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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탄생 민음의 시 275
유진목 지음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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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혼자일 때 나는 어떻게 너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말하며 대답할까. 네가 내가 만나고 싶은 네가 아닐 때 어떻게 우리가 우리라는 사실을 견딜까. 내가 나, 여기까지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의 다른 나는 유령이고 살아 있지 않은 나이며 스스로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단지 바라보는 나. 말하고 답을 듣지만 그것은 내 귓속에서만 울리는 목소리이고 잡을 수 없고 보이지 않는 나. 눈앞에서 너를 볼 수 있지만 너는 만져지지 않고 만져져도 없는 사람, 들려도 볼 수 없는 이. 더 나아가 사람이 아닌 것,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것. 없는 사람들은 그게 뭔지 알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헤매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나는 만지고 내리는 눈을 보면서 물음을 듣는다. 시인의 입은 천천히 열린다. 답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발음하고 싶어서 해보는 혼잣말처럼. “그러나 나에게는 아이가 쓴 글을 읽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작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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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화가 난다 - 국가 간 입양에 관한 고백
마야 리 랑그바드 지음, 손화수 옮김 / 난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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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메이션이라는 덴마크 일간지에서는 이 책을 가리켜 당신의 온몸을 관통할 하나의 장시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시라는 장르가 가진 가능성을 형식으로도 내용적으로도 극대화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시, 하면 떠올리는 형식과는 다른 몸을 입고 있다. <그 여자는 화가 난다>의 장르는 단순히 문학적인 스타일을 넘어 터져나오는 목소리, 진실한 발성을 받아쓰기에 시이자 사회고발적인 에세이이며 동시에 자신이 아닌 모든 입양인의 목소리를 조합해 만든 ‘여자’의 허구적인 이야기까지 함께한다. 이것은 단순히 마야 리 랑그바드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야는 국가 간 입양 문제에 대해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구조에 대한 분노와 성찰이 주관적인 게 아니라 명확한 근거가 있음을 논증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논증은 시라는 장르가 지닌 원초적인 힘으로 읽는 이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려 변화를 이끌어낸다. 마야는 사회를 쉽게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는 너무나 느리게 변한다. 하지만 이 책을 만나는 독자 한 명 한 명의 마음은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했을 때 나아가 사회의 법과 제도까지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이 책을 읽기 전 입양인과 입양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성소수자이며 한국에서 살아가는 남성인) 나와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만난 순간 이 책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마야가 입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성소수자로서 동양인으로서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솔직하게 묘사하면서 독자에게 한 인간을 입체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데서 온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주의깊게 관심을 갖고 보고 있는 소수자의 문제, 교차성, 나아가 가족구성권의 문제와 만난다.


입양인들은 자신이 타자화되는 경험을 한다. 덴마크인도 한국인도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입양인에 대한 환상이 있고 미디어에서는 그것들을 재현한다. 김치를 좋아하고, 한복을 입고, ‘모국’을 그리워하고, 혈육, 피를 나눈 가족에 대한 깊은 유대가 있기를 바라고. 그녀는 이렇게 재현되는 입양인, 번역되는 입양인, 통역되는 입양인이 완전한 나의 전체는 아니며 심지어 자신이 왜곡되기까지 한다고 느끼더라도 그 어떤 감정들은 자신에게 진실하다는 것에 화가 난다. 입양인으로서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모습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미디어에서의 노출이 또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도 하고. 


또한 마야의 작업은 사람들 사이의 언어와 소통의 문제에 천착한다. 소통의 문제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반복해서 겪게 된다. 자신의 생각하는 것을 한국어로는 정확하게 세밀하게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없어서 유아적인 표현을 하게 되는 것,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 질문받는 대상이 되는 것, 자신의 말을 누군가가 전달해주어야만 전달되는 권력관계를 의식해야 하는 것, 부모님을 만나 많은 말을 하지만 통역해주는 사람이 전해주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 것. 


그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동일하다면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주고받을 수 있을까? 마야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친부모에게 밝히지 않기를 ‘선택’한다. 이러한 장면은 언어의 장벽 없이 우리가 소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순간이 있음을 보여준다. 언어는 결국 상대방과 나라는 관계의 번역물이고 소통이라는 것은 그 권력관계 안에서 각자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시간 우리는 갑이기보다는 을로서 살아간다. 어느 조직 내에서, 위치 내에서 을들의 말하기는 대개 지정돼 있다. 할 수 있는 언어는 제한돼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영역도 허락되어 있다. 우리는 부당한 요구나 상황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괜찮습니다’인 순간도 많이 겪으며 살아가니까. 


마야의 글을 읽다보면 감정의 스펙트럼이 아주 다양하고 그것을 하나로 뭉뚱그려 말할 수 없는 다층적인 레이어를 만나게 된다.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혐오하면서도 그리워하고 만지고 싶어하면서도 수치스러워하는 인간적인 감정들이 깊은 공감을 끌어낸다. 자신의 나이가 ‘친부모’의 사랑을 원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느끼면서도 그러한 접촉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과 간절함이 있는 것, 상상 속에선 우리가 너무나 친밀하고 완전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어색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죄책감 속에 머물러야 하기도 한다는 뼈아픈 순간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한국의 어머니에게 입양을 보낸 자식이 있다는 사실은 숨기고 싶은 사실이며 가족들은 몰랐으면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때로 입양인들은 없는 존재, 숨겨진 존재, 거짓말해야 하는 존재,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부당함을 전가받는 것이 왜 어머니들인지, 여성인지, 낙태와 거짓말의 부담을 짊어지는 것이 왜 아버지가 아닌지 마야는 분노한다. 


동시에 그들은 서구사회와 한국사회의 계급 차이도 날카롭게 의식하게 된다.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을 보냈을 당시의 친부모는 해외의 양부모보다 배우지 못했고 가진 것이 없었고 소득수준이 낮았다. 자신의 어떤 권리를 포기하는지도 모르는 채 입양 서류에 서명을 하기도 했다. 양부모는 친부모보다 더 많은 교육문화적 혜택을 누렸고 자본이 많다.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부를 누리는 것일까. 입양인으로서 겪는 경험은 이러한 계급적 차이와 모순에도 주목하게 만든다. 


이렇듯 마야의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나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순간을 수시로 맞닥뜨리게 된다. 마야가 입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성소수자로서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진실한 분노는 나와 상관없는 경험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 입장하는 열쇠로 변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경험에 갇혀 있던 부조리를 사회를 향해 발화하게 하는 방아쇠로 만드는 연금술을 보여준다.


