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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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 마튜사랑하는 아들 토마에게

 

너희들이 어렸을 때난 성탄이 되면 왠지 너희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했었단다이를테면 만화 탱탱』 같은 것 말이야나중에 그 책에 대해서 너희들과 얘기를 나눌 수도 있었겠지아빠는 탱탱을 속속들이 다 꿰고 있단다앨범이 나오는 족족 다 읽었거든그것도 여러 번이나 말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너희들에게 책을 선물하진 않았지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너희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거든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글을 읽을 수 없겠지그러니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너희들이 받을 성탄 선물은 오직 장난감 나무토막이나 장난감 자동차일 뿐...

이제 마튜는 멀리로 던진 공을 찾으러 떠나고 없어더 이상 우리가 마튜를 도와 공을 찾아줄 수 없는 그런 곳으로 가버렸지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는 토마는 점점 더 멍하니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구나그런 지금그래도 아빠는 너희들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려 한단다내 아들들을 위해 아빠가 쓰는 책이야우리 모두가 너희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쓰는 책이요너희들이 그저 장애인증명서에 붙여진 사진으로만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쓰는 책이란다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하지 못한 말들을 적는 그런 책... 아마도 후회겠지그래난 좋은 아빠가 아니었어너희들을 참아낼 수 없었던 적이 많았단다사랑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그런 아이들이었거든너희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천사의 마음천사의 인내가 필요했지하지만 아니아빠는 천사가 아니란다.

우리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못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너희들에게 말하고 싶은 거야그리고 어쩌면 너희를 잘 낳아주지 못한 이 아비가 용서를 구하는 것일지도.

너희들도 그렇고나도 그렇고또 너희 엄마도 그렇고... 참 우리는 운도 없었지그냥 그렇게 하늘에서 툭하고 떨어진 거야이런 걸 재수가 없다고 한단다.

이제 그만 좀 구시렁거려야겠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얘기를 할 때면마치 무슨 큰 변이라도 당한 듯 사람들은 사뭇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곤 하지그래서 난 미소를 지으며 내 아들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너희들은 날 많이도 웃게 만들었지그것이 꼭 원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지만...

너희들 덕분에 난 평범한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못 누린 혜택을 받기도 했었단다이를테면 난 자식들의 학업 문제나 진로 걱정으로 골치가 아파본 적이 없어이과로 보내야 하나아니면 문과로 보내야 하나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을 해본 적도 없고 말이다너희들이 커서 어떤 일을 할까 생각하며 머리를 싸매본 적도 없단다엄마와 난 미리 그 답을 알고 있었거든우리 아들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란 걸 이미 알았던 거야.

혜택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지아빠는 수년간 자동차세 스티커를 공짜로 발급받았었단다.(장애아를 둔 부모들은 자동차세납부 영수증의 역할을 하는 스티커를 무료로 발급받았었다그러나 1991년 자동차세 스티커 시스템이 없어진 이후장애아를 슬하에 두어 그나마 받았던 혜택도 없어졌다.) 그래서 너희들 덕분에 별다른 세금 없이 커다란 미국차를 몰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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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할 때 그 마음으로 - 법정이 우리의 가슴에 새긴 글씨
법정 지음, 현장 엮음 / 책읽는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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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나면서 밤으로는 풀벌레 소리가 한층 여물어지고, 밤하늘 별자리도 또렷해졌다. 뜰에 내다 놓은 돗자리에 누워 별을 쳐다보면서, 별과 달이 없다면 밤이 얼마나 막막하고 삭막할까를 생각했다. 별과 달은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빛이 아닐 것이다.

한낮의 분주한 활동을 통해서 지치고 메마르고 거칠어진 우리의 삶을 푸근하게 감싸 주고, 안으로 정서와 사유의 뜰을 넓혀 주는 일도 한다.

