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하는 마음 일하는 마음 1
은유 지음 / 제철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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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 격인 상품을 우린 거의 모르고 사용한다. 농사짓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쌀을 얻어 밥을 먹고, 옷 만드는 사람의 처지와 얼굴을 모르고 옷을 사서 입는다. 결과물만 쏙쏙 취하니까 슬쩍 버리기도 쉽다. 그렇게 편리를 누릴수록 능력은 잃어간다. 물건을 귀히 여기는 능력, 타인의 노동을 존중하는 능력,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는 능력.

“분업은 사회의 생산물들, 사회의 힘, 사회의 향유를 증가시키나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사람들 각각의 능력을 빼앗고 감퇴시킨다”라고 일찍이 프랑스 경제학자 세이가 분석했듯이, 거대한 시스템에 하나의 부속으로 끼워져 파편화된 노동을 수행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기 ‘맡은 바’ 책임을 다할수록 ‘총체적’ 삶에는 무능해지고 만다. 그리고 무능과 무지는 필연적으로 무례와 불통을 낳는다. 그렇다고 일일이 자급자족하거나 경험하기는 불가능한 일. 대신에 노력은 기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일하는 사람의 고충이나 보람 같은 이야기를 듣고 읽고 보고 쓰려 한다. (-) 


(-)


출판의 진정한 예술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칙들을 화해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 긴장들을 조화로운 방식으로 어우러지게 하는 데 있다.

-제럴드 하워드, 『편집의 정석』


(-)내가 차라리 한 계간지에 게재했던 원고를 토대로 내용을 보완하면 어떨까 물었더니 편집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글은 좋지만 그게 책이 될 순 없어요.”

나는 글과 책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글이 내 안에서 도는 피라면,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 책은 누군가에게 읽힐 때만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모호한 자의식은 제쳐두고, 비용을 지불하고 책을 사는 독자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지,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는 독자가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지를 독자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

글의 총합이 책이 아니라는 것. 좋은 글이 많다고 좋은 책은 아니라는 것. 한 권의 책은 유기적인 구조를 갖고 있으며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와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 그 일을 과단성 있게 솜씨 좋게 해내는 사람이 편집자라는 것. 저자는 외부자의 시선을 갖기 어렵기에 편집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 좋은 출판사보다 좋은 편집자를 만나는 게 중요하다는 것.

(-) 경험은 좋은 스승이다. 여러 편집자와 일해보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아갔다. 상대방과 마음의 속도, 의욕의 강도를 맞추지 않는 일방적인 열심의 태도가 외려 독이 될 수도 있겠구나. (-)


어떤 일이든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런데도 혼자만 열심인 건, 말하자면 그 일을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슬픈 인간』


책은 부단한 협동의 결과물이다. 저자의 힘만으로만 나오는 게 아니며 출판사라는 보통명사 뒤에는 편집자, 북디자이너, 마케터, 제작자, MD, 서점인 등의 숨은 노동이 있다. (-) 출판계 종사자들은 숨돌릴 틈 없이 바쁘고 아침마다 수치로 제시되는 판매량 성과에 쫓긴다. 출판 노동자의 르포집  『출판, 노동, 목소리』에 나오는 편집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이 “좋은 책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 회사에서 사라진 지는 오래됐고, 회사는 내게 책을 빨리 만들 것을 주문”한다. 책을 ‘만들지’ 못하고 ‘쳐내기’ 바쁜 상황이다 보니 동료 간 서로의 업무를 숙지하고 상대 속사정을 헤아릴 소통의 기회는 더욱 드물다. 저자와 편집자만이 아니라 편집자와 북디자이너, 북디자이너와 마케터, 번역자와 편집자, 편집자와 제작자, 마케터와 MD 등등 업무적으로 얽혀 있기에 일하다 보면 저마다의 처지에서 한 움큼의 서운함, 서러움,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 수십 개 출판사의 마케터를 대응해야 하는 MD는 좋든 싫든 감정을 드러냈다간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 십상이라서 덤덤한 얼굴로 일할 수밖에 없지만, 출판사 입장에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MD가 야속하고 그가 어쩌다 흘리는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게 된다. 서점인은 심사숙고해서 책을 골라 진열하고 소개하지만 그런 노력을 모르는 독자는 서점에 들어와 사진만 찍고선 할인되고 굿즈도 받는 온라인 서점에서 사야지 생각하며 나가버린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동은 대단한 악의와 의도가 아니라 타인의 노동에 대한 무지와 알려고 하지 않는 습관적 게으름에서 오는 것들이다. 나도 인터뷰를 통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각각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전생을 기억하는 아홉 살 소년 앙뚜와 그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준 스승 우르갼, 두 사람의 동행을 담은 작품이다. 시원한 풍경과 묵묵한 관계가 진한 여운을 남기는데 특히 앙뚜의 이 대사가 좋았다.