이 책이 뛰어난 점은 난해하고 딱딱할 수 있는 문제를 아주 읽기 쉽고 받아들이기 좋게 만드는 마야의 리듬에 있다. 처음은 아주 사소해 보이는, 평범해 보이는 문장으로 시작해 매우 정교한 카드의 집을 만들어낸다. 그 집은 위태롭고 흔들리며 취약하지만 그 무너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시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성취에 닿는다. 마야가 쌓아올린 이 언어의 집은 어느 한 순간 무너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마야가 이 책을 펴내고 거의 10여 년 만에 한국에서 선을 보이게 된다. 한국계 입양인으로서 덴마크에서, 스웨덴에서 책이 나왔지만 정작 책으로 한국 독자들을 만날 기회는 없었던 그다. 한국어판이 출간된 올해에서야 진짜 책이 나오는 기분이 든다고 작가는 말한다. 나아가 친부모 역시 덴마크어도 스웨덴어도 몰랐기에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지만 이제 한국어로 책이 나왔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것은 친부모에게 하는 커밍아웃이기도 하다. 이 책을 편집한 김민정 시인은 마야의 이야기는 한국에서 이제야 말할 수 있는 토대와 조건이 갖춰진 것 같다고 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인권과 소수자의 경험에 주목하면서, 어느 누구도 한 가지 면만을 가지고 살아가진 않는다는 교차성에 대한 논의와 새로운 시대, 가족의 형태는 어떠해야 하는지 가족구성권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마야의 <그 여자는 화가 난다>가 품고 있는 진실한 고백의 힘은 다양한 소수자들의 경험과 만나며 그들의 세계를 확장시켜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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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
최승자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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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일생토록 어떤 순간을 기다려왔는데요, 그게 그 순간일까요? 그 순간에 몹시 아플까요? 「심장론」 부분

나더러, 안녕하냐고요?/그러엄, 안녕하죠. 「안부」 부분

그것들이 나를 지나치기 전에, 내가 먼저 통과한다./일번 국도에서, 통과할 것으로서의 이 세계,/스쳐 지나가야 할 것으로서의 이 세계를. 「일번 국도」 부분

산다는 것은 결국 싼다는 것인데 「“그릇 똥값”」 부분


최승자의 이 시집을 읽으면 벼락이 내리치거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어떤 순간을 기다려온 나와 그 전조에 무심한 세계를 일별하게 된다. 시인은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고, 우리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뉴스를 듣고 기뻐한다. 그 소식을 듣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이렇게 창조해놓은 신을 죽여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도대체 이런 스토리를 쓴 작자는 누굴까./죽여버려야지, 나는 그 안의 한 고통스런 배역으로 존재하긴 싫으니까”(「구토」).

시인에게 눈은 오직 길 잃고 헤매려 만든 연기 가득한 스크린이자 허상만을 보려 만든 필름이다. 스크린 안의 무서운 형상에 놀란 눈들은 그 필름을 행복한 필름으로 고치려 애를 쓰다 죽어버린다. “영원한 고쳐 쓰기의 과정, 구제불능의 패러디”(「눈이란 무엇인가」)인 이 세계에서 나는 끊임없이 만지고 싶어하는 손, 맛보고 싶어하는 혀, 냄새 맡고 싶어하는 코, 듣고 싶어하고 보고 싶어하는 귀와 눈, 생각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서 “먹어도 만족할 줄 모르는/거대한 식귀”이다. 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허섭스레기들에 목이 말라/쓸어담기만 하는 거대한 동냥 바가지”였으며 ‘그것들의 조립이 나라고 믿었’다(「또다른, 걸인의 노래」). 

시인은 “패혈증처럼 숨가쁘게,/어질어질” 진달래가 피어오르는 바깥의 봄을 견디지 못하고 쪽문을 닫아버린다. 시인은 자신이 ‘닫혀버린 집안 한구석에서 무게 없이 깊이깊이 가라앉는 인조 장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용서한다(「아득한 봄날」). “네 몸, 내 몸을/나의 눈, 나의 귀, 나의 코, 나의 입을.” 그리고 썼던, 쓸 모든 시를(「나는 용서한다」). 시인은 이제껏 먹여 키워왔던 슬픔들, ‘사실이었고 진실들이었던 그 대책 없는 픽션들’을 밟아버리기로 한다. 한때는 그것들이 나를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야말로 그것들을 얼마나 정성스레 먹여 키웠는지 알고 있다고 고백하면서(「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

이제 시인은 ‘긴 여행의 한 출발점에서’, 자신에게 이것이 너의 삶이라고 속삭이며 삶의 무대를 꾸며주고 삶의 줄거리를 하염없이 이어온(「?」) “태초의 빈 공책” 위에 아무것도 더이상 쓰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쓰지 않을 것이다, 라고”도 그 위에 더는 쓰지 않는다(「빈 공책」). 그제야 시인은 자신이 디딘 땅, 그 흙 속에서 말없이 천 년, 만 년 기다린 신부를 발견한다. “몸 다 굳어져/흙 인형으로 변했다가/이제 마침내 흙으로 부서져버릴” 그토록 오래 기다려온 납빛 절망의 눈을(「연인들 1」).

어느 날 아침, 방에서 눈을 떴을 때 시인은 움직임이 없는 돈벌레를 발견한다. 볼펜으로 밀어보아도 딱 그만큼만 밀려나는 작은 벌레. 섬세한 가는 다리들을 수없이 지닌 그것은 명상에 잠긴 듯 고요하다. 그러다 잠시 후 돈벌레는 얇은 껍질을 벗고 더 짙은 고동색의 벌레가 되어 사라진다. 꼬물거리며 사라지는 작은 돈벌레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시인은 판정을 내릴 수 없다. 그러다 시인이 떠올린 것은 타로 12번 카드, hanged man이다. 빚을 갚지 못한 벌로 교수대에 한쪽 발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당한 남자. 그 카드를 거꾸로 놓고 보면 남자의 얼굴은 평안하다. 시인은 묻는다. “죽음보다는 속세의 모든 빚과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쪽이 훨씬 덜 괴롭다는 뜻일까.” 벌레의 허물을 버리려 볼펜에 꿰어 들고 마당으로 나간 시인은 마당 한 끝에서 거미집을 발견한다. 분명 어제 부숴버렸던 것인데 같은 자리에 다른 거미가 커다랗게 집을 지어놓았다. 몇 개의 이슬방울들을 매단 둥근 거미집은 빛 속에서 “제가 전 우주인 것마냥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돈벌레 혹은 hanged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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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들 2019.겨울 - 제58호
문학들 편집부 지음 / 문학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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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의 내용과 의미를 보완하여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에 실었습니다.



형, 안에 싸도 돼요?1

―노콘 항문섹스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성원(퀴어활동가)

 

 

0.