한낮의 더위에 기가 죽어 있던 나무나 풀들도 어둠이 내리면, 숲과 강에서 보내오는 서늘한 바람에 생기를 되찾는다. 낮과 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활동과 휴식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있다. 별이 돋고 달이 떠 있는 밤은 우리들 삶의 축복일 뿐 아니라, 허겁지겁 쫓기듯 살아온 일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우리에게 허락된 유한한 세월을 어떻게 소모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게 한다. 이런 되돌아봄과 반성의 시간이 없다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우리는 인생의 종점을 향해 그저 곤두박질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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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위기 - 김인환 평론집
김인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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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실한 상처의 기록을 읽기 좋아한다. 인간의 마음을 찍는 사진이 있다면 그 사진에는 선인장처럼 온통 가시가 박혀 있는 마음의 형상이 찍혀 있을 것이다. (…) 작가는 누구에게서나 상처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원효나 퇴계, 아리스토텔레스나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면서도 거기서 그들의 상처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아무리 상처가 영혼의 본질이라 하더라도 문학이 상처의 기록에 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작품에는 상처를 달래는 지혜의 소중함과 어려움이 암시되어 있어야 한다. (…) 생명을 죽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을 다치게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도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나와 남의 다친 영혼을 달래는 길뿐이다.”(‘의미의 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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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89호 - 2016.겨울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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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이 소설의 여성 캐릭터들이 전부 호감이 가지 않았어요. 차라리 여성 캐릭터가 아예 나오지 않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요. 인숙도 인숙이지만, 손수미와 옥사장 딸을 그린 방식이 말할 수 없이 불편했어요. 손수미와 손수미의 남편 채선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손수미가 “만날 채선생에게 얻어터지면서도 이 남자를 사랑했다”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건 가정폭력 문제를 낭만과 무책임하게 버무린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바로 뒤에는 여자를 때리면서 여자의 사랑을 얻는 게 채선생의 “참으로 신비로운 재주”라고 덧붙여져 있고요. (-) 더 뜨악했던 건 옥사장의 딸에 대한 묘사인데, 주인공 희수가 자기가 죽인 남자의 미성년자 딸을 장례식장에서 마주쳐요. 그런데 이 딸에 대한 묘사가 너무…… 제가 본문을 읽어드릴게요. “아이가 입고 있는 상복은 체격에 비해 커서 치마는 바닥에 끌렸고 저고리는 헐렁해서 여민 깃 사이로 흰 브래지어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유방은 이제 막 생기려는 듯 아이의 작은 젖가슴이 봉긋했다.” 이런 시선은 불필요하게 저열한 시선이고 인터넷에서 매일 마주치는 시선인데 굳이 소설에서까지 읽고 싶진 않아요. 흥미진진하고 핍진하게 잘 쓰인 소설인데도 애정이 가지 않고 마음이 식더라고요. 그 많은 장점을 왜곡된 젠더 인식이 다 휘발시켜버리는 느낌이었어요.


(-)


오찬호 창작자의 재량에 관한 문제일 수 있는데, 창작자의 윤리라는 문제, 즉 ‘이걸 쓰지 말아야 하는데 썼다’ 등등을 판단하게 되면 조금 위험한 게 되지 않을까요?


정세랑 그런 말씀은 맞는데, 젠더 문제는 한국문학에서 좀 특수해요. 특수하게 후진적이에요. 여성 독자들은 한국소설을 읽을 때 매 페이지에 베여요. 손가락이 베이듯이, 마음이 계속 베여요. 이 창작자들은 여성 독자인 내가 상처받는 것에 쥐뿔도 신경을 쓰지 않는구나,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는 거죠. (-) 독자들이 저자들의 젠더 감수성과 인권 의식을 끝없이 지적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독자들은 공부를 계속하고 예민해지는데 쓰는 이들이 저 뒤에 있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이 글을 써서 누구를 해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전혀 안 하는 게 작가에게 한없이 허락될 자유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독자들이 질렸다고, 쳐다보기도 싫다고 말하고 있을 때는 더욱요.


(-)

오찬호 <진짜 사나이> 같은 TV예능에서 조교가 “어디 여자 같은 소리를 냅니까?” 이런 말들이 재현되고 편집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비판과 책과 영화에 대한 비판을 과연 동일한 잣대로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늘 가져봅니다. 미디어에는 성차별적인 광고가 만연하죠. 소설이나 영화는 나름 제한이 가능하죠. 싫으면 안 봐도 되고요. 그런데 예능이나 광고는 모두에게 노출되어 있잖아요. (-)결국 성인영화는 독자의 수준이 더 중요하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정세랑 저는 약간 다르게 생각합니다. 독자의 수준은 이미 높고, 그 독자들이 해외문학을 읽고 넷플릭스를 보며 모국어 콘텐츠를 포기했다고 봐요. 이런 대거 이탈이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닐 거예요. 여성혐오, 소수자 혐오가 지겨워 등을 돌린 독자들, 시청자들을 위해 창작자들이 변화해야 한다는 제 의견이 너무 보수적이고 위험한 의견이라면…… 제가 비평 이론을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창작자라서일 거예요.


(-)


강지희 일단 저는 이번 사건에서 매체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트위터는 익명이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매체였기 때문에 이런 고발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저 뒷담화로 그치거나 또다른 추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한 여성들의 언어가 왜곡되거나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옮겨지는 경험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트위터에서의 ‘토킹’들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스피킹’이 되어 나타난 거죠. 성과 관련된 사건들이면 늘 관음증적 욕망들이 따라다니곤 했는데, 이번에는 여성들, 특히나 어린 여성들이 일절 시각적으로 소비되는 일 없이 추가 고발이 이어졌다는 게 정말 긍정적인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피해자의 신상에 불필요하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가해자들에 대한 지각과 지탄으로 확실히 관점이 이동해 있었죠. (-)


(-)


