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 사랑과 돌봄에 관한 퀴어한 참조
캔디(윤다림) 지음 / 들녘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돌봄에 대해 아예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나는 력사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_30쪽


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날 ‘진정한 보호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우자도, 가족도, 친인척도 아닌 ‘그냥 친구’니까. 그래서 이후 나는 ‘환자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친구’라 답했던 일을 내내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호자의 자격은 무엇인가?’ _33쪽


(-)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여성스럽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은 력사를 신기하게 여겼고 궁금해했다. 력사는 이성애자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성애자로 보이지 않는 것과 동성애자로 의심받는 것은 좀 다른 문제였다. _55-56쪽


‘호스피스 병동에 자리가 난다는 것은 대부분 누군가가 죽어서 나갔다는 뜻이겠지. 아, 내가 죽을 준비를 하러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구나. (-)’ _78쪽


하지만 취직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력사가 자기 스타일을 고수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면접관들이 생각하는 ‘단정한 옷’과 력사가 생각하는 ‘단정한 옷’은 너무나 달랐다. 사회는 력사에게 ‘여성의 복장’을 요구했던 것이다. 여성인 력사가 입는 옷이라면 당연히 ‘여성의 복장’이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그건 ‘여성의 복장’이 아니라고 말했다. _96-97쪽


“아무개에게 여자 수의를 입힐 수 있었어요.”

아무개 씨는 트랜스여성이다. 많은 퀴어의 장례식에 다니면서도 나는 한 번도 그들이 어떤 수의를 입었을지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수의에 남성용과 여성용이 나뉘어 있으리라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97-98쪽


(-) 어머니는 끊임없이 찾아오는 이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내 친구들을 소개하는 게 너무나 어려웠다. 누가 봐도 퀴어인 저 퀴어를 나는 뭐라고 소개해야 하지? 좋았지만 난감하고, 어렵고, 맘이 복잡해지는 순간. 나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다. 같이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는 동료들은 “일하다 만난 좋은 일 하시는 분”이 되었고, 커뮤니티의 친구는 “동호회 친구” “같이 운동(!)하는 사람”, 하다하다 “제 사촌동생”이 되었다. (-) 딱 거기까지가 내가 그 장례식장에서 가질 수 있는 자리, 행사할 수 있는 권리였다. _102-103쪽


(-) 나는 력사와 통화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워낙 장거리 연애를 오래 하기도 했고, 요양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계속 떨어져 지내야 했으니까 가능한 시간에는 최대한 전화를 걸어 자잘하고 소소한 이야기까지 시시콜콜 늘어놓았다. 그날도 목욕하고 나와서 개운한 마음으로 나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이제 나 전화할 사람 없지.’

그래서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든 없든, 내가 어떻게 보일지도 신경 쓰지 않고 ‘아 몰라! 배 째!’라는 심정으로 펑펑 울었다. 114-115쪽


친구가 물었다. “넌 언제 력사 생각이 나?” 나는 “머리 감을 때”라고 대답했다. 력사가 아프고 나서 쓰기 시작한 샴푸가 있다. 력사만 그걸 쓰고 나는 다른 걸 썼었다. 력사가 가고 남은 물건들 중 어떤 것들은 정리하고 어떤 것들은 남겨놓았는데, 정말 어쩌다 보니 그 샴푸가 나에게 왔다. 좋은 물건이라 버리긴 아깝고, 쓰던 물건을 남에게 줄 수도 없어 그냥 뒀다가 내가 쓰기로 했다.

이후 쓰던 샴푸가 다 떨어진 뒤부터 력사의 샴푸를 쓰기 시작했는데, 머리를 감을 때마다 력사 생각이 났다. ‘력사가 머리를 감고 나오면 촉촉이 젖은 머리카락에서 이 향기가 났었는데’ 하고. _137쪽


(-) 유품을 정리하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집을 정리하면서 우리의 추억을, 퀴어로서의 력사를 보여주는 모든 물건을 몰래 챙기고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내가 비참했다. 력사 옆에서 십수 년을 함께했는데, 나에게 남은 권리는 호의를 기다릴 권리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 서러웠다.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임에도 그의 결심을 지켜주겠다고 여전히 좋은 친구인 척하고 있는 나 자신도 너무 싫었다.

