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공간 책세상총서 3
모리스 블랑쇼 / 책세상 / 1998년 6월
평점 :
품절


작품은 작가에게 모든 "자연", 모든 성격을 상실할 것을 요구한다. 그를 자기이게 하는 결단에 의해 타인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그치게 한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비인칭의 긍정이 예고되는 공허한 공간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요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의무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내용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강요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호흡해야 할 공기일 뿐이다. 이것은 그 위에 자신을 고정시켜 우리가 사랑하는 얼굴들이 보이지 않게 되는 빛의 마멸일 뿐이다. 마치 가장 용감한 사람들도 오로지 계략을 씀으로써만 위험에 과감하게 맞서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 부름에 답하는 것은 진실의 부름에 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무언가 이야기할 것이 있고, 그들 내부에서 해방시켜야 할 세계가 있으며, 감당해야 할 임무가 있고, 정당화해야 할, 그러나 정당화할 수 없는 그들의 삶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예술가가 그를 격리시키고 이 격리 속에서 그를 그 자신으로부터 박탈해버리는 이 원초적인 경험에 몸을 내맡기지 않는다면, 또한 그가 오류나 무한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주의 끝없음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면, 사실 시작이라는 말은 상실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정당화는 예술가에게는 결코 떠오르지 않으며, 그의 경험 속에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러한 변명은 오히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제외된다. 예술가는 이러한 사실을 그가 일반적인 예술을 믿듯이, "일반적"인 경우로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작품은 이러한 변명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탐구 또한 이런 변명을 알지 못하며, 변명을 알지 못하는 이 무지의 고민 속에서 작품은 자신을 추구할 따름이다.



모리스 블랑쇼 _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 도정일 문학에세이 도정일 문학선 3
도정일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돌이켜보면, 시에는 단 하나의 이야기만이 감추어져 있는 것인지 모른다라든가 이 단 하나의 이야기를 부단히 변형시켜내는 것이 시라고 말한 대목은 상당히 과감하다. 문학작품은 하나의 이야기 아닌 복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때가 더 많다. 이야기는 작품의 비밀 속에서 발견되는 것인가 아니면 독자가, 그리고 시대가, 만들어넣는 것인가? 양쪽 모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보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가설의 유용성을 지금도 인정하고 있다. 문학은 인간의 갈망을 담은 언어구조물이다. 그 갈망은 개인의 꿈과 사회의 꿈을 함께 담고 있고, 시대 안에 있으면서 시대 바깥에 있다. 그것은 공시적인 것이면서 통시적인 것이다. 읽기의 경험들을 들어보면, 독자가 어떤 문학작품과 친해지는 것은, '옳아, 네가 지금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라면서 앞뒤 문맥을 해석하고 의미를 정리하는 일, 곧 갈망의 존재와 그 모습을 파악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작품은 독자에게 '이해'된 것이 아니다. 이때의 이해는 '완벽한 이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해는 늘 부분적인 것이거나 잠정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여기 감추어진 이야기는 이거야'라거나 '내가 이 작품을 이해했어'라고 말할 만한 순간을, 말하자면 '잠정적 종결'의 한 순간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런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가설이고 가설의 유용성이다. 작품 읽기의 이상은 최종적 읽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술래잡기를 계속하고, 수정과 재시도와 또다른 잠정적 결론의 순간에 도달해보는 일이다.




운명? 인간의, 또는 글의 운명이 어느 때 결정되는 것인지 하느님은 모른다. 나는 이 말이 하느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인간의 삶이 어떤 모양새로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사전 지식의 완벽한 부재야말로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주재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무지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효과이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는 존재 같아 보인다. 그러므로 운명이라든가 인연이라든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인간뿐이다. 도척이 공자에게 깨우쳐주었듯이 들판의 황소는 아비를 확인하지 않고 제 고향을 연연해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이 시대에 시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우면서도 손쉽고 위험하면서도 안전하다. 시인 오규원은 이미 10년 전에 "나는 나의 믿음이 무겁다/ 정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패배를 승리로 굳게 읽는 방법을/ 믿음이라 부른다 왜 패배를/ 패배로 읽으면 안 되는지 누가/ 나에게 이야기 좀 해주었으면/ 그 믿음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여/ 나에게 화를 내시라/ 불쌍한 내가 혹 당신을 위로하게 될 터이니까"(우리 시대의 순수시,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1981)라고 노래한 일이 있다. (-)



(-) 브로드스키는 어떤 근작 시편에서 인간이 "태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지만 죽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라고 쓰고 있다. (-)



당대의 지배적 생산양식에 대한 죄의식이 증발해버린 사회에서 문학은 어떤 양태를 띠게 되는가? 그 한 가지 양태는 문학이 자기 파괴를 통해 '상징적 죽음'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또하나는 신비주의에로의 탐닉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문학의 상징적 죽음이란 수확(생산)의 축제(소비)가 더이상 생산의 폭력을 보속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때 문학 자체가 자기 파괴의 방법으로 공동체의 상징적 희생제물이 되는 경우이다. 희생제물, 또는 '카니발'로서의 문학은 자기를 해체함으로써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추방되고자 하며, 문학의 창조력을 스스로 고갈시키는 패러디로 남아 있고자 한다. 현대적 패러디는 새로운 일의 가능성과 일의 진지성을 부정한다. 이 부정은 문학이 공동체의 웃음거리, 공동체의 질병이 되어 추방됨으로써만 자신의 사회적 존재 의의를 확인하는 희생제의의 최종 절차이다.



