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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공간 ㅣ 책세상총서 3
모리스 블랑쇼 / 책세상 / 1998년 6월
평점 :
품절
누군가 절망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절망은 무엇에도 결정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 "절망은 언제나 당장 그 목표를 넘어선다"(카프카, <일기> 1910). 마찬가지로 글 쓰는 행위의 기원은 "진정한" 절망일 수밖에 없다. 즉 그 어느 것도 권유하지 않는 절망, 모든 것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절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글을 쓰는 자에게서 그 펜을 앗아가는 절망만이 글을 쓴다는 행위의 기원이다. 이 두 움직임의 공통점은 단지 이들 자체의 불확정성뿐이며, 오로지 이 불확정성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두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 아무도 자기 자신에게 "나는 절망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당신은 절망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아무도 "나는 글을 쓴다."라고 긍정할 수 없다. 단지 "당신은 글을 쓰십니까? 그렇습니까? 당신은 글을 쓰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카프카(-) 1912년까지 그에게 있어서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은 매우 컸었다. 이 욕망은 여러 작품을 낳았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그에게 문학적 재능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신을 주지 못했다. 아니 그 작품들은 그에게 자신의 문학적 재능보다는 오히려 그가 자신의 문학적 자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직접적인 의식을 더욱 확신하게 했다. 직접적으로 의식한 그의 문학적 자질이란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충일감의 원시적인 힘을 말한다. 그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의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였다.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힘이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느 정도까지 다른 모든 작가들과 다름없는 일개 젊은 작가에 불과했다는 가장 놀랄 만한 증거는 카프카가 브로트 Max Brod와 함께 공동으로 쓰기 시작했던 소설이다. 자신의 고독을 그렇게 공유한다는 것, 그것은 카프카가 아직도 자신의 고독 주위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일기>의 메모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아주 빨리 그는 이 사실을 깨닫는다. "막스와 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의 글이 내 앞에 있을 때, 내가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완성체로서, 그 어느 것도 도달할 수 없는 완성된 것으로서 나는 그의 글들을 감탄해 마지 않는다. 그 감탄의 양만큼 그가 소설 <리차드와 사무엘>을 위해 쓰는 문장 하나하나는 나 자신의 양보에 연결되어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나의 깊은 내면에까지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이 혐오스런 양보. 적어도 오늘만은 그렇게 느껴진다."(1911년 11월).
1912년까지 카프카는 자신을 온통 문학에 바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렇게 변명하고 있다. "나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아주 위대한 작업에 성공하지 못하는 한, 나는 아무 것도 감행할 수 없다." 1912년 9월 22일 밤, 그에게 이 성공의 증거가 찾아온다. 이날 밤 그는 단숨에 <선고>를 쓴 것이다. 이 작품은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이 표현될 수 있을 듯하고, 큰 불이 준비되어 그 불 속에 모든 것, 가장 기이한 생각들조차도 불타 사라져버리는 것같이" 여겨지는 지점으로 가까이 가게 한다. 얼마 후 그는 이 작품을 그의 친구들에게 읽어준다. 자기 작품을 육성으로 읽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굳히게 된다.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 이야기의 확실성이 입증된 것이다." (-)
이 이후로 카프카는 자기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앎은 앎이라고 할 수 없다. 글을 쓸 수 있다는 능력은 그의 것이 아니다. (-) 그가 쓴 글, 그것은 단지 접근하기 위한 작업, 확인하기 위한 작업일 뿐이다. <변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작품이 형편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나는 아주 끝장이 난 모양이다." 또 그 후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변신>에 대해 심한 혐오를 느낀다. 마지막 부분은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때 사업여행으로 방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1914년 1월 19일).
