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고 싶은 책이 생겨나지만

되도록 참고 있다. 리커버의 유혹은 특히나 조심해야 한다. 모양새에 약한 인간인 나에게 너무 위험해... 요즘은 서점앱을 잘 안 써서 리커버가 바로바로 눈에 띄지 않아 다행이지만 일단 보게 되면 한동안 아른거려서 쪼오금 힘들다. 번역이 개정되어 나오는 게 아니면 굳이 살 필요는 없다....라고, 오늘도 알라딘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배너에 떠 있는, 그리고 장바구니에 묵혀있는 녀석들을 보며 (어떤 건 품절돼버렸다 후후) 마음을 다잡는다. 난 (반강제) 미니멀리즘을 실천 중이라고.


-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

의식의 흐름 따라 읽는/읽을 책은 김수한무 씨 이름만큼 끝이 없고, 그래서 쓸 말은 많은데 정리가 안 된다. 마구잡이 생각의 고삐를 어찌 잡아야 할까. 




① 하얼빈 (feat. 부활, 마태오 복음, 이집트 왕자, 출애굽기)

포수이지 무직, 담배팔이 두 청년. 노회한 제국 관료. 어린 아들 둘과 낯선 곳에 발 디딘 여인. 죄수의 성사를 집전하러 떠나는 성직자. 부산스럽지 않은 묘사로 그리는 하얼빈은 르포르타주에 가깝지만 소설이기에 허구적 서사를 상상하며 읽었다. 그리고 이 소설의 뜻밖에 지점은 '사실'에 있었다.



✒️

안중근은 1910년의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남아 있었다. 

- <하얼빈> 후기 중 -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안중근 추모 미사가 1993년 8월이었다는 <<후기>>는 믿을 수가 없었다. 73년도 아니고 83년도 아닌 1993년... 이전까지 안중근 의사가 공식적으로 '죄인'이란 것을 처음 알았다. 



📖

안중근은 사제를 능멸했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반했으며, 교회 밖으로 나가서 살인의 대죄를 저질렀으므로, 그가 비록 영세를 받았다 해도 더 이상 교회의 자식이 아니라고 뮈텔은 하느님께 고했다. 하느님은 세속의 일에 관하여 대답하지 않았다. 

- 17 중 -



야훼는 10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심판하고 예수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늘. 신앙은 많지만 영혼은 하나이며,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고 톨스토이 할아버지도 강조했는데(아 근데 톨스토이도 파문당했지).


안중근 의사는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날은 밸런타인 데이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선물(초콜릿)을 주고받는 날이기도 한데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당시 군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로마법을 어기고 혼인성사를 집전하다 순교한 발렌티누스 주교의 축일이라고 한다. 결혼금지법은 세배루스 황제 시대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수감된 안중근을 만나려는 빌렘 신부에게 조선 대목구장 뮈텔은 "안중근은 제 발로 걸어서 교회 밖으로 나가서 죄악을 저지른 자이다. 안중근은 이미 교회와 관련 없다. 나는 하느님을 대신해서 그의 죄를 사하여줄 수가 없다"라며 여순 출장을 불허하는 편지를 보낸다. 안중근이 십계명을 어긴 죄인인 까닭이지만 저변에 깔린 '윗사람들의 사정'도 컸다. 


빌렘은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친다.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여순으로 가는 진남포 부두에서였다.


군율이 아무리 엄격해도 사랑을 강제할 순 없다. 톨스토이는 사회와 질서가 이대로나마 존속되는 것은 재판과 처벌, 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돌보며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 그리스도의 종들'이 백성들에게 이를 기르게 한다는 톨스토이의 표현처럼 지식, 교육, 법치, 종교에서 사람이 사라진 이상을 좇는 것은 질병이다. 포토밭에서 우리는 무엇을 했나. 



📖

“그럼 한 가지 질문해주십시오. 법률을 지키지 않는 인간에게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느냐고요?” 영국인이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질문을 전했다.
노인은 잇새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이상하게 웃어댔다.
“법률이라고?” 노인은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되뇌었다. “먼저 자기 쪽에서 모든 사람 것을 약탈해서 토지 재산을 다 뺏고, 거기에 항거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다음에 약탈을 하지 마라, 살인을 하지 마라 하는 식의 법률을 만들지 않았느냐 말이야. 그런 법률은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만들었어야지.”

- <부활> 3부 27 중 -



성경을 읽으면서 네흘류도프는 되뇐다. "고작 이런 것뿐인가?" 인간은 누구나 영혼이 있고 자기 영혼을 믿으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톨스토이는 말한다. 영혼을 자아로 바꾸면 받아들이기가 수월하다. '자기 영혼'을 믿는 일,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모든 인간이 자기를 믿으면 "눈먼 강아지처럼 쏘다니지 않고" 상관도 필요 없게 된다. 이 땅에서 삶의 주인은 자기인 것이다. 