(-) 칸트가 늘 지적했듯 인간의 미학적 진술이나 판단이라는 것은 대상의 성질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인간의) 지각 내용의 진술이고 판단이다. 예를 들어 어떤 대상을 두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 아름다움은 대상이 지닌 성질이 아니라 그 대상을 아름다운 것으로 파악하는 우리 자신의 지각을 진술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답다'라는 미적 판단은 대상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대상을 '마치as if' 아름다운 것인 양 보기로 한 우리 자신의 지각 내용을 판단한 경우이다. (-) 은유의 양식도 이 미적 판단의 범주에 속한다. "마음은 거울이다"라는 은유적 진술의 주제는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라는 판단인데 이 경우 맑고 깨끗함이란 대상(마음)의 성질이 아니라 마음을 마치 맑고 깨끗한 것인 양 보기로 한 진술자의 결정 내용이다. (-)



시가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주 장르가 아닌 것은 서사의 유무 때문이 아니라 서사의 은닉 때문이다. 시는 서사의 일종이되 그 특유의 서술양식이 갖는 수사적 책략으로 이야기의 결핍을 추구하는 서사양식이다. 이 결핍의 책략은 이야기의 추방(생략, 압축, 절단)과 변환을 수행한다. 이야기의 추방이 시의 텍스트로부터 이야기를 보이지 않는 유령의 공간에 은닉한다면 변환은 메타포모시스의 방법으로 이야기를 감춘다. 추방과 변환이 수행하는 은닉은 이야기의 감춤이지 이야기의 없음이 아니다. 이 은닉이 시의 텍스트에서 이야기가 존재하는 방식, 다시 말해 이야기가 분포되는 방식이다. 그것은 이야기를 보이지 않는 부재와 결핍의 방식으로 존재하게 하고 인지에 저항하는 변신의 모습으로 있게 한다. 이 부재와 변신을 읽어내는 한 가지 방법은 통사 층위에서 절단.은폐된 이야기를 복원하고 의미론의 층위에서 변환된 이야기를 역변환시키는 읽기이다. 복원과 역변환이라는 두 가지 작용의 동시적 수행이 통사와 의미 두 차원에서의 읽기의 통합이다. (-)


(-) 허순위의 <말라가는 희망>(고려원, 1992)에 수록된 '반달'의 경우,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

처음에는 안 돼 안 돼 소스라치다가

스르르 풀리는 햇살의 태엽

(...)

그러고도 한 사나흘 뒤 비딱한 모자 쓰고

제 낯 드러내는, 잘 가 즐거웠어, 하는 말같이

이별의 정류장 아픈 네 머리 위


<반달> 부분


첫 행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는 완결된 통사구조를 갖고 있지 않은 결핍성의 불완전 진술이다. 이 결핍문은 '내'가 '네'로 바뀐 어사 치환을 보이면서 이 시의 마지막 행에 다시 반복되고 있다. 시의 종결행 자체가 불완전 문장으로 제시되고 있고 첫 행과 종결 행 사이에는 이 결핍문을 통사적으로 완결시켜줄 어떤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들 두 행은 통사 차원에서 이미 문제를 일으키고 이 통사적 불완전성은 의미 층위에도 영향을 주어 완결된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완성된 명제가 아니기 때문에 진술 내용으로서의 이야기를 생략하고 절단한다. 이 생략된 부분을 메우는 일은 독자의 몫이 되고, 독자는 시의 텍스트 위에 반달처럼 떠 있는 제목 '반달'을 끌어다가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에 반달이 떠 있다)

이별의 정류장 아픈 네 머리 위(에 반달이 떠 있다)


로 읽어냄으로써 통사구조의 완결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같은 완결이 이루어지는 순간 독자는 "이별의 정류장 아픈 내 머리 위"는 통사적 전체성을 결핍으로 지니면서 동시에 의미의 완결성을 연기한 '반쪽 명제'이기 때문에 이 절반의 명제 자체가 '온달'이 되기를 기다리는 (그러나 그 희망이 좌절되고 연기된) '반쪽 달'의 언어적 모사, 재현, 변용이라는 읽기를 산출한다. 동시에 그 반쪽 명제들은 '나'와 '너'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반달"은 '나와 너'의 은유적 변환이 된다. 이렇게 해서 통사와 의미 두 층위에서의 읽기가 통합되면 '이야기가 없는' 단순한 서경적 진술처럼 보이는 '이별의 정류장 내/네 머리 위(에 떠 있는 반달)'가 실은 숨겨진 '어떤 이야기'(전체)의 한 구성 부분이라는 기능을 부여받는다. 그 숨겨진 이야기란 인간의 반쪽성, 전체성의 상실, 분열의 상처, 그리고 통합을 향한 그리움의 이야기이다.



시적 담론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에로스의 독법이고 발견의 해석학이다. 시의 담론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시적 담론이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엉뚱한 것으로 '뒤바꾸어 말하기 때문에' 특별히 시적 담론이다. 이 감추기와 바꾸기, 생략과 응축, 위장과 간접화의 기술을 배제한다면 시의 존재는 결정적으로 훼손된다. 그 기술은 시의 담론을 시적 실천이게 하는 시의 생산력이다. 시는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좁게는 작품 차원에서, 넓게는 역사의 큰 문맥에서, 전체성을 지향하고 완결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시의 '서사적 성질'ㅡ곧 시의 '서사성'이다. 시적 서사성의 진정한 의미는 특정의 시가 그 텍스트의 표증에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않는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총체적 서사의 한 '부분'으로서 그 서사의 완결을 지향하고 있는가 않는가의 문제이다. (-) 다만 시는 소설의 방법으로 총체 서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방법, 시의 방법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시의 읽기는 시 텍스트가 시적 담론의 방법으로 감추거나 결핍으로 남겨둔 전체성과 완결성에의 운동에 읽기 자체가 참여하는 일이다. 시와 마찬가지로 시의 읽기도 자유(완결)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다. 이 그리움을 에로스라고 한다면 그것에 의해 인도되는 시의 읽기는 에로스의 독법이다.

