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7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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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력이 많이 약해졌군요." 마침내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하긴 젊었을 때도 저기 쓰인 글자를 읽을 줄 몰랐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저 벽이 많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네요. 일곱 계명이 전에 적혀 있던 것하고 똑같은가요, 벤저민?"

벤저민은 이번만은 자신의 규율을 깨뜨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벽에 쓰인 글을 그녀에게 읽어주었다. 거기에는 단 하나의 계명만이 존재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몇몇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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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판 제21호 - 2006년 겨울 - 창간 5주년 기념호
열림원 편집부 엮음 / 열림원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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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하고 소리친 뒤


김애란


모든 말(言)은 말(言)이 되는 순간 머뭇거리는 듯하다. 바르게 선 사람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과 같이. 그것들은 말이 되느라 평소에 좀 바쁘고, 황당하게 곧잘 넘어진다. 언어 또는 문자래도 좋고, 19세기 혹은 21세기라도 상관없다. 활자 속에 깃든 잔인함과, 어쩔 수 없는 아늑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늘 이상한 우스움 같은 것이 서려 있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 멋지게 차려입고 걸어가다 휘청-이는 언어의 어떤 불완전성 같은 것이. 그것은 간혹 좀 더 잘 번식하기 위해, 좀 더 불완전해지려는 종(種)처럼 보인다. 혹은 반대라 해도 좋다. 언어란 인간에게 퍽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과 닮아 있다.


나는 그 사실 때문에 고통받았었다. 내가 말해야 된다는 것. 내가 들어야 한다는 것. ‘아아’ 하고 소리친 뒤 ‘아아’ 하고 느껴야 한다는 것. 네가 말하고. 네가 듣는 것을. 내가.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서로 절뚝이는 것을 보고도 웃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것은 내 사적인 문법과 사적인 잘못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문 따위 이 세계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거니까. 오히려 곤란했던 건, ‘올바른 문장’과 ‘올바른 문장’ 사이에 존재하는 불안이었다. 혹은 대칭점과 화살표를 나눠가질 수 있는, 말들의 무수한 사이―그 경우의 수 앞에서였다고 해야 할까.


말들의 ‘불완전성’이라니. 이 진부한 사실 앞에서 느끼기에 적당한 감정은 어떤 것이어야 했을까. 아무래도 빤한 사실 앞에서 느끼기에 온당한 감정은 빤한 것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아아’라고 느낀 뒤 ‘아아’ 하고 소리쳐야 하는 이 민망함. 죽음처럼, 진부해서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사실들이 있는 것처럼. 언어는 언제고 내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전혀 자연스럽지가 않다. 언어는 너무 미끌미끌하다. 그러니 이 오래된 당혹감이 산뜻해질 수 있는, 그 어떤 비문들이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말들의 ‘성격’을 존중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나를 둘러싼 진부함 앞에서 한 번도 웃어보려 한 적이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람끼리 소통이 좀 안 되고, 오해받는 것이 그렇게 곤란하기만 한 일인가 하는. 신이 우리에게 ‘완전한 언어’라는 것을 쥐여준다면, 그때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일 수 있을까, 혹은 행복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의 소중한 치졸함, 소중한 비열함, 유약함, 산만함, 다정함, 초조함, 엉뚱함, 소심함, 성실함, 기발함, 비굴함, 치열함과 같은 ‘인간적’ 특징들은 매우 단순하고 밋밋해지지 않을까. 그런 시대엔 아마 드라마도 없고, 문학도 없고 어쩌면 사랑도 없을 것이다. 아니면 무척 시시한 것이 되어 있으리. 인간적이라는 것 자체가 선(善)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세계를 좀 더 풍요롭게 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파라솔 모양의 아니 ‘불(不)’ 자가 ‘완전(完全)함’ 앞에 붙어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풍경을 그려본다. 미끌미끌한 언어를 타고 딴 곳으로 좀 가보자면, 아니 불(不) 자는 나무 목(木 ) 자를 닮은 것도 같다. 그리고 그 나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나무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이 낙원이 아니라 기쁘다. 인간과 인간이 소통이 좀 안 돼서 정말 다행이고, 언어가 순결하지 않아 좋다.