나는 이 글을 정리하기가 힘이 들었다. 나와 같은 문제를 겪는 MSM2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나는 상대가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추고,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이 글을 읽어나갈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에이즈와 HIV의 차이3도 모르고, 프렙4과 U=U5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동성 항문성교가 에이즈의 원인 아냐? 동성애를 치료해야 할 질병이라 여기는6 정도의 지식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이 글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이게 뭔지 친절하게 설명해달라고, ‘잠재적 아군’을 설득해보라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보라고 요구당하는 현실을 하나하나 상대하다간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의지를 상실하고 진흙탕에 처박히고 말리라는 위기감도 갖고 있었다. 소수자로서 살아가면서 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을 파악하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무시하는 일은 중요했다. 내게는 이다음에 올 것을 상상하고 고민할 의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적 지향을 차별금지사유에서 삭제해야 한다며 그 이유로 ‘동성애로 인한 에이즈 급증’을 드는 이들이 국회의원직을 수행하는 절망적인 나라7에서 내 이야기는 과연 어디까지 받아들여질까? 편견에서 기인한 주관적인 거부감을 근거로 동료 시민의 권리를 적극 제한하고 차별해도 된다고 믿는 이들이 득실거리는 듯 보이는 이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차별과 불평등은 개인의 특성이나 문제행동의 결과처럼 보이도록 강제된다. 구조적 취약성을 소수자 개인이 떠안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세계에서 그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다수에게 늘 ‘비용’이라는 부담으로 인식되어 변화를 저지시킨다. 소수자 개인이 처한 환경의 선택지를 다양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개인은 동일한 선택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게이로서 마주하는 차별과 혐오의 맥락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그 모두를 세심하게 풀어낼 만한 끈기와 능력이 내겐 없지만 나 개인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살아온 삶을 고백하고 그걸 이해하는 방법으로 이 글을 쓴다.

 

1.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나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고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그리고 나에게 친구가 있다면 누구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편안함을 느낀 곳은 남자와 하고 싶어하는 남자들이 모이는 공원 화장실 같은 곳이었다. 거기는 상대를 인격적으로 기대하지도 않고 이 사람의 이름이 뭔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오로지 싸고 싶어서 오거나 싸려고 가는 곳.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오는 곳이었다. 거기를 이용하는 사람들, 다니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비난하는 방식은 질병 혐오였다. 저렇게 하면 병 걸려, 더러운 애들, 우릴 욕먹게 하는 걸레 같은 애들. 그렇게 ‘더러운’ 사람을 낙인찍음으로써 건강한 사람을 분리해내려는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이 HIV/AIDS였다. 나는 비감염인이지만 언제든 HIV 감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성관계를 하는 이상 성정체성이나 그 형태에 관계없이 HIV에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2014년에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에 발표했던 「외로움의 조건」이라는 글은 도입부의 경험만을 잘라내 “[혐]에이즈에 걸린 게이가 쓴 수기”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다. 나는 그러한 편견에도 관심이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어째서 누군가가 ‘문란한’ 섹스를 했다고 하면 마땅히 에이즈에 걸렸으리라, 걸리리라 생각할까?​ 나는 2018년 11월부터 프렙 시범사업에 참여해 에이즈 치료제이자 예방약으로 사용되는 트루바다8를 복용하고 있다. 프렙 시범사업은 HIV 항원항체 검사에서 음성이 나와야만 참여할 수 있다. 즉, 나는 ‘아직’ HIV 감염인이 아니다. 내 의문은 세 가지다. 첫째, 사람들이 가지는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합리적이려면 나는 이미 HIV 감염인이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아닐까. 둘째, 누군가를 HIV 감염인이라 여겨 그를 혐오하고 두려워했을 때, 그가 HIV 감염인이 아니라면 사람들의 분노와 혐오는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 셋째, 안전하게 노콘 항문섹스를 하는 방법은 있을까?

 

2.

HIV는 정체성과 성교 형태를 막론하고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 사람과 혈액 내지 체액이 오가는 성접촉을 한다면 감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동안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의학 기술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자신의 감염 사실을 알고 꾸준히 치료하여 혈내 바이러스 수치가 미검출 상태(HIV RNA<200copies/mL)에 도달한 HIV 감염인은 타인에게 전파 능력이 없다는 사실(U=U)이 최신 연구결과를 통해 증명되었다.9 2016년 국제 에이즈 컨퍼런스에서 국제에이즈학회(IAS), 유엔에이즈(UNAIDS), 영국에이즈협회(BHIVA) 등 의학 단체가 발표한 ‘바이러스 미검출 수준의 HIV 감염인과의 성접촉으로 HIV에 감염될 위험에 대하여’라는 이 성명10은 혈내 바이러스 수치가 미검출 수준에 도달한 HIV 감염인과의 성접촉을 통해서는 HIV에 감염될 수 없다고 말한다. 감염 사실을 인지하고 조기치료를 시작해 에이즈로의 진행을 막고 전파 능력을 상실하면 더이상 신규 감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파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감염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HIV/AIDS 정책은 누구나 HIV에 걸릴 수 있음을 알리고, 정기적인 검사로 자신의 상태를 알게 하여 확진 판정을 받으면 치료에 들어가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타인에 대한 전파력을 0으로 만들어 결과적으로는 HIV/AIDS를 종식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에이즈와 다른 성병을 예방하는 간편하고 경제적인 방법은 콘돔이지만 콘돔 사용률이 높지 않은 현실에서 프렙은 HIV 감염을 예방하는 대안으로 등장했다. HIV 음성인 사람이 매일 같은 시간에 항레트로바이러스 약제를 한 알씩 복용하는 프렙 요법은 용법과 용량을 준수할 경우 90% 이상의 감염 위험 감소 효과를 보인다.

​2012년 FDA가 전세계 최초로 HIV 감염취약군에 대한 트루바다 예방요법을 허가한 데 이어 2014년 5월 세계 최초로 미국 질병관리본부(CDC)가 가이드라인을 배포했으며 미국·영국·유럽·호주·대만 등 57개국에서 프렙을 HIV 감염취약군의 HIV 예방법으로 채택했다. 나아가 2016년 유럽의약품청(EMA) 허가에 이어 2017년 6월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에이즈 예방을 위한 필수의약품으로 등재했다. 2018년 2월 13일에는 국내에서도 트루바다가 예방 목적의 적응증을 획득해 감염내과에서 처방받아 복용할 수 있다.​11

이렇듯 치료받는 HIV 감염인은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없다는 사실과 프렙이라는 혁명은 국제사회에서 상식으로 자리잡았으나 아직도 ‘동성애 하면 에이즈 걸린다’는 구시대적 막말을 적극적으로 재생산해내는 한국에서 에이즈는 낙인과 몰이해의 정점에 있다.

 

3.

질병관리본부와 대한에이즈학회가 공동 발표한 ‘에이즈 행태 조사 보고서’(2015)에 따르면 에이즈에 대해 사람들은 ‘죽음’ ‘불치병’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장 많이 떠올린다. 의학이 발달해 관리 가능하고 예방 가능한 만성질환이 되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에게 에이즈는 걸리면 죽는 병,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다. 이것은 에이즈 패닉이 있었던 80년대에 정부가 사용했던 공포소구 전략의 한계와 부작용으로도 볼 수 있다. 질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조해 경각심을 높여 예방 효과를 얻으려 했던 과거 캠페인과 미디어 속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아직도 해당 질병과 HIV 감염인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희귀 질환으로 분류될 만큼 HIV 감염인 수가 적은 한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HIV 감염인과 마주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경험보다는 HIV 감염인을 문제 삼는 선정적인 기사의 인터넷 댓글이나 종교 단체가 주류 이성애 질서에서 벗어난 소수자 집단을 낙인찍고 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구실로서 이용한 질병의 이미지를 통해 에이즈를 접한 경험이 대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보고서에서 주목할 점은 에이즈 지식 정답률이 15%에 그친 응답자들 중 92.8%가 자신은 에이즈에 걸리지 않으리라는 낙관적인 편견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나의 일이 아니라는 무관심에서 비롯된 이러한 태도는 HIV/AIDS 이슈를 공중보건에 위협이 되는 에이즈 괴담 내지는 일부 종교 단체의 혐오와 선동의 언어에 불려나오는 희생양으로만 바라보게 한다.

