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때문에 [다운독]이라는 요가 앱이 한 달 무료로 풀린 적이 있다. 이때다 싶어 열심히 했다. 무료 기간이 끝나고 결제의 유혹이 있었으나 끈기 없음에다 초보자인 나는 [다운독] 유튜브 버전으로 수련을 결심, 지금도 (관성인지는 몰라도) [다운독]을 이용한다. 유튜브로는 개인별 맞춤 세팅이 불가능하지만, 비기너인 나에겐 기본 프로그램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찔끔찔끔하다 보니 어떻게 하나 싶던 차투랑가 단다아사나도 할 수 있게 됐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게 이런 건가. 차투랑가 단다아사나는 모든 레벨에 들어가는 아사나(=자세)지만 초보자가 어떻게 저걸 하나 싶게 난도가 있다. 인간적으로 팔을 90도 구부려 몸을 판판하게 낮추는 게 말이 되는가. 하긴 더 말도 안 되는 자세가 많지만, 난 초보자 단계니까 할 일이 없다. 하지만 차투랑가는 모든 연결의 기본이라 엉망이라도 해야만 하는 자세다. 그러다 결국 모양새를 갖추고 (부들부들) 하게 된 것.


혼자 방구석 요가만 하면 안 될 것 같아 요가원을 알아보는데 매트며 바리바리 챙겨 다닐 생각을 하니 귀찮음병이 도진다. 근데 [다운독]을 하면서 자세 이름을 알아듣는 건 왜지? 생각해 보니 내가 요가원을 다녔던 것이다. 오래전에. 그것도 인도 선생님께 배웠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도 초보자반이었다. 아니 도대체 초보자만 몇 년이야... 한 번 기억이 나니 학원에 다녔던 때가 새록새록 떠오르더라는. 선생님이 마지막 수업 날 다음 레벨 맛보기라며 머리 서기였나, 그 자세를 쉽게 하는 법을 알려줬는데 나는 못했다. 벽에 기대서 연습하면 쉽다는데 벽에 기대는 것부터가 일이다. 그때는 젊은(?) 혈기로 몇 번 도전했지만 이제는 쟁기 자세도 조심조심해야 할 판인데 시도조차 말아야지. 만년 초보자라도 난 만족한다.



📖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 다른 신체가 있다는 걸 기억하자. 이를 통해 완벽한 자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자. 수많은 요가 자세들을 미학적으로 완벽하게 성취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팔각 자세를 수행하며 몸을 자세에 맞추는 것이 아닌, 자세를 몸에 맞게 이용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요기는 성취를 위해 요가를 수행하지 않는다. 요가는 깨달음을 위한 것이다.

— 요가, 몸으로 신화를 그리다 중에서



<요가, 몸으로 신화를 그리다>는 요가 지침서가 아니라 각 아사나가 유래한 신화 소개다. 그래서 재밌다. 힌두 신화는 익숙하지도 않고 많은 이름이 쏟아져나와서 한 장 넘기면 까먹을 판이지만, 흥미진진하다. 소개하는 자세 모두 일러스트를 넣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아 아쉽지만 요가의 의미, 목표, 의도를 즐겁게 되새길 수 있는 책이다.


요가 자세는 한 번 취하고 유지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혹은 어설프게 하는 자세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다니 좀 더 가다듬게 된달까. 물론 못하는 자세도 있다. 저 팔각 자세부터가..... 요즘은 손목 아픈 게 도져서 손목 안 쓰는 자세 위주로 연습 중이다. (삼각 자세 👍) 왠지 벌서는 것 같은 의자 자세가 원숭이 하누만이 스스로 권위를 세운 데에서 유래했다니 자부심을 품고 수련하자. 좋아하는 나무 자세로 관대한 마음을 키워보자. 다람쥐의 줄무늬가 라마의 손자국이라니 너무 귀엽지 않나. 다리 자세를 할 때마다 부지런한 다람쥐가 곁에 있다고 생각해야지.



"당신은 농부와 같아야 한다. 농부가 씨뿌리는 날 행복한 이유는 훗날의 추수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 제대로 씨를 뿌리고 심었기 때문이다." 