지구는 닳고 닳아, 분필만 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지만, 내가 ‘나라고 부르는 나’와 내가 ‘너라고 부르는 너’가 있는 이상, 아마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도 여전히 기우뚱거리는 말들 안에서, 기우뚱거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꼭 무엇을 하려 하는 게 아닌,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엇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환경 안에서 말이다. 물론 말들이 불완전해서, 말들이 우스워서 참혹해지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아아’ 하고 외친 뒤, 이 ‘아아’가 그 ‘아아’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다시 ‘아아’라고 반복할 수밖에 없는, ‘아아’ ‘아아’ ‘아아’ 하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시간들도 있을 것이다. 특별할 것도 없이 우리가 매일매일 맞닥뜨리는 그런 시간들처럼 말이다. 글이란 게 끝끝내 다가갈 수 없는 시간 주위를 끊임없이 기웃거리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지난한 기웃거림 안에서조차 뭔가 전달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면, 나는 그 말들 안을 부지런히 싸돌아다녀볼 생각이다. 가끔은 우리가 울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우리가 가진 진부함의 잔등을 길게 쓰다듬어주면서 말이다. 그러다 간혹 말들의 뒤뚱거림 안에서 새로운 박자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순간, 어쩌면 나는 ‘완전’할 순 없어도 외롭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 될런지도. 그런 뒤 조금쯤은 내가 그러한 일들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부디 그것이, 내가 마지막까지 가장 좋아할 수 있는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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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하는 마음 일하는 마음 1
은유 지음 / 제철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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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 격인 상품을 우린 거의 모르고 사용한다. 농사짓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쌀을 얻어 밥을 먹고, 옷 만드는 사람의 처지와 얼굴을 모르고 옷을 사서 입는다. 결과물만 쏙쏙 취하니까 슬쩍 버리기도 쉽다. 그렇게 편리를 누릴수록 능력은 잃어간다. 물건을 귀히 여기는 능력, 타인의 노동을 존중하는 능력,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는 능력.

“분업은 사회의 생산물들, 사회의 힘, 사회의 향유를 증가시키나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사람들 각각의 능력을 빼앗고 감퇴시킨다”라고 일찍이 프랑스 경제학자 세이가 분석했듯이, 거대한 시스템에 하나의 부속으로 끼워져 파편화된 노동을 수행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기 ‘맡은 바’ 책임을 다할수록 ‘총체적’ 삶에는 무능해지고 만다. 그리고 무능과 무지는 필연적으로 무례와 불통을 낳는다. 그렇다고 일일이 자급자족하거나 경험하기는 불가능한 일. 대신에 노력은 기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일하는 사람의 고충이나 보람 같은 이야기를 듣고 읽고 보고 쓰려 한다. (-) 


(-)


출판의 진정한 예술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칙들을 화해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긴장들을 조화로운 방식으로 어우러지게 하는 데 있다.

-제럴드 하워드, 『편집의 정석』


(-)내가 차라리 한 계간지에 게재했던 원고를 토대로 내용을 보완하면 어떨까 물었더니 편집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글은 좋지만 그게 책이 될 순 없어요.”

나는 글과 책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글이 내 안에서 도는 피라면,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 책은 누군가에게 읽힐 때만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모호한 자의식은 제쳐두고, 비용을 지불하고 책을 사는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지,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는 독자가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지를 독자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

글의 총합이 책이 아니라는 것. 좋은 글이 많다고 좋은 책은 아니라는 것. 한 권의 책은 유기적인 구조를 갖고 있으며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와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 그 일을 과단성 있게 솜씨 좋게 해내는 사람이 편집자라는 것. 저자는 외부자의 시선을 갖기 어렵기에 편집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 좋은 출판사보다 좋은 편집자를 만나는 게 중요하다는 것.