그래서 그때 굳게 다짐했다. 다음 사람을 만나면 꼭 결혼을 하겠노라고. 더럽고 치사해서,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떵떵거리면서 결혼할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_19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 사랑과 돌봄에 관한 퀴어한 참조
캔디(윤다림) 지음 / 들녘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요한 책이 나왔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
유성원 지음 / 난다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년 10월, 책방봄 북토크 중에서



저는 남자를 좋아해요 혹은 남자를 사랑해요라고 말하려고 해도 그 관계의 형태 자체가 이 소수자 내부 안에서도 굉장히 비규범적인 거 문제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형태였기 때문에 그걸 말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인 대중에게 호소하는 설득하는 전략 중에 우리 모두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이 사람의 경험을 번역하거나 해석해서 납작하게 만들어서 떠먹기 좋게 살을 발라서 주는데 저는 너무 잔가시가 많은 거예요. 살을 분리해내기에는 그냥 다 버리는 게 나은 그런 가시덩어리의 살이었어요. 그래서 이 가시인 나. 살만 발라내려고 하면 다 부서져버리는 이 나를 어떻게 세상에 드러낼 수 있을까? 그걸 계속 글을 쓰면서 좀 고민했었던 것 같고.


2019년도만 해도 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렇게 선으로 이해하진 못했어요. 그냥 점처럼. 일회성으로 만나고 헤어지고, 이 사람을 내년에 안 볼 수도 있고 그냥 한 번 만나고 끝이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1월에 봤는데 봄이 되니까 또 봐야 되고 여름에도 보고 가을은 건너뛰고 겨울에 보고 이렇게 반복적으로 사람들을 보게 되고 그 시간이 흐르면서 별다른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이 사람과 어떤 관계가 생겨났고 이 사람과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겠구나 하는 걸 좀 의식하게 된 게 한 몇 년 전부터인 것 같아요. 그전까지만 해도 예를 들면 뭐 회사는 그냥 고용관계 계약관계니까 그만둘 수 있고 떠날 수 있고 심지어 사는 것도 그냥 선택이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이제 죽지 않을 거고 살아 있을 거고 계속 일할 거고 하는 식으로 좀 마음을 바꾸게 된 그런 순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거는 이렇게 표현하면 좀 그렇지만 저의 소명처럼 느껴지는 걸 좀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저희 어머니가 뭐 칼국숫집을 하시는데 칼국수집이 그래도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편이라고 한다면 제가 종종 가서 일손도 거들고 하는데 갑자기 거기가 어디에 소개돼가지고 손님이 많이 몰려올 수도 있잖아요. 그럼 이제 제가 잠깐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정말 많이 도와줘야 되는 상황이 되는 거죠. 하지만 그 일을 도와주면서 저는 계속 마음속에 꿈이 있는 거예요. 나는 사실 어떤 과학자가 될 거야, 어떤 세균 실험을 잘하고 싶어, 뭐 이런 꿈이 있을 수 있는데 그래서 칼국숫집에서 일하는 걸 임시적이라고 생각하고 이거 말고 진짜 하고 싶은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근데 그때 이제 제가 배운 거는 이게 내가 할일이구나라는 걸 어느 순간 받아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칼국숫집에 오는 사람들이 그냥 나를 힘들게 하는, 날 노동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나 어머니가 만들어준 이 음식을 맛있게 먹고 그게 그 사람들 삶에 또 양분이 되고 하는 굉장히 의미 있는 노동의 어떤 조각과 관계 속에 내가 위치하고 있고 그거를 가능하게 하는 것에 대한 감사함 같은 것이 그때 생겼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시각을 전환하면서부터는 선택지를 아예 없애버렸어요. 옛날에는 사는 거는 살아도 되고 그만 살아도 되는 선택으로 생각하고 언제든 죽으면 되니까 죽으면 되니까라는 마음을 먹고 살았거든요. 그러면 이제 하기 힘든 일을 할 수 있고 삼키기 힘든 걸 삼킬 수 있고 화가 나는 걸 참을 수 있는데, 이제는 그런 식으로 모든 걸 끝내버리기 때문에 가능한 인내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이 일이나 상황이나 주어진 조건을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인내 같은 것들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지금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책을 쓸 때는 가제가 행복의 비결이었어요. 실제로 곳곳에 보면 행복의 비결이 나옵니다. 근데 그 행복의 비결이라는 거는 굉장히 평범한 것들이에요.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을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정말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인데 그것은 바로 제가 저에게 맞는 행복을 계속해서 발견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저라는 사람이 어떤 부분에서 트리거를 만나고 어떤 조건에서 힘들어하는지를 반복해서 기록하고 관찰하면서 저에게 맞춤형 매뉴얼을 만들어준 건데 그럼에도 이 글을 쓸 때 제가 생각했었던 독자는, 이 책을 만나는 모든 분들이 소중하지만 저 같은 사람이 이거를 읽기를 바랐어요. 이 안에 있는 성원씨라는 어떤 인물이 말하고 있는 거 보고 있는 거 겪고 있는 거가 어떤 건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텍스트가 좀 가닿기를 바랐고 그들에게 제가 썼던 어떤 문장들이 힌트가 되어서 그들이 반복해서 실패하는 어떤 부분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조금이라도 방향을 틀어줄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썼던 책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의미의 제국
캐시 애커 지음, 장한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빠가 죽으면dead, 아빠에게 더 이상 입으로 해줄head 수 없을 것이다.”(15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난다시편 1
김혜순 지음 / 난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악수하러 온 나무를

