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청목 스테디북스 88
장 폴 사르트르 지음, 김미선 옮김 / 청목(청목사)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지금은 재즈가 들려오고 있다. 거기에는 맬로디가 없고, 오직 음과 짧은 진동의 무수한 연속이 있을 뿐이다. 그 진동은 쉬지 않고 계속된다. 그것은 나타나게 했다가 없애곤 하는 확고한 질서가 있어 그 진동들로 하여금 잠시도 숨을 돌리고 스스로를 위해 존재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진동은 흐르다가 점차로 가빠져서 나를 한 대 후려갈기고 사라진다. 나는 그것을 멈췄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만약 내가 그 진동의 하나를 멈춘다 해도 내 손가락 사이에는 평범하고 힘없는 한 소리밖에는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용납해야 하며, 그 소멸을 내가 차라리 '바라기' 까지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도 혹독하고 힘찬 인상을 거의 알지 못한다.

  나는 훈훈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직은 이상할 게 조금도 없다. 그것은 '구토' 속의 조그마한 행복인 것이다. 이 행복은 끈적끈적한 물구덩이 밑에, '우리의' 시간, 즉 자줏빛 멜빵과 옴푹 팬 의자의 시간의 밑바닥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폭이 넓고 말랑말랑한 순간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둘레에서 기름의 띠처럼 번지고 있다. 그 행복은 생겨나자마자 이내 늙어 버린다. 20년 전부터 나는 그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다른 행복도 있다. 내 외부에는 그 강철로 된 허리띠, 음악의 협소한 연속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을 한쪽에서 또 다른 쪽으로 가로질러 놓고, 그것을 거부하고 날카로운 작은 송곳 같은 것으로 우리의 시간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우리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있는 것이다.

 

  (-) 몇 초 후면 흑인 여자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 같다. 그만큼 이 음악의 필연성은 강하다. 이 세상이 주저앉아 버린 그 시간, 그 시간으로부터 오는 그 아무것도 이 필연성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그 필연성은 질서에 따라 스스로 멈출 것이다. 내가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좋아한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성향이라든가 슬픈 곡조 때문이 아니다. 그 소리는 오래 전부터 수많은 음에 의해서 준비된 결과이며, 그 결과를 만들어내고자 수많은 소리가 죽어 버렸다. 그런데도 나는 불안하다. 음반이 멈추려면 어떤 대수로운 일이 필요가 없다. 용수철이 망가진다든가 아돌프가 기분을 바꾸면 그만이다.

  강인함이란 것이 그렇게도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야릇하고 감동적인가. 그것을 중단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것을 파괴해 버릴 수도 있다. 마지막 소리가 꺼졌다. 다음에 오는 짧은 침묵 동안에 나는 됐다고,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고 절실히 느꼈다. 

 

  무엇인가가 시작되지만 그것은 곧 끝나기 마련이다. 모험은 연장되지는 않는다. 모험은 그 자체가 사멸됨으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사멸을 향해, 나는 되돌아오지 않고 끌려간다. 순간순간은 그것을 이어오는 순간을 이끌기 위해서 생겨난다. 그 모든 순간에 나는 온 마음의 애착을 느낀다. 그 모든 각각의 순간은 유일한 것이며, 아무것과도 대치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그것이 소멸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가장 평범한 사건을 모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이야기하기'만 하면 되고도 남는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속고 있는 점이다. 인간은 늘 이야기를 하는 자이며, 자기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에 둘러싸여서 살고 있다. 그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본다. 그리고 또 그는 마치 남에게 이야기나 하는 것처럼 자기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사느냐, 이야기하느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인간이 살고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환경이 바뀌고 여러 사람이 들어 왔다가 나가고, 그뿐이다. 결코 출발이라는 게 없다. 나날이 아무런 리듬도 이유도 없이 그저 지나갈 뿐이다. 그것은 끊임없고 단조로운 덧셈에 불과하다. 가끔 사람들은 부분적인 결산을 한다. 이를테면 '나는 3년간 여행을 했다. 부빌에 온 지 3년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말도 역시 없다. 아내와 자식과 도시를 한꺼번에 떠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이 비슷하다. 상하이, 모스크바, 알제리도, 2주일이 지나면 모두가 같다. 때로는 드문 일이지만ㅡ사람은 결말을 짓는다. 어떤 여자와 붙어 살다가 구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번갯불과 같은 순간이다. 그 다음에는 행렬이 다시 시작된다. 사람은 다시 시간과 날짜의 덧셈을 시작한다. 월, 화, 수, 4월, 5월, 6월, 1924년, 1925년, 1926년.