시는 감출 뿐 아니라 또한 바꾸고 위장한다. 아니, 시는 바꿈으로써 감춘다. 시의 담론은 '나는 굶주린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포식한다/나는 바람을 먹고 바위, 돌멩이, 흙을 먹는다'라고 바꿔 말한다. 바람/바위/돌멩이/흙은 '먹을 수 없는 것'의 범주이며 따라서 먹을 수 없는 것들을 퍼먹고 다닌다는 것은 주린 자의 포식, 그의 잔치이다. '포식'은 포식이 아니라 굶주림의 변환어이고 바람/바위/돌멩이는 '먹을 수 없는 것'의 은유 체계이면서 '굶주림'의 환유 체계이다. 은유와 환유는 시적 변환을 담당하는 대표적 수사 장치들이다. 시란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모태 명제의 끝없는 변형이 아닐 것인가? 시에는 결국 '나는 너를 그리워한다'라는 단 하나의 이야기만이 감추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적 변환은 이 하나의 이야기를 감추기 위한 은유적.환유적 위장의 기술이고 포장의 책략이며, 시 읽기란 그 위장된 그리움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발견의 해석학일 것이다.



(-)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그녀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바뀌고 오디세우스만이 특별한 장치의 힘으로 그 변신의 형벌을 모면한다. 변신의 형벌이란 몸은 돼지로 바뀌었지만 정신은 인간의 것으로 남아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유지해야 하는 형벌이다. 그 기억이 고통스러운 까닭은 돼지의 몸과 인간의 정신이라는 그 기묘한 결합의 내부에 견딜 수 없는 비동일성과 분열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돼지이지만 돼지가 아니다. 나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비동일성의 고통이다. 이 고통을 더욱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언어의 상실'이다. 돼지로 바뀐 인간은 '나는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의 언어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라 돼지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그가 그 내적 분리의 고통을 인간 통신 회로 속의 분절 기호로 표현해낼 방법은 없다. 그가 이런 역경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수단은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기억 자체를 포기하는 '망각'의 기법을 선택하고 그 망각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일이다. (-)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돼지가 된 인간의 얘기는 후일 게오르크 루카치가 현대적 경험의 특수한 곤경을 '물화'라는 개념으로 이론화해낼 때 그를 전율케 했던 대목이며 그 전율은 <역사와 계급의식>에 씌어진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상품이 되어 있다. (...) 그러나 상품이 되었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한다." 물건이 된 인간, 상품이면서 인간임을 기억하는 상품ㅡ이것이 루카치가 평생을 두고 추구한 현대적 변신의 주제이다. 이 주제가 현대문학의 상상력과 이론의 충동을 자극하게 되는 것은 그 속에 분열(나는 내가 아니다), 인지(나는 마법에 걸려 있다), 극복(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이라는 세 가지 갈등의 계기가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의 돼지와 마찬가지로 물건이 된 인간도 내적 분열이라는 특수한 곤경을 그의 경험으로 가지고 있다. 분열의 경험은 그 분열의 조건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극복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소외된 '이방인'임을 극복할 수 없듯이, 키르케의 돼지가 마법을 벗어날 때까지는 돼지 속에 소외당한 자기를 회복할 수 없듯이 물건으로서의 인간은 그를 물건이게 하는 조건을 제거하지 않는 한 인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인간 회복을 향한 운동은 분열의 조건과 경험에 대한 인지 내용을 전제로 한다. 그가 그 자신의 소외를 알지 못한다면 회복을 향한 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는 기억의 정치학에 매달리고 기억의 시학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의 시학은 그러므로 인간 회복의 시와 서사를 낳는다. 이 서사를 출발시키는 계기는 인간 상실이라는 상처이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힘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의지이며 그것을 이끄는 길잡이는 인간 회복의 꿈이다. 따라서 그 서사는 상처와 의지와 꿈을 가진 것들의 이야기ㅡ곧 종놈의 서사, 돼지의 서사, 상품의 서사이고 이것들이 종놈, 돼지, 상품을 벗어나려는 이야기이다. (-)



(-) 기억의 시학이 욕망의 문제에 예민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인간의 물건 되기'가 바로 그 욕망이라는 매개에 의해 더욱 촉진되고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소비사회에서의 욕망은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사회적으로 모방된다. 욕망은 결핍감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그 결핍감 자체를 사회적으로 대량 생산하고 그 결핍감을 메우려는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후기 산업사회이다. 후기 산업사회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소비양식이 더욱 철저하게 확산되어 결핍의 무한 창출과 욕망의 무한 분출을 생산과 소비의 기본 문법으로 갖고 있는 사회이다. 기억의 시학은 이처럼 '사회적으로 생산된' 욕망이 후기 산업사회의 인간을 어떻게 인간 아닌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끝없는 변신의 윤회 고리 속에 묶어두는가를 관찰한다. 그러나 이 경우 기억의 시학이 곧잘 빠져드는 한 가지 오류는 욕망 부호에 관통당한 개인들을 향해 빈곤의 미덕을 노래하거나 '가난했던 과거'의 기억을 환기시켜 그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간 회복의 길인 것처럼 설교할 때이다. 가난했지만 인간다운 삶이 있었던 옛 고향에의 향수를 현대적 삶의 풍요로운 비참에 대한 하나의 반테제로 제시하는 것은 행복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기억이 궁핍 그 자체의 가치를 추켜세우는 데로 빠져든다면 그것은 궁핍성을 미화하고 신비화하는 일이 된다. 물화와 마찬가지로 궁핍은 미화의 대상이 아니다. 기억의 시학이 요구하는 인간 회복은 단순한 과거의 회복이 아니라 인간의 해방이다. (-)

