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돌이켜보면, 시에는 단 하나의 이야기만이 감추어져 있는 것인지 모른다라든가 이 단 하나의 이야기를 부단히 변형시켜내는 것이 시라고 말한 대목은 상당히 과감하다. 문학작품은 하나의 이야기 아닌 복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때가 더 많다. 이야기는 작품의 비밀 속에서 발견되는 것인가 아니면 독자가, 그리고 시대가, 만들어넣는 것인가? 양쪽 모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보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가설의 유용성을 지금도 인정하고 있다. 문학은 인간의 갈망을 담은 언어구조물이다. 그 갈망은 개인의 꿈과 사회의 꿈을 함께 담고 있고, 시대 안에 있으면서 시대 바깥에 있다. 그것은 공시적인 것이면서 통시적인 것이다. 읽기의 경험들을 들어보면, 독자가 어떤 문학작품과 친해지는 것은, '옳아, 네가 지금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라면서 앞뒤 문맥을 해석하고 의미를 정리하는 일, 곧 갈망의 존재와 그 모습을 파악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작품은 독자에게 '이해'된 것이 아니다. 이때의 이해는 '완벽한 이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해는 늘 부분적인 것이거나 잠정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여기 감추어진 이야기는 이거야'라거나 '내가 이 작품을 이해했어'라고 말할 만한 순간을, 말하자면 '잠정적 종결'의 한 순간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런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가설이고 가설의 유용성이다. 작품 읽기의 이상은 최종적 읽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술래잡기를 계속하고, 수정과 재시도와 또다른 잠정적 결론의 순간에 도달해보는 일이다.
운명? 인간의, 또는 글의 운명이 어느 때 결정되는 것인지 하느님은 모른다. 나는 이 말이 하느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인간의 삶이 어떤 모양새로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사전 지식의 완벽한 부재야말로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주재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무지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효과이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는 존재 같아 보인다. 그러므로 운명이라든가 인연이라든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인간뿐이다. 도척이 공자에게 깨우쳐주었듯이 들판의 황소는 아비를 확인하지 않고 제 고향을 연연해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이 시대에 시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우면서도 손쉽고 위험하면서도 안전하다. 시인 오규원은 이미 10년 전에 "나는 나의 믿음이 무겁다/ 정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패배를 승리로 굳게 읽는 방법을/ 믿음이라 부른다 왜 패배를/ 패배로 읽으면 안 되는지 누가/ 나에게 이야기 좀 해주었으면/ 그 믿음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여/ 나에게 화를 내시라/ 불쌍한 내가 혹 당신을 위로하게 될 터이니까"(우리 시대의 순수시,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1981)라고 노래한 일이 있다. (-)
(-) 브로드스키는 어떤 근작 시편에서 인간이 "태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지만 죽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라고 쓰고 있다. (-)
당대의 지배적 생산양식에 대한 죄의식이 증발해버린 사회에서 문학은 어떤 양태를 띠게 되는가? 그 한 가지 양태는 문학이 자기 파괴를 통해 '상징적 죽음'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또하나는 신비주의에로의 탐닉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문학의 상징적 죽음이란 수확(생산)의 축제(소비)가 더이상 생산의 폭력을 보속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때 문학 자체가 자기 파괴의 방법으로 공동체의 상징적 희생제물이 되는 경우이다. 희생제물, 또는 '카니발'로서의 문학은 자기를 해체함으로써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추방되고자 하며, 문학의 창조력을 스스로 고갈시키는 패러디로 남아 있고자 한다. 현대적 패러디는 새로운 일의 가능성과 일의 진지성을 부정한다. 이 부정은 문학이 공동체의 웃음거리, 공동체의 질병이 되어 추방됨으로써만 자신의 사회적 존재 의의를 확인하는 희생제의의 최종 절차이다.