— B.K.S. 아헹가




의자 자세는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하여 요기가 내면의 권위를 세우게 해준다. 자신의 자리가 제공되기를 하염없이 기다릴 필요는 없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드러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누만이 택한 방식을 떠올려보라.

유연함과 강인함, 뿌리내림과 펼침. 나무는 이처럼 대립되는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시킨 존재다.

나무는 인내와 관대함을 나타낸다. 나무는 누구에게 자신의 과일과 그늘을 줄지, 누구의 비바람을 막아줄지 선택하지 않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3-24 0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가센터 문닫아서 안한지 반년이 지나가는데 이 글 읽고 나니 하고싶어지네요. 열심히 혼자서라도 해야겠어요.

고자질하는머리 2023-03-24 20:53   좋아요 0 | URL
응원합니다! 즐겁게 수련하시길 :)
 

오물오물 야금야금 읽어 간 <지속의 순간들>.

사진의 연대기나 사진작가에 따른 구분 없이, 널을 뛰거나 훅 들어오는 제프 다이어의 글줄을 쫓아가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난 사진을 잘 모른다고요.) 뒤에 '사진가 연대표'가 있기는 하지만 이걸 먼저 읽었던들 이 리듬은 달라졌을 것 같지 않다. (<인간과 사진>은 어느 정도 선형적 구조로 흘러간다.)


되새김질 같은 리듬에는 글과 사진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듯한 감각도 한몫했다.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를 읽었을 때처럼 묘한 배신감과 흥분이 뒤섞인. 어느덧 이 페이지 저 페이지로 시나브로 생각의 널을 뛴다. 뒤의 사진가 목록은 더는 연대표로 읽히지 않는다. 서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엔딩크레딧이 된다. 


다이어는 사진에 관해 읽음으로서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을 본 적 없이 아버스에 관한 손택의 글을 읽었다.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에는 아버스의 사진이 없다. 나는 손택과 다이어가 아버스에 관해 쓴 글을 읽기 전에 아버스의 사진을 알았다. 다이어의 책에도 아버스의 사진은 없다. 아버스를 찍은 윌리엄 게드니의 사진 — 미인 대회 출전자들을 찍는 아버스의 모습 — 이 한 장 있을 뿐이다.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연민


📖

사진은 애수가 깃들어 있는 예술, 황혼의 예술이다. 사진에 담긴 피사체는 사진에 찍혔다는 바로 그 이유로 비애감을 띠게 된다. 추하거나 기괴한 피사체조차도 사진작가의 눈길이 닿으면 그때부터 고귀해지기에 감동을 줄 수도 있다. 모든 사진은 메멘토 모리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또는 사물)의 죽음, 연약함, 무상함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을 정확히 베어내 꽁꽁 얼려 놓는 식으로, 모든 사진은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증언해 준다.

-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중



글쓰기가 막막할 땐 하나의 모퉁이에서 시작해서 점점 채워가라는 어느 작가의 글을 본 것 같다. 단어 하나가 문장이 되고, 문단이 되고, 세계가 되는 확장 말이다. 아버스의 사진은 모퉁이 밖에서 서서히 침습해오는 것 같다. 아버스의 프레임 안 괴짜들은 상냥하고 솔직하고 당당하다. 손택의 비평대로 아버스는 괴짜 '친구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세상의 이면을 포착했다. '친구들'과 함께 아버스 자신도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 그 프레임 안에서는 모두가 비정상이고 기괴한 모퉁이 밖 인간이다. 사진을 일종의 예언이라고 믿었던 아버스는 기괴한 괴짜들을 남기고 떠났다. 피사체는 사라지고 사진은 남는다. 


'기형인들의 사진가' 아버스는 손택에게 사진 비평의 영감을 씌워 주었지만, 내가 아버스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매우 사적이다. 1971년 7월 26일, 최후의 만찬. 아버스는 이 짧은 일기를 마지막으로 욕조에서 손목을 긋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

아버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로 아버스의 피사체는 그녀가 숨겨진 마음을 표면적으로 분출시키는 방법으로 “기괴한 사람들”을 찍은 것처럼, 그녀의 운명을 간접적으로 재현한 것이 되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와 다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게 이 모든 것이 조금이나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은 당신의 불행과 같지 않다.” 그렇지만 동시에 “모든 차이점은 닮은 점이기도 하다.” 웰티가 주장한 대로 아버스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침해했다면 아버스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가진 고통과 두려움을 드러내었다.

