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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그는 나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 정문 앞에서 만나 굴다리를 지날 때 그와 살짝 스치기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처음부터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그건 지난봄의 실패를 떠올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꿈 때문이었을까? 그의 집요하진 않았지만 꼭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암시에 미리감치 나는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랑받을 예감으로 가득차 그를 보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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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을 만났을 무렵, 나는 사랑하는 데에 지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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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여태까지와 다르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강박, (-) 나는 남자를 사랑하는 데 특화된 생물처럼, 주인만을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개가 주인을 따지지 않듯 별 볼 일 없는 남자에서부터 꼴값하는 남자에 이르기까지 좋아할 구석을 어떻게든 찾아내 듬뿍 사랑했다. 그렇다고 내게 돌아오는 사랑이 있었느냐? 하나도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수지가 터무니없이 맞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그렇게나 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면서 왜 나를 좋아해주진 않지? 의아해하며, 하지만 전혀 지친 내색 없이, 마음만 털리고 재수도 털리고 몸은 잘 안 털리는 나날 속에서 그 이유를 어떤 날에는 내 몸─충분한 발기, 균형 잡힌 몸매, 매끈한 등과 종기, 튼살, 착색 없는 피부, 가 내겐 없지─에서 어떤 날에는 내 성격과 행동─지나침, 과민함, 사랑이 없어도 의미만 있다면 지속하는 맛도 멋도 없는 짓─에서 찾아냈는데 이러는 것도 지친다 이제는 정말 지친다, 사랑하는 건 지친다 이제 끊겠다, 하며 특별한 계기랄 것도 없이 그냥 한순간에 그만둬버렸다. 내가 사랑만 하지 않으면 얻을 것은 너무 많다. 비약적으로 내 삶은 윤택해질 것이다 그러니 끊는다 끊었다 정말, 하던 시기에
나를 사랑해주는 형을 만났고 보름 만에 연락이 끊겼지. 그래서
또 끝이라고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매번 똑같냐.
라고도 생각했어. (-) 내가 저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뭐가 좀 달라졌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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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홀로 된 것이 가장 당혹스러웠을 때는 (-) 기쁨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랑거리도 못 될 사소한 기쁨을, 부모님과 친구와는 공유할 수 없고 공유하기 싫은 그런 것들을 말할 수 없는 적막함. 망연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 마음을 가누어 억눌러야 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있다! 있었다.
(-)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마음놓고 좋아해도 좋겠다. 그 사실을 보란듯이 말해주고 또 사랑받아야지, 이미 좋아하지만 형도 그렇게 말해준다면 아니 무슨 말을 내뱉든 나는 이제 정말로 형을 사랑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해주고 사랑해야지. (-)
물론 형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날 이후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나는 복수라도 하듯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어놓고는 눈을 감고 등뒤로 훌쩍 날려버렸다. 하지만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방안에서 핸드폰을 되찾고 벨소리를 최대치로 맞춘 뒤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이 행동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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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에 기대 프루스트가 말했던 일본 종이꽃 놀이를 떠올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수중화水中花 이상의 이름─대개의 장난감이 그렇듯─을 찾을 수 없었던, 마른 꽃잎이 물에 잠기면서 활짝 피어나는 장난감. 나는 티포트 속 블루밍 티를 볼 때면 어김없이 소설 속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물에 잠기며 천천히 펴지는 꽃을 볼 때, 서서히 윤곽이 잡히고 색이 짙어져갈 때, 우리는 꽃의 과거를 보는 것일까 미래를 보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꽃의 현재를 보는 것뿐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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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을 마지막으로 봤던 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째서 난 일기를 쓰지 않으며 살았던 거지? 그날 왜 나는 계산을 하나도 하지 않았던 거지? 창천교회의 불 켜진 종탑, 정문을 비추는 하얀 불빛, 천천히 좌회전하는 파란색 버스, 신호등 경보음, 드문드문 불이 켜진 세브란스병원, 옹색한 소나무, 이런 뻔해빠진 풍경 속 그를 뒤로하고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뒤돌아본다. 그러면 형이 손을 흔든다. 언제나처럼 같은 셔츠를 입고 비슷한 갈색톤의 치노 팬츠를 입고서, 내가 현수막쯤 걸어가 다시 돌아보면 그땐 정말로 사라져 있고 그건 형을 만난 첫날부터 내게 반복되는 것으로, 하나도 특색이 없었을 마지막 작별 풍경 속에서 그건 어쩌면 첫날일 수도 셋째 날일 수도 마지막날일 수도 지금의 머릿속 풍경일 수도 있을 전혀 구별되지 않는 장면 속에서 나는 무엇도 길어낼 수 없어 속이 바짝 타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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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의 어머니는 당신의 와이셔츠를 품에 안고 낮게 읊조리다 웃었다. 형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었는지 어찌나 뽄만 지기는 아이였는지 이 웬수를 어떻게 갚느냐며 다시 울먹이다가 어느 순간 당신을 사랑했다고 말하는데, 그건 우리가 서로에게 단 한번도 해주지 못한 것─어째서 사랑한다는 말은 꼭 서울말로 하게 될까? 그렇게여야만 할 수 있었을까?─내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발음한 적 없는 그 성조의 사─랑, 그녀의 말은 점점 뭉개져 넋두리로 그 넋두리는 타령으로 변해가는데,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대도 성조로만 이루어진 저 음률을, 절대로 옮겨 적을 수도 없고 따라 할 수도 없는 저 소리를, 나는 그 어떤 죽음도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당신의 어머니가 내는 저 소리만큼은 어째서인지 알 것만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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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너무나 많지만, 원한다고 꿀 수 없는 꿈처럼, 형도 그러니까 이제 그런 사람이 된 것이지요? 그럼에도 당신 생각으로만 가득한 이곳에서 나는, 형이랑 만나는 꿈을 꿨어요. 당신의 없음이 아니라 있음으로 가득한 이 공간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돌이켜보고 겹쳐보고, 후회해보고, 떠올려보고, 상상해보고, 기억해보는 그 모든 것 중에서 내가 단 하나만 할 수 있다면, 그 무엇보다 형을 그저, 보는, 꿈을 꾼다고.
딱 한 번만 더 형이 보고 싶었다.
(-)
어떤 모습이든, 어떻게든. 나는 그것이 보고 싶었다.
_라스트 러브 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