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 실험실에서 머리가 뾰족한 물벌레를 관찰했던 적이 있다. 이 벌레도 불가사리처럼 잘린 부분이 다시 자라나서 심지어 여러 마리로 복제되기까지 했다.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이 생명체를 보면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화살 모양으로 생겼으면서도 원래 가고 싶어 했던 곳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잘려도 다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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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해 봄, 빌 루벤스타인(Bill Rubenstein)이라는 객원 강사가 “성적 지향과 법”이라는 과목을 처음으로 개설했다. 그 당시에는 빌 루벤스타인 교수가 로스쿨 교수진 중에 유일하게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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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빌은 나에게 예일 대학의 일정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일정에 맞춰 커밍아웃을 하라고 말하면서, 그 세미나 강의를 수강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강의 계획서를 구하고 자신이 편집한 판례집을 사서 강의 계획에 맞춰 읽으라고 거듭 권했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 수업 자료에 대해 함께 토론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연구실에서 만나는 것이 불편하면 도서관에서 만나자고 했다. 내가 강의를 들을 준비가 되면, 내년에 수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판례집을 읽으면서 잠드는 버릇이 생겼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그 책을 읽었고, 책을 팔로 감싸면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모든 것이 바뀌고 있지만 이 교과서는 변하지 않을 터였다. 활자는 페이지 위에 그대로 새겨져 있을 것이고, 단어들은 오늘 말했던 것을 내일도 말할 것이다.
(-) 이 책은 나에게 법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 출발점이었다. 법이 동성애자의 삶에 차등을 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힌 노동자들은 해고되었고, 부모는 자녀에 대한 양육권을 잃었으며, 게이 활동가인 래리 크레이머(Larry Kramer)의 말처럼 “사랑할 권리”를 부정당했다. 법적 언어의 힘은 나를 매혹시키기 시작했다. “당신은 사랑할 권리가 없다.”라는 법원의 말은 단순히 현실을 표현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현실을 실제로 만들어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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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수 생활을 시작할 무렵, 동료 교수가 나를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종신 교수 자격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아질 거라며, 그가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만약에 당신이 전문적인 동성애자가 아니라, 동성애자인 전문가가 된다면 말이에요.” 내가 동성애 주제를 연구하는 게이 교수인 것보다 “알고 보니 게이”인 주류 헌법학 교수로 사는 게 나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게이로 살아. 원한다면 공개하고 오픈리 게이로 살아. 하지만 너무 티 내지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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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괴롭히는 것은 ‘이성애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요청이 동성애와 관련된 주제, 사람, 문화에 대한 나의 열정을 마치 수치스러운 것에 대한 사랑인 양 억압한다는 점이었다. (-)
(-)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의 저서 『낙인(Stigma)』(-) 이 책에서는 장애인, 노인, 비만인 등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손상된’ 정체성을 감당하며 살아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고프먼은 패싱에 대해 논의한 후 “자신에게 찍혀 있는 낙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은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낙인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프먼은 이러한 행동을 ‘커버링(covering)’이라고 명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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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권 집단이 커버링 요구로 상처받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백인처럼 입고’ ‘뒷골목 비속어’를 쓰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아시아에서 온 티’를 내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여성에게는 직장에서 ‘남자처럼 행동’하고, 육아에 대한 책임감을 숨기라고 한다. (-)
우리는 미국인들의 차별 방식이 변화하는 시점에 살고 있다. 지난 세대는 집단 전체를 표적으로 삼았다. 즉 소수 인종, 여성, 동성애자, 소수 종교인, 장애가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의 차별은 집단 전체가 아니라, 주류 규범에 동화되지 못한 그 집단의 일부를 겨냥한다. 이 새로운 형태의 차별은 소수자인 사람이 아니라 소수자의 문화를 표적으로 한다. 외부자들은 내부자들처럼 행동할 때만 받아들여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커버링할 때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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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링에 대한 강의를 하다보면 소위 ‘성난 이성애자 백인 남성’의 반발과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다. 거의 예외 없이 백인 남성이며 화가 나 있는 수강생 한 명이 커버링이 민권의 이슈라는 것을 부정한다. 소수 인종이나 여성이 스스로 커버링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이 집단이 통제할 수 없는 것, 예컨대 피부 색깔이나 염색체, 선천적인 성적 지향으로 인해 차별을 받지 않도록 법적 보호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흑인 스타일로 땋는다거나, ‘여성스럽게’ 행동하거나, 성 정체성을 티 내는 것처럼, 자신들의 통제 범위 안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이 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질문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자신은 평생토록 커버링을 해야만 한다. 우울증, 비만, 알코올 중독, 조현증, 수줍음, 노동자 계급 출신 배경, 명칭이 없는 아노미 상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자신 역시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사는 수많은 남성 중의 하나다. 전형적인 민권 집단은 왜 자신에게 없는 자기표현의 권리를 갖는단 말인가? 진정한 자아를 위한 자신의 고투는 왜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내가 이들의 입장에 동의하면 다들 놀란다. 우리 시대의 민권 운동은 소수 인종이나 여성, 동성애자, 종교적 소수자, 장애인과 같이 전통적인 민권 집단의 권리 향상에만 중점을 두는 우를 범했다. 소위 주류에 속한 사람들, 예컨대 앞서 말한 이성애자 백인들은 커버링하지 않는다고 가정한 것이다. (-)
민권은 반드시 새롭고, 보다 포용적인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 그것은 주류가 허구임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동성애자보다는 이성애자가 주류다.”라는 문장에서처럼 특정 정체성에 관해서는 ‘주류’라는 단어가 말이 된다. 그러나 총칭해서 사용되면 이 단어는 의미를 상실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류는 유동적인 연합체이며,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한 주류에 속하지는 않는다. 퀴어 이론가들이 인식했듯이 완벽한 정상은 정상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표현을 위해 분투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커버링을 하는 자아가 있다.
민권 신장을 인간의 번영이라는 보편적인 과업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민권 운동은 비합리적인 믿음으로 인해 좌절을 겪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번영을 지키고자 항상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 열망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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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표를 충족하기 위해 현 세대의 민권은 법을 훨씬 초월해 나아가야 한다. 법은 결정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좀 더 인간답게 살도록 도울 수 있지만, 우리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 사실을 애석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법이 우리를 그렇게 쉽게 포착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야말로 걱정스러운 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법이 인간의 모든 복잡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문화가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_켄지 요시노_들어가는 말: 드러난 자아_커버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