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물오물 야금야금 읽어 간 <지속의 순간들>.

사진의 연대기나 사진작가에 따른 구분 없이, 널을 뛰거나 훅 들어오는 제프 다이어의 글줄을 쫓아가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난 사진을 잘 모른다고요.) 뒤에 '사진가 연대표'가 있기는 하지만 이걸 먼저 읽었던들 이 리듬은 달라졌을 것 같지 않다. (<인간과 사진>은 어느 정도 선형적 구조로 흘러간다.)


되새김질 같은 리듬에는 글과 사진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듯한 감각도 한몫했다.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를 읽었을 때처럼 묘한 배신감과 흥분이 뒤섞인. 어느덧 이 페이지 저 페이지로 시나브로 생각의 널을 뛴다. 뒤의 사진가 목록은 더는 연대표로 읽히지 않는다. 서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엔딩크레딧이 된다. 


다이어는 사진에 관해 읽음으로서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을 본 적 없이 아버스에 관한 손택의 글을 읽었다.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에는 아버스의 사진이 없다. 나는 손택과 다이어가 아버스에 관해 쓴 글을 읽기 전에 아버스의 사진을 알았다. 다이어의 책에도 아버스의 사진은 없다. 아버스를 찍은 윌리엄 게드니의 사진 — 미인 대회 출전자들을 찍는 아버스의 모습 — 이 한 장 있을 뿐이다.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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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애수가 깃들어 있는 예술, 황혼의 예술이다. 사진에 담긴 피사체는 사진에 찍혔다는 바로 그 이유로 비애감을 띠게 된다. 추하거나 기괴한 피사체조차도 사진작가의 눈길이 닿으면 그때부터 고귀해지기에 감동을 줄 수도 있다. 모든 사진은 메멘토 모리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또는 사물)의 죽음, 연약함, 무상함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을 정확히 베어내 꽁꽁 얼려 놓는 식으로, 모든 사진은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증언해 준다.

-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중



글쓰기가 막막할 땐 하나의 모퉁이에서 시작해서 점점 채워가라는 어느 작가의 글을 본 것 같다. 단어 하나가 문장이 되고, 문단이 되고, 세계가 되는 확장 말이다. 아버스의 사진은 모퉁이 밖에서 서서히 침습해오는 것 같다. 아버스의 프레임 안 괴짜들은 상냥하고 솔직하고 당당하다. 손택의 비평대로 아버스는 괴짜 '친구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세상의 이면을 포착했다. '친구들'과 함께 아버스 자신도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 그 프레임 안에서는 모두가 비정상이고 기괴한 모퉁이 밖 인간이다. 사진을 일종의 예언이라고 믿었던 아버스는 기괴한 괴짜들을 남기고 떠났다. 피사체는 사라지고 사진은 남는다. 


'기형인들의 사진가' 아버스는 손택에게 사진 비평의 영감을 씌워 주었지만, 내가 아버스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매우 사적이다. 1971년 7월 26일, 최후의 만찬. 아버스는 이 짧은 일기를 마지막으로 욕조에서 손목을 긋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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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로 아버스의 피사체는 그녀가 숨겨진 마음을 표면적으로 분출시키는 방법으로 “기괴한 사람들”을 찍은 것처럼, 그녀의 운명을 간접적으로 재현한 것이 되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와 다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게 이 모든 것이 조금이나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은 당신의 불행과 같지 않다.” 그렇지만 동시에 “모든 차이점은 닮은 점이기도 하다.” 웰티가 주장한 대로 아버스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침해했다면 아버스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가진 고통과 두려움을 드러내었다.

- 제프 다이어 <지속의 순간들> 중



그의 작품 세계가 보여 주는 강렬함 만큼 잊지 못할 인생의 기록. 세상에 온 날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 누군가와 함께 세상에 왔다는 감정은 지난한 삶 속에서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은 들게 한다. 세상에서 떠나는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메멘토 모리다. 어제 나는 없었지만 오늘 나는 있다. 그리고 어제는 있었지만 이제는 없다는 증거를 남기고 아버스는 떠났다.


하지만 같은 해 찍은 텅 빈 영화 스크린처럼 깊은 모호함 속에 그는 살아 있다. "이 사진들은 거기에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없는 것들의 증거다. 얼룩과도 같다. 그리고 그 적막에는 놀라운 면이 있다. 외면할 수도 있지만, 돌아보면 그들은 여전히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말처럼 아버스는 어둠 속에서 우리를 향해 있다. "삶을 뛰어넘는, 신화적이며 나이가 들지 않는" 모습으로.




피사체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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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애정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것의 외양을 보게 되지만,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의 기능을 봐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기능이라는 것은 시간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기에, 시간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중


피사체는 사진으로 남으면서 하나의 사물이 된다. 사진이란 피사체를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라고 손택은 말했다. 사진작가의 손을 떠난 네모난 사물도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다. 사진의 감각이 침습하는 순간 나는 고귀해지기도, 연약해지기도, 잔혹해지기도 — 그리고 모두 다가 되기도 — 한다. 사진의 구축과 사진의 효과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사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새로운 감각 환경이다. 


앙드레 케르테스가 찍은 워싱턴 스퀘어 파크(1952, 표지 이미지)와 폴 스트랜드의 센트럴 파크(1913~14) 사이에는 거의 40년의 시간 차가 존재하는데 다이어의 말처럼 같은 사진의 다른 부분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같은 곳을 찍었든 한 사람이 다른 시간을 찍었든, 시공을 벗어난 이 사진 속 눈 위를 걷는 사람은 좀머 씨를 생각나게 한다. 시계처럼 줄기차게 걷는 좀머 씨. 40년 동안 걷고 있는 좀머 씨.



"그러다가 죽겠어요!"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Washington Square Day, 1954. ⓒ The Andre Kertesz Estate, Colorado Photographic Arts Center



걷는다는 건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위이자 슬픔의 표현이다. 한 손에 지팡이를 쥐고 죽어라 걷는 좀머 씨에게 카메라를 목에 거는 아버스가 겹친다. 일하기를 두려워하던 때 아버스는 친구에게 "카메라를 쓰지 않아도 목에 건다. 그리고 카메라를 멜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라는 편지를 썼다. 여름*은 가고 아버스도 더는 카메라를 메지 않는다. 하지만 코트의 남자는 또 다른 사진을 "포용하기 위해"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시간을 걷고 있을지 모른다. 

*좀머 sommer : 독일어 '여름'




언제나 비껴갈 것만 같던 시간은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것 외에 다른 일은 없다는 듯, 아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어떠한 속임수도 없이. 우리는 시간의 피사체가 된다. 그렇다면 아버스의 친구들처럼 상냥하고 솔직하게 자세를 취하자. 랑시에르가 말한 대로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의 반직선이 아닌 하나의 환경이자 삶의 형태라고 한다면 그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자. 침묵이든 섬광이든 시간을 '소유'하자. 시간이 우리를 살게 하자. 


시간 속을 사는 우리. 시간의 수용 형태에 따라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전혀 다른 시간을 살수도 있다. 그것은 영화 스크린을 찍은 두 사진작가의 방식으로도 말할 수 있다. 사물의 미세한 어떤 부분을 독점하는 아버스의 모호함일 수도, 모든 것을 삼키고 환히 빛나는 히로시 스기모토의 방식일 수도 있다. 한쪽은 어둠을 삼키고 다른 쪽은 빛을 발한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 볼 수 없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A photograph is a secret about a secret.
The more it tells you the less you know."


DIANE ARB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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