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남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7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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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시앤은 자리를 뜨며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후회하는 듯이. (-) 우리는 서로 원망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어쩌면 우리의 사랑이 실패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상상할 만큼 순진했다. (-)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사랑은 태산도 넘고 무쇠도 부수며 온갖 장애를 넘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 우리가 집어치우고 포기하는 것은 우리의 무능 때문이다. '위대한 사랑'은 포기가 무엇인지 모른다. (-)



(-) 영화를 본 후에는 잠깐 산책을 했다. 멍하니 진열장을 바라보다가 여자들을 보려고 조금 정신을 차려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가끔 영화를 한 편 더 보러 가기도 했는데, 대개 범죄영화였다. 혹은 선술집 테라스에서 맥주를 한두 잔 비웠다.

살짝 심심했다. 일요일 오후보다 쓸쓸한 것이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젊은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가고, 배가 부른 아내가 유모차를 밀고 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을 죽여버리든가 내가 죽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맥주 서너 잔째부터는 모든 것이 우스꽝스러워졌고, 심지어 유쾌해지기까지 했다. (-)



나는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대낮이 더 나았다. 어두워지면 불안해졌다. (-) 거리가 어두워 반쯤 암흑인데도 나에게 안도감을 주던 웅성대는 군중이 기억난다. (-) 두려워졌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든 것이.(-) 나아졌다. 일종의 쾌활함이랄까. 자주 이렇게 유쾌해지고 갑자기 행복해지지만, 이런 느낌은 그리 강하지 않아서 곧 사라진다. 내게는 슬픔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하나 있지만,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방법이란 내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들을 될 수 있는 한 최대로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을 응시하는 것. 아주, 아주 주의깊게 바라보면 갑자기 이 세상 모든 것을 마치 처음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것은 이해할 수 없고 이상해졌다.



내가 보았던 모든 길과 도시, 거리, 그리고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잊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나는 이 세상에 던져졌고, 그런 사실을 마치 난생처음 안 사람처럼 새삼스레 깨달았다. 가끔 느끼곤 하던 세상의 이런 생소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것은 나 그리고 우리가 습관에 따라 으레 해왔던 배우나 엑스트라 역할에서 벗어나, 세상에 에워싸여 있으나 세상 속에 있지 않은 사람, 마치 연극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거리를 두고 떨어져 더이상 참여하지 않는 것과도 같았다. (-) 불안감이 사라졌다. (-) 왜냐하면 이 보편적 기계와 이 사람들, 이 거리들과 이 움직임들은 매번 추하지 않으면 아름답고, 좋지 않으면 나쁘고, 유리하지 않으면 불리하고, 위험하지 않으면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일종의 도덕적 중립을 얻기에 이르렀다. 혹은 미학적 중립을. '그들은' 더이상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나는 식당 안에서 그들이 내뱉는 말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모든 것이 덧없는 환영일 뿐이며 일종의 무(無)의 환상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거리에, 일종의 거리, 일종의 공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나뿐이었다. 나머지는 구분할 수 없는 '이 모든 것들'이었다. (-)



(-) 나는 파란 꿈은 두세 번밖에 꾸지 않은 것 같다. 파란 꿈이란 밝은 햇살 속에서 도망치듯 꺼져가는 바람과 그림자만 느낄 수 있는 새벽녘에 꾸는,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기억할 수 없어서 안타까운 꿈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이 걸레처럼 찢어져 사라져버린다. 괴롭지 않으려면 체념해야 한다. 나는 체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산다. 그리고 자주 그럭저럭 체념하는 데 성공했다. 진실하고 깊은 체념은 아니었다. 가끔 화가 치밀기도 한다. (-)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앞으로도 배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 벽들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나는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무지 속에서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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