(-) 경험은 좋은 스승이다. 여러 편집자와 일해보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아갔다. 상대방과 마음의 속도, 의욕의 강도를 맞추지 않는 일방적인 열심의 태도가 외려 독이 될 수도 있겠구나. (-)


어떤 일이든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런데도 혼자만 열심인 건, 말하자면 그 일을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슬픈 인간』


책은 부단한 협동의 결과물이다. 저자의 힘만으로만 나오는 게 아니며 출판사라는 보통명사 뒤에는 편집자, 북디자이너, 마케터, 제작자, MD, 서점인 등의 숨은 노동이 있다. (-) 출판계 종사자들은 숨돌릴 틈 없이 바쁘고 아침마다 수치로 제시되는 판매량 성과에 쫓긴다. 출판 노동자의 르포집  『출판, 노동, 목소리』에 나오는 편집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이 “좋은 책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 회사에서 사라진 지는 오래됐고, 회사는 내게 책을 빨리 만들 것을 주문”한다. 책을 ‘만들지’ 못하고 ‘쳐내기’ 바쁜 상황이다 보니 동료 간 서로의 업무를 숙지하고 상대 속사정을 헤아릴 소통의 기회는 더욱 드물다. 저자와 편집자만이 아니라 편집자와 북디자이너, 북디자이너와 마케터, 번역자와 편집자, 편집자와 제작자, 마케터와 MD 등등 업무적으로 얽혀 있기에 일하다 보면 저마다의 처지에서 한 움큼의 서운함, 서러움,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 수십 개 출판사의 마케터를 대응해야 하는 MD는 좋든 싫든 감정을 드러냈다간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 십상이라서 덤덤한 얼굴로 일할 수밖에 없지만, 출판사 입장에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MD가 야속하고 그가 어쩌다 흘리는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게 된다. 서점인은 심사숙고해서 책을 골라 진열하고 소개하지만 그런 노력을 모르는 독자는 서점에 들어와 사진만 찍고선 할인되고 굿즈도 받는 온라인 서점에서 사야지 생각하며 나가버린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동은 대단한 악의와 의도가 아니라 타인의 노동에 대한 무지와 알려고 하지 않는 습관적 게으름에서 오는 것들이다. 나도 인터뷰를 통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각각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전생을 기억하는 아홉 살 소년 앙뚜와 그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준 스승 우르갼, 두 사람의 동행을 담은 작품이다. 시원한 풍경과 묵묵한 관계가 진한 여운을 남기는데 특히 앙뚜의 이 대사가 좋았다.

“나쁜 마음으로 하지 마세요.”

살면서 행하는 잡다한 일들을 ‘해치우듯’ 살아가는 태도에 경종을 울리는 한마디였다. (-) 글을 쓰다가 속상해서, 꾀가 나서, 혹은 힘에 부쳐서 대충 하고 싶을 때면 나쁜 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소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좋은 마음으로 해야만 나쁜 현실을 바꿔낼 수 있을 테니까.


“이 책을 다른 출판사가 발행했다면 구매할 텐가?” 이 시험은 다음과 같이 경험상의 여러 질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아무 페이지나 찔렀을 때 피가 나는가? 한 단락을 건너뛰었을 때 경험을 놓쳤다는 생각이 드는가? 책을 읽을 때 목 뒤의 털이 곤두서는 게 느껴지는가? 본인 서재에 소장할 의향이 있는가? 수년이 흐른 후에 책장에 꽂혀 있는 그 책을 보고 흐뭇함을 느끼고 그 책을 한 번이 아니라 다시 읽는다는 즐거움에 마음이 설렐 것인가?

-M. 링컨 슈스터, 『편집의 정석』


 (-)


부끄럽지 않은 책을 만들어야 한다. 애정의 다함에 대해 나는 나를 자꾸만 의심해야 한다. 한순간의 안도가 한 권의 책을 망칠 수 있다. 어려운 이름, 책. 그렇다고 당신에게 내 싸다구를 후려쳐달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내 귀싸대기는 내가 치는 걸로. 


(-)


“고등학교 때 100번까지 있는 위인전을 출판사별로 몇 종류를 봤어요. 내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더라고요. 특히나 남의 족보 보는 걸 엄청 좋아했어요. 저자 약력 보고 책 고르는 게 나만의 도서 구입 팁이었죠. 시집을 읽고 싶은데 어떤 시집을 사야 할지 모를 때 시인의 약력 보고 시집을 골랐어요. 대학 1학년 때니까 시를 하나도 모를 때였죠. 시집 코너 앞에서 막막하면 일단 약력을 펼쳐서 인천 출신 시인들 시집만 사서 봤어요. 혹시나 내가 아는 풍경이 그려져 있지는 않을까, 그럼 이해하기가 훨씬 쉽지 않을까, 그랬는데 정말 도움이 됐어요. (-)”


