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공부법
박희병 엮어 옮김 / 창비 / 199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도 열심히 책을 본다. 하지만 학교 다닐 때와는 책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져 있는 나를 본다. 학교 다닐 때 책은 나에게 '정보'였다. 예술관련 비평이나 이론에 관심이 많았던 고로 무조건 신기하고 기발한 이론가들에게 정신이 팔렸다. 누가 어떤 소릴했네 하면서 주변사람들에게 되뇌이며 은근히 현학적 과시를 즐기려고도 했다. 따라서 진중하게 어떤 하나에 몰입하기 보다는 안스러울 정도로 난독하기 일수였고 또 새로운 사상가가 뜨면 이미 보고 있던 책은 저만치로 던져져 버렸다. 좀 고상한 책을 다룬다 뿐이지 신기한 유행을 쫓는 요즘의 신세대들의 태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박학(博學)이란 천지 만물의 이치 및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도를 말한다. 이것들은 모두 마땅히 배워야 할 것들이지만 또한 그 배우는 순서가 있다. 모름지기 중대하고 급한 것부터 먼저 공부하여 배움에 잡스럽고 무질서하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朱子가 한 말이다. 나는 '잡스럽고 무질서'했다.

이 책을 대하면서 특히 나는 주자의 경구들이 알알이 마음에 들어와 박히는 걸 느꼈다. 나나 주변을 돌아보면 설익은 지식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을 일도양단하는 못된 습관을 떼어내지 못하는 경우에 자주 부닥치게 된다. 주자는 '푹 익어야(學須時熟)' 한다고 말한다. 한 문제에 대해 잠자리까지 끌고 들어갈 정도로 궁구에 궁구를 거듭하고 자기 자신의 실존적 상황 속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이론과 실존이 하나로 어울어져야 '배움이 푹 익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푹 익은 연후에는 누군가 한 번 말해주면 직관적으로 깨우치는 바가 있게 된다.

물론 이건 아주 어렵다. 배움을 자기 실존에 연관시키는 일은 기존의 자기를 파괴하고 새롭고 더 나은 자기를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배우나? 특히나 인문학을 왜 하나? 위기네 위기네 하지만 인문학이야말로 실존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리고 장식으로 전락하는 그 순간 즉사한다.

따라서 배움은 처음부터 고원한 것만 쫓아서는 근본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이를 주자는 작은 방을 깨끗이 청소할 수 있으면 큰 방도 깨끗이 청소할 수 있다는 성현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한다. 자기의 실존부터 개혁해내는 배움에 이르지 못한다면 천하를 주통하는 지식이라도 헛된 것일 뿐이다. 그런 지식은 삶의 기초가 아니라 망상의 장식이다.

주자가 성리학을 집대성할 수 있도록 앞길을 튼 사람은 정자(程子)다. 그에게서도 역시 매력적인 문구들을 자주 만났다. 역시나 망치를 휘두르는 구절들이다. '학문을 해도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술 취한 사람과 같다. 한창 취했을 때야 무슨 짓인들 못 하리오마는 술이 깨면 반드시 부끄러워할 것이다.'

또한 다음 구절은 배움을 실존의 차원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오늘날 공부하는 사람은 산등성이를 오르는 것과 같아서 산 아래의 구불구불한 길에서는 활보를 하다가도 높은 산에 이르면 물러선다.' 배움이 근본에 다다르면 이제까지의 상식들을 버리고 새로운 차원으로 뛰어넘어야 하는데 이 넘어섬 앞에서는 우리는 멈칫 거리고 만다. 이 이유는 뭘까? 정자는 단호하다. '도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그 공부에 진전이 없는 것은 용기가 없어서다.'

나의 흥미를 끈 주자나 정자는 모두 성리학의 기둥들이다. 그러고 보니 모두 다 사변적이다. 가슴 한 구석이 또 뜨끔해진다. 나는 좀 상대적으로 즉물적인 표현을 하던 우리나라의 이이 같은 분의 글에는 별로 이끌리지 않았다. 아직도 공허한 먹물근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나는 다시 주자에게로 돌아가 그의 다음 구절에서 실오라기같은 구실을 잡는다.

'신기하고 기발하게 글을 쓰기는 쉽지만, 쉽고 담담하게 글을 쓰기는 어렵다. 그렇기는 하나 신기하고 기발함을 통과한 연후라야 쉽고 담담한데 이를 수 있다.'

이 책은 선인들이 바라본 공부에 대한 글 모음이다. 아직 지혜와 지식이 오늘날 처럼 야멸차게 분화되지 않았을 때 배움의 근원적 의미가 망각되지 않았던 시절로의 의미있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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