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의 '모더니티 재고 Modernity Revisited'를

    ① 아방가르드와 키치를 통해 살펴보는 근대의 동시대성

    ② 파도의 등가 운동 원리로 본 시간과 행위의 위계에서 미학적 평등 원리 

두가지 측면에서 정리.



근대의 동시대성 탐구

랑시에르에 따르면 우리는 아직 18세기 말에 시작된 예술의 미학적 체제의 자장 안에 있다. Modern TImes는 근대이면서 현대이다. 예술의 종별 차이 —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컨템포러리 — 역시 일면적 펼침에 지나지 않는다. 랑시에르는 헤겔과 그린버그의 모더니티론 — 단선적 시간성, 동시대성 시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모더니티의 비동시대성, 여전히 완수되지 않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소진하지 않은 근대의 ‘미적 혁명’에 관해 피력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근대 사회에서 해겔식의 예술의 종언에 다다르는 지점이야말로 예술의 미래가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보았다. 고대 그리스 예술가들이 알렉산드리아리즘과 헬레니즘으로 빠져든 것처럼 예술에 대한 도취로 모더니즘적 아방가르드가, 공산품을 제공해주는 자본주의 사회 발전에서 산업적 성취로 키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더니즘은 곧 아방가르드를 의미하고 이는 키치와 대립한다. 아방가르드가 전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적 데카당스의 가속화로 점점 인민의 삶에서 멀어지고, 모방하는 사실을 모방하는 데 매달리게 된다.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예술은 상품문화 형태로부터 분리되고, 각각의 예술이 제 고유의 매체에 몰두한다. 산업화의 끔찍한 결과물로 생겨난 키치문화가 이제 예술 자체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랑시에르는 "예술은 저 혼자로 존재하지 않으며 예술 혁명이 그저 예술 실천에서 일어나는 혁명일 수 만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모더니티는 수평선 위에서 과거와 현재의 단절, 분리와 촉발이 아니라, 시간성의 얽힘과 경계 사이의 복잡한 관계 집합을 수반한다. 미학적 혁명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 즉, 시간의 서사를 파괴하는 것이다. 미학이 철학이나 예술은 아니지만, 예술 없이 미학을 논할 수 없다. 미학은 감각을 해석하는 의미 사이의 불일치를 통해 작동하고 사유에 대한 관념, 해석 방법, 사회관, 역사관에 착수하는 지각과 담론의 출발점이 된다.


아방가르드는 군대의 선봉에 서는 첨병이 아니다. 그것은 승리를 구가하는 상품 문화 군대에 저항하는 최후의 부대도 아니다. 아방가르드는 근대(Modern TImes)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차이에 위치한다. (82) 



보리스 그로이스는 그린버그가 아방가르드와 키치를 구별하는 것은 다른 두 가지의 예술 영역이나 종류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두 가지 다른 태도라고 이해한다. 예술작품에 관해 기술과 생산자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방가르드이며, 효과와 소비자적 태도를 띠는 것이 키치라는 것이다. 오늘날 행위의 위계 보다 모두 일하고 모두 여가를 즐기는 구조에서 현대인은 아방가르드와 키치를 오갈 수밖에 없는 미학적 감수성을 갖게 된다.





파도의 등가 운동과 미학적 평등 원리

랑시에르는 예술에서의 자유로운 운동에 주목한다. 이는 시작된 적도, 끝이나 정지도 없는 삶의 리듬으로 예술가가 자유로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요 선택과 의지의 대상도 아닌, 보편적 삶의 리듬에 가까운 운동이다. 이사도라 덩컨은 “모든 운동은 정지 상태에 있을 때조차 풍요의 상징을 지니거니와 다른 운동을 발생시키는 힘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랑시에르는 이를 차용하여 다른 운동을 발생시키는 연속운동과 자유로운 운동을 개념화한다. 이는 폭풍우 속 파도와 같은 형상으로 운동과 정지, 활동과 비활동의 등가를 의미한다. 