- 제프 다이어 <지속의 순간들> 중



그의 작품 세계가 보여 주는 강렬함 만큼 잊지 못할 인생의 기록. 세상에 온 날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 누군가와 함께 세상에 왔다는 감정은 지난한 삶 속에서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은 들게 한다. 세상에서 떠나는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메멘토 모리다. 어제 나는 없었지만 오늘 나는 있다. 그리고 어제는 있었지만 이제는 없다는 증거를 남기고 아버스는 떠났다.


하지만 같은 해 찍은 텅 빈 영화 스크린처럼 깊은 모호함 속에 그는 살아 있다. "이 사진들은 거기에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없는 것들의 증거다. 얼룩과도 같다. 그리고 그 적막에는 놀라운 면이 있다. 외면할 수도 있지만, 돌아보면 그들은 여전히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말처럼 아버스는 어둠 속에서 우리를 향해 있다. "삶을 뛰어넘는, 신화적이며 나이가 들지 않는" 모습으로.




피사체의 시간


📖 

무엇인가 애정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것의 외양을 보게 되지만,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의 기능을 봐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기능이라는 것은 시간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기에, 시간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중


피사체는 사진으로 남으면서 하나의 사물이 된다. 사진이란 피사체를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고 손택은 말했다. 사진작가의 손을 떠난 네모난 사물도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다. 사진의 감각이 침습하는 순간 나는 고귀해지기도, 연약해지기도, 잔혹해지기도 — 그리고 모두 다가 되기도 — 한다. 사진의 구축과 사진의 효과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사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새로운 감각 환경이다. 


앙드레 케르테스가 찍은 워싱턴 스퀘어 파크(1952, 표지 이미지)와 폴 스트랜드의 센트럴 파크(1913~14) 사이에는 거의 40년의 시간 차가 존재하는데 다이어의 말처럼 같은 사진의 다른 부분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같은 곳을 찍었든 한 사람이 다른 시간을 찍었든, 시공을 벗어난 이 사진 속 눈 위를 걷는 사람은 좀머 씨를 생각나게 한다. 시계처럼 줄기차게 걷는 좀머 씨. 40년 동안 걷고 있는 좀머 씨.



"그러다가 죽겠어요!"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Washington Square Day, 1954. ⓒ The Andre Kertesz Estate, Colorado Photographic Arts Center



걷는다는 건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위이자 슬픔의 표현이다. 한 손에 지팡이를 쥐고 죽어라 걷는 좀머 씨에게 카메라를 목에 거는 아버스가 겹친다. 일하기를 두려워하던 때 아버스는 친구에게 "카메라를 쓰지 않아도 목에 건다. 그리고 카메라를 멜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라는 편지를 썼다. 여름*은 가고 아버스도 더는 카메라를 메지 않는다. 하지만 코트의 남자는 또 다른 사진을 "포용하기 위해"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시간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 

*좀머 sommer : 독일어 '여름'




언제나 비껴갈 것만 같던 시간은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것 외에 다른 일은 없다는 듯, 아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어떠한 속임수도 없이. 우리는 시간의 피사체가 된다. 그렇다면 아버스의 친구들처럼 상냥하고 솔직하게 자세를 취하자. 랑시에르가 말한 대로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의 반직선이 아닌 하나의 환경이자 삶의 형태라고 한다면 그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자. 침묵이든 섬광이든 시간을 '소유'하자. 시간이 우리를 살게 하자. 


시간 속을 사는 우리. 시간의 수용 형태에 따라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전혀 다른 시간을 살수도 있다. 그것은 영화 스크린을 찍은 두 사진작가의 방식으로도 말할 수 있다. 사물의 미세한 어떤 부분을 독점하는 아버스의 모호함일 수도, 모든 것을 삼키고 환히 빛나는 히로시 스기모토의 방식일 수도 있다. 한쪽은 어둠을 삼키고 다른 쪽은 빛을 발한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A photograph is a secret about a secret.
The more it tells you the less you know."