“나쁜 마음으로 하지 마세요.”

살면서 행하는 잡다한 일들을 ‘해치우듯’ 살아가는 태도에 경종을 울리는 한마디였다. (-) 글을 쓰다가 속상해서, 꾀가 나서, 혹은 힘에 부쳐서 대충 하고 싶을 때면 나쁜 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소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좋은 마음으로 해야만 나쁜 현실을 바꿔낼 수 있을 테니까.


“이 책을 다른 출판사가 발행했다면 구매할 텐가?” 이 시험은 다음과 같이 경험상의 여러 질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아무 페이지나 찔렀을 때 피가 나는가? 한 단락을 건너뛰었을 때 경험을 놓쳤다는 생각이 드는가? 책을 읽을 때 목 뒤의 털이 곤두서는 게 느껴지는가? 본인 서재에 소장할 의향이 있는가? 수년이 흐른 후에 책장에 꽂혀 있는 그 책을 보고 흐뭇함을 느끼고 그 책을 한 번이 아니라 다시 읽는다는 즐거움에 마음이 설렐 것인가?

-M. 링컨 슈스터, 『편집의 정석』


 (-)


부끄럽지 않은 책을 만들어야 한다. 애정의 다함에 대해 나는 나를 자꾸만 의심해야 한다. 한순간의 안도가 한 권의 책을 망칠 수 있다. 어려운 이름, 책. 그렇다고 당신에게 내 싸다구를 후려쳐달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내 귀싸대기는 내가 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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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100번까지 있는 위인전을 출판사별로 몇 종류를 봤어요. 내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더라고요. 특히나 남의 족보 보는 걸 엄청 좋아했어요. 저자 약력 보고 책 고르는 게 나만의 도서 구입 팁이었죠. 시집을 읽고 싶은데 어떤 시집을 사야 할지 모를 때 시인의 약력 보고 시집을 골랐어요. 대학 1학년 때니까 시를 하나도 모를 때였죠. 시집 코너 앞에서 막막하면 일단 약력을 펼쳐서 인천 출신 시인들 시집만 사서 봤어요. 혹시나 내가 아는 풍경이 그려져 있지는 않을까, 그럼 이해하기가 훨씬 쉽지 않을까, 그랬는데 정말 도움이 됐어요. (-)”


(-)


입사 초기에 가장 큰 어려움은 전화로 청탁하는 일이었다. 누가 먼저 말 걸기 전에 먼저 질문하는 법이 없을 만큼 새침한 때였다. 사무실 안에서 동료들이 듣고 있는데 전화를 거는 게 끔찍해 종종 동전을 잔뜩 바꿔가지고 회사 앞 공중전화에 가서 청탁 전화를 돌리곤 했다. 앳된 목소리의 신입 여자 기자에게 ‘그들은’ 대체로 친절하지 않았다. 그때 역지사지를 온몸으로 배웠다. 나는 어떤 곳에서 어떤 누구에게든 전화가 오면 친절해야지, 무조건 내치지 말아야지. 지금도 지나가다 공중전화 부스만 봐도 멈칫거린다. 거기엔 까만 봉지에서 잔돈 꺼내가며 전화하고 있는 스물네 살 김민정이 서 있다.


(-)

“(-) 단호함을 빨리 알아봐요. 다만 기획안을 쓸 적에, 저를 편집자라기보다 작가로 상정해놓고 어떻게 하면 쓰기 편하게 유도할까 최선을 다해 궁리해요. 쓰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기획안이냐, 이게 필수라는 걸 아니까요.”


(-) 그보다 우선시되는 덕목은 만나는 사람마다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고, 다음에 언제든 다시 만날 거란 생각을 하면서 그 예의에 진심을 보태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절로 구부러짐, 그 태도에서 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절로 생겨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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