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대우학술총서 구간 - 문학/인문(번역) 73
줄리아 크리스테바 지음, 김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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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나는 내가 빠져든 상태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또는 전혀 말할 수가 없다. 그 상태는 단순하고 변화할 수 없다. 내 속에서 그런 이름이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상태의 본질은 철저한 소멸이다. (-) 내가 마음의 고갈 상태에 있다면 나에게 그것은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와 같은 것이다. 거대한 가운데서 완전히 길을 잃고, 요구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이것은 바다에 삼켜져 없어지는 물방울과 같은 것이다. 물방울은 바닷물에 휩싸일 뿐 아니라 흡수되어 버린다. (-) 거기에는 아우성도, 고통도, 아픔도, 즐거움도, 불안도 없다. 완전한 평화만이 있다. (-) 불행하고, 약하고, 비천하지만 자기의 불행도 자기의 권위도 생각하지 않는다. (-)

 

 <(-) 내게 묻는 것에 대답한다. 내가 잘 말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놀라게 하지도 않는다. 내가 말을 잘하더라도, 그것을 내 탓으로 여기지 않는다. 旅程도 목적도 없이, 내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고 가는 것이다. 나는 가는 것도 원치 않고 멈추려고도 하지도 않는다. 의지와 본능은 사라졌다. 빈곤과 무일푼이 나의 몫이다. 나는 믿음도 불신도 지니지 않는다. 결국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완전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완전히 사랑한다'라고 잔은 페늘롱에게 쓴다.> (-)

 

 

 (-)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상상 imagination은 오만한 이성의 윤곽을 모방한다. 상상은 그 윤곽을 잘 맞추어 놓지 못하지만, 우리 존재의 밑바닥에서 그 윤곽을 찾는다. 숭고한 열정을 그린 그림들 속에서, 주인공에게 흥미가 쏠리는 것은,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그토록 목숨을 희생시킨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을 드높이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자신에 대한 망각과 열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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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성스러움
줄리아 크리스테바 외 지음, 임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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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친구로 알고 지내는 프랑스 남자 중에 캄보디아 여인과 결혼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나에게 울먹이면서 이야기하기를 크메르 루주에 의해 자기 아내의 가족 중 스무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이 일을 통해 캄보디아 불상의 그 유명한 미소를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죠. "그 미소는 무관심입니다"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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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 - 구조주의와 형식주의 비판 까치글방 31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윤지관 옮김 / 까치 / 199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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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고의 한 언어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면 언어들이란 불완전한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런 소품도 필요없고 속삭일 필요도 없이 글 쓰는 일 그 자체이지만, 그러나 또한 무언인 채로나마 영원불변의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이 지상에 언어가 다양하다는 사실은, 그렇지만 않았더라도 그저 한번 말을 튕김으로써 저절로 그 자체가 실체로서 진리가 되었을, 그러한 어휘들을 누구도 진술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약은 너무나 뚜렷해서, 이성이 아무런 값어치도 느낄 수 없을(-) 자연(-) 안의 도처에 깔려 있다. (-) 밀도 짙은 느낌의 ombre(어둠)에 비하면 tenebres(암흑)는 빛깔이 너무 엷다. jour(낮)에다 nuit(밤)와 같은 뉘앙스를 주고, 전자에 어두운 음색을, 후자에 반대로 맑은 음색을 부여했으니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 어휘가 광도를 바꿀 수 있다면-허나, 이런 사실은 알아두자-다만 그때는 시란 존재하지 않고 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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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얼 부르지
박솔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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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삼십 분 후 노래를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그전까지는 내 이야기를 들어. 너희는 도무지 열심히라는 것을 모르니까 삼십 분간 내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에 대해 생각해. 열심히.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열심히. 열심히에 도달하면 이제 너희의 소리와 너희의 노래가 완성되고 완성이 되면 너희는 이제. 이제 노래가 되어 세상으로 날아가는 거다, 그게 노래다.

 

 

  "너는 또다시 너 자신으로 돌아왔구나. 그게 어떤 건지 알기나 해?"

  "몰라. 나도 나를 모르는데 아저씨가 보는 나를 어떻게 알지?"

