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지음 / 지식플러스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나 완벽한 기준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갖추어진 기준에 의존하여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탐구를 시작하여 결과가 잘 나오면, 그 탐구의 시발점이 된 기준도 재검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래의 기준을 수정하고 정제합니다. (-)
이러한 인식과정을 통해 지식이 발달하는 과정을 좀 기하학적으로 비유하자면, 나선helix의 형태입니다. 나선은 동그랗게 돌아서 계속 같은 점으로 돌아오는데 한 번 돌아올 때마다 더 높아집니다. 이것이 덧없는 순환논리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관점이 '지식의 완벽한 정당화'라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요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히 높은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기 때문에 나선이 그냥 원으로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와서, 옆에서 나선형을 보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확실히 보입니다. 이 나선형의 발전형태를 원형의 순환논리로 잘못 이해하고 저도 측정에 관한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지식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 완벽하지 않은 지식을 우리가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 그것도 보입니다.

_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에서 장애학 하기
조한진 외 지음 / 학지사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장애인은 거의 항상, 자신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위치로 격하되어 왔다. 그렇다면 아무리 장애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자리라 하더라도, 비장애인 활동가나 장애인 부모만 있고 실제로 장애인이 그 자리에 없다면, 이 역시 크나큰 문제이다. 이에 당사자원칙은 '장애인을 빼놓고는 장애인에 대해서 논하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장애학에는 장애인 당사자가 주도적 위치를 점하는 것을 우선시한다.

그러나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비장애 주류 사회와 투쟁하는 한에 있어서는, 비장애인 활동가도 장애인의 부모도 당사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당사자는 '장애인으로서의 자존감과 억압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바이며, 이러한 사람들이 장애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주체적으로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것이 진정한 '당사자원칙'이라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빠알리어 직역 담마빠다 - 빠알리 원전 번역, DHAMMAPADA(법구경)
일아(一雅) 지음 / 불광출판사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 가고, 마음이 가장 중요하고 (-)마음에서 만들어진다. 만일 나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그로 인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끄는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6 우리들이 여기(싸움)에서 죽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싸움을 그친다.



15 그는 이 세상에서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 슬퍼한다. 악을 지은 자는 두 세상에서 슬퍼한다. 자신의 행동의 더러움을 보고 그는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19 비록 많은 경전을 외운다 해도, 그에 따라 행하지 않는 방일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소만 세는 목동과 같아서 그는 청정한 삶의 (결실을) 나누지 못한다.



28 지혜로운 사람이 깨어 있음으로 깨어 있지 못함을 쫓아버릴 때, 슬픔이 없는 분은 지혜의 망루에 올라 슬퍼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마치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듯이.



64 어리석은 사람은 평생 동안 어진 사람을 가까이 모셔도 진리를 알지 못한다. 숟가락이 국맛을 모르듯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버링 - 민권을 파괴하는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
켄지 요시노 지음, 김현경.한빛나 옮김, 류민희 감수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생물학 실험실에서 머리가 뾰족한 물벌레를 관찰했던 적이 있다. 이 벌레도 불가사리처럼 잘린 부분이 다시 자라나서 심지어 여러 마리로 복제되기까지 했다.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이 생명체를 보면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화살 모양으로 생겼으면서도 원래 가고 싶어 했던 곳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잘려도 다시 자라났다.

 

(-)

 

(-) 그해 봄, 빌 루벤스타인(Bill Rubenstein)이라는 객원 강사가 성적 지향과 법이라는 과목을 처음으로 개설했다. 그 당시에는 빌 루벤스타인 교수가 로스쿨 교수진 중에 유일하게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였다.

 

(-)

 

놀랍게도 빌은 나에게 예일 대학의 일정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일정에 맞춰 커밍아웃을 하라고 말하면서, 그 세미나 강의를 수강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강의 계획서를 구하고 자신이 편집한 판례집을 사서 강의 계획에 맞춰 읽으라고 거듭 권했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 수업 자료에 대해 함께 토론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연구실에서 만나는 것이 불편하면 도서관에서 만나자고 했다. 내가 강의를 들을 준비가 되면, 내년에 수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판례집을 읽으면서 잠드는 버릇이 생겼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그 책을 읽었고, 책을 팔로 감싸면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모든 것이 바뀌고 있지만 이 교과서는 변하지 않을 터였다. 활자는 페이지 위에 그대로 새겨져 있을 것이고, 단어들은 오늘 말했던 것을 내일도 말할 것이다.

