 그리움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발견의 해석학일 것이다.



(-)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그녀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바뀌고 오디세우스만이 특별한 장치의 힘으로 그 변신의 형벌을 모면한다. 변신의 형벌이란 몸은 돼지로 바뀌었지만 정신은 인간의 것으로 남아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유지해야 하는 형벌이다. 그 기억이 고통스러운 까닭은 돼지의 몸과 인간의 정신이라는 그 기묘한 결합의 내부에 견딜 수 없는 비동일성과 분열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돼지이지만 돼지가 아니다. 나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비동일성의 고통이다. 이 고통을 더욱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언어의 상실'이다. 돼지로 바뀐 인간은 '나는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의 언어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라 돼지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그가 그 내적 분리의 고통을 인간 통신 회로 속의 분절 기호로 표현해낼 방법은 없다. 그가 이런 역경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수단은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기억 자체를 포기하는 '망각'의 기법을 선택하고 그 망각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일이다. (-)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돼지가 된 인간의 얘기는 후일 게오르크 루카치가 현대적 경험의 특수한 곤경을 '물화'라는 개념으로 이론화해낼 때 그를 전율케 했던 대목이며 그 전율은 <역사와 계급의식>에 씌어진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상품이 되어 있다. (...) 그러나 상품이 되었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한다." 물건이 된 인간, 상품이면서 인간임을 기억하는 상품ㅡ이것이 루카치가 평생을 두고 추구한 현대적 변신의 주제이다. 이 주제가 현대문학의 상상력과 이론의 충동을 자극하게 되는 것은 그 속에 분열(나는 내가 아니다), 인지(나는 마법에 걸려 있다), 극복(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이라는 세 가지 갈등의 계기가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의 돼지와 마찬가지로 물건이 된 인간도 내적 분열이라는 특수한 곤경을 그의 경험으로 가지고 있다. 분열의 경험은 그 분열의 조건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극복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소외된 '이방인'임을 극복할 수 없듯이, 키르케의 돼지가 마법을 벗어날 때까지는 돼지 속에 소외당한 자기를 회복할 수 없듯이 물건으로서의 인간은 그를 물건이게 하는 조건을 제거하지 않는 한 인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인간 회복을 향한 운동은 분열의 조건과 경험에 대한 인지 내용을 전제로 한다. 그가 그 자신의 소외를 알지 못한다면 회복을 향한 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는 기억의 정치학에 매달리고 기억의 시학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의 시학은 그러므로 인간 회복의 시와 서사를 낳는다. 이 서사를 출발시키는 계기는 인간 상실이라는 상처이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힘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의지이며 그것을 이끄는 길잡이는 인간 회복의 꿈이다. 따라서 그 서사는 상처와 의지와 꿈을 가진 것들의 이야기ㅡ곧 종놈의 서사, 돼지의 서사, 상품의 서사이고 이것들이 종놈, 돼지, 상품을 벗어나려는 이야기이다. (-)



(-) 기억의 시학이 욕망의 문제에 예민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인간의 물건 되기'가 바로 그 욕망이라는 매개에 의해 더욱 촉진되고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소비사회에서의 욕망은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사회적으로 모방된다. 욕망은 결핍감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그 결핍감 자체를 사회적으로 대량 생산하고 그 결핍감을 메우려는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후기 산업사회이다. 후기 산업사회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소비양식이 더욱 철저하게 확산되어 결핍의 무한 창출과 욕망의 무한 분출을 생산과 소비의 기본 문법으로 갖고 있는 사회이다. 기억의 시학은 이처럼 '사회적으로 생산된' 욕망이 후기 산업사회의 인간을 어떻게 인간 아닌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끝없는 변신의 윤회 고리 속에 묶어두는가를 관찰한다. 그러나 이 경우 기억의 시학이 곧잘 빠져드는 한 가지 오류는 욕망 부호에 관통당한 개인들을 향해 빈곤의 미덕을 노래하거나 '가난했던 과거'의 기억을 환기시켜 그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간 회복의 길인 것처럼 설교할 때이다. 가난했지만 인간다운 삶이 있었던 옛 고향에의 향수를 현대적 삶의 풍요로운 비참에 대한 하나의 반테제로 제시하는 것은 행복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기억이 궁핍 그 자체의 가치를 추켜세우는 데로 빠져든다면 그것은 궁핍성을 미화하고 신비화하는 일이 된다. 물화와 마찬가지로 궁핍은 미화의 대상이 아니다. 기억의 시학이 요구하는 인간 회복은 단순한 과거의 회복이 아니라 인간의 해방이다. (-)

