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이 있는 골목은 차가 들어올 수 없어서 나는 하천 아래 찻길에서 버스에서 내려 빗장을 지른 철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누군가 나를 공격한다면 아마 이 계단에서일 거라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처럼 나 역시 자주 몽상을 했고, 때로는 수업 시간에도 다른 생각에 빠져 집으로 가는 길에 테러리스트가 튀어나와 그 계단에서 내게 총을 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신발을 벗어서 그 테러리스트를 때릴까?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이나 나나 다를 바가 없다. 차라리 내 생각을 주장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좋아요, 쏘려면 쏘세요. 하지만 먼저 내 말을 들어보세요. 당신이 하는 일은 옳지 못해요. 나는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어떤 반감도 없어요. 나는 그저 여자아이들도 모두 학교에 가게 되기를 바랄 뿐이에요."
(-)우리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일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선생님이나 의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지기는 힘들다. 나는 달랐다. 나는 장래 희망이 의사에서 발명가나 정치가로 바뀌었을 때 결코 그 꿈을 숨긴 적이 없다. 모니바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늘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모니바에게 말했다. "탈레반은 어린 여자애를 공격한 적이 없어."
평소와 다름없이 버스가 큰길 육군 검문소에서 오른쪽으로 꺾은 후 버려진 크리켓 경기장을 지나 완만하게 길모퉁이를 돌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것이 기억의 마지막 조각이다.
우리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밝은색 옷을 입고 턱수염을 기른 젊은 남자가 도로로 걸어들어와 손을 흔들어 버스를 세운 것이었다.
"이게 쿠샬 학교 버스요?" 그가 우리 기사에게 물었다. 우스만 바이잔은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버스 옆면에 학교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가. "맞아요." 그가 말했다.
(-)"저기 봐, 또 기자가 인터뷰하러 오나봐." 모니바가 말했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이런저런 행사에 참석해 여성 교육을 옹호하고, 우리를 막고자 하는 탈레반 같은 사람들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기 시작한 이후 종종 기자들이, 심지어 외국 기자들까지 찾아오곤 했지만 이렇게 도로에서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남자는 앞에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독감에 걸린 사람처럼 코와 입을 손수건으로 가리고 있었다. 대학생처럼 보였다. 그때 그가 홱 돌아 버스 후미로 오더니 우리에게 몸을 기울였다.
"말랄라가 누구냐?" 그가 물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몇몇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을 가리지 않고 있던 유일한 아이였다.
그때 그가 검은 권총을 들어올렸다. 나중에 그 총이 콜트 45구경임을 알았다. 아이들 몇 명이 비명을 질렀다. 모니바는 내가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고 말해주었다.
친구들 말로는 그가 세 발을 연달아 쏘았다고 한다. 첫번째 총탄이 내 왼쪽 눈 옆을 뚫고 들어가 왼쪽 어깨로 빠져나왔다. 내가 왼쪽 귀에서 피를 흘리며 모니바 앞으로 쓰러졌고, 뒤이은 두 발은 내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맞았다. (-)
내가 태어났을 때 마을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를 위로했고 아무도 우리 아버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나는 새벽, 마지막 별이 깜박이며 사라질 무렵 이 세상에 왔다. (-) 아들이 태어나면 축포를 쏘고 딸이 태어나면 커튼 뒤에 숨기는 나라, 그저 요리를 하고 아이를 낳는 일이 여자의 평생 역할인 나라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만일 한 남자가, 즉 파울즐라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면, 한 소녀가 그것을 바꾸는 건 왜 못하겠는가?
저 아래, 우리집 옥상에서는 어머니가 하늘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울파트 선생님과 함께 읽기 공부를 하던 중에, 힘겹게 '책'이나 '사과' 같은 낱말들을 배우던 중에 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소식이 뒤죽박죽으로 전달되어 어머니는 내가 사고를 당해 발을 다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당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던 할머니에게 소식을 전했고, 기도를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알라신이 머리가 하얗게 센 사람들의 기도를 더 가까이서 듣는다는 우리의 믿음 때문이었다. 곧 집은 모여든 여인들로 가득찼다.