남자와 섹스하는 남자를 뜻하는 MSM은 HIV 감염 고위험군으로 분류된다. 이 말은 기존 주류질서에 맞게 설계된 사회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어서 이들이 위험에 노출되는 구조적인 취약성을 갖는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HIV 감염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해당 집단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이유가 아니라 이에 걸맞은 접근법과 정책을 세워야 할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해당 집단을 낙인찍고 주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의 특성에 맞는 의료 조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이 용어는 동성애자라고 자신을 정체화했거나 표현하는 사람만이 동성과 섹스하는 게 아니라 이성애자, 혹은 나의 남편도 남자와 섹스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맥락에서 나온 용어이기도 하다. 성행동의 결과인 HIV 감염을 이성애/동성애라는 성정체성의 문제로 환원하는 혐오세력의 선동은 정작 사람들을 HIV 감염에 더 취약하게 만든다. HIV는 동성애, 혹은 항문섹스를 한다고 자연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HIV 감염인에 대한 비과학적인 혐오와 차별은 의료적 조치를 받으면 되는 질병의 문제를 도덕적 가치판단의 문제로 바라보게 하여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또한 HIV 감염인의 인권보호보다는 공중보건을 우선시하여 HIV 감염인의 인권을 적극적으로 침해했던 초기 에이즈 예방정책의 영향이 아직도 사회 전반에 남아 확진 판정을 받은 HIV 감염인들을 불필요하게 차별하고 있다. 혐오의 언어는 우리와 함께 지금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HIV 감염인들의 얼굴을 지우고 그들을 공중보건에 대한 위협이나 ‘비용’ 정도로 표현하는 악질적인 선동을 계속하고 있다. 단순히 의료적인 치료를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닌, 사회 전반에 깔린 구조적인 억압 속에서 해당 집단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책을 요구하고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어떻게 이들과 우리가 함께 건강히 살아가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대신 HIV 감염인 개인을 병리화, 범죄화하고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방조함으로써 사회 정책 면에서 효과적인 예방과 조치를 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4.

​비규범적 성행위를 통해 감염된 경우 사회의 시선은 병을 인과관계로, 그릇된 행동에 대한 형벌로 인식하는 비과학적인 입장을 취한다. 외부의 시선을 내면화한 게이 커뮤니티의 온도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격에 취약한 소수자 커뮤니티에서는 약한 고리인 HIV/AIDS와의 선긋기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받고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주로 성관계를 통해 감염되는 질병의 특성은 게이라는 소수자성과 만났을 때 더욱 풀기 힘든 숙제를 남긴다. HIV 감염을 자신에게 일어난 피해로 바라보는 일은 ‘피해자’를 동시에 ‘잠재적 가해자’로 만들며 내적 낙인을 더욱 깊게 한다. 성적으로 매력적이길 요구받지만 그 실천에 있어 사람들에게서 배척당할 우려가 있는 HIV 감염인이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은 소수자 안의 소수자라는 이중 낙인을 낳고 관계 맺는 것을 소극적이게 한다. 일부 사람들은 HIV 감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고 그를 배척함으로써 안전해지고 싶어한다.

노콘 섹스의 욕구가 있는 게이들의 경우 서로 오라퀵을 통해 HIV 감염 여부를 확인하고 노콘 섹스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감염되었더라도 음성 판정이 나올 수 있는 항체 미형성기, 창기간(window period)이, 의심되는 성관계가 있은 뒤 최소 2주 이상, 확실하게는 12주까지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HIV 감염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하는 행위이다. 특히 검사 결과에는 음성이 나오는 급성 HIV 감염 상태일 때는 혈중 바이러스 농도가 높아져 타인에 대한 전파력이 훨씬 커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검사 결과만 믿고 노콘 섹스를 하겠다는 생각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안전하게 노콘 섹스를 하고 싶다면 감염내과에서 상담을 통해 프렙을 진행하거나 안정적으로 치료받아 바이러스가 억제된 HIV 감염인과 하는 것이 외려 안전하다.

그러나 HIV 감염인으로서 미검출 수치에 도달하도록 치료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관리했다는 사실에 대해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더라도 그와 별개로 그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이 한국사회에 존재한다. 에이즈예방법 제19조 전파매개행위금지조항이 그것이다. 이는 HIV 감염인이 체액이나 혈액을 통하여 전파매개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여기까지 들으면 이 조항은 에이즈 확산 방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군인의 항문섹스를 처벌한다는 군형법 제92조의 612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전파매개금지조항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는데 하나는 감염 사실을 알고 적절한 치료를 받아 전파력이 0이 된 HIV 감염인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상태를 고지하고 합의하에 콘돔 없는 성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 상대방이 감염되지 않았더라도 ‘전파매개행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며, 만약 내가 검사를 받지 않아 감염 여부를 몰랐다면 ‘전파매개행위’를 했더라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조항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과연 자발적으로 HIV 검사를 받으려 할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의 감염 사실을 알고 착실히 치료받는 HIV 감염인들을 예비 범죄자로 만들어버리는 조항이다.

 

5.

예비 범죄자라는 국가가 찍은 낙인은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돌변해 일반 대중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민감한 사적 영역인 개인의 건강 정보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함부로 사람들에게 유통되고 근거 없는 혐오와 공포가 순식간에 한 개인을 악마화한다. 자신을 긍정하고, 나는 섹스하는 거 좋아해, 그리고 나는 타인에게 전염시키지도 않는다는 개인적인 정신승리와는 별개로 사회에서 이 사람을 모욕하고 불법화하는 제도나 법령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HIV 감염인들이, 그리고 남성 동성애자들이 사회와 하나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은 HIV 감염인이 악의를 품고 고의로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 경우에 어떻게 처벌하느냐일 텐데 사실 타인에게 전파할 수 있으려면 자신이 치료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당사자에게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이러한 경우는 이 사람이 어째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마음을 먹었는지 맥락을 살펴야 한다. 오늘날 HIV는 관리 가능한 질병으로서 확진을 통보받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마치 감기에 걸렸다고 하여 죽을 결심을 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는 질병에 대한 공포보다는 HIV를 둘러싼 사회의 견고하고 풀기 어려운 낙인 앞에서 좌절한 것으로 검진 과정과 통보에 있어 충분한 상담과 지지, 돌봄을 제공받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타인에게 HIV를 고의로 감염시키려 했다면 이것은 형법에 있는 중상해죄로 처벌할 수 있다. 상대방이 감염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중상해죄 미수에 해당하고 중상해죄 미수의 경우는 무죄이기 때문에 처벌받지 않는다. 또한 전파매개금지행위라는 것 역시 그 정의가 모호한데 한국에서는 콘돔을 사용했는지 여부로만 판단하고 있다. 현재 국제사회에서 말하는 U=U나 프렙 등의 개념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구시대적인 조항인 것이다.

