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은 시간들의 나눔이 재생산되는 지점인 동시에 가능한 간극과 가능한 재배분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 순간은 운명의 저울위에 올려진 추를 재분배함으로써 다른 시간을 발생시키는 힘이다. 나는 시간성의 다른 선을 발생시키는 순간의 바로 그 힘을 지적 해방론의 핵심에서 발견했다. (...) 한쪽에는 교육학적 진보의 정상 시간이 있다. 그것은 바른 순서로 즉 무지 상태에 걸맞게 처음에는 단순한 것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복잡한 지식으로 한 단계식 올라가야 하는 전진처럼 규정되는 시간이다. 무지에서 지식으로 옮아가는 이 경로는 동시에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옮아가는 경로로 간주된다. 그것은 사실 불평등을 무한히 재생산하는 시간성이다. 다른 한쪽에는 해방의 시간이 있다. 그것은 어디서나 출발할 수 있고 어느 때나 뭐든지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요, 이 임의의 지점과 이 임의의 순간에 예상치 못한 접속을 창조하여 연장될 수 있는 시간이다. 바로 이것이 자코토가 설명의 질서에 맞서 내세운 명백히 단순해 보이는 격연이 함의하는 바이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뭔가를 배우라. 그리고 그것을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하라. (33)
시간의 질서를 구조 짓는 명증성이 제거되는 시간, 가능태들의 분배가 다시 짜이고 그와 더불어 시간에 거주하는 자들의 힘도 다시 짜이는 시간의 열림. 그것은 지배적인 시간 질서 내에 뚫린 돌파구에서 구축되는 새로운 공통의 시간이다. (34)
작가는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그를 속박하는 어떤 강력하고 비양심적인 폭군에 의해 줄거리[플롯]를 만들고 희극, 비극, 사랑 이야기와 그리고 전체를 감싸는 개연성의 대사를 제공하도록 강요당하며 그러한 개연성은 너무나 흠잡을 데가 없어 만약 그의 인물들이 실제 인간으로 이세상에 나온다면 그들은 모두 외투의 마지막 단추까지 그 시간의 유행에 맞추어 꽉 채우고 있을 것이다. 폭군은 받들어지고 그리고 소설은 알맞게 완성된다. [...] 속을 들여다보면 인생은 '이렇다'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한 평범한 날의 한 평범한 마음속을 한순간 조사해보라. 그 마음은 무수히 많은 인상들을 받아들인다 - 하찮은 것, 놀라운 것, 덧없는 것 또는 강철의 날카로움으로 새긴 것. 모든 방향에서 인상들은 수없는 원자의 끊임없는 소나기로 내린다. 그것들이 내려올 때 그리고 스스로를 월요일 또는 화요일의 삶으로 구성할 때 예전과는 다른 곳에 강조점이 떨어진다.
- 버지니아 울프, <현대 소설>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솔출판사, 1996, 116쪽
자유로운 작가의 과제는 "원자들이 마음속에 떨어지는 순서를 그대로 기록"하고, "보기에는 제각기 아무리 통일성이 없어 보이더라도 각각의 광경이나 사건이 의식 속에 새겨지는 그 양식을 추적"하는 데 있다. 성마른 독자는 이 원자 소나기의 '하찮은 것'과 '덧없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올드 스쿨 소설가들이 그것에 참되고 지속적인 것의 측면을 제공하려는 '하찮은 것'과 '일시적인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물을지 모르겠다. (...) 차이는 바로 무의미한 것과 하루살이 같은 것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유물론자들'은 견고한 것을 원한다. 소설[허구]과 관련하여 견고한 것이란 개연성[그럴듯함]이다. 즉 원자 소나기를 동일성에 속하는 성질들로 변형하기. 우연한 사건들을 원인과 결과의 인지 가능한 도식 안에 봉합하기. (...) 울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을 뒤집어엎는다. 개연성의 논리는 반예술적 거짓말이다. '그럴 법한 대로' 배치된 사물의 질서는 감각적 원자들의 위대한 민주주의에 압제를 행사한다. (...)진리는 개별적인 것에 있다. 하지만 이는 일상생활의 잇달음과 반복의 무의미한 전개가 아니다. 그것은 원자들의 우발적 편성 각각에 내재하는 위대한 공존, 보편적 삶이다. 개별적인 것을 전체성에 대립시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전체와 다른 전체의 실존 방식이 중요하다. (51-52; 옮긴이, 랑시에르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