  남자는 다시 말을 시작한다. 너는 새로운 자신으로 나아가야 해. 열심히의 세계로. 아름다움과 정신과 정열의 세계로 새로운 세계로 가야 해. 이러면 안 돼. 테이블이 부서질 때까지 자신을 부수고 테이블이 부서짐과 동시에 자신도 부수고 태어나야 해 새롭게. 그러니까 너는 생각해봐. 너는 아냐. 너는 지금 셀린 디온도 아니고 코트니 러브도 아니고 이렇게 가다간 영영 되지도 못해. 니가 뭐가 되겠니? 너는 그렇다고 엘라 피츠제럴드라든가 그런 쪽도 아니잖아. 그쪽으로는 싹수가 안 보여, 여하튼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뭐냐, 너는 그러니까 아름다운 건 못 된다는 거야. 왜? 너는 사태를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으니까. 똑바로 보라고, 그게 미래인데 그게 아름다움인데 그쪽으로 가야 해 그렇게 가야 한다고 학생. 다른 길이 있겠어? 다른 사람을 봐 뭐가 될 만하니 다 웃기지도 않지. 그러니까 계속 생각해봐. 자 자. 뭐 생각하다 보면 누군가 될 만한 인물도 있기야 하겠지. 어쨌든 그런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어? 얼른 테이블을 부숴야지. 우리가 세상을 뒤흔들어야지. 남자는 여주의 어깨를 붙잡고 말한다.

 

 

  나는 3번 방에 앉아 있는 남자를 뒤로하고 카운터에 가서 앉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애초에 손님도 별로 없었다. 애초에 손님도 별로 없고 낡고 이름도 이상하지 구름새 노래방 이런 데 오는 게 아니었다. 여주야 너는 똑똑하고 말도 잘하면서 왜 이런 데 왔니? 나는 멍청하고 생각도 없고 병준이는 왠지 레트로해서 좋다고 증말 다시 생각해도 민망한 말을 하며 왔지만 너는 안 그렇잖아. (-) 사실 나에게도 생각이라는 것이 있어. 어제 노래에 대해 생각했거든 검은 옷 남자의 주입 때문에 한 번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도 있고 그러니까 너만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게 아냐 나도 생각이라는 것을 해. 물론 내 생각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여기서 어떻게 나갈지 이런 건설적인 것도 못 된다. 검은 옷 남자에게 금방 수긍하고 노래에 대해 생각해버리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생각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아니라고. 솔직히 말하면 검은 옷 남자는 뭐랄까 지망생의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지망생도 못 되기 때문에 오히려 노래라는 주제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남자는 열심히에 대해 말하지? 하지만 잘못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있다면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하지 않지? 하는 비뚤어진 교정 의식과 아 나는 열심히 하는데 왜 안 되지? 하는 피곤한 자학이 둘뿐이었다. 뭐 열심히 해서 뭔가 될 수도 있고 그런 게 필요하긴 하지. 나는 게임은 꽤 잘하는데 그건 열심히 해서 잘하게 된 것도 있으니까. (-) 뭐 양보해서 열심히가 중요하다고 쳐도 정말로 열심히의 세계가 있겠어? 있다 해도 그게 튼튼해? 검은 옷 당신의 말처럼 열심히의 세계로 만들어진 노래가 자기의 몸을 부수고 세상에 던져질 만큼 튼튼해? 게다가 열심히로 만들어진 노래라니 조금도 듣고 싶지 않잖아. 안 그래? 정말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나도 생각이라는 것을 했는데 아니라고 생각해.

 

  (-) 여주는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잠을 자려고 하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경찰 경찰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깨웠다.

  "뭐라고?"

  "경찰서에 가야지. 얼른 신고해야지."

  "뭐라고 신고해? 컵라면만 줬다고? 노래를 시켰다고?"

  "미친놈아. 우린 유괴당한 거거든?"

 

 

  "정신 차려."

  "정신 차렸어."

  "갈 수 있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주는 내 어깨를 흔들었다.

  "둘이 가서 남자를 가두면 되지 않을까?"

  "가두자고? 어떻게?"

  "끈으로. 동시에 때려서 방심한 틈에 이렇게 끈으로 묶으면 되지 않을까?"

  "죽어도 싫어."

 

  "나는 그 남자가 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벌은 내가 줘야 한다고 생각해. 벌이라기보다는 그냥 좀 놀리고 곤란해서 스스로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고 무릎 꿇고 빌었으면 좋겠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해? 하랄 땐 안 하고 왜 이럴 때 갑자기 적극적인 거야.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당장. 난 집에 가고 싶어. 경찰서에 신고하고 맛있는 거 먹고 그냥 자고 싶다고."