이 에이즈예방법은 국내에 감염인이 단 4명 존재하던 1987년, 치료제가 없던 시기에 만들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 의과학적인 지식에 비추어보더라도 합리성이 결여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에이즈예방법은 에이즈 유행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한 실효성 없는 인권침해적인 조치들인 에이즈 환자 격리, 감염인 추적관리, 감염취약계층 강제검진 등의 법적 근거로서 마련되었다. 삼십여 년이 흘러 발전한 의학은 감염인이 전파 염려 없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데 성공했고 비감염인이 복용할 수 있는 예방약까지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 조항은 예방약을 복용한 비감염인과 바이러스가 억제된 감염인이 합의하에 콘돔 없는 섹스를 해서 감염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감염인을 처벌한다. 이는 현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본래의 입법 목적이었을 예방과 전파 확산 방지에도 전혀 기여하지 못하면서 단지 감염인이 전파의 온상인 양 범죄화하고 낙인찍는 데 소용될 뿐이다.

이 전파매개금지조항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감염인을 위축시키고 그의 내밀한 사적 영역을 끊임없이 간섭하며 통제한다. 치료를 꾸준히 받아 타인에게 전파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음에도 성행위만으로 범죄자가 되어버린다면 어떻게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삶을 긍정할 수 있을까? 강간이 아닌 이상 성관계는 서로의 합의를 거쳐 성립함에도 이 조항은 전파가능성의 책임을 감염인에게만 전가한다. 개개인이 서로 피가해 구도를 형성하는 이 과정에서 감염 예방을 위한 국가의 의무는 은근슬쩍 사라지고 만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사회에 팽배한 에이즈에 대한 낙인이 어디에서부터 기원했는지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 조항은 감염인을 대하는 사회의 수준이 삼십여 년 전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후진성의 증거라 할 수 있다.

 

6.

내가 HIV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PL13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그는 약을 먹지도 않았고 병원에 다니지도 않았다. 그는 에이즈에 대한 높은 수준의 낙인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미래를 계획할 의지를 빼앗았으며 함부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내가 공부하고 알게 된 에이즈는 그렇게 살아갈 필요가 없는 질병이었다. HIV에 감염되었어도 치료받고 약을 꾸준히 먹으면 타인에게 전파할 우려 없이 비감염인과 다름없게 건강히 살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HIV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부정확한 편견으로 지레 삶을 포기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오해와 편견은 사회 전반에 퍼져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결합해 그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정당화하며 이를 개선할 긍정적인 분노를 끌어낼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항문으로 섹스하는 애들한테는 이런 취급을 해도 돼, 너희들은 항문으로 섹스하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라 콘돔을 사용하면 되고, 예방약이 있고 심지어 예방약 성분도 특허가 만료돼서 저렴한 복제약을 생산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 제도를 마련하지 않으면서 이를 범죄시하고 병리화하는 것이 옳은가?

노콘 섹스와 다수의 사람들과의 성접촉을 선호하는 내가 십여 년간 이 바닥에서 체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은 노콘 섹스에 대한 욕망이 있는, 안전하지 않은 섹스를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렙이나 U=U가 퍼지기 전에도 그랬다. 에이즈가 불치의 질병이고 죽음의 병이라는 인식이 있을 때에도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일까? 누군가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왜일까?

그것은 단순히 노콘에 대한 선호만으로 설명하긴 힘들 것이다. 나는 문제에 다가가는 열쇠로 게이들이 처한 조건과 상황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섹스를 서로가 원하는 매력을 교환하는 거래관계로 만드는 어플 문화, 거기에서 자원이 부족한 사람이 섹스를 성사시키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조건들엔 무엇이 있을까? 노콘을 허락하는 사람과 콘돔을 고집하는 사람 사이에 있는 힘의 격차. 나이가 많아서, 돈이 없어서, 관계 맺는 문법을 모른다는 이유 등으로 커뮤니티에 참여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성정체성과 항문섹스를 모욕하고 낙인찍는 국가와 그것이 재생산해내는 사회의 차별과 억압이 주는 스트레스. 헌법에 명시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성소수자로서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는 불안과 언론과 혐오세력들로부터 끊임없이 불려나가 모욕당해야 하는 불쾌감들이 표출되는 한 방식이라는 생각 등 복잡한 조건들이 서로 얽혀 있다.

 

7.

주류질서에서 벗어난 비규범적 성행위에 대한 수치심과 비난의 목소리는 한국사회에서 늘 설득력을 가진다. 이러한 성에 대한 수치심과 낙인은 문제를 투명하게 보기 어렵게 하고 성적 활발함을 비난할 대상으로 만든다. 합의된 성인 간의 성관계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 관계 맺는 방식이 폭력적이지는 않았는지, 서로 의사를 존중했는지 살피는 일이지 개인의 주관적 판단으로 다양한 실천의 형태를 비난하여서는 안 된다. 정책을 세움에 있어 필요한 것은 이러한 성적 실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위해를 감소시킬 접근법을 세우는 일이다.

성에 대한 활발한 실천이 개인의 몸에 안기는 질병 감염의 부담은 성병의 종류와 이해, 정확한 예방법을 교육하고 숙지해야 하는 문제다. 그러나 성소수자로서의 삶을 긍정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대신 수치심을 느끼고 다수에 맞춰 행동을 교정하도록 만들어진 사회 환경은 성병을 개인 특성에서 오는 ‘문제’로 바라보게 한다. 저질의 농담, 악의적인 모욕에 동원되는 질병이나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수사는 이런 잘못된 태도를 강화한다. 이러한 시선은 보건의료 영역에서 소수자가 겪는 구체적인 차별로 이어진다. 자신에게 필요한 의료 조치를 안정적으로 받을 수 없다면 그 누가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즉 U=U 슬로건의 “세번째 U, 모두를 위한(The Third U, Universal)”을 기억해야 한다. 감염인이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할까봐 우려한다면, 그 이전에 그가 적절한 치료를 제공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었는지, 그럴 수 없었다면 무엇이 장벽으로 작동했는지 살펴야 한다. U=U는 이제 그럼 안에 싸도 되느냐는 물음의 답이 아니라 상대(U)의 상태와 처지가 어떠한지 살피라는 하나의 질문이자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조기 검진 및 조기 치료, 감염취약군에 대한 예방약 접근성 확대 등 예방법으로서의 치료(TasP, Treatment as Prevention)로 에이즈 대응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사실(세계보건기구 HIV 예방 가이드라인, 2013)을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한다.

일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운운하는 보수세력의 혐오발언이 기승을 부리는 현실에서 이들은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누구와 관계 맺고 있는가?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관계일까? 커뮤니티 바깥에 존재하는 익명성, 파편화된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책임, 의무를 포기하게 하는 조건처럼 보인다.

 

8.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말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제3호에는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로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고용·교육·재화·용역·토지의 이용 등에 있어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법은 보호해야 할 사람과 아닌 사람을 정확히 구분하며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차별적으로 작동한다.

