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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군사정권의 회색빛 나던 세상에서, 그 군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지식인이란 것만으로도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빛 속에서 어둠으로 끌려들어가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한탄도 하고 더 넓은 그 바깥 세상의 도움이라도 얻으려고 온갖 애를 쓰면서, 철창 속에서 외교라는 미명 하에 이념의 대결이란 현실 속에서 교묘히 왜곡된 죄명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스러져 갔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얘기다. 과거 왕조 시대에도 식민지 시대에도 그 어느 때나 그 어느 곳에서나 항상 있었을 법한 삶들이었으니까. 이 서신집의 필자는, 그런 군부시절 지식인으로서 삶과 사회를 고뇌하다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었다. 그런 그가 대사역으로 세상에 나오고 그의 서간집이 또 세상의 빛 속으로 나타났을 때, 여러 서평들이 그의삶을 새롭게 조명하였고 그 서평들을 읽은 나는 몇 번을 이 책을 주문도서 품목에 올렸다가 지웠는지 모른다.
지식인이 적은 서신이란 것은 어떤 것일까, 무기수로서 모든 걸 버려야만 했을 때에, 주어진 현실 속에서 감내하면서 헛된 희망은 버리되 자신은 버리지 않았던 그 생각은 어떤 내용일까... 깊이 있는 지식인이 되고 싶은 나로서는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지만, 선뜻 주문하기에는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벼르다가 결국 주문해서 쥐어든 서신집에서 한가지 내용이 길게 여운을 남긴다. 중학교에 진급할 돈이 없어서 힘들어해도 배움에 목 말라하고 한 가지를 깨달아도 그 깊이를 더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란 것을 알고 있었던 당시의 성숙했던 초등생들과 함께 만들었던 청구회. 그 청구회 회원들이, 비록 원하는대로 공부할 수는 없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삶의 희망은 버리지 않으리라 소리 높여 함께 불렀던 그 노래가, 보안사에 끌려갔을 때는 '혁명을 노래했던 것이 아닌가'하고 검사의 손에서 서슬 푸르게 추궁되었다고 했던 부분.. 그걸 보고 지그시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는 저자의 담담한 필체는 아픈 한 시절의 편린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족이지만, 연약한 신체로 강건한 신체의 소유자였던 남이 장군을 질투하여 나라를 지키는 호국정신에 기개가 넘쳐 지은 한시를 들고 역모를 꿈꾼 것이 아닌가 하고 서슬 퍼렇게 추궁하던 인종(?) 앞에서, 씁쓸한 웃음을 짓고서는 팔순의 영의정을 역모 동의자로 끌고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남이 장군의 심정이 느껴졌다. 머리를 풀허헤치고 형장에서 '이놈, 왜 애꿎은 나까지 끌고 가느냐'고 절규하는 팔순의 노 정승에게, '영감, 나의 결백은 영감이 더 잘 알지 않소. 그 나이까지 정정하게 살았으면 세상에 무슨 미련이오. 나는 아직 서른도 못 되어 본 몸, 우리 함께 저승길에 동무하며 내일은 저승길 주막에서 함께 술이나 한 잔 합시다'라고 웃었다던가..
예나 지금이나 억울하게 형을 받은 이들이 있는 것처럼, 피해갈 수 없는 운명임을 알게 되었을 때 처연해지는 심리 또한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