(-) 이 책은 나에게 법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 출발점이었다. 법이 동성애자의 삶에 차등을 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힌 노동자들은 해고되었고, 부모는 자녀에 대한 양육권을 잃었으며, 게이 활동가인 래리 크레이머(Larry Kramer)의 말처럼 사랑할 권리를 부정당했다. 법적 언어의 힘은 나를 매혹시키기 시작했다. “당신은 사랑할 권리가 없다.”라는 법원의 말은 단순히 현실을 표현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현실을 실제로 만들어 냈다. (-)

 

(-)

 

내가 교수 생활을 시작할 무렵, 동료 교수가 나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종신 교수 자격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아질 거라며, 그가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만약에 당신이 전문적인 동성애자가 아니라, 동성애자인 전문가가 된다면 말이에요.” 내가 동성애 주제를 연구하는 게이 교수인 것보다 알고 보니 게이인 주류 헌법학 교수로 사는 게 나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게이로 살아. 원한다면 공개하고 오픈리 게이로 살아. 하지만 너무 티 내지는 마.

(-)

(-) 나를 괴롭히는 것은 이성애자처럼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요청이 동성애와 관련된 주제, 사람, 문화에 대한 나의 열정을 마치 수치스러운 것에 대한 사랑인 양 억압한다는 점이었다. (-)

 

(-)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의 저서 낙인(Stigma)(-) 이 책에서는 장애인, 노인, 비만인 등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손상된정체성을 감당하며 살아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고프먼은 패싱에 대해 논의한 후 자신에게 찍혀 있는 낙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은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낙인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프먼은 이러한 행동을 커버링(covering)’이라고 명명했다. (-)

 

(-)

모든 민권 집단이 커버링 요구로 상처받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백인처럼 입고’ ‘뒷골목 비속어를 쓰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아시아에서 온 티를 내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여성에게는 직장에서 남자처럼 행동하고, 육아에 대한 책임감을 숨기라고 한다. (-)

우리는 미국인들의 차별 방식이 변화하는 시점에 살고 있다. 지난 세대는 집단 전체를 표적으로 삼았다. 즉 소수 인종, 여성, 동성애자, 소수 종교인, 장애가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의 차별은 집단 전체가 아니라, 주류 규범에 동화되지 못한 그 집단의 일부를 겨냥한다. 이 새로운 형태의 차별은 소수자인 사람이 아니라 소수자의 문화를 표적으로 한다. 외부자들은 내부자들처럼 행동할 때만 받아들여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커버링할 때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

(-) 커버링에 대한 강의를 하다보면 소위 성난 이성애자 백인 남성의 반발과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다. 거의 예외 없이 백인 남성이며 화가 나 있는 수강생 한 명이 커버링이 민권의 이슈라는 것을 부정한다. 소수 인종이나 여성이 스스로 커버링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이 집단이 통제할 수 없는 것, 예컨대 피부 색깔이나 염색체, 선천적인 성적 지향으로 인해 차별을 받지 않도록 법적 보호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흑인 스타일로 땋는다거나, ‘여성스럽게행동하거나, 성 정체성을 티 내는 것처럼, 자신들의 통제 범위 안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이 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질문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자신은 평생토록 커버링을 해야만 한다. 우울증, 비만, 알코올 중독, 조현증, 수줍음, 노동자 계급 출신 배경, 명칭이 없는 아노미 상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자신 역시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사는 수많은 남성 중의 하나다. 전형적인 민권 집단은 왜 자신에게 없는 자기표현의 권리를 갖는단 말인가? 진정한 자아를 위한 자신의 고투는 왜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내가 이들의 입장에 동의하면 다들 놀란다. 우리 시대의 민권 운동은 소수 인종이나 여성, 동성애자, 종교적 소수자, 장애인과 같이 전통적인 민권 집단의 권리 향상에만 중점을 두는 우를 범했다. 소위 주류에 속한 사람들, 예컨대 앞서 말한 이성애자 백인들은 커버링하지 않는다고 가정한 것이다. (-)

민권은 반드시 새롭고, 보다 포용적인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 그것은 주류가 허구임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동성애자보다는 이성애자가 주류다.”라는 문장에서처럼 특정 정체성에 관해서는 주류라는 단어가 말이 된다. 그러나 총칭해서 사용되면 이 단어는 의미를 상실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류는 유동적인 연합체이며,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한 주류에 속하지는 않는다. 퀴어 이론가들이 인식했듯이 완벽한 정상은 정상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표현을 위해 분투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커버링을 하는 자아가 있다.