우리나라 국민은 직업 선택의 자유와 근로의 권리(헌법 제15조14, 고용정책기본법 제3조 제1호15)가 있으며 HIV 감염인의 노동할 권리는 법으로 보장받지만(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제3조 제5항16,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제3호17 및 고용정책기본법 제7조 제1항18) 직무 수행력과 상관없는 노동자의 HIV 감염 사실이 사업주에게는 부당해고의 명분이 된다. 질병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팽배한 현실에서는 의사 등 전문가의 판단이 아니라 사업주의 자의적 기준으로 채용 및 해고 여부를 결정하기도 하며 HIV 감염인은 소문이 나기 전에 그만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인사담당자의 ‘조언’을 듣는다. 질병에 대한 오해에 소수자를 향한 편견이 중첩된 현실은 문제 제기할 의지를 체념시킨다. 나 하나가 포기하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쉬운 일이기 때문에. 군인 신분의 남성이 합의하고 성인끼리 항문 성관계를 한 것은 법으로 처벌받지만(군형법 제92조의 6), 남성 동성애자라고 하여 국방의 의무를 면제해주는 것도 아니다.

위계에 의한 이성끼리의 성폭력은 용인해도, 합의한 동성 간의 섹스는 비정상이 되는 세상19에서 남성 동성애자가 성병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정책 마련의 필요성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오른손잡이가 만든 세상에서 왼손잡이를 위한 설계는 비용으로 간주하지만 이 둘은 같은 사회에서 생활해야 한다. 오른손잡이는 의식할 필요 없이 달린 문의 손잡이를 열 때마다 겪는 스트레스. 왼손으로 문을 잡고 밀어서 열거나 당겨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문은, 오른쪽을 위해 열린다. 특정 집단이 비인간화되어 있다면 과연 그것이 이 개인의 특성인지 구조적으로 배제당한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 소수자를 위한 구성원의 자리는 어떠했는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회의 약속이 작동하는 방식과 그 체계의 구성원이 누구인가를 드러낸다. 어떤 사람은 약속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그 사회에 속하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설렘 대신 두려움과 금지를 느껴야 했을 때부터. 그런 사람에게 사회가 허락한 공간은 어떤 풍경을 하고 있는가?

 

9

2015년 허핑턴포스트(US)에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살다 마침내 결혼한 노만 맥아더와 빌 노박 커플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뉴욕에선 동거관계(domestic partnership)을 법적으로 인정받았지만 펜실베니아주로 이사하면서부터는 동거관계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이 서로의 법적인 보호자가 되기 위해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입양밖에 없었다.

 

“만약 둘 중 하나가 병으로 입원하게 된다면, 병실에 들어가서 간호할 수 있는 권리는 타인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만약 빌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는 유일한 동반자임에도 불구하고 간호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법적으로 병실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는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지요.”(허핑턴포스트US, 2015. 5. 30.)

 

2014년 발표된 한국LGBTI(이하 성소수자)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에 따르면20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많은 성소수자가 상당히 장기적인 연애 관계를 맺고 살고 있다. 그들 역시 ‘파트너 관계 및 공동 생활을 유지하는 데 가장 시급히 필요한 제도’(복수응답, 3개 선택)로 ‘수술 동의 등 의료 과정에서 가족으로서 권리 행사’(68%)를 꼽았다. ‘국민건강보험 부양-피부양 관계 인정’(45%)이 그 뒤를 이었다. 또한 레즈비언의 98.1%가 파트너십의 제도화를 원한다고 응답했고 특히 가족으로서 권리 행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또한 응답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혐오, 차별, 폭력의 대상이 된다고 느꼈다. 공공장소에서 성소수자를 향한 증오와 혐오발언이 표출되는 일이 종종 또는 자주 일어나고(87%), 공공장소에서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물리적 폭력 및 괴롭힘이 종종 또는 자주 발생하며(55%), 미디어에 의한 조롱이나 왜곡, 차별적인 묘사가 종종 또는 자주 일어난다(84%)고 답했다. 이 때문일까? 응답자 중 28%가 자살을, 35%가 자해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특히 18세 이하의 청소년 성소수자 중 46%가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고 53%가 자해를 시도했다. 두 명 중 한 명인 셈으로 위험성이 심각하다. 이는 한국(0.4%, 2013), 전 세계(0.2~0.3%, 2010)의 평균 자살시도율과 비교했을 때도 매우 높은 수치다(마음연결, 성소수자자살현황). 또 성소수자라는 점 때문에 차별이나 폭력을 경험한 이들의 자살시도와 자해시도의 비율 역시 41%와 48%로, 차별이나 폭력 경험이 없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경우(21%, 27%)보다 높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자살 위험성을 줄일 수 있을까? 2017년 4월 JAMA 소아과 저널에 발표된 줄리아 레이프먼의 연구21를 참고할 만하다. 1999년부터 2015년까지 거의 80만 명에 달하는 모든 성적 지향의 학생을 조사한 줄리아 레이프먼은 동성혼 법제화 이후 매년 자살을 시도하던 청소년 성소수자가 약 13만 명 정도 줄어든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동성 결혼을 허용하면 성적 지향과 관련된 구조적 오명이 줄어든다”는 점을 지적하며 조사 대상자 대부분은 결혼할 일이 없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자신이 당장 사용할 일이 없다 해도,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되면 학생들은 오명을 덜 느끼게 되고 미래에 대해 보다 희망적이 된다”고 이야기했다(허핑턴포스트, 2017. 2. 22.).

독일에서도 동성 커플의 법적 보호를 위해 2001년부터 ‘등록된 동반자’(registered civil partnership)법을 시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동성 커플을 법적으로 인정하면 동성애자 수가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동반자등록법이 시행된 뒤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됐느냐’는 이준일 교수의 질문에 주자네 베어 독일연방헌법재판관은 답한다.

 

“내가 알기론 아니다. 아무도 동성애자 증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젊은 학생들의 자살이 줄었다. 그동안 여성성·남성성과 관련해 사회적 압박이 많았던 것이다.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는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이성애자에게도 해를 끼친다. 동반자등록법 시행으로 사회가 더 건강해졌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토대를 마련했으며, 동성애자들은 두려워하거나 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한겨레21, 제1033호)

 

9.