 

  나는 혼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없다. 그들은 라디오를 들으면서 석간 신문을 읽고 있다. 일요일은 이제 씁쓸한 맛만 남겼고, 생각은 이미 월요일에 가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월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있는 것이라곤 무질서하게 밀려오는 나날들과, 그리고 번갯불같이 일어나는 마음 속의 움직임 뿐이다. 

 

  (-) 비가 온다. 비는 더러운 유리창들을 가볍게 때린다. 거리에 아직 가장을 한 아이들이 있다면 비는 종이로 만든 가면을 적셔 더럽게 만들 것이다.

  웨이트리스는 전등을 켠다. 2시밖엔 안 됐는데 하늘은 컴컴하다. 바느질을 하기에는 어둡다. 부드러운 빛, 사람들은 집집마다 전등을 켰을 것이다. 그들은 책을 읽다가 창문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별문제이다.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늙어 갔다. 그들은 유산이라든지, 선물에 둘러싸여 살고 있으며, 가구 하나하나가 추억이다. 조그마한 추가 달린 시계, 메달, 초상화, 조개, 문진, 병풍, 숄, 그뿐인가, 술병이 잔뜩 들어 있는 장식장, 옷감, 낡은 옷, 신문 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보존했다. 과거, 그것은 소유자의 사치다.

  어디에 내 과거를 간직해 둘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의 과거를 호주머니에 넣어둘 수는 없다. 과거를 정돈하기 위한 집을 한 채 가져야만 한다. 나는 내 육체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자신의 육체만 가지고 있는 아주 고독한 사람은 추억을 간직할 수가 없다. 추억은 육체를 거쳐서 지나가 버린다. 나는 슬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자유롭기만 했으니 말이다. 

 

  (-) 갑자기 나는 진실을 알았다. 이 사람은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그도 이미 잘 알고 있다. 거울에 비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게다. 매일매일 그는 조금씩 결국 썩고 말 시체의 모습과 비슷해진다. 그들의 경험이란 그런 것이다. 가끔 내가 경험에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경험,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요새다. 의사는 그 마지막 요새를 믿으려고 한다. 그는 참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하여 눈을 감고 싶은 것이다. 고독하고, 알아낸 것도 없으며 과거도 없이 지성은 우둔해지고 육체는 무너져 간다는 그 비참한 현실에 대하여. 

 

  (-) 내 생각에는 오늘의 세계과 내일의 세계와 유사하다는 것은 게으른 탓인 것 같다. 오늘이야말로 변화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든 것',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결점 찾기를 단념했다. 그러나 그가 나를 놓아 주지 않았다. 순간 나는 그의 눈 속에서 냉정하고 무자비한 비판을 알아챘다.

  그 때 나는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 그의 비판은 칼날처럼 나를 들고, 내 존재의 권리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졌다. 그것은 정말이었다. 나는 항상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존재할 권리가 없었다. 나는 우연히 나타나서 돌처럼, 식물처럼, 세균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내 생명은 되는대로 여러 방향으로 뻗어갔다. 그 생명은 간혹 애매한 신호를 나에게 보내기도 했지만 아무 결과도 없는 윙윙 소리 밖에 나는 느끼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죽어 버린 흠잡을 데 없는 그 미남자에게 있어서, 국방군 파콤의 아들인 장 파콤에게 있어서는 전혀 달랐다. 심장의 고동이라든가 그의 내부기관의 희미한 소리가 그에게는 순간순간의 순수한 작은 권리와 같은 형태를 띄고 있었다. 60년간 그는 확고하게 존재의 권리를 행사했다. 훌륭한 회색 눈동자가! 삶에 대한 가장 작은 의문도 결코 그 눈동자를 스쳐가지 않았다. 

 

  (-)  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기를 내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갈망하고 있는 저 무無로부터 나 자신을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나, '나'다. 존재하는 데 대한 증오, 권태, 그것이 '나'로 하여금 존재시키는' 방식이며, 존재 속에 나를 밀어넣는 방식인 것이다. 

 

  (-) 나는 비존재와 그 엄청난 충만의 중간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사람이 존재한다면 '거기까지', 곰팡이의 상태까지, 그 팽창의 상태까지, 그 추잡스런 상태까지 '존재'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북한 존재들의 무리였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당황하고 어딘지 불안한 개개의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여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분' 이것이야말로 저 나무들, 저 철책들, 저 조약돌들 사이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

 

  (-) 본질적인 것, 그것은 우연이다. 원래,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 나 보기에는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필연적이며 자기 원인이 됨직한 것을 생각해 냄으로써, 이 우연성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충족하고 모든 것이 행위 속에 있다. 미약한 흐름은 없었다. 모든 것이, 가장 미미한 도약까지도 존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무 둘레를 방황하고 있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아무 데서도 오지 않고 아무데로도 가지 않았다. 그것들은 존재하다가 다음에는 갑자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존재는 기억이 없는 것, 사라져버린 것들이며, 존재는 아무것도, 추억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다. 도처에 무한하게, 여분의 것인, 항상 어디에나 있는 존재, 그 존재는 존재에 의해서만 한정된다. 근원이 없는 존재들의 그 풍요함에 충격을 받고, 어리둥절하여 의자 위에 몸을 내던졌다.