DIANE ARBU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사고 싶은 책이 생겨나지만

되도록 참고 있다. 리커버의 유혹은 특히나 조심해야 한다. 모양새에 약한 인간인 나에게 너무 위험해... 요즘은 서점앱을 잘 안 써서 리커버가 바로바로 눈에 띄지 않아 다행이지만 일단 보게 되면 한동안 아른거려서 쪼오금 힘들다. 번역이 개정되어 나오는 게 아니면 굳이 살 필요는 없다....라고, 오늘도 알라딘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배너에 떠 있는, 그리고 장바구니에 묵혀있는 녀석들을 보며 (어떤 건 품절돼버렸다 후후) 마음을 다잡는다. 난 (반강제) 미니멀리즘을 실천 중이라고.


-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

의식의 흐름 따라 읽는/읽을 책은 김수한무 씨 이름만큼 끝이 없고, 그래서 쓸 말은 많은데 정리가 안 된다. 마구잡이 생각의 고삐를 어찌 잡아야 할까. 




① 하얼빈 (feat. 부활, 마태오 복음, 이집트 왕자, 출애굽기)

포수이지 무직, 담배팔이 두 청년. 노회한 제국 관료. 어린 아들 둘과 낯선 곳에 발 디딘 여인. 죄수의 성사를 집전하러 떠나는 성직자. 부산스럽지 않은 묘사로 그리는 하얼빈은 르포르타주에 가깝지만 소설이기에 허구적 서사를 상상하며 읽었다. 그리고 이 소설의 뜻밖에 지점은 '사실'에 있었다.



✒️

안중근은 1910년의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남아 있었다. 

- <하얼빈> 후기 중 -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안중근 추모 미사가 1993년 8월이었다는 <<후기>>는 믿을 수가 없었다. 73년도 아니고 83년도 아닌 1993년... 이전까지 안중근 의사가 공식적으로 '죄인'이란 것을 처음 알았다. 



📖

안중근은 사제를 능멸했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반했으며, 교회 밖으로 나가서 살인의 대죄를 저질렀으므로, 그가 비록 영세를 받았다 해도 더 이상 교회의 자식이 아니라고 뮈텔은 하느님께 고했다. 하느님은 세속의 일에 관하여 대답하지 않았다. 

- 17 중 -



야훼는 10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심판하고 예수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늘. 신앙은 많지만 영혼은 하나이며,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고 톨스토이 할아버지도 강조했는데(아 근데 톨스토이도 파문당했지).


안중근 의사는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날은 밸런타인 데이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선물(초콜릿)을 주고받는 날이기도 한데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당시 군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로마법을 어기고 혼인성사를 집전하다 순교한 발렌티누스 주교의 축일이라고 한다. 결혼금지법은 세배루스 황제 시대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수감된 안중근을 만나려는 빌렘 신부에게 조선 대목구장 뮈텔은 "안중근은 제 발로 걸어서 교회 밖으로 나가서 죄악을 저지른 자이다. 안중근은 이미 교회와 관련 없다. 나는 하느님을 대신해서 그의 죄를 사하여줄 수가 없다"라며 여순 출장을 불허하는 편지를 보낸다. 안중근이 십계명을 어긴 죄인인 까닭이지만 저변에 깔린 '윗사람들의 사정'도 컸다. 


빌렘은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친다.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여순으로 가는 진남포 부두에서였다.


군율이 아무리 엄격해도 사랑을 강제할 순 없다. 톨스토이는 사회와 질서가 이대로나마 존속되는 것은 재판과 처벌, 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돌보며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 그리스도의 종들'이 백성들에게 이를 기르게 한다는 톨스토이의 표현처럼 지식, 교육, 법치, 종교에서 사람이 사라진 이상을 좇는 것은 질병이다. 포토밭에서 우리는 무엇을 했나. 



📖

“그럼 한 가지 질문해주십시오. 법률을 지키지 않는 인간에게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느냐고요?” 영국인이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질문을 전했다.
노인은 잇새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이상하게 웃어댔다.
“법률이라고?” 노인은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되뇌었다. “먼저 자기 쪽에서 모든 사람 것을 약탈해서 토지 재산을 다 뺏고, 거기에 항거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다음에 약탈을 하지 마라, 살인을 하지 마라 하는 식의 법률을 만들지 않았느냐 말이야. 그런 법률은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만들었어야지.”