(-) 칸트가 늘 지적했듯 인간의 미학적 진술이나 판단이라는 것은 대상의 성질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인간의) 지각 내용의 진술이고 판단이다. 예를 들어 어떤 대상을 두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 아름다움은 대상이 지닌 성질이 아니라 그 대상을 아름다운 것으로 파악하는 우리 자신의 지각을 진술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답다'라는 미적 판단은 대상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대상을 '마치as if' 아름다운 것인 양 보기로 한 우리 자신의 지각 내용을 판단한 경우이다. (-) 은유의 양식도 이 미적 판단의 범주에 속한다. "마음은 거울이다"라는 은유적 진술의 주제는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라는 판단인데 이 경우 맑고 깨끗함이란 대상(마음)의 성질이 아니라 마음을 마치 맑고 깨끗한 것인 양 보기로 한 진술자의 결정 내용이다. (-)
시가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주 장르가 아닌 것은 서사의 유무 때문이 아니라 서사의 은닉 때문이다. 시는 서사의 일종이되 그 특유의 서술양식이 갖는 수사적 책략으로 이야기의 결핍을 추구하는 서사양식이다. 이 결핍의 책략은 이야기의 추방(생략, 압축, 절단)과 변환을 수행한다. 이야기의 추방이 시의 텍스트로부터 이야기를 보이지 않는 유령의 공간에 은닉한다면 변환은 메타포모시스의 방법으로 이야기를 감춘다. 추방과 변환이 수행하는 은닉은 이야기의 감춤이지 이야기의 없음이 아니다. 이 은닉이 시의 텍스트에서 이야기가 존재하는 방식, 다시 말해 이야기가 분포되는 방식이다. 그것은 이야기를 보이지 않는 부재와 결핍의 방식으로 존재하게 하고 인지에 저항하는 변신의 모습으로 있게 한다. 이 부재와 변신을 읽어내는 한 가지 방법은 통사 층위에서 절단.은폐된 이야기를 복원하고 의미론의 층위에서 변환된 이야기를 역변환시키는 읽기이다. 복원과 역변환이라는 두 가지 작용의 동시적 수행이 통사와 의미 두 차원에서의 읽기의 통합이다. (-)
(-) 허순위의 <말라가는 희망>(고려원, 1992)에 수록된 '반달'의 경우,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
처음에는 안 돼 안 돼 소스라치다가
스르르 풀리는 햇살의 태엽
(...)
그러고도 한 사나흘 뒤 비딱한 모자 쓰고
제 낯 드러내는, 잘 가 즐거웠어, 하는 말같이
이별의 정류장 아픈 네 머리 위
<반달> 부분
첫 행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는 완결된 통사구조를 갖고 있지 않은 결핍성의 불완전 진술이다. 이 결핍문은 '내'가 '네'로 바뀐 어사 치환을 보이면서 이 시의 마지막 행에 다시 반복되고 있다. 시의 종결행 자체가 불완전 문장으로 제시되고 있고 첫 행과 종결 행 사이에는 이 결핍문을 통사적으로 완결시켜줄 어떤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들 두 행은 통사 차원에서 이미 문제를 일으키고 이 통사적 불완전성은 의미 층위에도 영향을 주어 완결된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완성된 명제가 아니기 때문에 진술 내용으로서의 이야기를 생략하고 절단한다. 이 생략된 부분을 메우는 일은 독자의 몫이 되고, 독자는 시의 텍스트 위에 반달처럼 떠 있는 제목 '반달'을 끌어다가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에 반달이 떠 있다)
이별의 정류장 아픈 네 머리 위(에 반달이 떠 있다)
로 읽어냄으로써 통사구조의 완결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같은 완결이 이루어지는 순간 독자는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는 통사적 전체성을 결핍으로 지니면서 동시에 의미의 완결성을 연기한 '반쪽 명제'이기 때문에 이 절반의 명제 자체가 '온달'이 되기를 기다리는 (그러나 그 희망이 좌절되고 연기된) '반쪽 달'의 언어적 모사, 재현, 변용이라는 읽기를 산출한다. 동시에 그 반쪽 명제들은 '나'와 '너'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반달"은 '나와 너'의 은유적 변환이 된다. 이렇게 해서 통사와 의미 두 층위에서의 읽기가 통합되면 '이야기가 없는' 단순한 서경적 진술처럼 보이는 '이별의 정류장 내/네 머리 위(에 떠 있는 반달)'가 실은 숨겨진 '어떤 이야기'(전체)의 한 구성 부분이라는 기능을 부여받는다. 그 숨겨진 이야기란 인간의 반쪽성, 전체성의 상실, 분열의 상처, 그리고 통합을 향한 그리움의 이야기이다.