기억의 시학 속에서 '꿈'과 '욕망'은 모두 역사적.사회적 산물이지만 둘은 모순관계에 있다. 꿈은 현실의 밖에서, 역사의 강 언덕 너머 어딘가에서 역사의 강 속으로 던져지는 '이상'이 아니라 역사의 현실 그 안에서 나오는 모순 극복의 그림이다. 이 경우의 역사란 바로 물화의 역사ㅡ인간을 물건으로 묶어두고 있는 억압의 역사이다. 키르케의 돼지가 '돼지로 묶여 있다'라는 바로 그 현실 때문에 해방의 꿈을 갖듯이 물화된 역사 속의 인간은 그 역사 때문에 그로부터 해방이라는 꿈을 갖는다. 이것이 꿈의 역사성이다. (-) 그러나 이 꿈은 또다른 형태의 욕망ㅡ물건의 상태로 남아 있으려는 모방 욕망 때문에 끊임없이 좌절된다. 이 욕망은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 있는 존재론적 결핍의 산물이 아니라 특정의 사회체제 속에서 만들어지고 모방과 매개에 의해 확산되는 사회적 욕망이다. 그러므로 물건이 되어 물건의 상태로 남아 있으려는 모방 욕망과 물건의 상태를 벗어나려는 탈출의 꿈은 서로 모순관계에 있다. 물화의 역사는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드는 상처를 안기면서 동시에 그 상처의 치유를 방해하고 좌절시킨다. 이 때문에 기억의 시학이 파악하는 역사란 상처, 억압, 좌절로서의 역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간 아시아 제32호 2014.봄 -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 편집부 엮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자주는 아니고 아주 드물게 소위 문학강연이라는 것을 나가면 거의 한번은 듣게 되는 질문이 ‘작가님은 어떻게 글을 쓰시나요’다. (-)

그런 질문이 올 때마다 속으로는 역정이 치밀어 오른다. (-) 내가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것이 나는 두렵다. 아니, 그럼 지가 지 글 쓰는데 어떻게 쓰는지 모르고 썼다는거시여? 할까봐, 나는 되나캐나 대답이랍시고 하기는 하지만, (-)‘글을 어떻게 쓰느냐’는 질문이 정말 싫다. 왜 사람들은 내게 글을 왜 쓰는지는 묻지 않는가. (-)
그러나 나는 아주 소싯적부터 왜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이런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가장 중요한 물음은 언제나 '왜'가 아닌 '어떻게'였다. 나의 삶과 나의 글쓰기는 다른 물음을 해온 셈이다.
(-)나의 표현욕구를 처음으로 글로 옮겼던 시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나는 그림으로 초등학교부 장원을 하였는데 상품으로 예상치 않게 삼국지 한질과 양장으로 된 대학노트 두 권을 받았다. (-)읽을거리라고는 동네 회관에 비치된 ‘새마을’이 전부인 상황에서 삼국지는 대단한 읽을거리였다. 공책 한 권 사려면 엄마 눈치 봐가며 쌀독에 보관중인 계란 훔쳐다가 ‘점방’에 갖다주고 사야할 형편에 고급 양장 대학노트(-)가 생겼다. 적어도 우리 동네에서 나한테만 있는 노트였다. 나는 거기에 뭐라도 적어넣고 싶었다. 그래서 쓴 것이 ‘우리 동네의 봄’이었다. 영양실조라는 말이 보편이었던 그곳, 그 시절에 봄은 환희였고 그 환희를 나는 어떡하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고 기록해서 남기고 싶었다. 봄이 보이는 빛, 결, 냄새들을 내가 적은 것을 식구들이 읽었고 좋다고 박수를 쳤다. 그것이 내가 최초로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을 글 속에다 ‘잡어넣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어떤 어렴풋한 느낌은 있었다. 글이란 것이 결코 현실을 따라잡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 느낌을 어떻게 글로 옮길 재주는 없었다. 글이란 것이 쓰면 쓸수록, 아무리 써도 써도 현실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고 그 갈증이 결국 나를 잡아먹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최초로 내 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글로 재현했던 때로부터 15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몹시 고통스런 현실에 직면해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언제나 천형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라 산다는 것은 늘 그런 것이려니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다른 고통의 문제를 나는 풀 길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먹고 사는 문제 외에 나를 괴롭히는 것, 내 머리통을 낮이고 밤이고 짓누르는 것의 정체를 한번 알아나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알아봐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고통이란 것은, 고통의 실체를 알아볼 수 있을 때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통의 실체를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를 알지 못할 때 그것이 고통의 본질일지도.
이 세상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것은 종이와 연필이었다. 한때 너무나 구하기 힘든 그것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깜빡 잊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 탁아소에 보내고 공장에서 하루종일 ‘원단’ 만지고 돌아와 밥해 먹고 자는 반복된 생활(생존?)의 와중에는 아직도 먼 데 있던 그 도구들이 내 손만 뻗으면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던 날의 가슴떨림을, 그 참담한 기쁨을 내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으리.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해부하기와 다름없다. 병이 났을 때 일단 병난 곳을 헤집어보기. 혹여라도 더 상처가 덧난다 하더라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이 나의 글쓰기인 것. (-)
고통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의 실체를 알고 싶어 글을 썼고 글을 쓰는 동안 고통의 실체는 그 모습을 드러내 주었던가. 그랬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지인으로부터 ‘카톡’ 메시지를 받고는 밥을 먹으면서 무심코 열어 보았고 그는 더 이상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인생이 지인이 보낸 메시지의 영상 때문에 상당히 힘들어질 것 같아(-) 하소연을 하던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학살하는 동영상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를 위로했고 ‘아무 생각없이’ 메시지를 보냈다는 그의 지인을 성토했다. (-) 나는 1980년 5월에 광주에 있었다. 한참 감수성 예민한 십대 후반이었고 (-)갓 도시로 온 시골아이였다. 나는 흙에서 나서 흙에서 뒹굴다 어느 날 갑자기 도시의 아스팔트로 옮겨왔고 아스팔트에 번지는 죽은 사람의 피를 보았다. 죽은 사람을 보았다. 죽임을 당한 사람을 보았다! 나는 그 전까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사람이 사람한테 죽임을 당한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짐승을 죽이는 것은 본 적이 있다. 개를 몽둥이로 때려잡았고 돼지 멱을 땄고 닭모가지를 비틀었다.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빚을 많이 지고 술에 농약을 타서 먹고는 거품을 물고 마당에 누운 그를 동네사람들이 '아이고메' 하고 악을 쓰며 병원으로 옮겨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다른 죽음은 그냥 보통의 죽음이었다. 노인들은 늙어서 죽고 아이들은 병나서 죽었다. 그리고 나는 광주에서 보았다. 죽이는 사람들은 몽둥이와 총과 칼을 들고 사람을 때려죽이고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죽였다. 몽둥이에, 총에, 칼에 죽은 사람들의 피웅덩이 위로 몰려들던 새까만 파리떼를 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죽인 사람들에 대한 성토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위로도 없었다. 그런 적막강산의 세상은 또다른 죽음의 세상이었다. 내가 그때 그리고 하필 그곳에 있었던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든, 없었든, 그것을 보았든, 안 보았든, 본 사람은 본 사람대로, 못 본 사람은 못 본 사람대로, 봤어도 안 본 척 하는 사람도 뭔가가 잘못되었고 잘못되어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30년도 훨씬 넘은 뒤에사 나는 내가 뭔가가, 하여간 뭔가가 잘못되어 있었고 그러나 그러함에도 지가 살려고 종이와 연필을 쥐고서 뭔가를 알아보겠다고, 또 뭔가를 적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아닌가, 긴가, 혼자서 물어보고 괜히 혼자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는가.(-) 나는 지금 내내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 내 몸은 뭔가가 잘못되었다. 그렇다. 뭔가가. 뭔가가 잘못된 것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쓰는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왜 쓰는지, 왜 써야 하는지를 알지 못해 고통받고 있는가,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몰라 그런가. 그 모든 것을 알 수 없어 그런 것인가. (-) 지금 창밖에 눈 내리고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기 한량없는 적막강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재에서 존재자로 현대사상의 모험 11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서동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탈출은 그 자신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필요이다. 즉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모면할 수 없는 관계를 부수는 것,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뜨리는 것에 대한 필요이다.'"