나는 그동안 내 삶의 방식을 바꾸어보려 여러 시도를 해보았으나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노력일 뿐이었다. 그것은 사회나 제도적 승인을 받을 수도 없는 소꿉장난 같은 것이며 미래를 그릴 수 없다는 감각만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그 사람과 가정을 꾸릴 수 없고 파트너가 될 수 없으며 우리는 ‘가족’이 될 수 없는 현실은 미래를 긍정하기 어렵게 한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선 우울감과 스트레스를 꾸준히 관리하며 ‘나중에’22가 과연 언제쯤일지, 그 ‘나중’을 ‘지금 당장’으로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분노하지 않고 침착해야 했다. 동성애 하면 에이즈 걸린다고 소리치는 저 혐오세력이 내게 주는 직접적인 모욕 앞에서 건강하게 욕망을 실천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고민하고 그 경험을 나누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해결해야 하는 산적한 과제 앞에서 성적 실천은 늘 말하기 꺼려지고 부담되는 주제이기도 했다. 그것은 늘 뒤에 남겨지는 것이고 생략되는 것이었고 오독하기 쉬운 것이었으므로. 이 글에서 말할 수 없는 주제들, ‘이다음’에 오는 문제들에 대한 고민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그것은 더욱 섬세하게 말해져야 하고 더 많은 경험이 발견되어야 한다. 어느 한 명이 집단을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각각의 소수자들에게는 강요되는 모델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경험담에 대해 누군가 남긴 말은 이러했다. 당신은 변태성욕자일 뿐 동성애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성애자가 성적으로 활발하다고 하여 그에 대고, 당신은 변태성욕자일 뿐 이성애자가 아니라고 말하진 않는다. 나는 이 강요되는 건강함, 모범적인 모델, 시민권을 승인받기 위해서 수행해야 하는 무해하고 건강한 정체성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간다. 치료하면 전파하지 않는다고, U=U가 상식이 된 세상에서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벽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약 일 년간 프렙을 하는 동안 나는 건강하지 않을 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치료제를 꾸준히 먹었어, 예방약을 꾸준히 먹었어, 하는 모범적인 답만이 강요되는 듯 보이는 삶에서 이 건강함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말 ‘선택’일까? 운동적 차원에서, 대국민적인 메시지 차원에서, 마치 연출된 광고에서처럼 활기와 긍정과 밝은 삶을 연출해야 한다고 느끼게 되는 어떤 부당함 앞에서 그만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이 약의 존재와 예방법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대중적으로 퍼지지 않았으며, 정책적으로도 나아갈 길이 한참 남은 듯 보이는 이 시점에, 이것은 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겉으로는 말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이 알약이, 어떤 치료제의 발달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그럼 이제 노콘으로 해도 된다는 거예요? 바이러스 수치가 종종 튀는 경우가 있다는데, 괜찮은가요? 감염인을 파트너로 둔 사람의 질문 앞에서 나는 이 모든 글을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환원하고픈 욕구에 저항하면서 고개를 젓고 말을 이어간다. 하고 싶었던 말은 노콘 섹스를 하기 위해서 상대방이 자신의 몸을 관리해야 하는 게 아니고, 그가 건강하게 살아가려는 그 의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라고. 포기하고 싶고 자신을 함부로 하고 싶을 때에도, 돌이킬 수 없어 보이고 내가 이 일들을 해낼 수 없는 듯 느껴질 때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은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하루에 약 한 알 먹는 것도 힘들었다. 프렙에서 말하는 확률은 결국 그 사람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약을 복용하면 예방 확률은 백 퍼센트이지만 우리가 약을 매일 먹지 못하는 상황이 닥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날은 먹어야 하는 시간에 직장 회식이 잡혀서, 술을 많이 먹고 깜빡 잠들어서, 약통을 잃어버려서, 약을 타러 병원에 가야 하는데 시간을 도저히 낼 수 없어서, 혹은 그냥 먹고 싶지 않아서. 누구도 삶의 변수를 통제할 수 없음을, 그렇기에 그것을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거기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경험들이, 이야기들이 자리할 것이다.

 


 

유성원(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HIV/AIDS인권팀)


*『문학들』 2019년 겨울호, 특집 우리 시대의 청년에 실은 글입니다.