- <부활> 3부 27 중 -



성경을 읽으면서 네흘류도프는 되뇐다. "고작 이런 것뿐인가?" 인간은 누구나 영혼이 있고 자기 영혼을 믿으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톨스토이는 말한다. 영혼을 자아로 바꾸면 받아들이기가 수월하다. '자기 영혼'을 믿는 일,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모든 인간이 자기를 믿으면 "눈먼 강아지처럼 쏘다니지 않고" 상관도 필요 없게 된다. 이 땅에서 삶의 주인은 자기인 것이다. 


고작 그것뿐이다. 포도밭에서 자신의 일만 하면 된다. "어떤 식으로 결말을 맺을지, 그것은 미래가 보여줄 것이다." 




② 가짜 노동 - 덴마크에서 쏘아올린 붉은 별

'김수한무 읽기'의 원흉이다. 덴마크 '가짜 노동'의 실태가 대체 어떻길래 싶어 읽다가 
그림자 노동 - 게으를 권리 - 랑시에르 - 마태오 복음(또!) - 캉디드 - 왜 마르크스는 옳았는가 -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공산당 선언 - 임금 노동과 자본 - 임금, 노동, 이윤에 이르러 결국 <자본론>으로 치닫고 있다. 들춰만 보는데도 머리가 아프다. 오랜만에 어려운 책을 잡았다. 흰머리 많이 생긴 것 같아.....(그리고 많이 생길 예정). 


- 프리드리히 엥겔스 
엥겔스 하면 괴팍한 마르크스의 대인배 친구, 최고의 조력자 등 2인자 이미지로 넘기는 경우가 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공산주의의 원리>>를 읽던 중 퍼뜩 생각이 미쳤다. 엥겔스는 한 명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는 것을. 왜 한 번도 그의 단독(?) 저작을 볼 생각을 안 했을까. 이렇게 해서 김수한무 무한 반복, 읽어 갈 책은 또다시 늘어난다. 김수한무 씨 잡으러 탄천으로 가야 할 판. 


어쨌든 결론은, 세상은 다시 한번 변하고 있고 이제는 노동을 이해하고 보상하는 방식에 도전해야 한다는 것. 애덤 스미스 이래로 굳어진 '노동시간'이라는 관념 자체를 버릴 때 비로소 이 도전은 실현될 수 있다.




③ 편의점 인간 - 사물들의 우주 

왜 난 이 책을 추리/미스터리라고 생각했지? ‘18년 동안 같은 편의점에서 알바만 하던 여성’, ‘보통 인간인 척’, 이런 단어에만 눈이 꽂혀 모종의 이유로 18년 동안 편의점에서 칼을 갈던 여성이 세상에 나가 부조리에 맞서 활극(?)을 펼친다, 뭐 이런 엉뚱한 망상을 해버렸다. 


철 지난 과거를 사는 남자와 오지 않은 미래를 사는 여자. 그리고 그 어딘가의 군상. 흥미로운 지점은 편의점이라는 ‘사물’을 문학적 극단으로 형상화하는 데 있다. 호기심은 어느덧 기묘함과 씁쓸함을 남기며 소설이라 선을 긋다가도 왠지 모를 연민으로 서글퍼진다.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듯한 이 불편한 소설을 읽고서 <<사물들의 우주 The Universe Of Things>>라는 단편이 떠올랐다. 영국 작가 기네스 존스의 SF 단편인데 사변적 실재론자인 스티븐 샤비로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 단편에서 제목을 따왔기 때문이다. 



📖

He discovered why the alien filled him with such helpless, inarticulate delight. The machines promised, but they could not perform. They remained things, and people remained lonely. (...) The aliens had the solution to human isolation: a talking world, a world with eyes; the companionship that God dreams of. The alien’s visitation had stirred in him a God-like discontent. 

+ + +

Human beings, when they wanted to express feelings of profound communion with the planet, with the race, spoke of being “a part of the great whole.” Having lived so many years – from the start of their evolution, in a sense, the pundits reckoned – in a world created by themselves, the aliens could not experience being a part. There were no parts in their continuum: no spaces, no dividing edges.