시적 담론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에로스의 독법이고 발견의 해석학이다. 시의 담론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시적 담론이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엉뚱한 것으로 '뒤바꾸어 말하기 때문에' 특별히 시적 담론이다. 이 감추기와 바꾸기, 생략과 응축, 위장과 간접화의 기술을 배제한다면 시의 존재는 결정적으로 훼손된다. 그 기술은 시의 담론을 시적 실천이게 하는 시의 생산력이다. 시는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좁게는 작품 차원에서, 넓게는 역사의 큰 문맥에서, 전체성을 지향하고 완결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시의 '서사적 성질'ㅡ곧 시의 '서사성'이다. 시적 서사성의 진정한 의미는 특정의 시가 그 텍스트의 표증에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않는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총체적 서사의 한 '부분'으로서 그 서사의 완결을 지향하고 있는가 않는가의 문제이다. (-) 다만 시는 소설의 방법으로 총체 서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방법, 시의 방법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시의 읽기는 시 텍스트가 시적 담론의 방법으로 감추거나 결핍으로 남겨둔 전체성과 완결성에의 운동에 읽기 자체가 참여하는 일이다. 시와 마찬가지로 시의 읽기도 자유(완결)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다. 이 그리움을 에로스라고 한다면 그것에 의해 인도되는 시의 읽기는 에로스의 독법이다.
시는 감출 뿐 아니라 또한 바꾸고 위장한다. 아니, 시는 바꿈으로써 감춘다. 시의 담론은 '나는 굶주린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포식한다/나는 바람을 먹고 바위, 돌멩이, 흙을 먹는다'라고 바꿔 말한다. 바람/바위/돌멩이/흙은 '먹을 수 없는 것'의 범주이며 따라서 먹을 수 없는 것들을 퍼먹고 다닌다는 것은 주린 자의 포식, 그의 잔치이다. '포식'은 포식이 아니라 굶주림의 변환어이고 바람/바위/돌멩이는 '먹을 수 없는 것'의 은유 체계이면서 '굶주림'의 환유 체계이다. 은유와 환유는 시적 변환을 담당하는 대표적 수사 장치들이다. 시란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모태 명제의 끝없는 변형이 아닐 것인가? 시에는 결국 '나는 너를 그리워한다'라는 단 하나의 이야기만이 감추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적 변환은 이 하나의 이야기를 감추기 위한 은유적.환유적 위장의 기술이고 포장의 책략이며, 시 읽기란 그 위장된 그리움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발견의 해석학일 것이다.
(-)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그녀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바뀌고 오디세우스만이 특별한 장치의 힘으로 그 변신의 형벌을 모면한다. 변신의 형벌이란 몸은 돼지로 바뀌었지만 정신은 인간의 것으로 남아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유지해야 하는 형벌이다. 그 기억이 고통스러운 까닭은 돼지의 몸과 인간의 정신이라는 그 기묘한 결합의 내부에 견딜 수 없는 비동일성과 분열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돼지이지만 돼지가 아니다. 나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비동일성의 고통이다. 이 고통을 더욱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언어의 상실'이다. 돼지로 바뀐 인간은 '나는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의 언어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라 돼지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그가 그 내적 분리의 고통을 인간 통신 회로 속의 분절 기호로 표현해낼 방법은 없다. 그가 이런 역경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수단은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기억 자체를 포기하는 '망각'의 기법을 선택하고 그 망각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일이다. (-)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돼지가 된 인간의 얘기는 후일 게오르크 루카치가 현대적 경험의 특수한 곤경을 '물화'라는 개념으로 이론화해낼 때 그를 전율케 했던 대목이며 그 전율은 <역사와 계급의식>에 씌어진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상품이 되어 있다. (...) 그러나 상품이 되었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한다." 