  "그럼 넌 집으로 가. 집으로 가서 엄마 아빠한테 말을 해. 그럼 엄마 아빠가 신고를 해줄 거야. 그사이에 나는 남자를 괴롭힐 거야. 마이크로 머리를 때릴 거야."

 

 

  "저는 열심히 하지 않고 할 생각도 없고 왜냐면 열심히의 세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아무리 때려도 이걸 맞고 죽지는 않겠지? 이러고 우리가 나가면 비틀거리며 일어나 내일이면 다시 옆집 고양이에게 노래를 불러주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럼에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걸 강요하고 어린애들을 붙잡아 요즘 젊은 것들은 열심히도 모른다고 훈계하겠지? (-) 어떻게 해도 남자는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말했다니까, 생각도 했지, 그러니까 생각한 걸 말했다는 거야. 그렇게 안 함. 당신이 말한 것에 수긍하지 않음. 그걸 말했다니까. 나는 소화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여주는 내 손을 잡아당긴다. 우리는 3번 방의 문을 닫고 나온다. 정말 피곤하다.

 

 

  (-) 나는 집요하고 치사하기만 한데 여주는 힘이 있다. 검은 옷 남자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열심히라는 게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아름다움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지도 모르지. 왜 여주같이 잘 달리는 사람에게 셀린 디온을 들먹이는 거야? 그 여자가 달리기도 잘해? 그런 걸 열심히 하니까 감상적이기만 하니까 그저 음악 지망생, 노래의 세계에서 끝 번호에 있는 후보 같은 거야. 프로가 아니라니까. 뛰어가는 여주의 뒷모습을 봤는데 하나도 예쁘지 않고 정말 평범하다. 그런데 너무 잘 뛰니까 금방 사라져버렸다. 사라졌으니까 생각한다. 눈앞에 있는 걸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라지는 건 생각하고 싶다. 그냥 마음이 그렇다. 자꾸만 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이렇게 잠이 들지만 꿈은 꾸지 않는다. 왜냐면 너무 피곤하니까. 일주일쯤 갇혀서 일을 하고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 하고 그리고 생각도 하고 화도 내고 괴롭히고 싶은 사람을 괴롭혔으니까. 이제 자야지. 이제 자도 된다고 생각한다. 생각이라는 것을 많이 해서 그렇게 하찮은 것도 이제 생각한다. 자야 된다 말아야 한다 그런 것도 생각한다. (-) 그러고 보면 아무것도 한 게 없지. 남자는 살아 있고 앞으로도 잘 살 것이며 노래방은 불에 타지도 부서지지도 않았고 나는 피곤하기만 하다. 그런데 피곤하기만 한 것은 자꾸만 잠을 자게 하니까 뭐 좋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으음 앞으로 뭐든 열심히 안 해야지. 아 잠만 열심히 자야지 열심히 안 해 아무것도. 지금까지 열심히 한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안 한다. 안 해 절대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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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극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3
마틴 에슬린 지음, 김미혜 옮김 / 한길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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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자신들의 몸뚱이 외에는 어떤 다른 아름다움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을 사랑한다(-)

 

 

  (-) 르프랑은 (-) 자신의 불운을 스스로 선택한다. (-)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그는 나포(拿捕)자가 된 것이다. 거울 방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그는 자기 이미지의 투영상 때문에 길을 잘못 드는 것이다. (-)

 

 

  그러나 여기 위에서 공연되는 극을 보면서도 여러분들이 조용히 기분 좋게 의자 위에 앉아 있을 수 있도록, 이 극이 당신들의 귀한 삶 속에 침투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도록, 우리들은 당신네들에게서 배운,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예의를 갖출 것입니다. (-) 왜냐하면 우리 역시 코미디언이니까요.

 

 

  (-) 한 가족-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저녁식탁에 앉아 있다. 아버지가 아내와 아들에게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냈는지 물어본다. 그런데 대답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질문 받은 사람들에게서 답을 기다리지 않고 질문을 계속한다. "넌 오늘 아침 무얼 했냐? 학교에 갔죠. 그럼 당신은? 장 보러 갔어요. 무얼 샀소? 채소를 샀는데 어제보다 비쌌고 고기는 어제보다 쌌어요. 그거 잘됐군. 계산은 같으니까. 그리고 넌, 선생님이 무어라 하시던? 제 실력이 좋아지고 있대요."