이 마지막 말은 카프카가 부딪혀 부서지고 만 갈등이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그는 직업이 있고 가족이 있다. 그는 이러한 세계에 속하며, 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시간을 준다. 그러나 그 시간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도 이 세상이다. 적어도 1915년까지 <일기>는 절망적인 생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거기에는 자살이라는 생각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자기 시간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이란 육체적인 힘, 고독, 침묵을 말한다. 틀림없이 외부적 상황이 그에게 불리했을 터이고, 그래서 저녁이나 밤에 일했을 것이다. 그래서 잠을 설치고 불안이 그를 지치게 했을 것이다. "일을 좀더 잘 조직했더라면" 갈등이 사라질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 후 병에 걸려 한가한 시간이 나게 되었을 때에도 갈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갈등은 점점 더 심각해지며, 다른 형태로 변한다. 이로운 상황이란 없다. 작품에의 의무에 "자기의 모든 시간"을 바친다 하더라도, "모든" 시간을 다 바친다 해도 그것은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문제는 작업에 시간을 바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기의 시간을 글 쓰는 것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이상 작업도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시간 속으로 이동하는 것, 시간이 상실되는 지점, 매혹과 시간의 부재가 주는 고독 속에 돌입하는 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
카프카는 글을 이따금씩 미완성으로 "조금씩" 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9월 22일 밤, 그는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날 단숨에 씀으로써, 그는 그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하는 무한한 충동을 충분히 회복한 것이다. "이렇게 연속적으로 씀으로써만, 영혼과 육체가 이렇게 완전히 열린 상태에서만이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1914년 12월 8일). "단편적으로 쓰여진 것들이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하여, 아니면 밤을 완전히 새어서 내리달아 쓰지 않은 것보다 가치가 훨씬 덜하다는 것, 또한 나의 생활방식으로 볼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가치가 덜한 글밖에는 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왜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포기된 채로 일기 속에 남아 있는가를 설명해주는 그 첫번째 이유를 발견한다. 카프카의 <일기> 속에는 상당한 분량의 이야기들이 중단된 채로 그대로 실려 있다. "이야기"는 대부분 몇 줄밖에는 계속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급속히 일관성을 이루고 밀도가 높아지지만 겨우 한 페이지를 메우고 중단된다. 때로 어떤 이야기는 몇 페이지 계속되어 점점 확실히 윤곽을 드러내며 전개되다가 멈추어버린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카프카는 이야기가 스스로 모든 방향으로 발전되어 나갈 수 있게 해줄 만한 충분한 폭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단편, 그리고 또 다른 단편에 불과하다. "어떻게 이 조각들을 용해시켜 비약이 가능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
카프카에게는 좀더 많은 시간과 또한 좀더 적은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람들이라면 먼저 그의 가족이 있다. 그는 이들의 구속을 잘 참아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족들로부터 해방되지도 못한다. 그 다음으로는 그의 약혼자가 있다. 이것은 이 세계 안에서 인간의 운명을 실현하며, 가족과 자식들을 갖고, 공동사회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그의 본질적인 욕망을 나타낸다. (-) F. B.와 약혼하고, 파혼하고, 재차 약혼을 하던 그 즈음, 카프카는 한결같이 점점 커져만 가는 긴장 속에서 "나의 결혼이 초래할 모든 장점과 단점"을 꾸준히 검토하면서 항상 이러한 요구에 부딪혔다. "나의 유일한 열망, 나의 유일한 소명은 ......문학이다. ......내가 이룬 모든 것은 오로지 고독의 소산이다. ......그때에는 나는 더이상 홀로 있지 못할 것이다. 이것만은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베를린에서의 약혼식에 대해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범죄자처럼 묶여 있었다. 진짜 쇠사슬로 나를 묶어 한 구석에 처박아놓고 그 앞에 헌병들을 세워놓았다 하더라도, 이것보다 더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약혼식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나를 삶으로 이끌어오고자 애썼다. 그러나 여기에 성공하지 못하자, 그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관용하려고 애썼다." 곧이어 약혼은 무효가 되나, 갈망은 그대로 남아 있다. "정상적인" 삶에 대한 욕망인 것이다. 또한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고민으로 인하여 이것은 더욱 비통하며 강한 욕망이 된다. (-) 카프카에게 있어 정상적인 삶과 평범한 행복의 포기는 올바른 삶의 확고함조차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법의 보호권 밖에 위치하게 되는 것, 그가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땅과 발판들을 잃는 것이었다. 어떤 면으로 그것은 법이 설 땅과 발판조차 박탈당하는 것이다. (-)
(-) 카프카의 경우는 모든 것이 훨씬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작품에의 의무와 자기 자신의 구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의무를 그가 융합시키려 애썼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카프카에게 고독을 선고하며, 그의 삶을 사랑도 인연도 없는 독신의 삶으로 만든 것이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글을 쓴다는 것을ㅡ적어도 자주,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ㅡ자기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으로 느꼈다. 어쨌든 그것은 고독이 그의 내면에서, 그의 밖에서 그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 절망과, 이러한 움직임과 불가분의 관계인 나약함 가운데서도 글을 쓴다는 것은 다시 충만한 삶의 가능성이 된다. 목표 없는 길이 된다. (-) 글을 쓰지 않을 때 카프카는 고독하다. 그가 야우노흐에게 말한 것처럼 "프란츠 카프카로서 고독하다". 그러나 이 고독은 불모의 차디찬 고독이다. 그가 마비라고 부르는, 화석처럼 얼어붙게 하는 추운 고독이다. 이것이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제일 큰 위협이었던 것 같다. (-) "나는 마비되었다. 나는 돌이다."라고 횔덜린은 말한다. 카프카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고, 관찰하고, 증명하고, 기억하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함께 함에 있어, 나는 무능하다. 이 무능력은 매일 더욱 커진다. 나는 돌이 된다. 내가 작업 속에서 나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희망이 없다."(1914년 7월 28일).
모리스 블랑쇼_카프카와 작품에의 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