  1. 이 글은 2018년 진행된 키씽에이즈쌀롱 후기인 「고통에는 얼굴이 있다」, 2019년 성소수자 인권포럼 발제문 「노콘 항문섹스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PL과 MSM의 새로운 관계맺기」, 『아무도 만나지 않고 무엇도 하지 않으면서 2014~2016』(볼끼책방, 2019)의 ‘작가의 말’을 종합한 것이다.
  2. Men who have Sex with Men.
  3.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는 대표적인 혐기성 바이러스로 공기에 노출되면 죽는다. 열에도 약하여 약 71℃의 열을 가하는 것만으로 완전히 사멸하고 체액이 건조되어도 사멸한다. 염소계 소독제에는 특히 약해 수돗물 정도의 염소 농도에서도 바로 비활성화되어 감염력을 상실한다. 곤충매개성 바이러스가 아니기 때문에 모기를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 1회 성관계로 HIV에 감염될 확률은 0.1~1% 정도로 낮으며 HIV 감염인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 감염되는 것은 아니다. ‘HIV 감염인’이란 넓은 뜻으로 보면 에이즈(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를 포함해 HIV에 감염된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질병의 진행경과를 적용하면 HIV에 감염되었지만 면역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되고 에이즈 정의질환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에이즈 환자’란 HIV에 감염된 사람 중 면역체계가 손상된 사람과, 면역이 저하되어 비감염인에게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세균·바이러스·진균·기생충 등에 의한 감염증·암 등의 질병들이 나타나는 사람을 말한다(질병관리본부, 2012).
  4. PrEP, Pre-Exposure Prophylaxis.
  5. Undetectable=Untransmittable.
  6. 국제사회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취급하고 차별하는 것을 멈추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21세기에도 국제보건기구(WHO)가 동성애가 질병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1990년)을 굳이 거론해야 할까?
  7. 국가인권위원회법 일부개정법률안(안상수 의원 등 44인, 2019. 11. 12.). (전략) “성적 지향”의 대표적 사유인 동성애(동성 성행위)가 법률로 적극 보호되어 사회 각 분야에서 동성애(동성 성행위)가 옹호 조장되어온 반면, 동성애에 대하여 양심·종교·표현·학문의 자유에 기한 건전한 비판 내지 반대행위 일체가 오히려 차별로 간주되어 엄격히 금지되어옴. (……) 그 결과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양심·종교·표현·학문의 자유가 현행법 “성적 지향” 조항과 충돌하는 등 법질서가 훼손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성정체성이 확립되기 전인 청소년 및 청년들에게 악영향을 주고, 신규 에이즈감염이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급증하는 등의 수많은 보건적 폐해들이 초래되고 있는 실정임. (후략)
  8. TDF300㎎/FTC200㎎.
  9. HIV감염인이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를 빨리 시작할수록 감염 위험을 93%까지 낮출 수 있다는 1736쌍의 HIV감염인-비감염인 커플을 대상으로 한 (남성 동성커플 38쌍, 나머지는 이성 커플) 미국국립보건원의 연구(HPTN 052, A Randomized Trial to Evaluate the Effectiveness of Antiretroviral Therapy plus HIV Primary Care versus HIV Primary Care Alone to Prevent the Sexual Transmission of HIV-1 In Serodiscordant Couples)의 2016년 결과와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를 받고 있고, 바이러스 수치가 미검출인 HIV감염인과 비감염인 커플 888쌍의 58,213번의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성관계로 0번의 HIV 감염이 일어났다고 발표한 유럽 14개국을 아우르는 PARTNER 연구가 있다.
  10. The Prevention Access Campaign, RISK OF SEXUAL TRANSMISSION OF HIV FROM A PERSON LIVING WITH HIV WHO HAS AN UNDETECTABLE VIRAL LOAD(2016).
  11. 국내에서 트루바다 1알의 가격은 보험약가 기준 13,730원으로 HIV 감염인과 사실혼 관계에 있는 배우자, HIV 감염인의 동성 파트너의 경우 급여 적용이 되어 본인 부담 30%로 한달 약값 123,570원 정도에 프렙을 할 수 있다. 성관계 전 24시간 이내 2알을 복용하고, 첫번째 복용 24시간 이후, 48시간 이후에 각각 1알씩 추가로 복용하는 온디멘드(On Demand) 용법을 택해도 무방하다. 물론 HIV 감염인 파트너의 혈중 바이러스 농도가 미검출 수준에 도달했다면 예방조치 없이 노콘 항문섹스를 하더라도 HIV에 감염되지 않는다. 아래는 트루바다의 알려진 부작용이다.
    1. 트루바다는 임질, 클라미디아(성병의 일종), 매독과 같은 성매개 감염을 예방하지 않는다.
    2. 트루바다는 고위험군의 감염 위험도를 낮출 뿐 HIV를 100% 예방하지 않는다.
    3. 감염 위험을 더욱 낮추려면 안전한 성관계 등의 안전 조치를 병행해야 한다.
    4. HIV 감염을 치료하지 않는다. 에이즈 발병 속도를 늦추려면 트루바다와 여러 항레트로바이러스 약물을 병행 복용해야 한다.
    5. 트루바다는 특히 B형 간염을 악화시킬 수 있다. 또한 간비대증, 혈액 내 젖산 축적(젖산산증) 등 상당히 치명적인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젖산산증 증세는 현기증, 숨 가쁨, 근육통, 부정맥, 메스꺼움과 구토를 동반한 복통 등이다. 간비대증의 경우에는 메스꺼움, 입맛 상실, 흑뇨, 피부 및 눈 흰자위 황변, 복통 등의 증세를 보인다.
    6. 트루바다는 뼈와 신장에 무리를 주기도 한다. 골밀도 감소로 작은 충격에도 뼈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심한 경우 골절될 수 있다. 트루바다를 복용한 후에 뼈나 신장에 이상이 발견되면 곧바로 의사와 상담을 해야 한다.
  12. 한국사회에서 동성애를 처벌하는 유일한 법조항인 군형법 92조 6의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문구는 합의된 성관계는 물론, 성폭력 피해자일지라도 동성애자라면 폭행이나 협박 없이 이루어진 성적 접촉에 대해서도 처벌한다는 내용을 담는다. 군사 시설 내에서 또는 밖에서 성행위가 이루어졌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동성 군인간 성행위를 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는 이 차별적인 법률은 국가가 동성애를 무조건 처벌하겠다고 명시하는 것이다. 2012년 UN 국가별 보편적 정례인권검토(UPR)에 이어 2015년 11월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이 조항을 폐지할 것을 권고했으며 유엔 사회권위원회도 2016년 발표한 일반논평에서 ‘동성 간 합의한 성관계 처벌 규정은 명백한 인권침해’임을 지적했다. 2019년 3월 휴먼라이츠워치는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군형법 제92조의 6이 사생활권, 자의적 구금을 당하지 않을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평등권 등 국제적으로 보호되는 권리들을 침해한다고 설명한다. 또 군대 내 동성애 행위의 금지가 군 기강 등을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국내외의 관련 기구들이 강력히 반박하고 있음을 이유로 들며 이 법률이 인권과 관련한 한국의 국제적인 의무를 위반하고 있으며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 HIV 감염인과 에이즈 환자를 통틀어 PL, People Lving with HIV/AIDS이라고도 부른다. PL이라는 단어는 에이즈가 갖고 있는 도덕적, 사회적 낙인이 인간으로서 감염인이 지니는 다양한 면을 소거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단순화해 강조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용하는 단어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는 이 질병과 함께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렇게 HIV/AIDS를 바라보려는 믿음은 설령 내가 이 병에 대한 의학적인 사실을 잘 모른다 할지라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14.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15. 근로자의 직업선택의 자유와 근로의 권리가 확보되도록 할 것.
  16. 사용자는 근로자가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근로관계에 있어서 법률에서 정한 사항 외의 불이익을 주거나 차별대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17.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출생지, 등록기준지, 성년이 되기 전의 주된 거주지 등을 말한다),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용모 등 신체 조건, 기혼·미혼·별거·이혼·사별·재혼·사실혼 등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상황, 인종,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前科), 성적(性的) 지향, 학력, 병력(病歷) 등을 이유로 한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 다만, 현존하는 차별을 없애기 위하여 특정한 사람(특정한 사람들의 집단을 포함한다. 이하 이 조에서 같다)을 잠정적으로 우대하는 행위와 이를 내용으로 하는 법령의 제정·개정 및 정책의 수립·집행은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로 보지 아니한다.
    가. 고용(모집, 채용, 교육, 배치, 승진, 임금 및 임금 외의 금품 지급, 자금의 융자, 정년, 퇴직, 해고 등을 포함한다)과 관련하여 특정한 사람을 우대·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
    나. 재화·용역·교통수단·상업시설·토지·주거시설의 공급이나 이용과 관련하여 특정한 사람을 우대·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
    다. 교육시설이나 직업훈련기관에서의 교육·훈련이나 그 이용과 관련하여 특정한 사람을 우대·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
    라. 성희롱[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에서 공공기관(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초·중등교육법」 제2조, 「고등교육법」 제2조와 그 밖의 다른 법률에 따라 설치된 각급 학교, 「공직자윤리법」 제3조의 2 제1항에 따른 공직유관단체를 말한다)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그 직위를 이용하여 또는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또는 그 밖의 요구 등에 따르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행위
  18. 사업주는 근로자를 모집·채용할 때에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신앙, 연령, 신체조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학력, 출신학교, 혼인·임신 또는 병력(病歷) 등을 이유로 차별을 하여서는 아니 되며, 균등한 취업기회를 보장하여야 한다.
  19. 2018년 11월 19일, 군사고등법원 재판부는 지위를 이용해 함정 내 유일한 여군이었던 부하 군인에게 상습적으로 강간과 강제추행을 자행한 해군 소령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가해자는 성소수자임을 밝힌 피해자에게 “남자 맛을 보여주겠다”며 상습적인 성폭력을 저질렀다.
  20. 친구사이, 한국 LGBTQ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 2014. 총 3208명(설문조사 3159명, 면접조사 49명)의 성소수자들이 참여했다.
  21. Raifman J, Moscoe E, Austin BS, McConnell M. Difference-in-differences analysis of the association between state same-sex marriage policies and adolescent suicide attempts. JAMA pediatrics. 2017;171 (4) :350–356.
  22. 대선 후보 시절 문재인 대통령은 ‘새로운 대한민국, 성평등으로 열겠습니다’를 주제로 열린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제7차 포럼’에서 성평등 공약을 발표하며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 자리에서 ‘여성 동성애자’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한 것에 기습 항의하며 여성이며 성소수자인 자신의 인권을 반으로 가를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청중은 “나중에, 나중에”를 연호했다(2017년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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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에 쓰는 글들 - 허수경 유고집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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