(-)


빛은 빛나며 자연적으로 이해된다. 빛은 이해의 사실 자체이다. (-)빛은 밤과 섞여 있다. (-) 우리는 밤처럼 숨막히는 존재의 속박을 감내한다. 그러나 존재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것이 존재의 악(le mal)이다. (-)


(-)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에 대한 권태가 존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권태가 존재한다. (-) 권태롭게 하는 것은 우리 삶, 우리 환경의 어떤 특별한 형식이 아니다. (-) 권태는 존재 자체를 겨냥하고 있다. (-) 권태 속의 존재는 계속 존재함에 연루되어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자와 같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무엇인가 착수해야 하고 열망해야 한다. 판단하기를 중지해 버린 채 행위하고 열망하기를 기권해 버리는 완전한 회의론자의 그릇된 미소에도 불구하고, 그 계약의 의무는 피할 길 없는 '해야 한다'로 부과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태는 이 궁극적인 의무에 대한 불가능한 거부이다. (-)


(-) 시작의 순간에는 이미 잃어버리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하면 이미 소유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인데, 그 소유된 것이란 오로지 이 순간 자체이다. 시작은 단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 복귀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소유한다. (-) 우리는 여행 중인 것처럼 존재한다. (-)


(-) 실패는 모험의 일부를 이룬다. 중단된 것은 놀이에서와 달리 무 속으로 침몰해 버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 행위는 존재 안에 기입된 것 그 자체이다. 그리고 행위로부터의 물러섬으로서 무기력은 존재 앞에서의 머뭇거림, 즉 존재함에 대한 무기력이다.


(-)


이 상태가 잠이나 졸음이 쏟아지는 상태가 아닌 한에서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 "살려고 해봐야 한다."는 <해변의 묘지>의 한 구절인데, 이 말은 근심처럼 스며들어 오며, 그럼으로써 존재에 대한 관계와 행위에 대한 관계가 가장 부드러운 무기력의 한복판에서 노출된다. 무기력이 우리를 휩쓸어버리고 따분함은 무게를 더하며 지루하게 만든다. (-)


(-)


존재는 자신을 지칠 줄 모르고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했던 나르키소스의 순진함과 달리 존재는 자신의 그림자에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 보지 못한다. 대신에 존재는 그림자와 더불어 자기의 순진함의 실패를 깨닫는다. (-)

존재가 질질 끌고 다니는 무거운 중량은 바로 그 자신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무거운 중량은 존재의 여행을 복잡하게 만들어버린다. 존재는 그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다닌다.


(-) 무기력은 짐으로서의 존재 자체에 대한 기쁨 없는 무력한 반발이다. 그것은 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을 느끼는 일 역시 삶이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토 청목 스테디북스 88
장 폴 사르트르 지음, 김미선 옮김 / 청목(청목사)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지금은 재즈가 들려오고 있다. 거기에는 맬로디가 없고, 오직 음과 짧은 진동의 무수한 연속이 있을 뿐이다. 그 진동은 쉬지 않고 계속된다. 그것은 나타나게 했다가 없애곤 하는 확고한 질서가 있어 그 진동들로 하여금 잠시도 숨을 돌리고 스스로를 위해 존재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진동은 흐르다가 점차로 가빠져서 나를 한 대 후려갈기고 사라진다. 나는 그것을 멈췄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만약 내가 그 진동의 하나를 멈춘다 해도 내 손가락 사이에는 평범하고 힘없는 한 소리밖에는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용납해야 하며, 그 소멸을 내가 차라리 '바라기' 까지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도 혹독하고 힘찬 인상을 거의 알지 못한다.

