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어둠 - 우울증에 대한 회고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임옥희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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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육체적 심리적 자기 혐오─뭐라고 규정하기는 힘들지만, 자부심의 상실 같은─는 우울증의 가장 보편적인 증세였다. 병이 진행되면서 나는 나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으로 인해 점점 더 고통받았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감을 눈부시게 회복시켜줄 상을 받기 위해 나흘 일정으로 황급히 파리로 날아왔던 것이니, 내가 느끼는 비애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나의 상황과 역행하고 있었다.

 

 

시상식 당일이었다. (-) 나는 퐁 루와얄 호텔에서 아침 늦게 일어났다. 오늘은 기분이 상당히 좋은 것 같은데, 라고 혼잣말을 하고 아내 로즈와도 얘기를 나눴다. 약한 진통제 할시온 덕분에 불면증을 가까스로 진정시켜 잠을 몇 시간 잔 후라 기분이 꽤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덧없이 이지러질 이런 쾌활함은 거의 의미 없는 반복현상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밤이 오기 전에 얼마나 끔찍한 상태에 빠져들 것인지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당시 매 단계 악화되는 상황을 조심스럽게 감시 관찰하고 있었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지적 선언은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에 등장하는 바로 이 문장이다. "진정으로 진지한 철학적인 주제는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철학적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으나 언제나 실패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자살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그 전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

(-) 그는 어떠한 자살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지프의 신화』에 죽음을 지배하는 생의 승리라는 엄숙한 메시지(희망이 부재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가까스로)가 담겨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살에 관한 카뮈의 진술과 이 주제에 관한 그의 집착이, (-)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정서장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여주인공 엠마 보바리가 마을 신부에게 도움을 청하는 순간이다. 간통으로 인한 죄의식에 시달리다 미칠 지경이 되어 지독한 우울증에 빠진 엠마─마침내 자살로 치닫고 마는─는 신부에게 이처럼 비참한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해달라고 주저하면서 부탁한다. 하지만 단순한데다 그다지 현명하지도 않은 (-) 진부한 종교적 충고나 들려주는 신과 남자, 어느 누구로부터도 위안을 받을 수 없었던 엠마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되었다.

 

 

(-) 억지스런 농담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진심이었다. (-) 강한 성욕의 소유자들에게는 음탕한 백일몽이 환상이 아니라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날 상담 시간에는 위안거리가 전혀 없었다. 나는 정말 비참한 기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시간을 맞이할 차비를 했다. 손님 몇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저녁식사는 반갑지도 그렇다고 공포스럽지도 않았다.(-) 그 같은 무심함 자체야말로 우울증의 병리학적인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이 상태는 익숙한 고통이 시작되려는 고통의 문지방이 아니라 고통의 평형현상이다. 말하자면 정신이 (-) 고통을 흡수할 수도 없는 상태인 셈이다.

고통에는 사람들이 그걸 경험하면서도 경감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사람들은 날마다 다양한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비롭게도 그런 고통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

그러나 우울증에는 이와 같은 구원에 대한 신념, 혹은 궁극적인 회복에 대한 신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럭저럭 견딜 만한 치료법이 있다 하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며 더욱 극심한 고통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름아닌 이 절망감이 고통보다 더욱 인간의 영혼을 파멸시킨다. (-) 이 병의 경우에는 고통에서 고통으로 이동한다. (-)

 

 

(-)최초로 우울증의 발작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병이 지나가야 할 모든 과정을 전부 다 거쳐야만 낫는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아니, 그것은 확신에 가깝다. 이것은 힘든 일이다. 안전한 해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모독이다. 그러나 모독이 될지라도 반복해서 그런 격려를 보여주면, 그리고 그런 격려가 충분히 끈질기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라면 위험에 빠진 사람은 거의 언제나 구출된다. 극히 심각한 우울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비현실적인 절망 상태에서 과장된 병마와 치명적인 위협으로 인해 갈가리 찢기고 분열된다. 친구, 사랑하는 사람, 가족, 존경하는 사람들은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생명의 가치를 설득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울증 환자에게 생명의 가치는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종종 갈등을 일으키지만, 그런 헌신은 무수히 많은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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