(-)


입사 초기에 가장 큰 어려움은 전화로 청탁하는 일이었다. 누가 먼저 말 걸기 전에 먼저 질문하는 법이 없을 만큼 새침한 때였다. 사무실 안에서 동료들이 듣고 있는데 전화를 거는 게 끔찍해 종종 동전을 잔뜩 바꿔가지고 회사 앞 공중전화에 가서 청탁 전화를 돌리곤 했다. 앳된 목소리의 신입 여자 기자에게 ‘그들은’ 대체로 친절하지 않았다. 그때 역지사지를 온몸으로 배웠다. 나는 어떤 곳에서 어떤 누구에게든 전화가 오면 친절해야지, 무조건 내치지 말아야지. 지금도 지나가다 공중전화 부스만 봐도 멈칫거린다. 거기엔 까만 봉지에서 잔돈 꺼내가며 전화하고 있는 스물네 살 김민정이 서 있다.


(-)

“(-) 단호함을 빨리 알아봐요. 다만 기획안을 쓸 적에, 저를 편집자라기보다 작가로 상정해놓고 어떻게 하면 쓰기 편하게 유도할까 최선을 다해 궁리해요. 쓰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기획안이냐, 이게 필수라는 걸 아니까요.”


(-) 그보다 우선시되는 덕목은 만나는 사람마다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고, 다음에 언제든 다시 만날 거란 생각을 하면서 그 예의에 진심을 보태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절로 구부러짐, 그 태도에서 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절로 생겨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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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구원
레슬리 뉴비긴 지음, 홍병룡 옮김 / 복있는사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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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동료 인간과 모순된 상태에 있다

(-) 가인과 아벨의 시대로부터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죽이는 행위를 계속해 왔다. 어디로 눈을 돌리든지 싸움을 목격하게 된다. 나라와 나라, 계급과 계급, 인종과 인종 간, 그리고 심지어는 한 가족 내에서도 형제와 형제, 자녀와 부모 간에 싸움이 일어난다. (-) 사랑이 최고의 선이며 사랑이 없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서로서로 싸움을 일삼는다. (-)

 

사람은 자기 내면과 모순된 상태에 있다

각 사람의 내면은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 속에서 많은 세력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일종의 공화국이다. 그 마음의 주권에 반란을 일으키는 강력한 본능적 세력들이 존재한다. 사람의 몸은 언제나 의지에 순종하는 도구가 결코 아니며, 그의 마음 내부에도 상충되는 욕망들이 있다. (-) 무엇보다도, 각 사람의 내면에는 그가 마땅히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과 그가 실제로 행하는 일 사이에 커다란 분열이 존재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7:19) 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의 실제 상태와 그의 당위적인 상태 간의 이런 자기모순은 각 사람의 영혼을 관통하고 있다. (-)

 

사람은 하나님과 모순된 상태에 있다

이것이 다른 모든 모순의 근거가 되는 기본적인 모순이다. 사람은 자신의 창조주에 반란을 일으킨 피조물, 자기 존재의 뿌리로부터 자신을 잘라버린 피조물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창조세계와 모순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창조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려고 애쓴다. 그는 겸손과 믿음과 순종의 자세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의 힘과 지혜와 선행에 의지하여 사는 길을 택한다. 사람은 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겠다고 말할 때조차도 자기의 권리와 자기의 힘으로 그렇게 행하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어 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의로움을 구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사람과 하나님 간의 모순은 다른 모든 모순들의 뿌리에 해당한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 존재의 근원과 대립함으로써 스스로를 자기 자신, 동료 인간, 그리고 세계와 모순된 상태에 두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모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속박에 빠지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적대적 세력들에 사사건건 부딪혀서 한계에 봉착한다. 주변 세상에 있는 악의 세력, 그 영혼 속에 있는 죄의 세력, 생명에 종말을 고하는 죽음의 세력 등은 모두 힘을 합쳐 사람에게서 자유를 빼앗는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런 적대적인 세력들을 이기고 자신을 해방시킬 만한 힘이 없다. 이 속박의 본질과 이유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 구원이란 사람이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과 우리가 논한 여러 모순들을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구원하다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온전케 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온전함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사르바Sarva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단어로, 상처 난 곳을 치유하고, 부러진 것을 고치고, 속박된 것을 풀어 준다는 뜻을 갖고 있다.