  (-) 누군가 문밖에 있다. 아버지가 문을 연다. 키가 아주 큰 남자가 밖에 서 있다. 그는 아버지를 목 졸라 죽이고 그의 시체를 가져간다. 알 수 없는 여자가 어머니에게 창밖을 내다보라고 한다. 밖에는 온통 시체들이 널려 있다. 아버지의 시체도 그 속에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부른다. 아버지는 시체들 가운데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온다. (-)

 

 

  타르디외의 초기작품들 중 (-) 「열쇠 구멍」(La Serrure)에서는 (-) 한 유곽에서 어떤 고객이 욕망을 채우려고 기다린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지나치게 큰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고 싶어한다. 그는 황홀경에 차 자기가 보는 것을 묘사한다. 그 처녀는 옷을 차례차례 벗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녀는 완전히 발가벗은 후에도 계속 벗는다. 그녀는 두 뺨, 두 눈, 신체의 다른 부분들도 벗어놓아 드디어 앙상한 갈비뼈만 남는다. (-)

 

 

  (-) 보리스 비앙(1920~59)의 부조리극에 속하는 유일한 작품은 (-) 이오네스코의 영향력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 작품은 (-)「제국의 건설자」(-)로, (-) 전 3막은 우리에게 무언지 알 수 없는 끔찍한 소음에서 도망치는 한 가족을 보여준다. 그 가족은 소음을 피하려고 점점 더 높은 층으로, 점점 더 작은 집으로 옮겨간다. 1막에선 아버지, 어머니, 딸 제노비, 그리고 하녀 크뤼슈가 방 두 칸짜리 집을 정돈하는 중이다. 2막에서 그들은 어느새 한 층 더 높은 곳의 방 한 칸짜리 집에 살고 있다. 하녀가 나간다. 베란다로 나간 딸은 왠지 모르지만 문이 잠겨 있기 때문에 부모에게 돌아올 수 없다. 부모만 달랑 남아 있다. 그들의 세계는 계속 좁아진다. 3막에서는 아버지가 아주 옹색한 다락방으로 옮겨가는 게 보인다. 소음 때문에 극도의 공포감을 느껴 그는 아내가 들어오기도 전에 문을 봉쇄해버렸다. 그는 혼자다. 그러나 소음, 즉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다가오는 죽음의 소리는 막을 길이 없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에겐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 그는 죽는다.

 

 

  (-) 1906년에 태어난 부차티 (-) 1955년 카뮈의 각색으로 파리에서 상연된 이 드라마의 제목은「한 임상(臨床) 케이스」(Un caso clinico)다. 2부(13장면)로 된 이 희곡은 중년의 사업가 조반니 코르테의 점진적인 죽음을 보여준다. 남자는 하는 일이 많아 과로한데다 가족에게 구박받으면서도 방종하다. 왜냐하면 가족을 위해 돈을 벌기 때문이다. 그는 무조건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그는 멀리서 어떤 여자가 자신을 부르는 환청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집에서는 여자 유령이 나타나는 것 같다. 그는 유명한 전문의를 찾아가보라는 충고를 듣고 최신 시설을 갖춘 병원으로 의사를 찾아간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그 병원의 환자가 되고 즉각 수술을 받아야 할 상황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 병원은 최상이고 최신 시설을 갖추었다며 그를 안심시킨다. 실제로는 멀쩡하거나 그저 관찰 대상인 환자들은 7층에 누워 있다. 건강이 썩 좋지 않은 사람들은 6층에 머물고 있다. 병중이긴 하지만 꼭 돌봐주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5층에 누워 있고 등등, 그런 식으로 1층까지 내려오면 그곳은 죽기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다.

