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사회 - 개정판 눈빛시각예술선서 10
지젤 프로인트 지음, 성완경 옮김 / 눈빛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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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직까지 사진을 그것이 나왔던 때의 사회현상, 즉 19세기 프랑스에서의 중산계급의 부상과 관련시켜서 연구한 사람이 없었다. 이 새로운 사회계층은 그들의 고유한 표현형식을, 그들의 취향과 경제능력에 부합하는 형식을 필요로 했다.' 1974년에 초판이 출간된 이 책의 문제의식은 바로 저자의 위와 같은 언급에서 시작된다.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1부는 사진이란 문화적 양식이 등장하게된 역사적 필연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2부는 사진이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우리의 일상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실례들을 통해 풀어간다. 1부가 사진이란 양식의 태동에 대한 논리적인 역사논문이라면, 2부는 현대 사회 속에서의 사진에 대한 생생한 다큐멘타리라고 하겠다. 지금의 시각이라면 아주 진부한 논리일런지 모르지만 그 구체적 실례들은 아주 인포머티브하고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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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장의 명반
안동림 지음 / 현암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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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클래식에 절어가던 때가 있었다. 거품경제 탓인지 클래식 전문월간지가 우후죽순처럼 창간되고 있었고, 공짜로 씨디를 넣어서 주는 경우도 많았다. 주로 클래식 음악 정보를 얻는 것은 그런 월간지등을 통해서 였고, 그래서 항시 내 귀는 최신반과 하이파이에 쏠려 있었다. 그러다 혜성같이 출간된 책이 이 책이었다. 당시에는 요즘처럼 합본-양장본이 아니라, 두 권으로 나뉜 페이퍼백이었다. 이 책을 접하고 음악과 예술을 대하는 나의 천박한 눈을 속죄해야만 했다.

지금은 다른 공부를 하느라고 책장 저켠의 그늘밑에 숨어버렸지만 때때로 생각날 때 다시 들쳐 보면서 생각에 잠길 때가 많다. 특히나 그를 통해 바하의 마태수난곡을 만난 것은 나에게 기로같은 것이었다. 종교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눈뜸, 책 속에서 마태수난곡에 관한 글을 읽고 그 날로 씨디를 구입해서 플레이보턴을 눌렀다. 눈물... 아~ 내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다니... 벅차오르는 그 때 그 감성은... 거기다가 나는 덤으로 예수의 삶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종교적 회심이었다. 비록 (걸레가 되어버린) 교회에 다니지는 않지만 심정적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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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영화
마르크 페로 지음 / 까치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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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영화로 본 역사가 아니라 역사로 본 영화이다. 따라서 영화적으로 재현된 역사를 다루던 몇 가지 비슷한 제명의 책들과는 분명히 그 종류가 다르다. 마르크 페로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영화는 '일종의 반역사 혹은 비공식적 역사의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클리포드 기어츠가 제시한 '두껍게 읽기'의 한 전형으로써 영화를 그 자료로 쓰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시대의 감수성을 읽어낼 자료를 찾을 수 있다.

또한 동시에 영화는 역사적 사건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즉 단순히 시대의 반영자료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 역사에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라 미디어가 대중이 어떤 역사적 사건을 인식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현대사회에서 영화나 미디어의 현실 해석은 그 자체로 역사적 사건의 발생과 추이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차원들은 기존의 전통적 역사학의 주제에서 놓쳐왔던 영역이다.

페로의 문제의식 중에서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시간상의 지속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 어떤 방식이나 혹은 단지 공간상의 이전을 나타내기 위해서 배치한 스타일상의 어느 한 인물 같은 것들이 감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데올로기의 구역 또는 사회적 구역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영화란 예술의 형식적 차원이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시대의 망탈리테를 찾는 실마리가 된다. 따라서 영화적 묘사와 구성의 방식은 단지 미학적 차원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도 접근이 가능해진다.

역자는 문화사 연구에서 주도적인 길을 트고 있는 주경철 선생이고, 저자는 프랑스의 아날학파 학자인 자크 르 고프에게 이 책을 헌정하고 있다. 따라서 만일 자신이 영화 매니아로서 이 책을 골랐다면 일찌감치 내려놓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매니아를 넘어서고 싶다면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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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미디어
윌슨 브라이언 키 / 동문선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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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새로운 인간이 탄생했다. 그들은 미디어 인간이다. 미디어에 대한 최근의 담론은 아무래도 친미디어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 상호미디어적이고 상호텍스트적인 매커니즘 속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주체를 긍정하는 이러한 시각은 왠지 모르게 사악한 냄새가 난다. 자본이 자신의 지배력을 가장 확실히 유지하는 방법은 우리의 정신적 삶을 제어하는 것이며, 그 제어망을 보이지 않게 은닉시키는 것이다. 은닉의 가장 성공적인 방법은 우리 인식의 기초적 매커니즘, 즉 인식적, 문화적 선험의 영역을 조작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미디어론은 찬양일색이다. 저항적이고 창조적인 유목적 주체는 어느새 미디어 제국주의의 전사로 돌변하여 오프라인의 인격들을 사면초가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경향으로부터 공격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중매체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는 바로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것이며, 우리의 일상과 감수성 하나 하나가 조작되어 나가고 있다.

대중미디어의 조작성은 압도적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미로처럼 준비해 놓고 있다. 따라서 이 미로에 갇히게 되면 삶의 실제적 문제들과 단절된다. 자기 충족적이고 자기 폐쇄적인 세계에 갇혀버린다. 현실의 침입과 가설의 검증에 대해 자기를 봉인하고 영원 속에 갇혀버린다. 이는 광고 미디어에 지배당한 문화가 자초하는 가공할 귀결이다.