기억의 시학 속에서 '꿈'과 '욕망'은 모두 역사적.사회적 산물이지만 둘은 모순관계에 있다. 꿈은 현실의 밖에서, 역사의 강 언덕 너머 어딘가에서 역사의 강 속으로 던져지는 '이상'이 아니라 역사의 현실 그 안에서 나오는 모순 극복의 그림이다. 이 경우의 역사란 바로 물화의 역사ㅡ인간을 물건으로 묶어두고 있는 억압의 역사이다. 키르케의 돼지가 '돼지로 묶여 있다'라는 바로 그 현실 때문에 해방의 꿈을 갖듯이 물화된 역사 속의 인간은 그 역사 때문에 그로부터 해방이라는 꿈을 갖는다. 이것이 꿈의 역사성이다. (-) 그러나 이 꿈은 또다른 형태의 욕망ㅡ물건의 상태로 남아 있으려는 모방 욕망 때문에 끊임없이 좌절된다. 이 욕망은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 있는 존재론적 결핍의 산물이 아니라 특정의 사회체제 속에서 만들어지고 모방과 매개에 의해 확산되는 사회적 욕망이다. 그러므로 물건이 되어 물건의 상태로 남아 있으려는 모방 욕망과 물건의 상태를 벗어나려는 탈출의 꿈은 서로 모순관계에 있다. 물화의 역사는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드는 상처를 안기면서 동시에 그 상처의 치유를 방해하고 좌절시킨다. 이 때문에 기억의 시학이 파악하는 역사란 상처, 억압, 좌절로서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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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아시아 제32호 2014.봄 -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 편집부 엮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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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는 아니고 아주 드물게 소위 문학강연이라는 것을 나가면 거의 한번은 듣게 되는 질문이 ‘작가님은 어떻게 글을 쓰시나요’다. (-)