- 기네스 존스 <사물들의 우주> 중 -



외계인이 타던 자동차 정비를 맡게 된 인간 정비사는 외계인의 감각 세계를 통해 주변을 경험하게 된다. 정비사는 굉장한 특권을 누리는 것처럼 느끼면서도 이내 욕지기를 참지 못한다. 그 감각은 인간이 상호 작용을 할 때 느끼는 세상의 일부라는 지각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전체도 없고 부분도 없는 불쾌한 뒤섞임이다. 

샤비로는 이 픽션에서 철학적 질문을 읽어내고 생동하는 사물들이 우리를 '초대'하여 작용하게 한다는 논지를 전개한다. 우리 자신의 '범주'는 무엇인가?


사변적 실재론은 어렵다. 인간 직관에 반하는, 비표상적 맥락 때문일 것이다. 그레이엄 하먼이 주장하는 OOO(Object-Oriented Ontology)는 단순하고 동글동글한 이름과는 다르게 내용은 그렇지 못하다. <편의점 인간>을 읽고 사변적 실재론이란, 이름도 생소한 철학이 난데없이 떠오르다니. 요즘의 관심사로 인해 나의 작은 두뇌가 멋대로 갖다 붙이기를 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객체와 인간의 관계 맺음 — 창발과 공생, 소멸과 탄생 — 의 이야기라고 내 나름대로 정리. 정말 연관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는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공부할 것은 점점 늘어만 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 추리소설의 해 vol. 1에 이어서



③ 와카타케 나나미

'하무라 아키라'를 만난 것 역시 작년 즐거움 중 하나. 가만, 절판 외 나나미 작품은 다 읽은 것 같은데? 뜻하지 않은 '와카타케 나나미 모아 읽기' 달성인가.


- 하자키 일상 시리즈

몇 년 전 읽은 <녹슨 도르래>를 계기로 '코지'한 미스터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해서 같은 작가의 <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을 골랐다. 유쾌+상쾌+통쾌의 무언가가 필요했던 때 살인+코지의 조합이라니, 딱 아닌가.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진달래 고서점의 사체>로 기대치는 절정으로 올라가 하자키 일상 시리즈 독파. 하지만... <고양이섬 민박집의 대소동>은 나의 하자키 시리즈가 이렇게 끝나다니, 라는 탄식만이 남았다. <어두운 범람>과 <이별의 수법> 이후 읽어서 인지, 제목에 한껏 부풀었다 그 반작용인지, 둘 다 인지. 하여튼 고양이는 죄가 없다.





























단편은 '일어난 것'이고 장편은 '여파'라고 했던가. <어두운 범람>과 <이별의 수법>만큼 이 분야의 좋은 보기는 없으리라. '하무라 아키라'의 다음 시즌은 언제일까. 초기 활약도 궁금하지만, 그의 소망대로 일흔일곱 살 탐정 하무라 아키라를 바라본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 나의 차가운 일상

작가의 풋풋한 시절 초기 작품으로 현재 나의 (구닥다리) 감정선과 괴리를 실감한 와카타케 일상 시리즈.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1991년 데뷔작. 단편으로 구성된 연작이다. 각 단편이 주인공 와카타케 나나미가 일하는 회사 사보에 1년에 걸쳐 연재되다가 <<조금 긴 듯한 편집 후기>>와 <<마지막 편지>>에서 12개의 사건은 하나의 미스터리로 연결된다. <<마지막 편지>>로 "조금 긴 듯한" 꼬리를 더 늘린다 싶지만, 일상 미스터리 특유의 경쾌하면서도 일본식 괴담의 기묘한 분위기가 독특하다.


<나의 차가운 일상> 회사원 와카타케 나나미가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이)의 죽음을 둘러싼 모종의 사건을 파헤친다. 구성이나 설정에서 재기 발랄함이 도처에 묻어있긴 한데 수습이... 무엇보다 '일상적'이지 않다! 하무라 아키라의 전신을 만난 데 의의를 두련다. 


