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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후지따 쇼오조오 지음, 이순애 엮음, 이홍락 옮김 / 창비 / 2014년 7월
평점 :
'나는 과연 무엇인지 누가 가르쳐다오'라는 리어왕의 물음은 '리어왕의 그림자'라는 어릿광대의 대답에 의해 그 물음이 지닌 자기부정성을 명백히 한다.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지 않은가라는 통렬한 의문을 자신에게 되던지는 것이다. (-)
생산자로서의 측면(-)을 방대한 기구적 체계 속에 흡수시켜버린 탓에 그 체계 속에서 가루 상태로 흩날리게 된 존재가 유일하게 남은 소비 측면에서만 자신의 활동을 안전하게 발휘하려고 할 때, 거기서 발생하는 자아 지향은 앞에서 말한 대로 욕구의 만족을 향한 자기내적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
(-)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연모하는 태도의 근저에는 사태의 성격상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모습을 품에 안을 수 없는 데서 오는 욕구불만과 불안의 잠재적 고조가 숨어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온전히 긍정하고 그러한 욕구의 만족만을 일편단심 추구할 때에도 자족보다는 불만과 불안이 끊임없이 맴돈다.
구체적인 사물과 대면하는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자아는 사물 그 자체의 한계를 자신의 욕구의 한계로 자연스럽게 인식한다. 모든 지각 형식을 통해 종합적으로 사물의 한계를 스스로 알게 되므로 거기서 오는 자제력은 도덕적인 명령에 의한 외부로부터의 제한 같은 것과는 달리 극히 자연스러운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족이 된다. 그러나 대량생산과 대량유통 및 대량소비의 기구 속에 침몰하여 사물과의 관계를 상실한 제품 음미기로서의 자아가 발하는 욕구는 줄 끊어진 연처럼 무한정해지고 만다. (-) 소비의 자아에 가해지는 제한은 사물과의 상호관계가 아니라 돈이라는 이름을 지닌 '인쇄된 종잇조각'의 보유한도뿐이다. 그 '기호'의 명령만이 욕구에 대해 금지를 명령한다. (-)
그리고 숙명적으로 불안정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오히려 더욱 용의주도하게 자아방위를 위한 장치를 만들어내려 한다. 자신에게 지나친 위협이나 겁을 줄 가능성을 가진 자, 즉 '타자'는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또는 일이든 간에 갑작스럽게 맞닥뜨릴 일이 없도록 아예 멀리한다. (-) '타자'와의 대면적인 상호교섭으로서의 경험은 이런 식으로 주도면밀하게 배제된다.
그러나 무균상태의 온실로부터 세계의 사물을 제멋대로 선별하여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것만 골라서 쓰는 태도가 횡행하는 곳에서 세계는 어떻게든 변형될 수밖에 없다. 거기서의 세계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물(物)이 아니라 오로지 소비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만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가상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거기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리어왕의 허깨비처럼 '세계의 허깨비'로만 끝나지 않는, 물건 목록으로까지 폄하되어버린 세계다. 우리를 둘러싼 현대적 나르시시즘은 그 속에 이러한 세계상을 감추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생산의 사회관계'가 은폐되어 제품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활보함으로써 그것이 지니는 소비상의 아름다움이 마술적인 매력을 마음껏 뽐내는 '제품의 물신숭배'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긍정적인 자아가 행하는 만족 추구는 그 같은 '물신숭배'를 촉진하는 정신적인 요인이 될지언정 그것에 제동을 걸지는 못한다. (-)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나르시시즘의 자아를 대신해 '타자'에 대해 생각하는 자아가 되살아나야만 한다. 오래된 문구를 흉내내서 말하면 '나는 타자에 관해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모든 것에 대해서 '서로 낯선 관계'에 있는 자는 '처음 보는 자'가 흔히 보이는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마치 '기이한 것'을 보듯이 사물을 들여다본다. 정신없이 들여다보는 그 같은 주시에는 멍한 '방심'과 '망연자실'이 포함되어 있으며 동시에 들여다보는 물체에 대해서는 '극도의 각성'을 하게 된다. 그럴 때 사물을 수단으로 취급할 때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사물의 가려진 차원'에까지 눈길이 닿게 되며 사물의 자연을 그것 자체에 입각하여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사물에 대해 생각함'은 바로 그 사물에 대해 '친밀한 자에서 전혀 낯선 자로 돌아가는 것'이다. 잘 길들여 자신의 소비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처음 만나는 존재를 접하게 된 상황이 내포하는 '기묘한 의심'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한 무의 의식상태, 이 세상의 경계선으로 되돌아와 선 상황이 바로 '타자를 그것에 입각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 모든 사람이 '고래 배 속에' 갇혀 살고 있는 오늘날에는 '낯선 자'의 시선에 관해 깊은 통찰을 행한 바로 그 사상가 본인이 (-) 지적했듯이, '나는 가끔 생각한다. 고로 나는 가끔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뽈 발레리Paul Valéry). (그러나 데까르뜨적 확실성과 항상성을 상실한 채 이따금 되돌아와 숨을 돌리는 간헐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나'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간헐적인 존재가 가져다주는 제동·억제 작용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
그리고 만약 그 간헐적인 존재가 늘어나서 그 간헐성의 발생빈도가 잦아진다면 그것들의 상호집합의 결과, '타자'의 존재를 확인하고 우리 밖에 서 있는 사물의 자연스러운 세계를 소생시키며 그것을 향해 마음을 비우고 대면하는 '우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그때에는 "눈이 펄펄 내립니다/사람은/그 아래서 살고 있는 것이랍니다"라고 일찍이 우리에게 겸허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던 어느 산마을 소년의 감수성이 우리 사회의 공통항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는 '고래 배 속'의 이물질이 되어 얼마간의 가능성을 책임지게 될 것이다.
한 번 쓰고 버리는 행위에는 사용가치 극대화라는 소비 자본주의 논리가 체현되어 있다. 이때, 버리는 주체는 인간이고 버려지는 것은 사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소외되는 것은 인간이다.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일회성 속에서 사물은 결코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지 않는다. 일회성은 사물의 평면적인 성격과 만나는 것만을 허용하고 사물 속에 깃들어 있는 비밀과 교섭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앤다.
_장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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