  (-) 처음에 코르테는 7층에서 6층으로 옮겨진다. 그보다 더 급하게 개인 간호사가 필요한 새로운 환자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서다. 그뒤 한 층을 더 내려갔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의료기구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옮겨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명해지기도 전에 그는 최하층에 내려오게 되어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는 포기해버린, 버림받은 사람들 사이에 묻힌다. (-)

  (-) 이 작품은 (-) 무엇보다도 그의 몰락이 전혀 눈치챌 수 없게 일어나다가 그가 갑자기 그것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체험케 한다. (-) 즉 사회란 개개인을 죽음으로 몰아대는 몰개성적인 조직체인 것이다. 이 조직체는 개개인을 돌보고, 개개인에게 봉사하지만 동시에 접근 불가능하고, 규제되어 있고, 포착 불가능하며 무서운 것이다. (-) 「한 임상 케이스」는 인간이 늙어감과 질병에 어떻게 점차 압도당하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분명히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묘사한다. 점진적으로 죽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은 개인성을 잃는다. (-)

 

 

  1957년 7월 5일 바르셀로나에서 세계 초연된 페드롤로의 단막극 「크루마」(Cruma)는 인간의 고독화에 대한 연구다. '크루마'는 에트루리아의 도량형, 즉 측량기구의 명칭이다. (-) 커다란 집의 한 부분으로 보이는 퇴락한 벽이 있는 텅 빈 복도에서 그곳에 살기 때문에 '거주자'라 불리는 남자가 벽의 면적을 재느라 애쓴다. 한 사람이 찾아와 그 일을 돕는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허사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줄자에 눈금도 숫자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는 걸 발견하기 때문이다.

  (-) 거주자는 자신이 바깥세계에 존재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는 물건들이 어떻게 자신의 것이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방문자는 그가 재떨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묻는다. "모르겠소. 누군가 가져왔을 테고 그래서 여기 있는 거요"라고 그는 대답한다. (-)

  (-)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도 접촉한다. 나가이오라는 여자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밖에서 들린다. 한 처녀가 복도를 지나가지만 두 사람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방문자가 손을 씻으려고 욕실 문을 열자 그곳에 낯선 자가 있고 거주자는 그를 방문자로 생각한다. (-) 나가이오라는 여자의 얼굴은 마당의 반대쪽에 있는 집의 창문이 열릴 때 보인다. 거주자와 방문자(-)와는 달리 낯선 자는 곧장 그녀와 친해지고 심지어는 데이트 약속까지 한다. 그는 이제 다시 복도를 지나가는 처녀와 대화를 나눈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이제 그는 나가이오가 아니라 그 처녀와 외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처녀가 방과 복도 사이를 갈라놓은 커튼 뒤로 사라졌을 때 그는 그녀를 따라가려 한다. 그런데 커튼이 갑자기 고정된 문이 되어버린다. 거주자는 문을 열 수 있고 낯선 자는 그 처녀에게로 간다. 거주자와 방문자만 달랑 남게 된다.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려고 한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을 방해했던 기이한 존재들이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들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 문제만 해결하면 그들은 다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린다. 거주자는 문을 열기 위해 문으로 간다. 바로 그 순간 막이 내린다.

  이 독특한 작품은 '타자들'의 실재, 그리고 그들과의 접촉 가능성을 묻는다. 각 인물마다 존재의 다른 단계를 형상화한다. 거주자가 그 단계의 끝에 있다.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려고 하는, 실재하고, 신빙성 있는 존재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나 타자들과 관계를 가질 수 없다. 그는 친구와 낯선 자도 식별하지 못한다. 그 단계의 또 다른 끝에 젊은 처녀가 있다. 그녀는 타자의 욕망의 대상일 때에만 실재한다. 나머지 세 인물은 이 단계의 중간에 있다. (-)

  페드롤로의 이와 같은 양식의 두번째 작품이며 수준 높은 희곡이 「인간들과 노우」(Homes i No)인데 (-) 무대는 두 개의 철창으로 삼분되어 있다. 가운데 공간에서 기이하고도 비인간적인 노우라는 이름의 간수가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수감자들을 지킨다. 노우는 잠이 들어 있다. 양쪽의 감방에 수감되어 있는 커플들, 즉 한 쪽의 파비와 셀레나, 다른 한 쪽의 브레트와 엘리아나는 간수를 제압하려고 한다. 그러나 간수는 때맞춰 눈을 뜬다. 두 커플의 탈옥시도는 좌절한다. 그러나 탈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된 후 그들에겐 자신들이, 또는 언젠가는 자신들의 아이들이 탈옥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커진다.

