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ch fields of the coordinates can then be said to describe one aspect of the physiognomic appearance of the commodity, showing contradictory "faces"; fetish and fossil; wish image and ruin".
역자는 위의 원문을 "좌표의 사분면은 각각 상품의 일면을 보여줌으로써 상품의 모순적 "얼굴"을 드러낸다. 즉 상품은 물신이자 화석이고, 소망 이미지이자 폐허이다."(수잔 벅 모스, <보기의 변증법>, 김정아 역. (문학동네,2004) p.272)라고 해석한다. 역문에서는 "physiognomic appearance"에 해당하는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관상학적 외양의 한 일면'이라고 정확히 변역한 후에, 여기서 "관상학적"이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서양 관상학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다. 설혜심님의 <서양의 관상학>이란 휼륭한 책이 있었고, 들췄고, 그리고 거기서 18세기에 맹렬하게 활동하여 큰 영향력을 가졌던 '라바터'라는 관상학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사조는 과학과 유사과학의 경계가 흐려지던 시절로 - 과학적 발견이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비스런 질문은 많았고 명백히 과학적인 해답은 부족했던 시대였다 - 관상학은 사람들의 궁금증에 훌륭한 대답을 해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종류의 새로운, 과거로부터 부활한 학문이었다.
라바터의 관상학 방법론 중에 이 구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부분은, 라바터가 관상을 '본성'과 '표정'의 두가지로 구분한다는 점이다. '본성'은 타고난 것(신이 각 개인에게 부여해 준 바)으로 관상학에서 본질적인 부분이고 '표정'은 후천적인 것으로 그의 관상학에서 부차적이거나 제외시킬 부분이다. 그래서 아예 표정을 배제하고자 얼굴의 실루엣만으로 관상을 분석하는 방법까지 고안된다. 라바터의 이러한 구분은 좀 허무맹랑해 뵈지만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놓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당시 궁정문화(신분주의)에 대항하여 개인주의를 드높이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라바터 이전의 궁정문화는 '화장의 시대'라고 할 만큼 의복과 화장 등 후천적 요소에 의해 신분(나아가 인격)을 맹렬하게 구분짓는 요소가 지배했었는데 라바터의 이런 '본성'에 천착한 관상학은 그런 신분주의에 대한 일격이기도 했던 것이다. 실루엣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화장한 티가 전혀 안나기 때문이다.
본성과 표정의 구분은 벤야민의 '상품의 모순적인 얼굴'에도 적용할 수 있을 듯 하다. 본성은 상품의 원역사(ur-history)에 상응하고, 표정은 상품의 자연사적 측면에 상응한다. 이 두 요소가 서로 해소됨 없이 변증법적 이미지로 대치되는 상태에서 오는 '충격'은 원역사의 actualization, 즉 계급 혁명을 이끈다.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면 벤야민의 <파세젠 베르크>는 '상품의 관상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하다. 단 라바터의 관상학과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라바터의 관상학이 개인주의와 분석적 관상학이라면 벤야민의 그것은 계급주의와 예언적 관상학이란 점이다. 라바터의 관상학이 구체제인 궁정문화에 대해 개인주의를 내세우는 반면, 벤야민은 부르조아 개인주의 문화에 대항하여 계급주의 혹은 무산계급의 집단적 무의식을 흔들어 깨움을 노린다. 또한 라바터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분석적"으로 추척하는 일을 추구한다면 벤야민은 상품 이미지들 속에서의 변증법적 이미지를 통해 아직 오지 않은 유토피아에 대한 집단적 꿈을 각성시키는 "예언적" 효과를 노린다.
추신 - 윗글은 전혀 학문적으로 믿을만한 내용이 못되어오니 장난글로 봐주시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