<나쁜 토끼> 30대 초반의 프리랜서 탐정 하무라 이야기. <저주토끼>랑 은근히 헷갈린다. 정리할 때마다 바꿔 적는다. 제목이 비슷한 것도 있지만 '어둠'을 우화적으로 이야기하는 점에서도 그렇다. 토끼 상야등. 부조리의 신에게 낙점받은 지 오래라는 자조에 어둠 공포증까지 더해진 하무라에게는 성물 같은 물건이다. 40대에 접어든 그가 여전히 온갖 액운을 등에 업고도 발로 뛰는 탐정으로 살게 해주는. 부디 하무라의 토끼가 '저주 토끼'는 아니기를. 그러고 보니 올해가 토끼해던가. 2023년 부디, 복 토끼여 오라.
















📖 

토끼 상야등을 콘센트에 꽂고 다른 전등을 껐다. 토끼는 침대 옆에서 통통하게 살이 찐 채 둔탁하게 빛났다. 

아주 조금의 빛만 있으면 나는 살아갈 수 있다. 눈을 감았다. 

 - 나쁜 토끼, 다시 전초전 중

-----

모든 물건에는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 저주토끼 중





④ 가와이 간지 

- 데드맨 / 단델라이언 / 드래곤플라이 / 구제의 게임

가와이 간지가 내세우는 수사 기법 애브덕션 abduction. 이 추론법은 '귀추법' 혹은 '최선의 설명 추론 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이라는 명칭답게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추리물에 — 진부하냐 참신하냐에 상관없이 —  제법 잘 녹아든다. 














문제는 읽은 모든 작품에서 이게 골자라는 거다. <데드맨>이 흡족한 킬링타임용, 오락 소설이었다면 이후 작품에서는 이 애브덕션이 발목을 잡는다. 이게 가능한가 싶은 설정과 전개는 후반부에서 범인/탐정/형사가 들려주는 마법의 장광설로 싹 정리된다. 저자가 오가닉 마니아인지 생태 관련 지식을 잘 써먹는데 마법의 애브덕션까지 더해지니 <단델라이언>과 <드래곤플라이>는 설정을 위한 서사가 돼버렸다. 제목부터가 민들레, 잠자리라고 하면 모양이 안 산다. 


애브덕션 월드가 하도 공고해서 가부라기 특수반의 활약상도 매번 별다를 게 없다. 그래도 각자의 개성은 확실해서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작가가 패션에도 박식한지 4인방의 개성에 따른 복장 묘사가 인상적이다. 새삼스럽지만 말끔한 슈트에 가죽 구두를 신은 형사라니 살짝 위화감이 든다. 그러고 보니 일본 형사는 커리어가 아니라도 어느 정도 갖춰 입는 듯한데 내 머릿속 표본이라 신빙성은 없다.


<구제의 게임> 골프라는 흔치 않은 소재, 원주민 학살에 얽힌 전설이 어우러져 신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예사롭지 않은 설정이다. 그래서 어김없이 마법의 애브덕션으로, 거기에 진화심리학까지 더해져 살인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하버드 출신(진화심리학 전공) 천재 골퍼에 의해서. 골프 설명이 지루하지 않은 건 의외였다. 




⑤ 나카야마 시치리 

- 웃어라, 샤일록 / 표정 없는 검사 / 작가 형사 부스지마 / 시즈카 할머니에게 맡겨 줘

<작가 형사 부스지마> 내부 고발 소설인가? 우후, 우후후, 우후후후. (부스지마 웃음소리)

출판계 풍자 때문인지 책 만드는 사람들만 줄줄이, 업계 하나 사라질 듯 죽어 나간다. 반복되는 패턴으로 식상할 찰나 들려오는 웃음소리. "우후, 우후후, 우후후후." 시치리 작품은 이야기는 차치하고 직업이나 성격에서 캐릭터 특징이 돋보인다. 부스지마 역시 중독성 있는 웃음소리로 여운을 남긴다.














<시즈카 할머니에게 맡겨 줘> 코지 미스터리에 맛들린 김에 — 하무라 아키라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 골랐다. 그런데 시즈카 할머니는 전직 판사로 안락의자 탐정이라네? 원래 내 취향의 뿌리는 안락의자 탐정이니까, 그리고 할머니가 발로 뛰면서 열일하는 것도 현실성이 없지 않은가. 이런저런 합리화로 시작한 책은 아무 감흥 없는 상태로 중도 하차하게 되었으니. 시치리도 여러 서랍을 가진 작가로 국내 출간작이 꽤 된다. 워낙 순서 없이 읽어서 시치리 월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만, 시즈카 할머니는 시치리 월드에 맡겨 두기로. 