  나는 훈훈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직은 이상할 게 조금도 없다. 그것은 '구토' 속의 조그마한 행복인 것이다. 이 행복은 끈적끈적한 물구덩이 밑에, '우리의' 시간, 즉 자줏빛 멜빵과 옴푹 팬 의자의 시간의 밑바닥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폭이 넓고 말랑말랑한 순간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둘레에서 기름의 띠처럼 번지고 있다. 그 행복은 생겨나자마자 이내 늙어 버린다. 20년 전부터 나는 그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다른 행복도 있다. 내 외부에는 그 강철로 된 허리띠, 음악의 협소한 연속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을 한쪽에서 또 다른 쪽으로 가로질러 놓고, 그것을 거부하고 날카로운 작은 송곳 같은 것으로 우리의 시간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우리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있는 것이다.

 

  (-) 몇 초 후면 흑인 여자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 같다. 그만큼 이 음악의 필연성은 강하다. 이 세상이 주저앉아 버린 그 시간, 그 시간으로부터 오는 그 아무것도 이 필연성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그 필연성은 질서에 따라 스스로 멈출 것이다. 내가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좋아한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성향이라든가 슬픈 곡조 때문이 아니다. 그 소리는 오래 전부터 수많은 음에 의해서 준비된 결과이며, 그 결과를 만들어내고자 수많은 소리가 죽어 버렸다. 그런데도 나는 불안하다. 음반이 멈추려면 어떤 대수로운 일이 필요가 없다. 용수철이 망가진다든가 아돌프가 기분을 바꾸면 그만이다.

  강인함이란 것이 그렇게도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야릇하고 감동적인가. 그것을 중단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것을 파괴해 버릴 수도 있다. 마지막 소리가 꺼졌다. 다음에 오는 짧은 침묵 동안에 나는 됐다고,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고 절실히 느꼈다. 

 

  무엇인가가 시작되지만 그것은 곧 끝나기 마련이다. 모험은 연장되지는 않는다. 모험은 그 자체가 사멸됨으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사멸을 향해, 나는 되돌아오지 않고 끌려간다. 순간순간은 그것을 이어오는 순간을 이끌기 위해서 생겨난다. 그 모든 순간에 나는 온 마음의 애착을 느낀다. 그 모든 각각의 순간은 유일한 것이며, 아무것과도 대치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그것이 소멸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가장 평범한 사건을 모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하기'만 하면 되고도 남는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속고 있는 점이다. 인간은 늘 이야기를 하는 자이며, 자기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에 둘러싸여서 살고 있다. 그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본다. 그리고 또 그는 마치 남에게 이야기나 하는 것처럼 자기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사느냐, 이야기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인간이 살고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환경이 바뀌고 여러 사람이 들어 왔다가 나가고, 그뿐이다. 결코 출발이라는 게 없다. 나날이 아무런 리듬도 이유도 없이 그저 지나갈 뿐이다. 그것은 끊임없고 단조로운 덧셈에 불과하다. 가끔 사람들은 부분적인 결산을 한다. 이를테면 '나는 3년간 여행을 했다. 부빌에 온 지 3년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말도 역시 없다. 아내와 자식과 도시를 한꺼번에 떠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비슷하다. 상하이, 모스크바, 알제리도, 2주일이 지나면 모두가 같다. 때로는 드문 일이지만ㅡ사람은 결말을 짓는다. 어떤 여자와 붙어 살다가 구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번갯불과 같은 순간이다. 그 다음에는 행렬이 다시 시작된다. 사람은 다시 시간과 날짜의 덧셈을 시작한다. 월, 화, 수, 4월, 5월, 6월, 1924년, 1925년, 1926년.

 

  나는 혼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없다. 그들은 라디오를 들으면서 석간 신문을 읽고 있다. 일요일은 이제 씁쓸한 맛만 남겼고, 생각은 이미 월요일에 가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월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있는 것이라곤 무질서하게 밀려오는 나날들과, 그리고 번갯불같이 일어나는 마음 속의 움직임 뿐이다. 

 

  (-) 비가 온다. 비는 더러운 유리창들을 가볍게 때린다. 거리에 아직 가장을 한 아이들이 있다면 비는 종이로 만든 가면을 적셔 더럽게 만들 것이다.

  웨이트리스는 전등을 켠다. 2시밖엔 안 됐는데 하늘은 컴컴하다. 바느질을 하기에는 어둡다. 부드러운 빛, 사람들은 집집마다 전등을 켰을 것이다. 그들은 책을 읽다가 창문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별문제이다.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늙어 갔다. 그들은 유산이라든지, 선물에 둘러싸여 살고 있으며, 가구 하나하나가 추억이다. 조그마한 추가 달린 시계, 메달, 초상화, 조개, 문진, 병풍, 숄, 그뿐인가, 술병이 잔뜩 들어 있는 장식장, 옷감, 낡은 옷, 신문 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보존했다. 과거, 그것은 소유자의 사치다.

  어디에 내 과거를 간직해 둘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호주머니에 넣어둘 수는 없다. 과거를 정돈하기 위한 집을 한 채 가져야만 한다. 나는 내 육체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자신의 육체만 가지고 있는 아주 고독한 사람은 추억을 간직할 수가 없다. 추억은 육체를 거쳐서 지나가 버린다. 나는 슬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자유롭기만 했으니 말이다. 

 

  (-) 갑자기 나는 진실을 알았다. 이 사람은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그도 이미 잘 알고 있다. 거울에 비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게다. 매일매일 그는 조금씩 결국 썩고 말 시체의 모습과 비슷해진다. 그들의 경험이란 그런 것이다. 가끔 내가 경험에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경험,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요새다. 의사는 그 마지막 요새를 믿으려고 한다. 그는 참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하여 눈을 감고 싶은 것이다. 고독하고, 알아낸 것도 없으며 과거도 없이 지성은 우둔해지고 육체는 무너져 간다는 그 비참한 현실에 대하여. 

 

  (-) 내 생각에는 오늘의 세계과 내일의 세계와 유사하다는 것은 게으른 탓인 것 같다. 오늘이야말로 변화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든 것',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결점 찾기를 단념했다. 그러나 그가 나를 놓아 주지 않았다. 순간 나는 그의 눈 속에서 냉정하고 무자비한 비판을 알아챘다.

