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 정해찬 일러스트레이션
정해찬 지음 / 시공사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여유 있을 때보다 여유 없을 때 돈을 더 잘 빌려준다, 그것도 엄마한테 빌려서. 엄마가 다리 수술하고 집에 누워 있고 나는 어떻게 해도 진짜 월화수목금토일일일일일 일을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두 탕 세 탕씩 일을 해도 생활비와 병원비 충당이 안 되는 시절에 누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준다. 돌았나? 대리만족했나? 그 사람 왈, 자기한테 돈을 빌려간 동생이 돈 대신 카메라를 가지고 왔다, 너 사진 찍는 거 좋아하니 이거 너한테 오만원에 싸게 팔겠다, 일단 내 통장에 돈을 넣어줄래? 음 그후 계좌이체한 오만원. 와 오만원, 그때 오만원은 나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돈이었다. 지금은 오만원? 야 에이 됐다 이럴 수도 있겠죠. 그때 오만원? 지금 오백만원 수준의 압박감을 주는 돈이었다. 엄마가 집에 누워 있는데 나는 그 앞에서 말을 꺼낸다. 음... 나 오만원만, 나 만나는 형이 카메라 싸게 사준대 오만원만 계좌에 넣어줘. 엄마는 다리 아파서 누워 있다가 텔레뱅킹으로 뚜뚜뚜 하고 계좌이체를 해준다. 음... 그 사람이 어떤 식이었냐면 자기랑 데이트하면 와인에 스테이크 먹고 옷도 좋은 걸로 사서 입혀줄 거야, 너는 재능이 있는 아이니까, 하고 말한다. 그땐 내가 이런 말을 믿었다. 내가 이렇게 일해도 돈을 벌 수가 없고 이거는 어쩔 수가 없는데 이 사람은 나를 도와주겠다니? 그때는 통화가 지금처럼 무제한이 아닐 때여서 핸드폰 요금도 문제가 되었는데... 항상 내가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런데 절대 전화를 끊지 않고 늘 자기 얘기 자기 자랑을 했다. 그러면 내가 그걸 한 시간 정도 듣는다. 한 시간 들으면 통화료가 삼천원 정도인가 나왔다. 통화하는 동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만나자는 말과 약속이다. 통화가 끝나갈 때쯤 그는 토요일에 보자~ 말하고 토요일이 되기까지 매일 통화한다. 토요일이 되면 음 다음주 토요일에 보자 일이 너무 많아. 기다리던 다음주 토요일이 되면 또, 와~ 정말 미안해 다음달에 봐야 할 거 같아 어떡해? 이렇게 반년 가까이 시간을 끌었다. 나는 왜 믿었을까요? 우린 만날 수 없고 이 사람은 내가 기대하던 사람이 아님을 예감하면서도 그걸 인정하기 싫었을까? 이 정도 기대나 ‘희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는 그림을 그렸고 나는 그 사람의 그림책을 구해서 보며 엄마에게, 엄마 이 사람이 그림을 그리면 나한테 글을 쓰게 할거래, 나랑 같이 책을 내자고 하네. 그러면 엄마는 누운 채로, 응 그래 그래 대단하다, 잘됐다, 말한다. 근데 그가 한 짓은 오만원 받아가서 계속 카메라를 안 준 것밖에 없네. 자꾸 이렇게 만나는 거 미룰 거면 카메라 그냥 택배로 보내주세요, 라고 하면, 만나서 줄 거야 한다. 언제 만날 건데요, 빨리 만나요. 너무 바빠서 안 돼. 알잖아 나 계약이 너무 많이 밀려 있어. 그리고 넌 오만원 가지고... 근데 그때 전화비가 한달에 십만원 가까이씩 나왔다. 고지서를 보고 엄마가 한숨 쉬면 나는 빨리, 아니야 형이 나 책이랑 쓰게 해준대, 같이 작업하자 그랬어, 내가 글도 보내고 그랬어. 그를 만나기 얼마 전 나는 집에 커밍아웃했지만 만나던 형이랑 헤어진 상태였다. 그러다 그를 알게 된 거라 들떠 있었고 엄마한테도 나이 많은 게이들이 이렇게 능력이 좋아~ 하면서 그의 책들을 펼쳐서 보여주었다. 그럼 엄마는 나를 다 믿어주는 척하였다. 응 그래그래 잘됐다. 음... 나는 왜 그랬을까? 그때는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살 때였다.