  곳곳에 개화와 환희가 있고, 내 귀에서는 존재들이 윙윙거리고 있었으며, 내 육체 자체가 꿈틀거리며 벌어져서, 우주의 발아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그러나 왜?' 이렇게 나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많은 존재들이 있나? 그들은 모두가 서로 비슷한데' 서로 비슷한 나무들이 그렇게 많아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마치 나자빠진 벌레의 서투른 노력처럼(나도 그 노력의 하나였다) 그렇게도 많은 존재들은 사라졌다가는 악착같이 되살아나고, 또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풍성함은 너그러운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그것은 음침하고, 괴롭고, 스스로를 어찌할 줄 몰랐다. 그 나무들, 그 서투른 큰 몸집을‥‥‥ 나는 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책에 묘사해 놓은 꿈틀거리는 소리, 폭발 소리, 거창한 개화로 가득 찬, 놀라운 봄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화요일, 부빌에서

  이것이 자유라는 것일까? 눈 아래에서는 마당들이 도시를 향해서 힘없이 내려가고 있고, 마당마다 집이 한 채씩 서 있다. 나는 바다를 본다. 무겁고 움직이지 않는 바다. 나는 부빌을 본다. 날씨가 좋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애써 찾아낸 모든 이유들은 사라지고, 다른 이유는 이미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아직 충분히 젊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충분한 힘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무엇을 새로 시작해야 하나? 가장 혹독한 공포들과 구토들로부터 안니가 나를 구해 주리라고 얼마나 간절하게 기대하고 있었던가. 이제야 그것을 깨닫는다. 내 과거는 죽었다. 드 를르봉 씨는 죽었다. 안니는 나에게서 모든 희망을 빼앗아 갔을 뿐이다.

  나는 마당과 마당 사이로 난 그 흰 길 속에서 고독하다. 고독과 자유, 그러나 이 자유는 어딘지 죽음과 비슷하다.

  오늘로써 내 생활은 종지부를 찍는다. 나는 내일 내 발 밑에 전개되어 있는 이 도시에서 이미 떠나고 없을 것이다. 이 곳에서 나는 그렇게도 오래 살았건만, 이 도시는 땅딸막하고, 시민적이고, 대단히 프랑스적인 이름에 불과해질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은 피렌체나 바그다드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밖에는 가질 수 없으리라. '부빌에 있었을 때, 하루 종일, 대체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하고 자문하는 시기가 오리라. 그리고 이 태양, 이 오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무런 추억조차 남아 있지 않으리라.

  내 모든 생활은 내 뒤에 있다. 내 생활을 남김없이 본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그 형태와, 그 느린 동작들을 본다.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그것은 한 마디로 패배한 승부였다. 그뿐이다. 내가 엄숙하게 부빌에 들어온 지 2년이 된다. 나는 첫판에서부터였다. 두 번째 다시 걸었으나 역시 졌다. 나는 패배한 것이다. 동시에 나는 사람들은 늘 패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긴다고 생각하는 건 더러운 놈들 뿐이다. 이제, 나는 안니처럼 하겠다. 나는 살아 남으련다.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나무들처럼, 웅덩이처럼, 전차의 붉은 의자처럼, 천천히 고요하게 존재하겠다.

  '구토'는 잠시 멎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찾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이 내게는 정상적인 상태인 것이다. 다만 오늘 내 몸은 그것을 견디기에 너무나 기진맥진해 있다. 따분하다. 그뿐이다. 가끔 눈물이 날 정도로 나는 하품을 한다. 그것은 깊고 깊은 권태며, 존재의 깊은 마음이며, 나를 만든 재료 자체다. 나는 내 몸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오늘 아침에 목욕을 하고 면도를 했다. 다만 그 모든 꼼꼼한 짓을 다시 생각해 볼 때, 어떻게 내가 그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짓은 그처럼 헛된 일이다. 아마 나에게 그런 짓을 시킨 것은 습관이라는 것들일 것이다. 습관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여전히 분주하다. 조용히, 약삭바르게 그들의 피륙을 짜고 있다. 습관은 유모처럼 나를 씻겨 주고, 닦아 주고, 옷을 입혀 준다. 