  그 때 나는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 그의 비판은 칼날처럼 나를 들고, 내 존재의 권리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졌다. 그것은 정말이었다. 나는 항상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존재할 권리가 없었다. 나는 우연히 나타나서 돌처럼, 식물처럼, 세균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내 생명은 되는대로 여러 방향으로 뻗어갔다. 그 생명은 간혹 애매한 신호를 나에게 보내기도 했지만 아무 결과도 없는 윙윙 소리 밖에 나는 느끼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죽어 버린 흠잡을 데 없는 그 미남자에게 있어서, 국방군 파콤의 아들인 장 파콤에게 있어서는 전혀 달랐다. 심장의 고동이라든가 그의 내부기관의 희미한 소리가 그에게는 순간순간의 순수한 작은 권리와 같은 형태를 띄고 있었다. 60년간 그는 확고하게 존재의 권리를 행사했다. 훌륭한 회색 눈동자가! 삶에 대한 가장 작은 의문도 결코 그 눈동자를 스쳐가지 않았다. 

 

  (-)  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기를 내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갈망하고 있는 저 무無로부터 나 자신을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나, '나'다. 존재하는 데 대한 증오, 권태, 그것이 '나'로 하여금 존재시키는' 방식이며, 존재 속에 나를 밀어넣는 방식인 것이다. 

 

  (-) 나는 비존재와 그 엄청난 충만의 중간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사람이 존재한다면 '거기까지', 곰팡이의 상태까지, 그 팽창의 상태까지, 그 추잡스런 상태까지 '존재'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북한 존재들의 무리였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당황하고 어딘지 불안한 개개의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여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분' 이것이야말로 저 나무들, 저 철책들, 저 조약돌들 사이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

 

  (-) 본질적인 것, 그것은 우연이다. 원래,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 나 보기에는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필연적이며 자기 원인이 됨직한 것을 생각해 냄으로써, 이 우연성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충족하고 모든 것이 행위 속에 있다. 미약한 흐름은 없었다. 모든 것이, 가장 미미한 도약까지도 존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무 둘레를 방황하고 있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아무 데서도 오지 않고 아무데로도 가지 않았다. 그것들은 존재하다가 다음에는 갑자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존재는 기억이 없는 것, 사라져버린 것들이며, 존재는 아무것도, 추억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다. 도처에 무한하게, 여분의 것인, 항상 어디에나 있는 존재, 그 존재는 존재에 의해서만 한정된다. 근원이 없는 존재들의 그 풍요함에 충격을 받고, 어리둥절하여 의자 위에 몸을 내던졌다.

  곳곳에 개화와 환희가 있고, 내 귀에서는 존재들이 윙윙거리고 있었으며, 내 육체 자체가 꿈틀거리며 벌어져서, 우주의 발아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그러나 왜?' 이렇게 나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많은 존재들이 있나? 그들은 모두가 서로 비슷한데' 서로 비슷한 나무들이 그렇게 많아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마치 나자빠진 벌레의 서투른 노력처럼(나도 그 노력의 하나였다) 그렇게도 많은 존재들은 사라졌다가는 악착같이 되살아나고, 또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풍성함은 너그러운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그것은 음침하고, 괴롭고, 스스로를 어찌할 줄 몰랐다. 그 나무들, 그 서투른 큰 몸집을‥‥‥ 나는 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책에 묘사해 놓은 꿈틀거리는 소리, 폭발 소리, 거창한 개화로 가득 찬, 놀라운 봄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화요일, 부빌에서

  이것이 자유라는 것일까? 눈 아래에서는 마당들이 도시를 향해서 힘없이 내려가고 있고, 마당마다 집이 한 채씩 서 있다. 나는 바다를 본다. 무겁고 움직이지 않는 바다. 나는 부빌을 본다. 날씨가 좋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애써 찾아낸 모든 이유들은 사라지고, 다른 이유는 이미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아직 충분히 젊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충분한 힘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무엇을 새로 시작해야 하나? 가장 혹독한 공포들과 구토들로부터 안니가 나를 구해 주리라고 얼마나 간절하게 기대하고 있었던가. 이제야 그것을 깨닫는다. 내 과거는 죽었다. 드 를르봉 씨는 죽었다. 안니는 나에게서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갔을 뿐이다.

  나는 마당과 마당 사이로 난 그 흰 길 속에서 고독하다. 고독과 자유, 그러나 이 자유는 어딘지 죽음과 비슷하다.

  오늘로써 내 생활은 종지부를 찍는다. 나는 내일 내 발 밑에 전개되어 있는 이 도시에서 이미 떠나고 없을 것이다. 이 곳에서 나는 그렇게도 오래 살았건만, 이 도시는 땅딸막하고, 시민적이고, 대단히 프랑스적인 이름에 불과해질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은 피렌체나 바그다드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밖에는 가질 수 없으리라. '부빌에 있었을 때, 하루 종일, 대체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하고 자문하는 시기가 오리라. 그리고 이 태양, 이 오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무런 추억조차 남아 있지 않으리라.

  내 모든 생활은 내 뒤에 있다. 내 생활을 남김없이 본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그 형태와, 그 느린 동작들을 본다.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그것은 한 마디로 패배한 승부였다. 그뿐이다. 내가 엄숙하게 부빌에 들어온 지 2년이 된다. 나는 첫판에서부터였다. 두 번째 다시 걸었으나 역시 졌다. 나는 패배한 것이다. 동시에 나는 사람들은 늘 패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긴다고 생각하는 건 더러운 놈들 뿐이다. 이제, 나는 안니처럼 하겠다. 나는 살아 남으련다.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나무들처럼, 웅덩이처럼, 전차의 붉은 의자처럼, 천천히 고요하게 존재하겠다.