역사적 합리성에 기인한 새로운 서사는 이제 같은 세계에서 시간성의 위계를 만든다. 이 시간성의 위계로 여가와 휴식이라는 비활동의 위계가 발생한다. 여가는 노동에서 벗어난 자유시간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행위의 즐거움을 안다. 반면 휴식은 일과 일 사이 신체의 중지이다. 필요 충족 수단과 필연에 얽매여 있으며 기계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비활동의 위계는 행위의 위계를 만들어 낸다. 행위의 위계로 생겨난 기계적인 인간과 자유로운 인간은 예술이 근대 사회에서 종언을 고하는 시점에 이르러 제 고유의 성질에 몰두하면서 산업적 성취와 예술적 도취라는 양상을 띠게 된다. 파도의 자유로운 운동은 인류의 두 계급을, 행위의 위계를 기각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는 청년 마르크스가 완수하고자 했던 이념으로 행위가 자신의 시간성에서 그리고 저 자신이 추구하던 목적에서 분리 — 탈접속 — 하여 기계적 인간이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삶의 형태이다. 따라서 노동은 생계를 꾸려야 하는 단순한 필요가 아닌, 인간 활동의 총칭이 된다. 


랑시에르는 청년 마르크스의 ‘정치 혁명’과 ‘인간 혁명’이 포이어바흐와 칸트는 물론 실러의 ‘미적 상태’를 차용했다고 주장한다. 이 미적 상태는 순수 중단이며 능동성과 필연성이 평형이 되는 등가 상태이다. 형식 그 자체로 체험되는 순간으로 반드시 ‘미적 사유’를 거쳐야만 한다. 형식과 감각의 위계적 분리를 단절하고 상상과 오성 사이를 자유롭게 유희하는 실러의 미적 사유는 통찰력과 신념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하고 필연적인 조건이다. 혁명은 지각된 그리고 감각적인 세계와 관련된다. 혁명은 매일의 행동, 그리고 존재가 매일 서로 관계 맺는 방식과 연관된다. 파도의 등가 운동 원리처럼 행위의 수단과 목적이 하나의 동일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18세기 말 이래 예술은 서구사회에 존재했던 역사적 짜임 historical configuration이다. 마르크스의 분석에는 예술의 자리가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예술가들은 현재의 지체 lateness에서 추출한 예견의 힘으로 미래를 새롭게 직조한다. 이는 새로운 시인의 과제이며, 마르크스가 아방가르드 이념과 어렵지 않게 연관되는 사상가라고 볼 수 있다. 청년 마르크스의 혁명 이념은 감각적 사유와 평등을 분업의 폐지 — 행위의 위계 — 뿐 아니라 활동의 목적과 수단을 가르는 분리 자체 — 시간의 위계 — 의 폐지를 연결한 것이라고 랑시에르는 누차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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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두렵지 않은데, 굳이 용기를 낼 이유가 있을까?



오랜만에 꺼내 본 <무민 원화를 색칠하다>.

굳이 색칠하려던 건 아니고, 수록된 글과 원화 자체로도 맘에 들어서 샀더랬다.

위의 구절을 보고, 무민에 이리 시니컬한 말이 있었나 했는데 

내가 잘못 읽은 거였다. (요즘 눈이 너무 침침해...) 

원문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데, 굳이 용기를 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 아빠 무민의 모험 中- 



근데 생각해 보니 두려운 것이 없는데, 굳이 용기란 것이 필요할까 싶다.

이때 생각나는 구절,


So farewell hope, and with hope farewell fear,

Farewell remorse; all good to me is lost.

<실낙원> 5권 中, 

희망이 사라지고 그래서 두려움도 뉘우침도 없으니 내게 선은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 건데

아빠 무민의 교훈을 통해 재미 삼아 바꿔보자면, 


So farewell fear, and with fear farewell courage,

Farewell gravity; all good to me is found.

그냥, 부침없이 매일매일이 소소하고 그래서 좋다는, 아빠 무민을 통해 얻은 깨달음.



세상에는 공기와 물이 흐른다는 것, 계절이 변한다는 것, 해가 뜨고 지는 것 그리고 지금 등댓불이 켜져 있다는 사실과 같이 확실한 것들이 있다.

- 아빠 무민 바다에 가다 中 - 


나는 행복한 지금 이 순간이 멀어져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또다시 행복해.