한 나무가 그 나무의 악수를 받자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악수하러 온 두 그루의 나무를

그 나무들의 악수를 받자


불이 붙은 그 산의 눈길을


온몸에 빛을 받은 채

불이 붙은 나무를 연주하는 한 남자를

불이 붙은 그의 열 손가락을

불이 붙은 그의 목덜미를

땅속에서 근사하게 올라오는 불의 지휘자를


불의 구더기가 그의 입으로 드나드는 광경을

불새처럼 그의 어깨에서 날개가 펴지는 광경을


그 위에서 보이지 않는 실로 통곡의 피륙을 짜듯

집을 잃고 우왕좌왕 나는 새들을

불의 오케스트라를


*

나무들이 나무를 베는 한 사람을 골똘히 내려다보는 것처럼

나무들이 나무로 만든 의자에 앉은 법정스님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나무들이 나무를 연주하는 사람을 듣는 것처럼


저 나무는 내 친구는 아니지만

저 나무는 내 가족은 아니지만


나무에 기대는 내 마음

나무가 연주하는 대지의 찬가


가로수들이 거리를 내내 지켜보는 것처럼

가로수들이 한 번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은 것처럼


하늘엔 네이비색 잉크 십 톤이 떠 있고

잉크의 시선이 대지 위로 호수처럼 쏟아져 있고

나무의 림프절들이 그 비에 출렁이고


전세계 어디에나 죽은 나무들의 시선이 있다

나는 울면서 나무 탁자의 나이테를 하나하나 문질러본 적이 있다


*

큰물에 온몸이 휩쓸려 악수를 청하러 온 나무를

또 한 그루 나무가 그 악수를 받고

휩쓸린 나무들이 깃발을 펄럭이는 것처럼

그러다 태풍이 쏟아져내리는 것처럼

그 비를 다시 맞는 나무가 마지막으로 한순간

벌거벗은 인간으로 변하는 광경을


환히 빛나는 인간의 마지막 모습으로

거기서 땅으로 떨어지는 물앵두와 물자두와 물호두를


나는 열매의 이름으로 불리는 과수원 나무들에게 고한다

네 열매를 따가던 주인이 죽었다 너희처럼 이번 큰물에 죽었다

숲속 요양원 할머니들이 잠겼다 너희처럼 죽었다


_김혜순, 「순교하는 나무들」 전문,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