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아시아 제32호 2014.봄 -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 편집부 엮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자주는 아니고 아주 드물게 소위 문학강연이라는 것을 나가면 거의 한번은 듣게 되는 질문이 ‘작가님은 어떻게 글을 쓰시나요’다. (-)

그런 질문이 올 때마다 속으로는 역정이 치밀어 오른다. (-) 내가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 나는 두렵다. 아니, 그럼 지가 지 글 쓰는데 어떻게 쓰는지 모르고 썼다는거시여? 할까봐, 나는 되나캐나 대답이랍시고 하기는 하지만, (-)‘글을 어떻게 쓰느냐’는 질문이 정말 싫다. 왜 사람들은 내게 글을 왜 쓰는지는 묻지 않는가. (-)
그러나 나는 아주 소싯적부터 왜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이런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가장 중요한 물음은 언제나 '왜'가 아닌 '어떻게'였다. 나의 삶과 나의 글쓰기는 다른 물음을 해온 셈이다.
(-)나의 표현욕구를 처음으로 글로 옮겼던 시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나는 그림으로 초등학교부 장원을 하였는데 상품으로 예상치 않게 삼국지 한질과 양장으로 된 대학노트 두 권을 받았다. (-)읽을거리라고는 동네 회관에 비치된 ‘새마을’이 전부인 상황에서 삼국지는 대단한 읽을거리였다. 공책 한 권 사려면 엄마 눈치 봐가며 쌀독에 보관중인 계란 훔쳐다가 ‘점방’에 갖다주고 사야할 형편에 고급 양장 대학노트(-)가 생겼다. 적어도 우리 동네에서 나한테만 있는 노트였다. 나는 거기에 뭐라도 적어넣고 싶었다. 그래서 쓴 것이 ‘우리 동네의 봄’이었다. 영양실조라는 말이 보편이었던 그곳, 그 시절에 봄은 환희였고 그 환희를 나는 어떡하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고 기록해서 남기고 싶었다. 봄이 보이는 빛, 결, 냄새들을 내가 적은 것을 식구들이 읽었고 좋다고 박수를 쳤다. 그것이 내가 최초로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을 글 속에다 ‘잡어넣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어떤 어렴풋한 느낌은 있었다. 글이란 것이 결코 현실을 따라잡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 느낌을 어떻게 글로 옮길 재주는 없었다. 글이란 것이 쓰면 쓸수록, 아무리 써도 써도 현실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고 그 갈증이 결국 나를 잡아먹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최초로 내 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글로 재현했던 때로부터 15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몹시 고통스런 현실에 직면해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언제나 천형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라 산다는 것은 늘 그런 것이려니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다른 고통의 문제를 나는 풀 길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먹고 사는 문제 외에 나를 괴롭히는 것, 내 머리통을 낮이고 밤이고 짓누르는 것의 정체를 한번 알아나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알아봐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고통이란 것은, 고통의 실체를 알아볼 수 있을 때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통의 실체를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를 알지 못할 때 그것이 고통의 본질일지도.
이 세상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것은 종이와 연필이었다. 한때 너무나 구하기 힘든 그것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깜빡 잊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 탁아소에 보내고 공장에서 하루종일 ‘원단’ 만지고 돌아와 밥해 먹고 자는 반복된 생활(생존?)의 와중에는 아직도 먼 데 있던 그 도구들이 내 손만 뻗으면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던 날의 가슴떨림을, 그 참담한 기쁨을 내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으리.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해부하기와 다름없다. 병이 났을 때 일단 병난 곳을 헤집어보기. 혹여라도 더 상처가 덧난다 하더라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이 나의 글쓰기인 것. (-)
고통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의 실체를 알고 싶어 글을 썼고 글을 쓰는 동안 고통의 실체는 그 모습을 드러내 주었던가. 그랬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지인으로부터 ‘카톡’ 메시지를 받고는 밥을 먹으면서 무심코 열어 보았고 그는 더 이상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인생이 지인이 보낸 메시지의 영상 때문에 상당히 힘들어질 것 같아(-) 하소연을 하던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학살하는 동영상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를 위로했고 ‘아무 생각없이’ 메시지를 보냈다는 그의 지인을 성토했다. (-) 나는 1980년 5월에 광주에 있었다. 한참 감수성 예민한 십대 후반이었고 (-)갓 도시로 온 시골아이였다. 나는 흙에서 나서 흙에서 뒹굴다 어느 날 갑자기 도시의 아스팔트로 옮겨왔고 아스팔트에 번지는 죽은 사람의 피를 보았다. 죽은 사람을 보았다. 죽임을 당한 사람을 보았다! 나는 그 전까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사람이 사람한테 죽임을 당한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짐승을 죽이는 것은 본 적이 있다. 개를 몽둥이로 때려잡았고 돼지 멱을 땄고 닭모가지를 비틀었다.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빚을 많이 지고 술에 농약을 타서 먹고는 거품을 물고 마당에 누운 그를 동네사람들이 '아이고메' 하고 악을 쓰며 병원으로 옮겨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다른 죽음은 그냥 보통의 죽음이었다. 노인들은 늙어서 죽고 아이들은 병나서 죽었다. 그리고 나는 광주에서 보았다. 죽이는 사람들은 몽둥이와 총과 칼을 들고 사람을 때려죽이고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죽였다. 몽둥이에, 총에, 칼에 죽은 사람들의 피웅덩이 위로 몰려들던 새까만 파리떼를 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죽인 사람들에 대한 성토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도 없었다. 그런 적막강산의 세상은 또다른 죽음의 세상이었다. 내가 그때 그리고 하필 그곳에 있었던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든, 없었든, 그것을 보았든, 안 보았든, 본 사람은 본 사람대로, 못 본 사람은 못 본 사람대로, 봤어도 안 본 척 하는 사람도 뭔가가 잘못되었고 잘못되어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30년도 훨씬 넘은 뒤에사 나는 내가 뭔가가, 하여간 뭔가가 잘못되어 있었고 그러나 그러함에도 지가 살려고 종이와 연필을 쥐고서 뭔가를 알아보겠다고, 또 뭔가를 적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아닌가, 긴가, 혼자서 물어보고 괜히 혼자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는가.(-) 나는 지금 내내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 내 몸은 뭔가가 잘못되었다. 그렇다. 뭔가가. 뭔가가 잘못된 것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쓰는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왜 쓰는지, 왜 써야 하는지를 알지 못해 고통받고 있는가,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라 그런가. 그 모든 것을 알 수 없어 그런 것인가. (-) 지금 창밖에 눈 내리고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기 한량없는 적막강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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