  2막에서는 한 커플에겐 아들 페다, 또 다른 커플에겐 딸 소르네가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이 감옥을 벗어나 결합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라고 결심한다. (-) 그들의 부모는 끊임없이 노우의 감시 하에 있기 때문에 감방의 다른 쪽을 조사해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 면밀히 조사해본 결과 (-) 벽은 그저 커튼 같은 것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이 커튼 찢는 일을 감행해야 하나? (-) 간수 노우는 아주 당황하며 두 사람에게 어떤 경우라도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간청한다. 만일 그런 짓을 하면 그들은 끝장이라는 것이다. 죽음? 아니, 훨씬 더 끔찍한 것. 긴장감이 증대된다. 드디어 페다는 모험을 감행하려고 한다. 그는 커튼을 찢는다. 벽의 뒤에서 새로운 철창들이 나타난다. 이 철창들은 감방을 막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우 자신도 세번째 감방에 갇힌 죄수임이 드러난다. 새 감방의 뒤엔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세 간수들이 말없이 꼼짝도 않고 앉아 있다. 노우도 그저 죄수에 지나지 않았다. 맞다. "그걸 알고 있었으니 죄수 이상이지!"라는 페다의 말처럼. 

 

 

  (-) 1932년 메릴라(옛날 에스파냐령의 마로코)에서 태어난 페르난도 아라발(-)의 세계에 있는 부조리성의 뿌리는 (-) 인물들이 아이들의 천진하고도 불가해한 눈길로 인간 상황을 바라본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들은 때로 아이들처럼 잔인하다. 왜냐하면 도덕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도덕률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 아라발은 스무 살 때 한국전쟁에 대해 들었고 그 인상을 바탕으로 이 희곡을 썼다. 이 짧은 단막극은 우리에게 최전선에서 혼자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 자포를 보여준다. (-) 그의 부모가 그곳으로 면회를 온다. 그들은 함께 일요일의 피크닉을 벌이려 한다. 갑자기 적군 병사 제포가 나타난다. 자포는 그를 체포하지만 나중엔 피크닉에 초대한다. 즐겁게 식사를 하다가 그들은 모두 폭탄세례를 맞고 죽는다.

  (-) 단막극 「기도」에서도 (-) 한 남자와 한 여자, 피디오와 릴베(-)가 한 아이의 관 옆에 앉아 오늘부터 선해지기 위해 그 관을 어떻게 놓으면 좋을지 의논한다. 릴베는 '선해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다.

 

릴 베: 그러니까 이젠 묘지에 가지 않고도 전처럼 즐길 수 있단 말이지?

피디오: 그럼, 그렇고 말고.

릴 베: 전처럼 시체에서 눈알을 파내?

피디오: 그건 안 돼. 안 돼.

릴 베: 죽이는 건?

피디오: 안 돼.

릴 베: 그럼 사람들이 계속 살게 놔둬야 돼?

피디오: 물론이지.

릴 베: 그게 더 나쁠 텐데.

 

  (-) 토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피디오와 릴베가 자신들이 죽인 자신들의 아이의 관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 드디어 한번쯤 선해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릴베는 그것이 지루하리라는 것을 예견한다.

 

 

  (-) 이스라엘인 아모스 캐난의 희곡(-) 이 작품의 프랑스어 제목은 「사자」(Le Lion)인데 (-) 세 사람이 등장한다. 즉 쉰 살가량의 베이비(아기), 서른 살가량의 부인-그녀는 베이비를 자기 자식인 양 다룬다-그리고 스무 살가량의 운전기사가 등장한다. 한 번도 동시에 무대 위에 등장하지 않는 세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쉰 살의 베이비가 갑자기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군이 되고, 이 장군이 다시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에 몰두하는 실업가가 된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베이비를 전쟁터와 공장부지를 둘러보는 감리 작업차에 태워서 다니는 운전기사는 부인의 집에 침입하는 도둑이 된다. 그는 모든 귀중품들을 가져가라는 요구를 받아들여 부인과 동침한다. 그녀는 처음에는 베이비-실업가의 정부로 등장하는데 그에게 구둣가게에서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부인은 다시 젖먹이의 어머니가 되어버린다. 그녀는 아이에게 미음을 먹이려고 한다. 그러나 베이비는 그건 사자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 이 작품은 시간의 연속을 해체함으로써 인간 발전과정의 공관(共觀)적 관점을 창조하려고 한 것 같다. 베이비는 이미 장군의 소지가 있고, 장군은 여러 측면에서 아직 베이비인 것이다. 그런데 두 인물 모두 사자의 공격적 본능이 있는 것이다. 부인은 어머니고, 먼 곳에서 그리워하는 연인이고, 강도의 육감적인 공범자다. 그런데 강도는 다시 장군의 충성스런 부하고, 죄 없이 박해받는 희생자고, 마지막에는 교활한 범죄자다. 만일 우리가 주변사람들의 삶의 단계를 시간의 흐름에서 연속적으로가 아니라 병렬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면 한 인간 속에 모순되는 본질적인 특징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존재하는지를 보고 아연해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이 작품은 논증하고 있다.