- 아빠 무민의 모험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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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은 시간들의 나눔이 재생산되는 지점인 동시에 가능한 간극과 가능한 재배분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 순간은 운명의 저울위에 올려진 추를 재분배함으로써 다른 시간을 발생시키는 힘이다. 나는 시간성의 다른 선을 발생시키는 순간의 바로 그 힘을 지적 해방론의 핵심에서 발견했다. (...) 한쪽에는 교육학적 진보의 정상 시간이 있다. 그것은 바른 순서로 즉 무지 상태에 걸맞게 처음에는 단순한 것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복잡한 지식으로 한 단계식 올라가야 하는 전진처럼 규정되는 시간이다. 무지에서 지식으로 옮아가는 이 경로는 동시에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옮아가는 경로로 간주된다. 그것은 사실 불평등을 무한히 재생산하는 시간성이다. 다른 한쪽에는 해방의 시간이 있다. 그것은 어디서나 출발할 수 있고 어느 때나 뭐든지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요, 이 임의의 지점과 이 임의의 순간에 예상치 못한 접속을 창조하여 연장될 수 있는 시간이다. 바로 이것이 자코토가 설명의 질서에 맞서 내세운 명백히 단순해 보이는 격연이 함의하는 바이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뭔가를 배우라. 그리고 그것을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하라. (33)


시간의 질서를 구조 짓는 명증성이 제거되는 시간, 가능태들의 분배가 다시 짜이고 그와 더불어 시간에 거주하는 자들의 힘도 다시 짜이는 시간의 열림. 그것은 지배적인 시간 질서 내에 뚫린 돌파구에서 구축되는 새로운 공통의 시간이다. (34)



작가는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그를 속박하는 어떤 강력하고 비양심적인 폭군에 의해 줄거리[플롯]를 만들고 희극, 비극, 사랑 이야기와 그리고 전체를 감싸는 개연성의 대사를 제공하도록 강요당하며 그러한 개연성은 너무나 흠잡을 데가 없어 만약 그의 인물들이 실제 인간으로 이세상에 나온다면 그들은 모두 외투의 마지막 단추까지 그 시간의 유행에 맞추어 꽉 채우고 있을 것이다. 폭군은 받들어지고 그리고 소설은 알맞게 완성된다. [...] 속을 들여다보면 인생은 '이렇다'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한 평범한 날의 한 평범한 마음속을 한순간 조사해보라. 그 마음은 무수히 많은 인상들을 받아들인다 - 하찮은 것, 놀라운 것, 덧없는 것 또는 강철의 날카로움으로 새긴 것. 모든 방향에서 인상들은 수없는 원자의 끊임없는 소나기로 내린다. 그것들이 내려올 때 그리고 스스로를 월요일 또는 화요일의 삶으로 구성할 때 예전과는 다른 곳에 강조점이 떨어진다. 

- 버지니아 울프,  <현대 소설>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솔출판사, 1996, 116쪽


자유로운 작가의 과제는 "원자들이 마음속에 떨어지는 순서를 그대로 기록"하고, "보기에는 제각기 아무리 통일성이 없어 보이더라도 각각의 광경이나 사건이 의식 속에 새겨지는 그 양식을 추적"하는 데 있다. 성마른 독자는 이 원자 소나기의 '하찮은 것'과 '덧없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올드 스쿨 소설가들이 그것에 참되고 지속적인 것의 측면을 제공하려는 '하찮은 것'과 '일시적인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물을지 모르겠다. (...) 차이는 바로 무의미한 것과 하루살이 같은 것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유물론자들'은 견고한 것을 원한다. 소설[허구]과 관련하여 견고한 것이란 개연성[그럴듯함]이다. 즉 원자 소나기를 동일성에 속하는 성질들로 변형하기. 우연한 사건들을 원인과 결과의 인지 가능한 도식 안에 봉합하기. (...) 울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을 뒤집어엎는다. 개연성의 논리는 반예술적 거짓말이다. '그럴 법한 대로' 배치된 사물의 질서는 감각적 원자들의 위대한 민주주의에 압제를 행사한다. (...)진리는 개별적인 것에 있다. 하지만 이는 일상생활의 잇달음과 반복의 무의미한 전개가 아니다. 그것은 원자들의 우발적 편성 각각에 내재하는 위대한 공존, 보편적 삶이다. 개별적인 것을 전체성에 대립시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전체와 다른 전체의 실존 방식이 중요하다. (51-52; 옮긴이, 랑시에르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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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에게서 온 편지 : 멘눌라라 퓨처클래식 1
시모네타 아녤로 혼비 지음, 윤병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줄거리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점에서 책의 첫 몇 장을 뒤적이다 말았던 게 3년 전쯤 인 것 같다. 이탈리아어로 된 등장인물 이름과 지명이 하도 입에 안 붙어서. 그러다 요즘 뇌용량에 넘치는 책들을 읽다 보니 그저 재미지게 읽을 만한 책이 뭐 없을까 하던 중 읽게 되었다. 