민권 신장을 인간의 번영이라는 보편적인 과업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민권 운동은 비합리적인 믿음으로 인해 좌절을 겪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번영을 지키고자 항상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 열망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

이 목표를 충족하기 위해 현 세대의 민권은 법을 훨씬 초월해 나아가야 한다. 법은 결정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좀 더 인간답게 살도록 도울 수 있지만, 우리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 사실을 애석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법이 우리를 그렇게 쉽게 포착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야말로 걱정스러운 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법이 인간의 모든 복잡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문화가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_켄지 요시노_들어가는 말: 드러난 자아_커버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상 - 정해찬 일러스트레이션
정해찬 지음 / 시공사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여유 있을 때보다 여유 없을 때 돈을 더 잘 빌려준다, 그것도 엄마한테 빌려서. 엄마가 다리 수술하고 집에 누워 있고 나는 어떻게 해도 진짜 월화수목금토일일일일일 일을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두 탕 세 탕씩 일을 해도 생활비와 병원비 충당이 안 되는 시절에 누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준다. 돌았나? 대리만족했나? 그 사람 왈, 자기한테 돈을 빌려간 동생이 돈 대신 카메라를 가지고 왔다, 너 사진 찍는 거 좋아하니 이거 너한테 오만원에 싸게 팔겠다, 일단 내 통장에 돈을 넣어줄래? 음 그후 계좌이체한 오만원. 와 오만원, 그때 오만원은 나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돈이었다. 지금은 오만원? 야 에이 됐다 이럴 수도 있겠죠. 그때 오만원? 지금 오백만원 수준의 압박감을 주는 돈이었다. 엄마가 집에 누워 있는데 나는 그 앞에서 말을 꺼낸다. 음... 나 오만원만, 나 만나는 형이 카메라 싸게 사준대 오만원만 계좌에 넣어줘. 엄마는 다리 아파서 누워 있다가 텔레뱅킹으로 뚜뚜뚜 하고 계좌이체를 해준다. 음... 그 사람이 어떤 식이었냐면 자기랑 데이트하면 와인에 스테이크 먹고 옷도 좋은 걸로 사서 입혀줄 거야, 너는 재능이 있는 아이니까, 하고 말한다. 그땐 내가 이런 말을 믿었다. 내가 이렇게 일해도 돈을 벌 수가 없고 이거는 어쩔 수가 없는데 이 사람은 나를 도와주겠다니? 그때는 통화가 지금처럼 무제한이 아닐 때여서 핸드폰 요금도 문제가 되었는데... 항상 내가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런데 절대 전화를 끊지 않고 늘 자기 얘기 자기 자랑을 했다. 그러면 내가 그걸 한 시간 정도 듣는다. 한 시간 들으면 통화료가 삼천원 정도인가 나왔다. 통화하는 동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만나자는 말과 약속이다. 통화가 끝나갈 때쯤 그는 토요일에 보자~ 말하고 토요일이 되기까지 매일 통화한다. 토요일이 되면 음 다음주 토요일에 보자 일이 너무 많아. 기다리던 다음주 토요일이 되면 또, 와~ 정말 미안해 다음달에 봐야 할 거 같아 어떡해? 이렇게 반년 가까이 시간을 끌었다. 나는 왜 믿었을까요? 우린 만날 수 없고 이 사람은 내가 기대하던 사람이 아님을 예감하면서도 그걸 인정하기 싫었을까? 이 정도 기대나 ‘희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는 그림을 그렸고 나는 그 사람의 그림책을 구해서 보며 엄마에게, 엄마 이 사람이 그림을 그리면 나한테 글을 쓰게 할거래, 나랑 같이 책을 내자고 하네. 그러면 엄마는 누운 채로, 응 그래 그래 대단하다, 잘됐다, 말한다. 근데 그가 한 짓은 오만원 받아가서 계속 카메라를 안 준 것밖에 없네. 자꾸 이렇게 만나는 거 미룰 거면 카메라 그냥 택배로 보내주세요, 라고 하면, 만나서 줄 거야 한다. 언제 만날 건데요, 빨리 만나요. 너무 바빠서 안 돼. 알잖아 나 계약이 너무 많이 밀려 있어. 그리고 넌 오만원 가지고... 근데 그때 전화비가 한달에 십만원 가까이씩 나왔다. 고지서를 보고 엄마가 한숨 쉬면 나는 빨리, 아니야 형이 나 책이랑 쓰게 해준대, 같이 작업하자 그랬어, 내가 글도 보내고 그랬어. 그를 만나기 얼마 전 나는 집에 커밍아웃했지만 만나던 형이랑 헤어진 상태였다. 그러다 그를 알게 된 거라 들떠 있었고 엄마한테도 나이 많은 게이들이 이렇게 능력이 좋아~ 하면서 그의 책들을 펼쳐서 보여주었다. 그럼 엄마는 나를 다 믿어주는 척하였다. 응 그래그래 잘됐다. 음... 나는 왜 그랬을까? 그때는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살 때였다.