그런 질문이 올 때마다 속으로는 역정이 치밀어 오른다. (-) 내가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 나는 두렵다. 아니, 그럼 지가 지 글 쓰는데 어떻게 쓰는지 모르고 썼다는거시여? 할까봐, 나는 되나캐나 대답이랍시고 하기는 하지만, (-)‘글을 어떻게 쓰느냐’는 질문이 정말 싫다. 왜 사람들은 내게 글을 왜 쓰는지는 묻지 않는가. (-)
그러나 나는 아주 소싯적부터 왜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이런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가장 중요한 물음은 언제나 '왜'가 아닌 '어떻게'였다. 나의 삶과 나의 글쓰기는 다른 물음을 해온 셈이다.
(-)나의 표현욕구를 처음으로 글로 옮겼던 시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나는 그림으로 초등학교부 장원을 하였는데 상품으로 예상치 않게 삼국지 한질과 양장으로 된 대학노트 두 권을 받았다. (-)읽을거리라고는 동네 회관에 비치된 ‘새마을’이 전부인 상황에서 삼국지는 대단한 읽을거리였다. 공책 한 권 사려면 엄마 눈치 봐가며 쌀독에 보관중인 계란 훔쳐다가 ‘점방’에 갖다주고 사야할 형편에 고급 양장 대학노트(-)가 생겼다. 적어도 우리 동네에서 나한테만 있는 노트였다. 나는 거기에 뭐라도 적어넣고 싶었다. 그래서 쓴 것이 ‘우리 동네의 봄’이었다. 영양실조라는 말이 보편이었던 그곳, 그 시절에 봄은 환희였고 그 환희를 나는 어떡하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고 기록해서 남기고 싶었다. 봄이 보이는 빛, 결, 냄새들을 내가 적은 것을 식구들이 읽었고 좋다고 박수를 쳤다. 그것이 내가 최초로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을 글 속에다 ‘잡어넣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어떤 어렴풋한 느낌은 있었다. 글이란 것이 결코 현실을 따라잡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 느낌을 어떻게 글로 옮길 재주는 없었다. 글이란 것이 쓰면 쓸수록, 아무리 써도 써도 현실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고 그 갈증이 결국 나를 잡아먹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최초로 내 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글로 재현했던 때로부터 15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몹시 고통스런 현실에 직면해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언제나 천형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라 산다는 것은 늘 그런 것이려니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다른 고통의 문제를 나는 풀 길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먹고 사는 문제 외에 나를 괴롭히는 것, 내 머리통을 낮이고 밤이고 짓누르는 것의 정체를 한번 알아나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알아봐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고통이란 것은, 고통의 실체를 알아볼 수 있을 때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통의 실체를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를 알지 못할 때 그것이 고통의 본질일지도.
이 세상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것은 종이와 연필이었다. 한때 너무나 구하기 힘든 그것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깜빡 잊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 탁아소에 보내고 공장에서 하루종일 ‘원단’ 만지고 돌아와 밥해 먹고 자는 반복된 생활(생존?)의 와중에는 아직도 먼 데 있던 그 도구들이 내 손만 뻗으면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던 날의 가슴떨림을, 그 참담한 기쁨을 내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으리.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해부하기와 다름없다. 병이 났을 때 일단 병난 곳을 헤집어보기. 혹여라도 더 상처가 덧난다 하더라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이 나의 글쓰기인 것. (-)
고통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의 실체를 알고 싶어 글을 썼고 글을 쓰는 동안 고통의 실체는 그 모습을 드러내 주었던가. 그랬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지인으로부터 ‘카톡’ 메시지를 받고는 밥을 먹으면서 무심코 열어 보았고 그는 더 이상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인생이 지인이 보낸 메시지의 영상 때문에 상당히 힘들어질 것 같아(-) 하소연을 하던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학살하는 동영상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를 위로했고 ‘아무 생각없이’ 메시지를 보냈다는 그의 지인을 성토했다. (-) 나는 1980년 5월에 광주에 있었다. 한참 감수성 예민한 십대 후반이었고 (-)갓 도시로 온 시골아이였다. 나는 흙에서 나서 흙에서 뒹굴다 어느 날 갑자기 도시의 아스팔트로 옮겨왔고 아스팔트에 번지는 죽은 사람의 피를 보았다. 죽은 사람을 보았다. 죽임을 당한 사람을 보았다! 나는 그 전까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사람이 사람한테 죽임을 당한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짐승을 죽이는 것은 본 적이 있다. 개를 몽둥이로 때려잡았고 돼지 멱을 땄고 닭모가지를 비틀었다.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빚을 많이 지고 술에 농약을 타서 먹고는 거품을 물고 마당에 누운 그를 동네사람들이 '아이고메' 하고 악을 쓰며 병원으로 옮겨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다른 죽음은 그냥 보통의 죽음이었다. 노인들은 늙어서 죽고 아이들은 병나서 죽었다. 그리고 나는 광주에서 보았다. 죽이는 사람들은 몽둥이와 총과 칼을 들고 사람을 때려죽이고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죽였다. 몽둥이에, 총에, 칼에 죽은 사람들의 피웅덩이 위로 몰려들던 새까만 파리떼를 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죽인 사람들에 대한 성토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도 없었다. 그런 적막강산의 세상은 또다른 죽음의 세상이었다. 내가 그때 그리고 하필 그곳에 있었던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든, 없었든, 그것을 보았든, 안 보았든, 본 사람은 본 사람대로, 못 본 사람은 못 본 사람대로, 봤어도 안 본 척 하는 사람도 뭔가가 잘못되었고 잘못되어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30년도 훨씬 넘은 뒤에사 나는 내가 뭔가가, 하여간 뭔가가 잘못되어 있었고 그러나 그러함에도 지가 살려고 종이와 연필을 쥐고서 뭔가를 알아보겠다고, 또 뭔가를 적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아닌가, 긴가, 혼자서 물어보고 괜히 혼자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는가.(-) 나는 지금 내내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 내 몸은 뭔가가 잘못되었다. 그렇다. 뭔가가. 뭔가가 잘못된 것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쓰는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왜 쓰는지, 왜 써야 하는지를 알지 못해 고통받고 있는가,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라 그런가. 그 모든 것을 알 수 없어 그런 것인가. (-) 지금 창밖에 눈 내리고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기 한량없는 적막강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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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서 존재자로 현대사상의 모험 11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서동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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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은 그 자신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필요이다. 즉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모면할 수 없는 관계를 부수는 것,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뜨리는 것에 대한 필요이다.'"