 

(-)

동전에 새겨진 어느 왕의 머리의 형상은 그 동전의 일부이므로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왕이 죽더라도 그 형상은 동전에 그대로 남는다. 그런데 이와 다른 종류의 형상도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고요한 밤이면 우리는 호수 물에 비친 달의 형상을 볼 수 있다. (-) 그러나 구름이 달과 지구 사이에 끼어들면 그 형상은 사라질 터이고, 만일 물이 바람에 흔들리면 그 형상은 흩어지고 일그러질 것이다. 따라서 물에 비친 달의 형상이 그 물에 속하지 않는 것은 동전에 새겨진 왕의 형상이 그 동전에 속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 형상은 달과 물 사이의 어떤 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만일 이 관계가 깨어지면 그 형상도 비뚤어지거나 사라지게 된다(이 예화는 나일즈 박사에게서 들은 것이다).

이 비유는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형상은 동전 위의 형상보다 물에 비친 형상에 더 가까운데, 형상의 존재는 하나님과 사람 간의 관계에 달려 있다. 사람과 다른 모든 피조물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사람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개의 개다움은 그 자체 속에 있다. 그러나 사람의 사람다움은 그 자체 속에 있지 않고 그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만일 이 관계가 파괴되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되고 만다. 사람의 사람다움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관계를 그분과 맺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데 달려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면 그 형상은 비뚤어지고 망가져 버린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등을 돌린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실종되고 사람은 더 이상 사람다운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은 사랑 안에서, 사랑에 의해,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점에 있다. 사랑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자 목적인 셈이다. 그래서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 (-) 사랑의 충만함은 사랑을 주고받는 곳에만 존재할 뿐, 한 개인 속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체질 속에 사랑을 받을 필요성과 사랑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심어 놓은 셈이다.

(-)

사람의 존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다른 인간들에 대한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 뒤에서 우리는 사람이 이 사랑의 능력을 자기만을 사랑하는 데 이용했기 때문에 그 형상이 비뚤어져버린 경위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 사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무한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없다고 믿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척 큰 독립성을 부여하셨다. 하지만 완전한 독립성은 아니었다. 만일 그것이 완전한 독립성이었다면, 그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일과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사랑을 위해 사랑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점에 있는 만큼 완전히 독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독립성과 의존성 둘 다를 의미한다. 만일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 있고 따라서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지만 결코 하나님은 아니다. 이런 지위 때문에 유혹과 죄가 들어올 여지가 생긴다. 유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불신과 함께 시작된다. 유혹하는 자는 하와에게 아주 교묘한 말투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마땅히 주셨어야 한다고 넌지시 말한다. 아울러 하나님이 사람에게 한계를 두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에 무언가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 불신이 유혹의 출발점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있는 곳에는 결코 유혹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불신이 바로 죄의 시작이다. 불신은 사실상 죄의 뿌리이자 근거에 해당한다.

유혹하는 자는 먼저 (-) 마음속에 불신의 씨앗을 뿌린 뒤에(-) 새로운 생각을 집어넣는다. 바로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3:5) 될 것이라는 발상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기를 그만둘 때, 그 다음 단계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인생을 다스리고, 미래를 예측하고,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결정하고, 남을 판단하고, 세계의 중심이 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바로 다 자란 죄다. 죄란 각 사람이 세계의 중심이 되고 싶어 하는 것, 자기의 유익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죄란 사람이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는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그 자신을 사랑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린다.