우리 인간은 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지 못한다. 신은 우리에게 탁월한 뇌와 사랑하는 섬세한 마음을 주었다. 신은 말을 하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두 입술을, 세상의 빛깔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두 눈을,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두 다리를, 일할 수 있는 두 손을, 아름다운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코를, 사랑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두 귀를 주어 우리를 축복했다. 내 귀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신체 기관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그것을 잃기 전까지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의사들이 존재하는 데 대해, 내 회복에 대해, 그리고 비록 우리가 생존을 위해 힘겹게 싸우는 이 세상일지라도 세상에 우리를 보내준 데 대해 알라신께 감사를 드린다. (-)한 사람이 내게 총을 쏘았다. 그 총알은 일 초 만에 내 뇌를 부풀어오르게 했고 내 청각을 빼앗았고 내 왼쪽 안면신경을 잘랐다. 그 일 초가 지난 후 수백만의 사람들이 내 생명을 위해 기도했고, 뛰어난 의사들이 내게 다시 내 몸을 돌려주었다. (-) 내가 마음속으로 유일하게 바란 것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다. (-) 매일 신에게 기도했다. "나는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제가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총격 사건에 대해 자주 생각하지는 않지만 매일 거울을 보면 그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안면신경수술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치료를 했지만 결코 예전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완전하게 눈을 깜박일 수도 없고, 이야기를 할 때면 왼쪽 눈이 많이 감긴다. (-)
나는 아버지도 운다는 것을 안다. 내가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기면 내 머리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울고, 오후의 낮잠에서 깨어나 정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도 섞여 있음을 확인하고는 또 운다. 아버지는 내가 총에 맞은 것이 당신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자식을 테니스 챔피언으로 만들려는 극성맞은 아버지처럼 나한테 앞에 나가 연설하도록 강요했다고, 마치 나는 내 생각도 없는 아이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힘든 일이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바쳐 일해온 것을, 빈손으로 시작해 이제 천백 명의 학생들과 칠십 명의 교사들이 공부하고 가르치는 세 채의 건물로 일군 학교를 남겨두고 왔다. 나는 아버지가, 검은 산과 하얀 산 사이 좁다랗게 앉은 시골 마을 출신의 가난한 소년이 그렇게 이루어낸 것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있는지 잘 안다. (-)
(-)우리가 쇼핑몰을 걷고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주위에 너무나도 많은 남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총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총을 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겁에 질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말랄라, 넌 이미 죽음과 대면한 적이 있어. 이건 네 두번째 삶이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두려워하면 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연설을 하고 난 후 나는 세계 곳곳에서 지지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나의 조국은 대부분 침묵으로 반응했다. 오히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같은 파키스탄 형제자매들이 내게 등을 돌리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명성에 안달난 십대 아이"가 떠드는 것이라며 비난했다. (-)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약속을 하고는 결코 지키는 법이 없는 우리나라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을 보며 실망했기 때문임을 안다. 그런 약속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테러리스트들의 끝없는 공격은 전 국민을 충격에 몰아넣고,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내가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나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바로 평화와 교육이라는 내 목표에 대한 지지라는 것을.
오늘날 우리 모두는 교육이 우리의 기본권임을 안다. 서구에서뿐만이 아니다. 이슬람교에서도 우리에게 교육받을 권리를 주었다. 이슬람교에서는 모든 소년 소녀가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 신은 우리가 왜 하늘이 푸른지 알길 원하며, 바다와 별에 대해 배우길 원한다. 나는 이것이 큰 싸움이 될 것임을 안다. 세계적으로 초등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오천칠백만 명이며, 그중 삼천이백만 명이 여자아이들이다. 슬프게도 우리나라 파키스탄이 최악의 경우여서, 헌법으로 모든 파키스탄 어린이의 교육권을 보장하고 있음에도 오백십만 명이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성인들 중 오천만 명이 문맹이며, 그중 3분의 2가 우리 어머니 같은 여성이다.
여학생들은 계속해서 살해당하고 학교는 폭파당한다. 3월에는 카라치의 한 여학교가 공격을 받았다. 학교에서 상장 수여식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 폭탄과 수류탄이 운동장으로 날아들어, 교장 압두르 라시드가 사망하고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의 어린 학생 여덟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중 여덟 살인 한 어린이는 불구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울고 또 울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잘 때는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니. 어떻게 어린애들에게 그럴 수 있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