김신현경 (-) 저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직장 내 성희롱을 어떻게 볼 것이냐라는 질문에서 발전시켜온 관점들이 있어요. (-) 사실 구체적인 사례들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쉽지 않아요. 직장은 되게 명확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거든요. (-) 저 같은 사람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성희롱은, 그 하나하나의 사례들을 따졌을 때 이것이 성희롱인가 하는 결과적인 일이 아니라는 거죠. 그 상황을 성희롱으로 만드는 우리의 과정과 문화가 있다는 거죠. 예컨대 직장에서 주위 사람들이 너 화장 좀 해, 화장 왜 이렇게 안 하고 다녀 여자가라고 말했을 때 이게 성희롱이라고 생각하세요? 성희롱이거든요. 그건 바로 직장에서 여자가 화장을 해야 하고, 그게 아닐 시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과 평가가 다 들어가고 권력이 작동하기 때문에 그게 성희롱인 거죠.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정치와 문화가 변해서 어느 시기가 되어 ‘너 여자가 왜 그런 거 안 하냐?’ 이런 말을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당신 너무 이상하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되면 이 말은 성희롱이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그 말은 이제 더이상 그 사람을 규정하는 권력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가 그렇게 바뀌었을 때는 그 말을 한 그 사람 한 명이 무례한 개인이 되는 것이죠. (-)



_강지희·김신현경·오찬호·정세랑·문강형준(사회) 「어떻게 할 것인가―문단 내 성폭력과 한국의 남성성」(『문학동네』 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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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89호 - 2016.겨울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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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투 응구문투 응가반투(Umuntu ngumuntu ngabantu)’,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뜻의 아프리카 속담이다. 고립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인간됨의 마땅한 본질로 여긴, 이른바 ‘우분투(Ubuntu)’ 정신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속성이다. (-)



(-) 국가-기업의 질서하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리라는 것은 ‘정규직’으로 특정되고 구체화되었으며, 이 자리를 차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대다수의 사람들을 개돼지의 자리로 밀어낸 뒤 희소해진 사람됨의 자리에 값을 매기고 흥정하는 사회는 사실상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해 여기는 한때 사회였으나 점점 그렇지 않게 되어가고 있는 박토(薄土)이고, 이런 땅에서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자격을 부득불 박탈당한 자들의 사람됨은 어떻게 보전될 수 있는가. 친척집의 삯바느질을 도우러 온 뒤 그 집 딸인 해옥과 친자매처럼 우정을 나누었다가 멀어져간 순애의 이야기(「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는 그에 대한 소설적 사례에 값한다. 전쟁통에 가족을 잃고 천애고아가 된 순애는 자신을 마냥 좋아해주는 해옥에게도 그 속내를 털어놓지 않고 묵묵히 허드렛일을 하는 소녀였으나, 결혼을 계기로 삶을 향한 순수한 열망을 갖게 된다. 그런 순애의 남편이 북에서 지령을 받은 반동분자로 몰려 사법 조치를 받게 되면서 이 열망은 좌절된다. 해옥은 순애의 안부를 살피는 한편 청원서를 쓰고 정의구현사제단의 선전문을 직장 사무실에 돌리는 등 사건을 해결하려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107쪽)다는 조소 섞인 반응만을 접한다. 강제로 형이 집행된 직후 그런 조소들이야말로 당대의 진실이었음을 확인한 해옥은, 자신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앞으로도 모르리라는 것”(109쪽)을 아프게 깨닫는다. 그리고 그런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어준 한 직장 동료와 운명처럼 부부가 된다.

그후로도 해옥은 순애를 종종 찾아갔지만 사회적 낙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순애는 해옥을 예전처럼 대하지 못하고, 해옥 또한 처지가 영 다르게 된 순애 앞에서 자신의 행복한 삶을 애써 감추는 식의 기만적인 배려밖에는 베풀 수 없게 된다. “엄마의 생활이 안정되어갈수록 이모는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이모가 불편했”(114쪽)고 이 불편한 마음 탓에 왕래를 점점 뜸하게 하다가 종래는 아주 끊어버린다. 그렇게 해옥은 형부가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초반부터 일찌감치 순애를 “없는 사람”(104쪽) 취급한 자신의 엄마나, 형부의 무고함을 증명하려는 노력에 “애처럼 굴지”(107쪽) 말라고 충고했던 동료들의 편리한 태도를 체득하기에 이른다. (-) 처음 봤을 때부터 까닭 모르게 순애가 좋아서 뭐든 이야기하고 오래 같이 걸었던, 순애가 “세상 누구보다 귀한 사람”(100쪽)임을 꿰뚫어 보던 태도를, 해옥은 잃었다.

형부가 출소한 해 겨울 순애의 집을 찾아간 해옥이 목격한 공장 뒤편 작고 허름한 방, 조카아이의 더러운 양말, 내복 차림의 형부, 사다 준 통닭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처럼”(118쪽) 게걸스레 먹는 순애의 모습은 해옥을 불편하게 한다. 이 관계의 불편함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을 가누기 힘든 형부가 바닥에 앉은 채로 오줌을 누어 해옥의 옷가지를 적시는 순간 물리적으로 드러난다. 순애의 삶은 누군가를 초대하여 편안하게 배려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도 박탈된 상황인 것이다. (-) 순애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돌연한 자각에 수치심을 느끼며 해옥을 “뭍에 걸린 배를 호수로 밀어내듯이”(120쪽) 제 삶으로부터 영원히 떠나보낸다. (-)



_이은지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최은영론」(『문학동네』 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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