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가면 늘 일본소설 책장에서 발길을 떼지 못하는 나.
이번에는 기필코 다른 분야로 눈길을 줘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어김없이 일본소설 쪽을 향한다.
그곳에서 이만큼 나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책이다라고 말해주듯 유독 허름하게 너덜너덜한 자태를 뽐내는 한권의 책을 만났다.
냉정과 열정사이. 아! 이 책은 영화로도 상영되고 왠지 로맨스에 관해 얘기할때면 등장하는 냉정과 열정사이.
묻고 따질 겨를도 없이 내 손에 들려왔다.
한 제목의 소설을 두 사람의 작가가 쓴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2년에 걸쳐 실제로 연애하듯이 써내려간 릴레이 러브 스토리라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내 손에 들려온 소설은 Rosso와 Blue 두권으로 이뤄진 세트 중 츠지 히토나리가 쓴 냉정과 열정사이였다.
헤어진 연인을 잊지못해 10년후 재회하자는 약속을 가슴에 간직한 준세이의 지독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 Blue.
준세이의 헤어진 연인 아오이가 주인공이 된 이야기는 Rosso. 에코니 가오리의 책도 빨리 찾아들어야겠다.
영화는 생각보다 별로였다는 평에 책도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었는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어간 책이라서 그런가 기대이상이었다.
책 속 글귀가 너무 마음에 들어 글귀를 적어가다보니 노트 2장을 빼곡하게 채워버렸다. 그동안 달달한 로맨스를 읽어가며 나는 이제 늙었다!를 외치곤 했는데 냉정과 열정사이를 보며 또다른 로맨스의 맛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사람이란 살아온 날들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소중한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난 믿고 있다.
아오이가 그 날 밤의 일을 완전히 잊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해도......
아직도 아오이가 잊혀지지 않는다.
괴팍한 나를 멀리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그녀만이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었다. - 11page
미술품 복원 공부를 위해 이탈리아에 온 준세이는 과거의 어떤 기억때문에 더이상 상대를 옭아매는 연애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과거의 연인 아오이를 일상에서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 준세이는 현재의 연인 매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마음 속에 아오이가 똬리를 틀고 있어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담을 수가 없다. 매미는 그런 준세이를 보며 불안함을 느낀다. 자신에게 사랑을 퍼붓는 매미를 밀어내지도 못하면서 가슴 속 아오리의 존재도 떨쳐버리지 못한다. 과거의 연인은 마음 속에 담고 현재의 연인을 품는 준세이는 참으로 무책임하게만 보인다. 일상에서 늘 아오리를 떠올리며 산다.
한 번도 품에 안겨 보지 못한 어머니를 그리며 하늘만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던 준세이는 그런 하늘의 색채를 닮은 아오이를 사랑했다. 현재의 연인 매미를 보면 예전 아오리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던 자신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더욱 준세이는 매미를 밀어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사라져가는 생명을 되살리는 복원사에 매력을 느끼는 준세이는 유채화 복원으로 잃어버린 생명을 되살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나는 이 거리에서 나 자신을 재생시킬 수 있을까, 내 안에 르네상스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준세이는 아오이와 헤어진 이후로 계속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재생하고 싶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보다 그림 복원하는 일에 더 전념을 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자신은 도저히 재생할 수 없는 과거지만 그림만은 재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매력을 찾은 것 같다.
어제는 조금 전이지만 내일은 영원히 혼을 뻗칠 수 없는 저편에 있다. - 44pgae
약속은 미래야, 추억은 과거. 추억과 약속은 의미가 전혀 다르겠지.
누구에게도,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살아가는 과정에 어두운 그림자 한둘은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과거를 쫓아가도 좋은 건지, 또한 미래를 믿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약속.
그 주술적인 올가미에 묶여 있는 나 자신.
그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 줄 알면서도,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미래에도 과거가 기다리고 있다.
서른 살 생일날 5월 25일 - 100page
인간미 넘치는 소박한 애인 매미를 두고 준세이는 이미 떠나간 아오이만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가 책 속에서도 나와있듯이 매미를 떠난 10년 후 다시 그녀를 그리게 되지는 않을까. 그건 모를 일이다. 지금 아오이를 그리워하듯 열정적인 매미를 추억하며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하게된다. 과거밖에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준세이를 보며 아오이와 만나 다시 사랑하게되면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날려버리기는 참 미안하지만 헤어진 8년의 세월이 그들 사이의 장애물이 되진 않을까 싶다. 애써 외면하고 싶겠지만 말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은 과거, 죽도록 후회되는 자신의 책임이 짐이 되서 헤어진 연인에 대한 미련의 사슬을 끊고 있는건 아닐지. 과연 이것을 사랑이라고 해야할지. 많은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 나눈 아오이의 서른 날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나자 약속은 그때의 행복을 생각나게 해서 더욱 간절하게만 보였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아오이를 향한 준세이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하고 결국 그렇게 못 잊을 것이라면 과감하게 아오이에게 달려가란 말이다!라고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데 책을 다 덮고 이야기를 떠올리게되니 준세이와 아오이의 재회나 러브라인보다도 남겨진 연인 매미에게 눈길이 간다.주인공 남녀보다 홀로된 매미가 더 많이 떠오르고 만다. 준세이도 시간이 흐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되지 않을까. 잡을 수 없는 대상에 관한 감정이 늘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법이니까말이다. 왠지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이 시리즈의 다른 이야기 아오이의 마음을 듣게 된다면 또 다른 생각을 하게될지도 모르겠다.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사이를 빨리 만나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