 

 

  “농(弄)이 세 번째 최상의 위장이지. 두 번째 최상은 센티멘털리즘이고 [……] 그러나 가장 최상이자 가장 확실한 위장은 [……] 역시 적나라한 진실이야. 이상도 하지. 이걸 아무도 안 믿으니.”

 

 

  귄터 그라스(-)의 희곡들은 근본적으로 거칠다. (-) 「아저씨, 아저씨」(Onkel, Onkel)에서는 살인에 전력투구 헌신하겠다는 젊은이 볼린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항상 계획한 대로 성공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희생물로 점찍어놓은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소녀는 그가 그녀의 침대 밑에 숨어 있다가 기어나왔는데도 그에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녀는 그에게 글자 맞추기 하는 것을 도와달라고까지 한다. (-) 그가 목욕탕에서 살해하려고 하는 스타 영화배우는 얼토당토않은 잡담으로 그를 쫓아내고, 마지막에는 두 아이들이 볼린의 권총을 훔쳐 그를 쏜다.

 

 

  “한 방 안에 있는 두 사람-한 방 안에 있는 두 사람의 이미지가 종종 나를 사로잡습니다. (-)” (-) “그들은 분명 방 밖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방 밖에는 자신들에게 영향을 주는 하나의 세계가 있죠. 그게 겁이 나는 겁니다. 그건 당신과 나에게도 똑같이 두려운 거라고 난 확신합니다.”(-)

 

 

 

  (-)「실내장식업자」(I Gaspiri/The Upholsteres)에서는 한 외국인이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어디서 태어났습니까?”라고 묻자 “결혼에서요”라는 대답을 듣는데 대답한 사람은 뒤이어 “거긴 아주 근사한 곳이었어요”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가 결혼했는지 알고 싶어하자 그는 “글쎄요. 내 옆에 사는 여자가 한 사람 있긴 한데 난 그녀를 잘 보관할 줄 모릅니다”라고 설명한다.

 

 

  (-) 이오네스코는 (-) 이렇게 썼다. “아리아드네의 실*을 갖지 못해 미궁에서 길을 잃은 인간이라는 테마가 카프카 작품에서의 [……] 원초적 테마다. 인간이 인도하는 실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그 실을 더 이상 가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서 인간의 죄의식, 두려움, 역사의 부조리함이 유래하는 것이다.”

 

 

  (-) “(-) 우리의 운문 시대가 끝난 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섬세한 색과 신경증적 리듬이 없어진 후, 콘더(Conder)가 그린 흐릿하고 혼합된 색조가 사라진 후 무엇이 올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뒤엔 야만인들의 신이 오겠지” (-)

 

 

  (-) 인간은 가는 것을 모방하고 싶어서 다리와는 전혀 닮지 않은 바퀴를 창조했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모르는 사이에 초현실주의 방식을 사용했던 것이다.

 

 

  (-) 1959년 7월 29일 (-) 방송극 「가벼운 통증」에서 (-) 세 인물들 중 두 인물들만 말을 한다. 세 번째 인물은 말이 없고, 그래서 낯선 자의 경악을 나타낸다. 늙은 부부 에드워드와 플로라는 몇 주 전부터 성냥상자를 메고 그들의 집 뒤편 입구에 서 있으면서도 결코 성냥을 팔지 않는 알 수 없는 성냥장수 때문에 불안하다. 결국 두 사람은 그 남자를 집안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그에게 말할 수 없다. 그가 여전히 말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 방문자의 고집에 자극받아 에드워드는 그에게 자기의 인생이야기를 하게 된다. 에드워드는 자기가 전혀 겁먹고 있지 않다고 확신하지만 실은 그도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정원으로 나간다. 이번에는 플로라의 차례다. 그녀는 말없는 방문자에게 추억과 고백을 잔뜩 쏟아놓는다. 그녀는 심지어 성적 욕구에 대해서까지도 이야기한다. 그녀는 자신이 이 늙은 부랑자에게 매력도 주지만 동시에 혐오감도 준다고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난 당신을 여기 머물게 하겠어요. 이 끔찍한 양반아, 난 당신을 바나바스라고 부르겠어요.” 늙은 남자에 대한 플로라의 태도에는 모성 본능과 성적 본능이 뒤섞여 있다. 에드워드는 강한 질투심에 휩싸인다. 이제 그가 다시 바나바스에게 이야기할 차례다. 상대방에게서 무언가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또 실패하자 그는 점점 더 사적(私的)으로 되고, 그러는 동안 눈에 띄게 초췌해진다. 작품의 마지막에 플로라는 바나바스를 받아들이고 에드워드를 쫓아낸다. “에드워드, 자 여기 당신 판매상자!” 남편과 부랑자가 자리를 바꾼 것이다.