이로써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어떻게 죄를 범할 가능성이 생기는지를 알게 된다. 사람의 진정한 삶은 하나님을 향한 애정 어린 믿음, 하나님을 만물의 중심으로 인정하는 일, 그분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일에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능력을 갖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놓고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사랑하고픈 유혹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의 본질은 불신이고, 죄의 반대는 믿음이라는 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죄의 반대는 의로움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죄의 반대는 믿음이다. 우리가 이 점을 잘 이해하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무엇보다도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불협화음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면, 이제는 자녀가 아버지에게 달려가듯 기쁘게 달려가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하여 몸을 숨긴다(3:9-10).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 된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을 회피하려고 애쓴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에게 공포감을 안겨 준다. 하나님의 법인 사랑은 더 이상 그의 삶을 채색하는 법이 아니다. 그는 사랑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은 그를 위협하는 계명이 된다. 그리하여 인류의 이야기는 곧 하나님이 오랫동안 끈기 있게 사람을 찾는 이야기, 곧 하나님을 찾는 체하지만 실은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도망치고 몸을 숨기는 사람을 찾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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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개
박솔뫼 지음 / 스위밍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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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정지를 받고, 이것은 박솔뫼의 소설이고 사랑스러운 선물 같은 소설이다, 라는 황예인의 말을 듣고, 그래서 그것을 본다. (-) 하얀 종이 위에 인쇄된 박솔뫼라는 이름과 '사랑하는 개'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박솔뫼의 문체(차라리 말투)를 들을 수 있고, 이것이 소설이며, 그것도 아주 사랑스러운 소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들고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아니 그전에 이미 작가와 제목과 표지를 보며 알았던 것처럼. 그건 예감이나 직관 같은 것은 아니고 독자로서 내가 하는 간단한 산수다.




개+박솔뫼=사랑스러운 소설




(-) 이런 경우에(-) 나는 (-) 아니고 (-) 모르고 (-) 이유를 이제는 안다.






(-) 어떤 상황에도(-) 종종 전망이 보이지 않고(-) 상황 속에서 "방법이 없다, 아무튼 방법이 없으므로 그것에 스스로 다가가보는" 마음으로 (-)생각"한다. (-) 그렇게 만난(-) 좋아하고 믿으며(-) 이미 얼어붙은 길을 미끄러지지 않으려 애쓰며 걷고 걸어 고기를 먹으러 가기 위해서?




(-)(그래 고기는 맛있지).




(-) 아무튼 간에 뭔가 힘이 있긴 있다는 것이다.(-) 항상은 아니겠지만 어떤 순간에(-) 개의 눈을 바라보고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거기서 뭔가가 변해버릴지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을 (-)은 보여준다. (-) 않는다. (-) 동시에 (-)준다. (-) 두기. (-)는 그렇게 생각하고 따라서 어느 순간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계산을 하러 가게 주인과 마주했던 순간 왠지 제가 이곳을 못 찾아서요 헤매다가요 하고 주절주절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싶은 나는(-) 당신이(-) 알아도 모르고 몰라도 압니다 하는 마음이 들고 나는 돈을 내밀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선다.(-)




(-)"아니 개가 되고 싶다고 말을 한 것은 분명해. 나는 금으로 오랫동안 살아온 노디가 그때 너와 함께 있었을 때 개가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을 분명히 차근차근 알려주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금은 그때 개로 돌아가도 상관없는 거야. 충분히 이해한 후에 말야."






(-) 어쩌면 나는 박솔뫼의 소설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해야 했는지 몰라. (-) 우리가 하는 말은 어떤 순간에 힘을 발휘하지 (-) 풀어낼 수 있지 않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나는 (-)긴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는데, 누운 자세로 메모를 하는 건 귀찮은 일이기도 하거니와 침대 발치에 잠들어 있던 개가 어느새 깨어 나에게 안겨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2018년 4월이고 내가 2017년 4월 13일에 정말 개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고 친구가 내게 개를 잠시 맡기지도 않았지만 일 년이 지난 후 정말 친구는 내게 개를 잠시 맡겼고 눈처럼 하얀 개의 이름은 유키다. 여덟 살인 유키는 사람을 몹시 좋아해서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한시도 자신의 몸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을 때도 글을 쓸 때도 소파에 앉아 함께 도그티비를 볼 때도 개는 늘 내 무릎에 앉아 몸을 내게 맡긴 채 언제까지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 온도로 숨을 쉰다. 그래서 나는 침대에 누운 채 개를 품에 안고 규칙적으로 뛰는 개의 심장을 느끼며 계속해서 박솔뫼의 소설을 읽는다.


그러니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해야겠다. 2018년 봄에 나는 몇 가지 방식으로 박솔뫼의 소설을 읽었다. 그중에서 제일 좋았던 건 사랑하는 개를 사랑하며 읽는 것이었다.




_금정연_개와 함께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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