자신을 봉인한 정신구조는 인생에서 많은 즐거움을 이끌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미디어가 주는 것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데 전 인생을 바칠 뿐, 창조적 유희와 혁신을 만들어 낼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미에 이 자기폐쇄적이고 쓸모없는 대중에 대해 '생존을 위한 부대'를 언급한다. 그들은 가망없는 대중들 속에서 보다는 깨어있을 가능성이 많은 사회의 상층부로부터 선발된 일종의 특수 부대다. 그는 그것을 만드는 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방법이라고 넌지시 제안한다. 섬뜻한 경고다. 저자는 그걸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현재의 상황이 악화되어 있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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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의 공부법
박희병 엮어 옮김 / 창비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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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열심히 책을 본다. 하지만 학교 다닐 때와는 책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져 있는 나를 본다. 학교 다닐 때 책은 나에게 '정보'였다. 예술관련 비평이나 이론에 관심이 많았던 고로 무조건 신기하고 기발한 이론가들에게 정신이 팔렸다. 누가 어떤 소릴했네 하면서 주변사람들에게 되뇌이며 은근히 현학적 과시를 즐기려고도 했다. 따라서 진중하게 어떤 하나에 몰입하기 보다는 안스러울 정도로 난독하기 일수였고 또 새로운 사상가가 뜨면 이미 보고 있던 책은 저만치로 던져져 버렸다. 좀 고상한 책을 다룬다 뿐이지 신기한 유행을 쫓는 요즘의 신세대들의 태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박학(博學)이란 천지 만물의 이치 및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도를 말한다. 이것들은 모두 마땅히 배워야 할 것들이지만 또한 그 배우는 순서가 있다. 모름지기 중대하고 급한 것부터 먼저 공부하여 배움에 잡스럽고 무질서하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朱子가 한 말이다. 나는 '잡스럽고 무질서'했다.

이 책을 대하면서 특히 나는 주자의 경구들이 알알이 마음에 들어와 박히는 걸 느꼈다. 나나 주변을 돌아보면 설익은 지식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을 일도양단하는 못된 습관을 떼어내지 못하는 경우에 자주 부닥치게 된다. 주자는 '푹 익어야(學須時熟)' 한다고 말한다. 한 문제에 대해 잠자리까지 끌고 들어갈 정도로 궁구에 궁구를 거듭하고 자기 자신의 실존적 상황 속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이론과 실존이 하나로 어울어져야 '배움이 푹 익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푹 익은 연후에는 누군가 한 번 말해주면 직관적으로 깨우치는 바가 있게 된다.

물론 이건 아주 어렵다. 배움을 자기 실존에 연관시키는 일은 기존의 자기를 파괴하고 새롭고 더 나은 자기를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배우나? 특히나 인문학을 왜 하나? 위기네 위기네 하지만 인문학이야말로 실존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리고 장식으로 전락하는 그 순간 즉사한다.

따라서 배움은 처음부터 고원한 것만 쫓아서는 근본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이를 주자는 작은 방을 깨끗이 청소할 수 있으면 큰 방도 깨끗이 청소할 수 있다는 성현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한다. 자기의 실존부터 개혁해내는 배움에 이르지 못한다면 천하를 주통하는 지식이라도 헛된 것일 뿐이다. 그런 지식은 삶의 기초가 아니라 망상의 장식이다.

주자가 성리학을 집대성할 수 있도록 앞길을 튼 사람은 정자(程子)다. 그에게서도 역시 매력적인 문구들을 자주 만났다. 역시나 망치를 휘두르는 구절들이다. '학문을 해도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술 취한 사람과 같다. 한창 취했을 때야 무슨 짓인들 못 하리오마는 술이 깨면 반드시 부끄러워할 것이다.'

또한 다음 구절은 배움을 실존의 차원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오늘날 공부하는 사람은 산등성이를 오르는 것과 같아서 산 아래의 구불구불한 길에서는 활보를 하다가도 높은 산에 이르면 물러선다.' 배움이 근본에 다다르면 이제까지의 상식들을 버리고 새로운 차원으로 뛰어넘어야 하는데 이 넘어섬 앞에서는 우리는 멈칫 거리고 만다. 이 이유는 뭘까? 정자는 단호하다. '도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그 공부에 진전이 없는 것은 용기가 없어서다.'

나의 흥미를 끈 주자나 정자는 모두 성리학의 기둥들이다. 그러고 보니 모두 다 사변적이다. 가슴 한 구석이 또 뜨끔해진다. 나는 좀 상대적으로 즉물적인 표현을 하던 우리나라의 이이 같은 분의 글에는 별로 이끌리지 않았다. 아직도 공허한 먹물근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나는 다시 주자에게로 돌아가 그의 다음 구절에서 실오라기같은 구실을 잡는다.

'신기하고 기발하게 글을 쓰기는 쉽지만, 쉽고 담담하게 글을 쓰기는 어렵다. 그렇기는 하나 신기하고 기발함을 통과한 연후라야 쉽고 담담한데 이를 수 있다.'

이 책은 선인들이 바라본 공부에 대한 글 모음이다. 아직 지혜와 지식이 오늘날 처럼 야멸차게 분화되지 않았을 때 배움의 근원적 의미가 망각되지 않았던 시절로의 의미있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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