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89호 - 2016.겨울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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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이 소설의 여성 캐릭터들이 전부 호감이 가지 않았어요. 차라리 여성 캐릭터가 아예 나오지 않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요. 인숙도 인숙이지만, 손수미와 옥사장 딸을 그린 방식이 말할 수 없이 불편했어요. 손수미와 손수미의 남편 채선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손수미가 “만날 채선생에게 얻어터지면서도 이 남자를 사랑했다”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건 가정폭력 문제를 낭만과 무책임하게 버무린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바로 뒤에는 여자를 때리면서 여자의 사랑을 얻는 게 채선생의 “참으로 신비로운 재주”라고 덧붙여져 있고요. (-) 더 뜨악했던 건 옥사장의 딸에 대한 묘사인데, 주인공 희수가 자기가 죽인 남자의 미성년자 딸을 장례식장에서 마주쳐요. 그런데 이 딸에 대한 묘사가 너무…… 제가 본문을 읽어드릴게요. “아이가 입고 있는 상복은 체격에 비해 커서 치마는 바닥에 끌렸고 저고리는 헐렁해서 여민 깃 사이로 흰 브래지어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유방은 이제 막 생기려는 듯 아이의 작은 젖가슴이 봉긋했다.” 이런 시선은 불필요하게 저열한 시선이고 인터넷에서 매일 마주치는 시선인데 굳이 소설에서까지 읽고 싶진 않아요. 흥미진진하고 핍진하게 잘 쓰인 소설인데도 애정이 가지 않고 마음이 식더라고요. 그 많은 장점을 왜곡된 젠더 인식이 다 휘발시켜버리는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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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창작자의 재량에 관한 문제일 수 있는데, 창작자의 윤리라는 문제, 즉 ‘이걸 쓰지 말아야 하는데 썼다’ 등등을 판단하게 되면 조금 위험한 게 되지 않을까요?


정세랑 그런 말씀은 맞는데, 젠더 문제는 한국문학에서 좀 특수해요. 특수하게 후진적이에요. 여성 독자들은 한국소설을 읽을 때 매 페이지에 베여요. 손가락이 베이듯이, 마음이 계속 베여요. 이 창작자들은 여성 독자인 내가 상처받는 것에 쥐뿔도 신경을 쓰지 않는구나,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는 거죠. (-) 독자들이 저자들의 젠더 감수성과 인권 의식을 끝없이 지적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독자들은 공부를 계속하고 예민해지는데 쓰는 이들이 저 뒤에 있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이 글을 써서 누구를 해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전혀 안 하는 게 작가에게 한없이 허락될 자유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독자들이 질렸다고, 쳐다보기도 싫다고 말하고 있을 때는 더욱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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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진짜 사나이> 같은 TV예능에서 조교가 “어디 여자 같은 소리를 냅니까?” 이런 말들이 재현되고 편집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비판과 책과 영화에 대한 비판을 과연 동일한 잣대로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늘 가져봅니다. 미디어에는 성차별적인 광고가 만연하죠. 소설이나 영화는 나름 제한이 가능하죠. 싫으면 안 봐도 되고요. 그런데 예능이나 광고는 모두에게 노출되어 있잖아요. (-)결국 성인영화는 독자의 수준이 더 중요하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정세랑 저는 약간 다르게 생각합니다. 독자의 수준은 이미 높고, 그 독자들이 해외문학을 읽고 넷플릭스를 보며 모국어 콘텐츠를 포기했다고 봐요. 이런 대거 이탈이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닐 거예요. 여성혐오, 소수자 혐오가 지겨워 등을 돌린 독자들, 시청자들을 위해 창작자들이 변화해야 한다는 제 의견이 너무 보수적이고 위험한 의견이라면…… 제가 비평 이론을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창작자라서일 거예요.


(-)


강지희 일단 저는 이번 사건에서 매체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트위터는 익명이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매체였기 때문에 이런 고발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저 뒷담화로 그치거나 또다른 추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한 여성들의 언어가 왜곡되거나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옮겨지는 경험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트위터에서의 ‘토킹’들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스피킹’이 되어 나타난 거죠. 성과 관련된 사건들이면 늘 관음증적 욕망들이 따라다니곤 했는데, 이번에는 여성들, 특히나 어린 여성들이 일절 시각적으로 소비되는 일 없이 추가 고발이 이어졌다는 게 정말 긍정적인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피해자의 신상에 불필요하게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가해자들에 대한 지각과 지탄으로 확실히 관점이 이동해 있었죠. (-)


(-)


김신현경 (-) 저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직장 내 성희롱을 어떻게 볼 것이냐라는 질문에서 발전시켜온 관점들이 있어요. (-) 사실 구체적인 사례들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쉽지 않아요. 직장은 되게 명확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거든요. (-) 저 같은 사람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성희롱은, 그 하나하나의 사례들을 따졌을 때 이것이 성희롱인가 하는 결과적인 일이 아니라는 거죠. 그 상황을 성희롱으로 만드는 우리의 과정과 문화가 있다는 거죠. 예컨대 직장에서 주위 사람들이 너 화장 좀 해, 화장 왜 이렇게 안 하고 다녀 여자가라고 말했을 때 이게 성희롱이라고 생각하세요? 성희롱이거든요. 그건 바로 직장에서 여자가 화장을 해야 하고, 그게 아닐 시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과 평가가 다 들어가고 권력이 작동하기 때문에 그게 성희롱인 거죠.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정치와 문화가 변해서 어느 시기가 되어 ‘너 여자가 왜 그런 거 안 하냐?’ 이런 말을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당신 너무 이상하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되면 이 말은 성희롱이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그 말은 이제 더이상 그 사람을 규정하는 권력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가 그렇게 바뀌었을 때는 그 말을 한 그 사람 한 명이 무례한 개인이 되는 것이죠. (-)



_강지희·김신현경·오찬호·정세랑·문강형준(사회) 「어떻게 할 것인가―문단 내 성폭력과 한국의 남성성」(『문학동네』 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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