본작이 첫 소설인 저자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현재 영국에서 변호사로 일한다고. 헌사에 브리티시 에어웨이즈 British Airways를 언급하는데 비행기 지연으로 공항에서 시간 죽이던 중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지연이 고작(?) 한 시간인데 영감을 얻고, 게다가 실천으로 옮겼다니 대단하네. 공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행은 쉽지 않으니까.


이야기의 시작은 자못 흥미롭다. 한데, 워낙 입에 안 붙는 시칠리아 인명 때문인지 중반까지도 소설 속 가문 이름, 성씨들이 죄다 오락가락해서 죽을 맛. 첫 장에 주요 등장인물이 나오지만 그 외 마을 주민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통에 머리에서 쥐 나는 줄 았았는데...제일 뒤에 정리가 되어 있다! 희곡 등장인물처럼. 


지금이야 기계로 아몬드를 수확하지만 20세기 초에는 채찍을 휘둘러가며 아몬드를 땄더랬다. 꼬마 때부터 아몬드를 주우며 가족을 부양하던 소녀. 날래게 아몬드 나무를 타며 야무지게 일하던 소녀는 이후 멘눌라라 즉, '아몬드 줍는 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다 13살에 알팔리페 가문의 하녀로 들어가 수완을 발휘하여 가문의 재산 관리를 책임지다 생을 마감한다. 유언장을 남기지 않아 가문의 재산을 둘러싸고 논쟁이 분분한 가운데 장례식 이후 날아드는 그녀의 편지로 알팔리페 가문과 마을은 순식간에 들썩이고, 사람들은 저마다 기억하는 멘눌라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온갖 소문이 난무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책 소개와는 다른 서사에 맥이 빠진다. 한 여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 두뇌 게임, 지적 유희와는 거리가 멀다(또 낚였어). 클리셰가 알맞게 버무려지고 갈등은 시칠리아식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해결되는 헐렁한 결말. 반전, 당연히 없다. 그래도 저자가 변호사라 그런지 인물 설정과 묘사는 자못 흥미롭다. 되먹지 않은 상류층 인간 군상과 단순하면서 악의 없고 말 많은 로카콜롬바 소시민들의 묘사는 때때로 실소가 나기에 충분하다.


시작부터 이미 고인인 멘눌라라.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제각각의 관점으로 이해된다. 독자 역시 다르지 않다. 멘눌라라가 미련한건지, 충직한 건지, 영리한 건지, 순수한 건지 나는 모르겠다. 숨 막히는 두뇌 게임을 강요하고, 지적 유희로 스릴 넘치는 소설이라는 것은 더더욱 모르겠고. 대신 고단한 운명을 짊어지고 치열하게 삶을 꾸려가는 모든 소시민을 위한 헌사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문장은 제법 여운을 남긴다.



로카콜롬바 사람들은 멘눌라라라고 불리던 마리아 로살리아 인제릴로의 이름을 머지않아 잊어버렸다. 하지만 로카콜롬바 출신이자 도시의 이름을 빛낸 탁월한 학자이고 수집가였던 저명한 변호사, 오라치오 알팔리페의 자랑스러운 이름만큼은 로카콜롬바의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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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영원한 저주를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2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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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노조는 완전히 관료적으로 접근합니다. 노조 대표들은 일반 조합원들에게 완전히 무관심합니다. 육 개월 후 노조는 이 사건에서 이겼고 우리는 하루 휴가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정말로 중요한 문제가 생겨서 노조가 조합원들을 조직해 싸워야 할 때가 오면, 노조원들의 냉담과 냉소를 비롯해 과거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생긴 모든 결과를 감당해야 할 겁니다. 이것이 바로 행정조직을 유지하는 것과 사회운동을 확립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64)

그들은 이란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어요. 신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모두 알지요. 하지만 그들은 늙어서 세상일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난 그들을 경멸해요. 그들은 게으르고 이기적이에요. 아무리 늙어도 나는 계속 세상 소식에 귀를 기울일 거예요. 우리가 언제 다시 필요한 존재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거든요. 그게 바로 행동한다는 거예요. (76)

이 나라에서 그들은 현실성이 결여된 사람들입니다. 사회적 토대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어요. 토론과 내부 투쟁, 권모술수와 독설, 성격 차이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나는 그곳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인가요?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테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뿐이에요.

사회적 토대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고요?

노동자 계급에 대해 끝없이 토론했지만 그 그룹에는 노동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복잡하고 탁상공론 같은 논쟁이었지요. 그 어떤 노동자도 그 그룹에 관심을 보이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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