 

  이 언덕 위에서 나는 얼마나 그들과 아득히 떨어져 있는가를 느낀다. 내가 마치 다른 족속에 속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하루의 일을 끝내고 사무실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만족한 태도로 집들과 광장들을 바라보고, 그것이 '그들의' 도시이고, '훌륭한 상업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허공에 내던진 물체는 모두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공원은 매일 겨울에는 오후 4시에, 여름에는 오후 6시에 닫는다. 납은 335도에서 녹고, 전차의 막차는 오후 11시 5분에 시청 앞에서 떠난다. 그들은 평온해 보이지만, 약간 우울하다. 그들은 '내일'을 생각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또 하나의 오늘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들은 아침마다 똑같이 돌아오는 단 하루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일요일이면 사람들은 그 하루를 즐기기 위해 좀 화사하게 꾸미기도 한다. 바보자식들 같으니. 

 

  (-) 어쩌면 이 모든 일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눈에 띄는 아무런 변화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에 사람들이 덧문을 열 때, 사물 위에 묵직하게 놓여 있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무서운 일종의 의미에 놀랄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계속된다면 수백 명씩 자살자가 생겨날 것이다. 

  그렇다. 그러한 변화가 조금이라도 생겨난다면 나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또 사람들은 갑자기 고독 속에 잠기는 다른 사람들을 볼 것이다. 고독하게 된 사람들은 무섭고 기형적인 모습으로, 완전히 고독해진 모습으로 거리를 달리고, 눈을 부릅뜨고 재앙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날개를 치는 벌레같은 혀를 가지고 내 앞을 지친 걸음걸이로 지나갈 것이다. 

 

  저녁때가 된다. 첫 전등불이 도시에 켜진다. 제기랄! 그 도시는 기하학적 현상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자연스럽게' 보일까! 그 도시는 얼마나 저녁으로 짓눌린 모습을 하고 있단 말인가? 

 

  (-) 그때는 음악이 없었다. 나는 우울하고 냉정했었다. 주위의 모든 물체들을 나와 같은 존재 즉, 일종의 비참한 고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세계는 내 외부에서 그렇게도 추하고 테이블 위의 저 더러운 컵, 유리의 갈색 반점과 마들렌의 앞치마, 마담의 뚱뚱한 애인의 친절한 태도, 이런 것이 모두 추했다. 세계의 존재 자체가 그렇게도 추했다. 그래서 나는 내 집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지금 색소폰의 곡조가 들려온다. 그러나 나는 부끄럽다. 영광스러운 사소한 고통, 표준형의 고통이 막 태어났다. 색소폰의 4박자, 그 소리가 오간다. 그리고 '우리처럼 해야지. 적당히 괴로워해야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 좋다! 물론 나는 그렇게 '적당히', 그리고 자기 만족을 하는 것도, 자기를 가엾게 여기는 일도 없이 무정한 순결성을 가지고 괴로워하고 싶었다.

 

  이상한 잡음이 나는 것을 보니 거기에 금이 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슴을 죄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이 멜로디가 축음기 바늘의 약간 긁적거리는 소리와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멜로디는 그렇게도 먼 뒤쪽에 있다. 이것도 나는 알고 있다. 즉, 판은 금이 가고 닳았으며, 가수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 나는 가려고 한다. 나는 기차를 탈 것이다. 그러나 과거도 미래도 없이, 하나의 현재에서 다음의 현재로 멀어져 가는, 존재하는 것들의 뒤에 매일매일 해체되고, 벗겨지고, 죽음을 향해서 미끄러져 가는 그 소리들 뒤에, 멜로디는 사정없는 증인처럼 젊고, 힘차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내게 재능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그러나 절대로, 절대로 나는 그런 종류의 것을 써본 일이 없다. 역사에 관한 논문을 쓴 적은 있지만 그렇다. 앞으로도 안 쓰겠다.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 소설을 읽고 다음과 같이 말하리라. '그것을 쓴 사람은 앙트완 로캉탱이다. 그는 카페에 빈둥거리며 다니던 머리카락이 붉은 놈이었다'라고. 그리고 그들은 내가 그 흑인 여자를 생각하듯이, 내 생활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마치 무슨 귀중하고 반 전설적인 일처럼 말이다. 한 권의 책. 물론, 처음에는 그것이 지리하고 피곤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도, 또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도 그로 인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이 완성되고, 내 뒤에 그것이 남을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 책의 빛이 조금이나마 내 과거 위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아마도, 나는 그 책을 통해서, 내 생활을 아무 혐오감 없이 회상할 수 있으리라. 아마도 그 어느 날, 등을 오그리고 내가 탈 기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이 시간, 이 음울한 시간을 뚜렷이 회상하면서, 나는 아마도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그날, 그 시간이었다'라고 말할 때가 오리라. 그리고 나는 과거로서, 다만 과거로서만 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날이 저물었다. 프랭타니아 호텔 이층의 두 창문에 막 불이 켜졌다. 새 역의 공사장에서, 축축한 목재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내일 부빌에는 비가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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