 

 

  1960년 (-) 방송된 방송극 「난쟁이들」에서 핀터는 아스턴의 체험을 다시 한 번, 좀더 넓은 형식으로 다운다. 주인공 렌 역시 환각증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이 맛있는 쥐고기를 먹이로 주는 난쟁이 동아리의 일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난쟁이들을 무서워하고 그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에 분노한다. 그러나 꿈의 세계가 사라지자 그는 그 세계의 더러운 마당에서 느꼈던 따뜻함과 기분 좋은 무질서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손실로 여긴다.

 

 

  (-) “우리가 살고 있는 방은 [……] 열리고 닫혀 [……] 너희들한텐 그게 안 보이냐? 그 방들은 제멋대로 모양이 변하지. 그 방들이 어떤 고정된 모습만 갖고 싶어한다 해도 난 아무 말 않을 거야. 그런데 그렇진 않아. 난 한게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 사람들이 내게 당연한 거라고 말하는 한계 말이야.” (-)

 

 

  「울리는 벨소리」의 극적 장소는 파라독크(파라독스를 연상시킴) 부부가 사는 방갈로의 거실이다. (-) 바라독크 부부는 상점에서 코끼리를 한 마리 주문해 배달시켰지만 코끼리는 개인 집에 들어가기에는 좀 크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코끼리는 호텔에나 맞는 크기다”). 그래서 그 부부는 코끼리를 뱀과 바꾼다(“뱀은 더 길게 할 수도 있지만 우린 그렇게 하지 않아”). (-)

 

 

  작가(-)는 이렇게 선포한다. “저는 특별한 세계관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저의 독자적인 개념들은 좀더 나은 여러분의 개념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 것인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저는 서커스의 난쟁이입니다. 저는 저의 신체적인 약점과 정신적인 약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이득을 취합니다.” (-)

 

 

  (-) 가장인 아서 그룸커비는 파코미터 공장을 운영하여 생활비를 번다. (-) 그는 법학에 대해 대단히 흥미가 있고 나무로 공작품을 만드는 데 열정적이다. (-)

  아서의 아들인 커비 그룸커비는 파블로브 방식에 따라 자신을 훈련시킨다. 그는 식사 전에 자동 금전등록기가 울리는 것을 들어야 식사를 할 수 있다. 그것 말고도 그는 거대한 교육 프로젝트에 매진하고 있다. 즉 그는 5백 개의 “자동저울”에게 ‘메시아’에 나오는 ‘할렐루야 합창’을 연습시키려 한다. 그는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자동저울들이 말을 할 수 있으니 노래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는 꽤나 진전을 본다. 자동기계들이 노래하는 것을 배우면 곧 그는 그것들을 북극으로 가져가려 한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을 부추겨 똑같은 순간에 모두 한꺼번에 뛰어오르게 하면 지축이 기울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국에 빙하시대가 올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죽으리라는 것이다. (-)

 

  (-) 미무스(Mimus)(-)는 일종의 민중극으로서 (-) 춤, 음악, 곡예로 이루어진 극이었다. (-)

 

  고대의 미무스에서 어릿광대는 모로스(moros)나 스투피두스(stupidus)로 등장했다. (-) 라이히는 집을 팔고 싶어서 돌을 집의 견본으로 끌고 다니는 남자의 예로 든다. (-) 또 다른 대표자는 자기 노새에게 먹지 않고도 사는 기술을 가르치려고 한다. 노새가 드디어 굶어죽게 되자 그는 “엄청 손해났군. 노새가 ‘안 먹기’를 배웠는데 그만 뒈졌으니 말이야”라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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