⑥ 넬레 노이하우스 

안 읽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읽은 두 권이 재독이었다. 그럼에도 생각이 날듯 말듯, 플롯을 '추리'해가며 읽었다. 추리소설 읽기에 최적화된 나의 두뇌. 후후. 가만 보니 타우누스 시리즈 중 <영원한 우정으로> 빼곤 다 읽었네. 2/3 이상이 기억 휘발이지만.



⑦ 기타 몇 권






















<기만의 살의> 서간체가 돋보이는 정통 미스터리. 글줄을 잘 따라가면 '범인들'이 누구인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지만 후더닛이 아닌 최후의 '와이더닛'에 방점이 있다. 


<리슐리외 호텔 살인> 초반부 하차 위기를 겪으며 찔끔찔끔 읽어가다 어느새 개성 넘치는 인물들에 푹 빠져 아, 읽기 잘했구나 나 자신을 칭찬했다. 고진감래.


<정체>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고립된 존재, 자기 목소리를 삼키는 데 익숙한 이들이 소리 내어 외치다.


📖 

터질 듯한 절규가, 울부짖음이 법정 안에 울려 퍼진다.

마이도 외쳤다. 있는 힘을 다해 계속 외쳤다.

들리고 있을까.

이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고 있을까…




<그 거울은 거짓말을 한다> 나츠메 형사 vs 키요마사 검사 구도가 인상적이다. 의대 입시에 얽힌 사건이다 보니 학원물 느낌도 난다. BGM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 we all lie🎵


<유리고코로> 살인 고백이 담긴 수기에서 '나'는 유리고코로에 집착한다. 아이 때 유리도코로(안식처)를 잘못 알아들은 것이지만 성인이 된 나에게 안식처는 여전히 유리고코로다. 유리고코로가 없는 나는 나만의 안식처를 만들기 위해 살인을 한다. 

소설은 심연의 불가사의한 파장을 헤집는다. 액자 구성으로 들어간 살인자의 수기는 몰입감을 더한다. 서늘하고 미묘하던 파장은 후반부에서 크게 일렁인 후 잠잠해진다. 의미가 없는 '유리고코로'처럼. 전반부의 흡인력과 기세가 무색하다. 너무 따뜻해져 버렸다. 

저자 누마타 마호카루는 승려를 비롯한 여러 직업을 거쳐 56세에 데뷔했다. <유리고코로>는 2011년 출간이니 63세에 쓴 소설이다. 서늘하고 얼얼한 그것. 작가의 이력만큼, 시간만큼 거쳐와야 느낄 수 있는 감각이려나.



+++



추리소설 분포는 일본 80 / 기타 외국 15 / 한국 5 정도 되는 것 같고,

러시아도 아닌 일본 이름이 이리 헷갈릴 줄이야. 확실히 전두엽이 녹슬었나 보다.

'추리소설 읽기' 덕분에 독서의 총량은 늘었지만 달이 아닌 손에 집중하지는 않았나 생각해 본다. 

갑자기 많이 먹으면 체하는 법.

2023 독서는 하던 대로, 소소하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만 중국 일본을 물 흐르듯 넘나들며 감칠맛 나는 문체로 완성한 청춘의 질곡.
유려한 필치와 유머로 읽는 맛 나는, 색다른 감성의 미스터리. 하지만 “몇십 년 만에 한 번 나올 위대한 소설”이라는 데는 글쎄. 퍼뜩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을 다시 봐야겠다는 의욕이 인다.



"자네 할아버지는 늘 화가 나 있었어요." 위에 씨가 말했다. "가슴속에 아직 희망이 있었던 거죠."
"희망?"
"조바심과 초초함은 희망의 다른 얼굴이니까요."
위에 씨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냥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대륙을 떠날 때 멈췄던 할아버지의 시계는 대륙에 한 방 먹이기 전까지는 그대로 멈춰 있었던 것이다.

노인들이 성별을 넘어 손을 맞잡은 그림은 늘 나를 살짝 흐뭇하게 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온전한 배려뿐이다. 아니면 공범자 의식. 성별을 뛰어넘을 만큼, 노인들은 의외로 권모술수에 능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