  '구토'는 잠시 멎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이 내게는 정상적인 상태인 것이다. 다만 오늘 내 몸은 그것을 견디기에 너무나 기진맥진해 있다. 따분하다. 그뿐이다. 가끔 눈물이 날 정도로 나는 하품을 한다. 그것은 깊고 깊은 권태며, 존재의 깊은 마음이며, 나를 만든 재료 자체다. 나는 내 몸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오늘 아침에 목욕을 하고 면도를 했다. 다만 그 모든 꼼꼼한 짓을 다시 생각해 볼 때, 어떻게 내가 그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짓은 그처럼 헛된 일이다. 아마 나에게 그런 짓을 시킨 것은 습관이라는 것들일 것이다. 습관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여전히 분주하다. 조용히, 약삭바르게 그들의 피륙을 짜고 있다. 습관은 유모처럼 나를 씻겨 주고, 닦아 주고, 옷을 입혀 준다. 

 

  이 언덕 위에서 나는 얼마나 그들과 아득히 떨어져 있는가를 느낀다. 내가 마치 다른 족속에 속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하루의 일을 끝내고 사무실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만족한 태도로 집들과 광장들을 바라보고, 그것이 '그들의' 도시이고, '훌륭한 상업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허공에 내던진 물체는 모두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공원은 매일 겨울에는 오후 4시에, 여름에는 오후 6시에 닫는다. 납은 335도에서 녹고, 전차의 막차는 오후 11시 5분에 시청 앞에서 떠난다. 그들은 평온해 보이지만, 약간 우울하다. 그들은 '내일'을 생각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또 하나의 오늘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들은 아침마다 똑같이 돌아오는 단 하루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일요일이면 사람들은 그 하루를 즐기기 위해 좀 화사하게 꾸미기도 한다. 바보자식들 같으니. 

 

  (-)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눈에 띄는 아무런 변화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에 사람들이 덧문을 열 때, 사물 위에 묵직하게 놓여 있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무서운 일종의 의미에 놀랄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계속된다면 수백 명씩 자살자가 생겨날 것이다. 

  그렇다. 그러한 변화가 조금이라도 생겨난다면 나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또 사람들은 갑자기 고독 속에 잠기는 다른 사람들을 볼 것이다. 고독하게 된 사람들은 무섭고 기형적인 모습으로, 완전히 고독해진 모습으로 거리를 달리고, 눈을 부릅뜨고 재앙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날개를 치는 벌레같은 혀를 가지고 내 앞을 지친 걸음걸이로 지나갈 것이다. 

 

  저녁때가 된다. 첫 전등불이 도시에 켜진다. 제기랄! 그 도시는 기하학적 현상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자연스럽게' 보일까! 그 도시는 얼마나 저녁으로 짓눌린 모습을 하고 있단 말인가? 

 

  (-) 그때는 음악이 없었다. 나는 우울하고 냉정했었다. 주위의 모든 물체들을 나와 같은 존재 즉, 일종의 비참한 고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세계는 내 외부에서 그렇게도 추하고 테이블 위의 저 더러운 컵, 유리의 갈색 반점과 마들렌의 앞치마, 마담의 뚱뚱한 애인의 친절한 태도, 이런 것이 모두 추했다. 세계의 존재 자체가 그렇게도 추했다. 그래서 나는 내 집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지금 색소폰의 곡조가 들려온다. 그러나 나는 부끄럽다. 영광스러운 사소한 고통, 표준형의 고통이 막 태어났다. 색소폰의 4박자, 그 소리가 오간다. 그리고 '우리처럼 해야지. 적당히 괴로워해야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 좋다! 물론 나는 그렇게 '적당히', 그리고 자기 만족을 하는 것도, 자기를 가엾게 여기는 일도 없이 무정한 순결성을 가지고 괴로워하고 싶었다.

 

  이상한 잡음이 나는 것을 보니 거기에 금이 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슴을 죄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이 멜로디가 축음기 바늘의 약간 긁적거리는 소리와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멜로디는 그렇게도 먼 뒤쪽에 있다. 이것도 나는 알고 있다. 즉, 판은 금이 가고 닳았으며, 가수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 나는 가려고 한다. 나는 기차를 탈 것이다. 그러나 과거도 미래도 없이, 하나의 현재에서 다음의 현재로 멀어져 가는, 존재하는 것들의 뒤에 매일매일 해체되고, 벗겨지고, 죽음을 향해서 미끄러져 가는 그 소리들 뒤에, 멜로디는 사정없는 증인처럼 젊고, 힘차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내게 재능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그러나 절대로, 절대로 나는 그런 종류의 것을 써본 일이 없다. 역사에 관한 논문을 쓴 적은 있지만 그렇다. 앞으로도 안 쓰겠다.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 소설을 읽고 다음과 같이 말하리라. '그것을 쓴 사람은 앙트완 로캉탱이다. 그는 카페에 빈둥거리며 다니던 머리카락이 붉은 놈이었다'라고. 그리고 그들은 내가 그 흑인 여자를 생각하듯이, 내 생활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마치 무슨 귀중하고 반 전설적인 일처럼 말이다. 한 권의 책. 물론, 처음에는 그것이 지리하고 피곤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도, 또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도 그로 인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완성되고, 내 뒤에 그것이 남을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 책의 빛이 조금이나마 내 과거 위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아마도, 나는 그 책을 통해서, 내 생활을 아무 혐오감 없이 회상할 수 있으리라. 아마도 그 어느 날, 등을 오그리고 내가 탈 기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이 시간, 이 음울한 시간을 뚜렷이 회상하면서, 나는 아마도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그날, 그 시간이었다'라고 말할 때가 오리라. 그리고 나는 과거로서, 다만 과거로서만 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날이 저물었다. 프랭타니아 호텔 이층의 두 창문에 막 불이 켜졌다. 새 역의 공사장에서, 축축한 목재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내일 부빌에는 비가 내릴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