물건이 된 인간, 상품이면서 인간임을 기억하는 상품ㅡ이것이 루카치가 평생을 두고 추구한 현대적 변신의 주제이다. 이 주제가 현대문학의 상상력과 이론의 충동을 자극하게 되는 것은 그 속에 분열(나는 내가 아니다), 인지(나는 마법에 걸려 있다), 극복(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이라는 세 가지 갈등의 계기가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의 돼지와 마찬가지로 물건이 된 인간도 내적 분열이라는 특수한 곤경을 그의 경험으로 가지고 있다. 분열의 경험은 그 분열의 조건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극복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소외된 '이방인'임을 극복할 수 없듯이, 키르케의 돼지가 마법을 벗어날 때까지는 돼지 속에 소외당한 자기를 회복할 수 없듯이 물건으로서의 인간은 그를 물건이게 하는 조건을 제거하지 않는 한 인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인간 회복을 향한 운동은 분열의 조건과 경험에 대한 인지 내용을 전제로 한다. 그가 그 자신의 소외를 알지 못한다면 회복을 향한 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는 기억의 정치학에 매달리고 기억의 시학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의 시학은 그러므로 인간 회복의 시와 서사를 낳는다. 이 서사를 출발시키는 계기는 인간 상실이라는 상처이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힘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의지이며 그것을 이끄는 길잡이는 인간 회복의 꿈이다. 따라서 그 서사는 상처와 의지와 꿈을 가진 것들의 이야기ㅡ곧 종놈의 서사, 돼지의 서사, 상품의 서사이고 이것들이 종놈, 돼지, 상품을 벗어나려는 이야기이다. (-)
(-) 기억의 시학이 욕망의 문제에 예민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인간의 물건 되기'가 바로 그 욕망이라는 매개에 의해 더욱 촉진되고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소비사회에서의 욕망은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사회적으로 모방된다. 욕망은 결핍감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그 결핍감 자체를 사회적으로 대량 생산하고 그 결핍감을 메우려는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후기 산업사회이다. 후기 산업사회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소비양식이 더욱 철저하게 확산되어 결핍의 무한 창출과 욕망의 무한 분출을 생산과 소비의 기본 문법으로 갖고 있는 사회이다. 기억의 시학은 이처럼 '사회적으로 생산된' 욕망이 후기 산업사회의 인간을 어떻게 인간 아닌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끝없는 변신의 윤회 고리 속에 묶어두는가를 관찰한다. 그러나 이 경우 기억의 시학이 곧잘 빠져드는 한 가지 오류는 욕망 부호에 관통당한 개인들을 향해 빈곤의 미덕을 노래하거나 '가난했던 과거'의 기억을 환기시켜 그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간 회복의 길인 것처럼 설교할 때이다. 가난했지만 인간다운 삶이 있었던 옛 고향에의 향수를 현대적 삶의 풍요로운 비참에 대한 하나의 반테제로 제시하는 것은 행복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기억이 궁핍 그 자체의 가치를 추켜세우는 데로 빠져든다면 그것은 궁핍성을 미화하고 신비화하는 일이 된다. 물화와 마찬가지로 궁핍은 미화의 대상이 아니다. 기억의 시학이 요구하는 인간 회복은 단순한 과거의 회복이 아니라 인간의 해방이다. (-)
기억의 시학 속에서 '꿈'과 '욕망'은 모두 역사적.사회적 산물이지만 둘은 모순관계에 있다. 꿈은 현실의 밖에서, 역사의 강 언덕 너머 어딘가에서 역사의 강 속으로 던져지는 '이상'이 아니라 역사의 현실 그 안에서 나오는 모순 극복의 그림이다. 이 경우의 역사란 바로 물화의 역사ㅡ인간을 물건으로 묶어두고 있는 억압의 역사이다. 키르케의 돼지가 '돼지로 묶여 있다'라는 바로 그 현실 때문에 해방의 꿈을 갖듯이 물화된 역사 속의 인간은 그 역사 때문에 그로부터 해방이라는 꿈을 갖는다. 이것이 꿈의 역사성이다. (-) 그러나 이 꿈은 또다른 형태의 욕망ㅡ물건의 상태로 남아 있으려는 모방 욕망 때문에 끊임없이 좌절된다. 이 욕망은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 있는 존재론적 결핍의 산물이 아니라 특정의 사회체제 속에서 만들어지고 모방과 매개에 의해 확산되는 사회적 욕망이다. 그러므로 물건이 되어 물건의 상태로 남아 있으려는 모방 욕망과 물건의 상태를 벗어나려는 탈출의 꿈은 서로 모순관계에 있다. 물화의 역사는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드는 상처를 안기면서 동시에 그 상처의 치유를 방해하고 좌절시킨다. 이 때문에 기억의 시학이 파악하는 역사란 상처, 억압, 좌절로서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