돈이 뭘까? 여러분은 돈 벌려고 사나요? 하기 싫고 스트레스 받는 일을 돈 받는다고 할 수 있나요? 아 시발~~ 이러니까 월급 받지~~ 하고 참을 수 있음? 나는 아닌 거 같다. 내가 그때 그한테, 지금 돌아봐도 말도 안 되는 그의 말을 믿으려고 했던 척은, 마치 몸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엄마가 내게 그래 네 말에 동조해주마 하는 태도를 취했던 것처럼, 스스로 이미 어느 코너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돈은 중요하고 돈은 필요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그것이 맞지만 그때 억울했던 건 의도와 다르게 그 한구석, 돈이 나오는 한구석에 껌딱지처럼 필사적으로 붙어 있어야 한다는 의식 때문이었음. 여긴 똥물이 나오는 구멍이야! 하지만 나는 여기에 고개를 들이밀고 막고 있어야 해! (나는 고개를 빼고, 이 구멍에서 머리를 빼고 제발 다른 곳을 보고 싶다, 매우 간절하게) 그런데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것이 책임감이고 당분간 정해진 운명이었으며 동시에 자포자기 하고 싶은 뭐 그런 거였다. 근데 누가 나를 속인다. 그때는 그런 이들이 이런 나에게서조차 뭔가를 건져내려는 더 바닥이라는 걸 몰랐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자기가 최고로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더 당한다거나? 자기를 누가 노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당하고 더 쥐어짜이게 되는 거 같다. 근데 어떻게 바뀌었지? 어떻게 결말이 났죠? 내가 정말 일을 구하게 되면서, 정식으로 취직하게 되면서 확 바뀌었다. 월화수목금토일일일 벌었던 돈보다도 훨씬 많은 돈(그래봤자 적지만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벌 수 없었던)을.. 그건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다. 생활비 병원비 이런 것들이 해결되고 나니 나는 그 구멍에서 얼굴을 뗄 수 있었다. 그후에도 여전히 그에게서 뜸하게 연락왔지만 이젠 정말 그 사람이 싫고 미우며 심하게는 때리고 싶었고 지금도 이 미움은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다 극장에서 영화 <그래비티>를 보았다. 상영시간을 조금 지나 들어갔는데.. 영화 속에서 산드라 블록과 조지 클루니는 무슨 음악을 들으면서 우주공간을 떠다닌다. 그러다 위기가 닥치고 산드라 블록은 저기 먼 우주 공간으로 한없이 뱅글뱅글 돌면서 멀어져버린다. 후에도 여러 위기가 있었는데 그래비티의 서사는 그랬어. 이 사람이 노력한다 -> 실패한다 –> 다시 노력한다 –> 노력했던 이유 때문에 다시 실패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거듭, 다시, 노력하는 걸까, 무엇 때문에? 그러다 산드라 블록은 무슨 탈출용 우주선인가에 들어간다. 거기에 들어가서 죽을 생각을 하고.. 지구를 본다. 지구는 너무나도 멀고 거기에서 머물렀던 시절은 닿을 수 없게 멀다. 모든 걸 잃어버렸다는 기분이 들고 아무것도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노력을 해보았지만 실패했고 다시 해보았지만 또 실패했다. 그 감정 속에서 다시 그 명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걸 느끼기까지 이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때는 연말이었는데 극장에서 나는 처음, 그해 본 영화 중에서 처음으로 울었다. 내 안의 해소되지 않은 억울함, 멍청했던 나에 대한 분노와 원망, 부끄러움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아무것도 아니게, 저기 저 악의를 가진 멍청한 사람들이 내가 다가갈 수 없이 멀어진, 이제 잃어버린 지구에서, 이런 상실의 경험없이 하루하루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무엇이 대수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이 상처를 주었더라도 그것이 그가 생각하기에 자기가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201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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