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에게서 온 편지 : 멘눌라라 퓨처클래식 1
시모네타 아녤로 혼비 지음, 윤병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줄거리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점에서 책의 첫 몇 장을 뒤적이다 말았던 게 3년 전쯤 인 것 같다. 이탈리아어로 된 등장인물 이름과 지명이 하도 입에 안 붙어서. 그러다 요즘 뇌용량에 넘치는 책들을 읽다 보니 그저 재미지게 읽을 만한 책이 뭐 없을까 하던 중 읽게 되었다. 


본작이 첫 소설인 저자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현재 영국에서 변호사로 일한다고. 헌사에 브리티시 에어웨이즈 British Airways를 언급하는데 비행기 지연으로 공항에서 시간 죽이던 중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지연이 고작(?) 한 시간인데 영감을 얻고, 게다가 실천으로 옮겼다니 대단하네. 공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행은 쉽지 않으니까.


이야기의 시작은 자못 흥미롭다. 한데, 워낙 입에 안 붙는 시칠리아 인명 때문인지 중반까지도 소설 속 가문 이름, 성씨들이 죄다 오락가락해서 죽을 맛. 첫 장에 주요 등장인물이 나오지만 그 외 마을 주민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통에 머리에서 쥐 나는 줄 았았는데...제일 뒤에 정리가 되어 있다! 희곡 등장인물처럼. 


지금이야 기계로 아몬드를 수확하지만 20세기 초에는 채찍을 휘둘러가며 아몬드를 땄더랬다. 꼬마 때부터 아몬드를 주우며 가족을 부양하던 소녀. 날래게 아몬드 나무를 타며 야무지게 일하던 소녀는 이후 멘눌라라 즉, '아몬드 줍는 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다 13살에 알팔리페 가문의 하녀로 들어가 수완을 발휘하여 가문의 재산 관리를 책임지다 생을 마감한다. 유언장을 남기지 않아 가문의 재산을 둘러싸고 논쟁이 분분한 가운데 장례식 이후 날아드는 그녀의 편지로 알팔리페 가문과 마을은 순식간에 들썩이고, 사람들은 저마다 기억하는 멘눌라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온갖 소문이 난무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책 소개와는 다른 서사에 맥이 빠진다. 한 여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 두뇌 게임, 지적 유희와는 거리가 멀다(또 낚였어). 클리셰가 알맞게 버무려지고 갈등은 시칠리아식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해결되는 헐렁한 결말. 반전, 당연히 없다. 그래도 저자가 변호사라 그런지 인물 설정과 묘사는 자못 흥미롭다. 되먹지 않은 상류층 인간 군상과 단순하면서 악의 없고 말 많은 로카콜롬바 소시민들의 묘사는 때때로 실소가 나기에 충분하다.


시작부터 이미 고인인 멘눌라라.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제각각의 관점으로 이해된다. 독자 역시 다르지 않다. 멘눌라라가 미련한건지, 충직한 건지, 영리한 건지, 순수한 건지 나는 모르겠다. 숨 막히는 두뇌 게임을 강요하고, 지적 유희로 스릴 넘치는 소설이라는 것은 더더욱 모르겠고. 대신 고단한 운명을 짊어지고 치열하게 삶을 꾸려가는 모든 소시민을 위한 헌사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문장은 제법 여운을 남긴다.



로카콜롬바 사람들은 멘눌라라라고 불리던 마리아 로살리아 인제릴로의 이름을 머지않아 잊어버렸다. 하지만 로카콜롬바 출신이자 도시의 이름을 빛낸 탁월한 학자이고 수집가였던 저명한 변호사, 오라치오 알팔리페의 자랑스러운 이름만큼은 로카콜롬바의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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