(-)


빛은 빛나며 자연적으로 이해된다. 빛은 이해의 사실 자체이다. (-)빛은 밤과 섞여 있다. (-) 우리는 밤처럼 숨막히는 존재의 속박을 감내한다. 그러나 존재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의 악(le mal)이다. (-)


(-)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에 대한 권태가 존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권태가 존재한다. (-) 권태롭게 하는 것은 우리 삶, 우리 환경의 어떤 특별한 형식이 아니다. (-) 권태는 존재 자체를 겨냥하고 있다. (-) 권태 속의 존재는 계속 존재함에 연루되어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자와 같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무엇인가 착수해야 하고 열망해야 한다. 판단하기를 중지해 버린 채 행위하고 열망하기를 기권해 버리는 완전한 회의론자의 그릇된 미소에도 불구하고, 그 계약의 의무는 피할 길 없는 '해야 한다'로 부과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태는 이 궁극적인 의무에 대한 불가능한 거부이다. (-)


(-) 시작의 순간에는 이미 잃어버리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하면 이미 소유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인데, 그 소유된 것이란 오로지 이 순간 자체이다. 시작은 단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 복귀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소유한다. (-) 우리는 여행 중인 것처럼 존재한다. (-)


(-) 실패는 모험의 일부를 이룬다. 중단된 것은 놀이에서와 달리 무 속으로 침몰해 버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 행위는 존재 안에 기입된 것 그 자체이다. 그리고 행위로부터의 물러섬으로서 무기력은 존재 앞에서의 머뭇거림, 즉 존재함에 대한 무기력이다.


(-)


이 상태가 잠이나 졸음이 쏟아지는 상태가 아닌 한에서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 "살려고 해봐야 한다."는 <해변의 묘지>의 한 구절인데, 이 말은 근심처럼 스며들어 오며, 그럼으로써 존재에 대한 관계와 행위에 대한 관계가 가장 부드러운 무기력의 한복판에서 노출된다. 무기력이 우리를 휩쓸어버리고 따분함은 무게를 더하며 지루하게 만든다. (-)


(-)


존재는 자신을 지칠 줄 모르고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했던 나르키소스의 순진함과 달리 존재는 자신의 그림자에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 보지 못한다. 대신에 존재는 그림자와 더불어 자기의 순진함의 실패를 깨닫는다. (-)

존재가 질질 끌고 다니는 무거운 중량은 바로 그 자신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무거운 중량은 존재의 여행을 복잡하게 만들어버린다. 존재는 그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다닌다.


(-) 무기력은 짐으로서의 존재 자체에 대한 기쁨 없는 무력한 반발이다. 그것은 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을 느끼는 일 역시 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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