돈이 뭘까? 여러분은 돈 벌려고 사나요? 하기 싫고 스트레스 받는 일을 돈 받는다고 할 수 있나요? 아 시발~~ 이러니까 월급 받지~~ 하고 참을 수 있음? 나는 아닌 거 같다. 내가 그때 그한테, 지금 돌아봐도 말도 안 되는 그의 말을 믿으려고 했던 척은, 마치 몸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엄마가 내게 그래 네 말에 동조해주마 하는 태도를 취했던 것처럼, 스스로 이미 어느 코너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돈은 중요하고 돈은 필요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그것이 맞지만 그때 억울했던 건 의도와 다르게 그 한구석, 돈이 나오는 한구석에 껌딱지처럼 필사적으로 붙어 있어야 한다는 의식 때문이었음. 여긴 똥물이 나오는 구멍이야! 하지만 나는 여기에 고개를 들이밀고 막고 있어야 해! (나는 고개를 빼고, 이 구멍에서 머리를 빼고 제발 다른 곳을 보고 싶다, 매우 간절하게) 그런데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것이 책임감이고 당분간 정해진 운명이었으며 동시에 자포자기 하고 싶은 뭐 그런 거였다. 근데 누가 나를 속인다. 그때는 그런 이들이 이런 나에게서조차 뭔가를 건져내려는 더 바닥이라는 걸 몰랐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자기가 최고로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더 당한다거나? 자기를 누가 노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당하고 더 쥐어짜이게 되는 거 같다. 근데 어떻게 바뀌었지? 어떻게 결말이 났죠? 내가 정말 일을 구하게 되면서, 정식으로 취직하게 되면서 확 바뀌었다. 월화수목금토일일일 벌었던 돈보다도 훨씬 많은 돈(그래봤자 적지만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벌 수 없었던)을.. 그건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다. 생활비 병원비 이런 것들이 해결되고 나니 나는 그 구멍에서 얼굴을 뗄 수 있었다. 그후에도 여전히 그에게서 뜸하게 연락왔지만 이젠 정말 그 사람이 싫고 미우며 심하게는 때리고 싶었고 지금도 이 미움은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다 극장에서 영화 <그래비티>를 보았다. 상영시간을 조금 지나 들어갔는데.. 영화 속에서 산드라 블록과 조지 클루니는 무슨 음악을 들으면서 우주공간을 떠다닌다. 그러다 위기가 닥치고 산드라 블록은 저기 먼 우주 공간으로 한없이 뱅글뱅글 돌면서 멀어져버린다. 후에도 여러 위기가 있었는데 그래비티의 서사는 그랬어. 이 사람이 노력한다 -> 실패한다 –> 다시 노력한다 –> 노력했던 이유 때문에 다시 실패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거듭, 다시, 노력하는 걸까, 무엇 때문에? 그러다 산드라 블록은 무슨 탈출용 우주선인가에 들어간다. 거기에 들어가서 죽을 생각을 하고.. 지구를 본다. 지구는 너무나도 멀고 거기에서 머물렀던 시절은 닿을 수 없게 멀다. 모든 걸 잃어버렸다는 기분이 들고 아무것도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노력을 해보았지만 실패했고 다시 해보았지만 또 실패했다. 그 감정 속에서 다시 그 명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걸 느끼기까지 이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때는 연말이었는데 극장에서 나는 처음, 그해 본 영화 중에서 처음으로 울었다. 내 안의 해소되지 않은 억울함, 멍청했던 나에 대한 분노와 원망, 부끄러움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아무것도 아니게, 저기 저 악의를 가진 멍청한 사람들이 내가 다가갈 수 없이 멀어진, 이제 잃어버린 지구에서, 이런 상실의 경험없이 하루하루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무엇이 대수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이 상처를 주었더라도 그것이 그가 생각하기에 자기가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2014.08.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