고작 그것뿐이다. 포도밭에서 자신의 일만 하면 된다. "어떤 식으로 결말을 맺을지, 그것은 미래가 보여줄 것이다." 




② 가짜 노동 - 덴마크에서 쏘아올린 붉은 별

'김수한무 읽기'의 원흉이다. 덴마크 '가짜 노동'의 실태가 대체 어떻길래 싶어 읽다가 
그림자 노동 - 게으를 권리 - 랑시에르 - 마태오 복음(또!) - 캉디드 - 왜 마르크스는 옳았는가 -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공산당 선언 - 임금 노동과 자본 - 임금, 노동, 이윤에 이르러 결국 <자본론>으로 치닫고 있다. 들춰만 보는데도 머리가 아프다. 오랜만에 어려운 책을 잡았다. 흰머리 많이 생긴 것 같아.....(그리고 많이 생길 예정). 


- 프리드리히 엥겔스 
엥겔스 하면 괴팍한 마르크스의 대인배 친구, 최고의 조력자 등 2인자 이미지로 넘기는 경우가 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공산주의의 원리>>를 읽던 중 퍼뜩 생각이 미쳤다. 엥겔스는 한 명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는 것을. 왜 한 번도 그의 단독(?) 저작을 볼 생각을 안 했을까. 이렇게 해서 김수한무 무한 반복, 읽어 갈 책은 또다시 늘어난다. 김수한무 씨 잡으러 탄천으로 가야 할 판. 


어쨌든 결론은, 세상은 다시 한번 변하고 있고 이제는 노동을 이해하고 보상하는 방식에 도전해야 한다는 것. 애덤 스미스 이래로 굳어진 '노동시간'이라는 관념 자체를 버릴 때 비로소 이 도전은 실현될 수 있다.




③ 편의점 인간 - 사물들의 우주 

왜 난 이 책을 추리/미스터리라고 생각했지? ‘18년 동안 같은 편의점에서 알바만 하던 여성’, ‘보통 인간인 척’, 이런 단어에만 눈이 꽂혀 모종의 이유로 18년 동안 편의점에서 칼을 갈던 여성이 세상에 나가 부조리에 맞서 활극(?)을 펼친다, 뭐 이런 엉뚱한 망상을 해버렸다. 


철 지난 과거를 사는 남자와 오지 않은 미래를 사는 여자. 그리고 그 어딘가의 군상. 흥미로운 지점은 편의점이라는 ‘사물’을 문학적 극단으로 형상화하는 데 있다. 호기심은 어느덧 기묘함과 씁쓸함을 남기며 소설이라 선을 긋다가도 왠지 모를 연민으로 서글퍼진다.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듯한 이 불편한 소설을 읽고서 <<사물들의 우주 The Universe Of Things>>라는 단편이 떠올랐다. 영국 작가 기네스 존스의 SF 단편인데 사변적 실재론자인 스티븐 샤비로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 단편에서 제목을 따왔기 때문이다. 



📖

He discovered why the alien filled him with such helpless, inarticulate delight. The machines promised, but they could not perform. They remained things, and people remained lonely. (...) The aliens had the solution to human isolation: a talking world, a world with eyes; the companionship that God dreams of. The alien’s visitation had stirred in him a God-like discontent. 

+ + +

Human beings, when they wanted to express feelings of profound communion with the planet, with the race, spoke of being “a part of the great whole.” Having lived so many years – from the start of their evolution, in a sense, the pundits reckoned – in a world created by themselves, the aliens could not experience being a part. There were no parts in their continuum: no spaces, no dividing edges.

- 기네스 존스 <사물들의 우주> 중 -



외계인이 타던 자동차 정비를 맡게 된 인간 정비사는 외계인의 감각 세계를 통해 주변을 경험하게 된다. 정비사는 굉장한 특권을 누리는 것처럼 느끼면서도 이내 욕지기를 참지 못한다. 그 감각은 인간이 상호 작용을 할 때 느끼는 세상의 일부라는 지각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전체도 없고 부분도 없는 불쾌한 뒤섞임이다. 

샤비로는 이 픽션에서 철학적 질문을 읽어내고 생동하는 사물들이 우리를 '초대'하여 작용하게 한다는 논지를 전개한다. 우리 자신의 '범주'는 무엇인가?


사변적 실재론은 어렵다. 인간 직관에 반하는, 비표상적 맥락 때문일 것이다. 그레이엄 하먼이 주장하는 OOO(Object-Oriented Ontology)는 단순하고 동글동글한 이름과는 다르게 내용은 그렇지 못하다. <편의점 인간>을 읽고 사변적 실재론이란, 이름도 생소한 철학이 난데없이 떠오르다니. 요즘의 관심사로 인해 나의 작은 두뇌가 멋대로 갖다 붙이기를 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객체와 인간의 관계 맺음 — 창발과 공생, 소멸과 탄생 — 의 이야기라고 내 나름대로 정리. 정말 연관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는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공부할 것은 점점 늘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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