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1월 벤야민은 청소년 대상 라디오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마지막회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1927년의 미시시피 홍수에 관한 실화였다. 이것은 "자연"재해로 보이지만 사실은 국가가 자초한 재난이다. 미국 정부는 항구 도시 뉴올리언스를 구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공권력을 발동하여 수마일의 강안 상류를 막고 있는 댐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그 지역 농토에 예상치 못했던 파괴를 초래한 조치였다. 벤야민은 청소년 청취자에게 나체스(Natchez) 농부 형제 이야기를 들려준다. 생산 수단 전체를 잃고 고립된 그들은 범람하는 강물을 피해 지붕 위에 올라갔다.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형은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물 속으로 뛰어든다. "잘 있어, 루이스! 너무 오래 걸린다. 이걸로 충분해." 그러나 끝까지 버텨낸 동생은 지나가던 보트에 구조되었으며, 살아남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원제 The Dialectics of Seeing) 김정아 역, (문학동네, 2004) p.60

코끼리는 힘, 충성, 기억의 지속, 인내, 지혜, 행복한 결혼생활을 의미한다. 흰 코끼리는 태양에 속한다. 불교 - 코끼리는 부처의 성수(聖獸)이다. 흰 코끼리는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의 꿈에 나타나 이 세상을 구원할 왕의 탄생을 알려주었다. 흰 코끼리는 삼보(三寶)의 하나인 법(法), 보살의 탈 것, 동정, 사랑, 친철을 상징한다. 코끼리는 아축여래(阿축如來)의 탈것이다. 기독교 - 코끼리는 뱀의 적인 예수의 상징이므로 발 밑에 뱀을 밟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 정결, 자비의 상징이다. 그리스로마 - 지성을 나타내는 신 헤르메스/매르쿠리우스의 부수물이다. 플리니우스에 의하면 코끼리는 신앙심이 돈독한 동물로 태양과 별을 숭배하며, 초승달이 뜨면 강에서 몸을 씻어 정결히 하고 천국을 부른다고 했다. 로마 미술에서는 장수, 불사, 죽음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힌두교 - 코끼리는 지혜의 신 가네샤가 타는 것이다. (보통은 가네샤의 모습이 코끼리이고 탈것은 쥐로 되어 있다) 신성한 예지의 힘, 사려, 왕위, 무적의 힘, 장수, 지성을 뜻한다. 동쪽의 수호자인 인드라 신은 코끼리 아이라바타를 타고 있다. 세계는 코끼리가 떠받치고 있다.

         진 쿠퍼, <그림으로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이윤기 역 (까치,1996) p.121

자기가 가짜이고 어떤 필연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된 도오루(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속의 주인공)는 자기가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이렇게 역사의 네 번째 반복은 소극으로 변하고, <풍요의 바다>는 그 타이틀과는 반대로 '공허의 바다'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 주인공과 미시마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인식'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마 이 공허함 때문에 미시마 유키오는 지금 '의미하는 것'으로서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행동이 가진 배후를 찾으려고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시마가 설치한 덫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 자기 행동의 '공동 空洞'안에 엄청난 해석의 바람이 불어닥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미시마가 죽은 것은 1970년, 즉 1960년의 고도경제성장이나 신좌익운동이 그 정점을 넘었던 시점입니다. 미시마는 이른바 우익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좌익 과격파에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격파가 그때까지의 좌익과는 달리, 뭔가 적극적으로 실현해야 하는 이념이나 이해를 갖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부정함으로 목적없는 행동의 과격성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시마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공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그는 신좌익 집회에 나아가 "그대들이 천황이라 말해주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연대하고 싶다"라고 언명하고 있습니다. 즉 미시마는 입장은 달랐지만, 그 당시 급진주의radicalism의 태도와 깊이 결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언어와 비극> 조영일 역 (도서출판b,2004) p.18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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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8-29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76000

글 ,  재미있네요 ......  ( 흐흐 그리고 6000 힛 잡았어요`!! ㅎㅎ )

 


간달프 2004-08-29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스! 6000힛... ^^ 하루에 20쯤 힛트하면 1만은 언제쯤 넘을까나?

간달프 2004-08-31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속에서 나체스 형제 중 불어난 물에 자진해 뛰어든 형은 가해자-아이들이고, 동생은 피해자-살아남은자-아이들이다. 영화 속에서 이 학살극이 의미하는 바는 '공허함'이다. 가해자-아이는 혁명을 열렬히 고대했던 베토벤을 연주한다. 그러나 연주가 잘 안되고 아이는 베토벤의 악보에 엿을 먹인다. 혁명의 전망이 보이지 않자 아이는 살인게임이 열중한다. 역겨우리만치 짜증스러운 공허함을 가장 극악한 방식으로 재현한다. 가해자-아이와 피해자-아이 사이에 경계따윈 없다. 감독이 각각의 아이들에게 동등한 이름을 배당했듯이 아이들은 모두 다 똑같이 공허하다. 국가-미국의 부산물. 영화 속 하늘은 오즈의 관조/체념적인 하늘과 달리 신의 심판을 준비하는 하늘이다. 영화 속에서 하늘은 파국의 - 이미 처음부터 파국이다 - 전주를 우르릉거리기 시작한다.

간달프 2004-09-05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에 대한 정성일과 전찬일의 논쟁을 보고 - 특히 전찬일의 "모더니즘 스타일의 반복" 운운한 것에 대해서...

모더니즘은 근대성(특히 부르조아 자본주의)에 대한 서구의 자기반성의 형태 중 하나였다. 과거의 모든 전통적 양식에 反한 래디컬한 입장들이 개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인 우리는 그것을 마치 무슨 전범처럼 받아들였다. 모더니즘의 당대에 대한 혁명성은 석화되고 데생용 아그리파상이나 다를 것 없이 유입된 것이다. (또한 모더니즘이 서구의 초극이란 입장에서 동양적인 것의 발견이란 코드로 전환되기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모더니즘 스타일의 지루한 반복이라고 비판한다면 옳다. 그러나 딱 그 수준, 그 차원에서 한해서만 전찬일의 비판에 수긍할 수 있다.

한마디로 '모더니즘의 지루한 반복' 따위는 없다. 오직 모더니즘을 지루하게 받아들인 한국적 상황 속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따라서 전찬일의 비난은 지시대상도 없이 허공을 맴돈다. 우리는 그런 비난을 하기 전에 영화 자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고 있는지 면밀히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영화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를 대할 때도 반드시 필요한 자세다.

전찬일의 비판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점은 그 영화가 "설명하지 않는 척 하면서 설명하려한다"고 비난한 점이다. 감독이 설명하려 했는지 아닌지 전찬일은 어떻게 아는 걸까? 동성애, 나찌 선전, 총기 구매 싸이트 뭐 이런 것들을 보여주면 뭔가 설명하는 것인가? 뭘 설명하는 것일까? 영화가 나찌즘이 총기애호가 동성애가 콜럼바인 학살극의 원인이라고 설명했다는 말인가? 이 정도가 소위 아시아 최대 영화제의 주요 인사란 자가 영화를 해석하는 방식인가? 영화를 제대로, 혹은 진지하게 볼 생각이 있었다면 "모더니즘의 지루한 반복"이라고 지레 단언하기 보다는 이 영화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부터 제대로 보려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서 "지루한 반복" 운운해도 늦지 않지 않은가?

예를 들어, 나찌 시대 다큐물이 나오는 장면은 어떤 식으로 읽을 수 있을까? 영화 전체와 함께 엮어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이 부분에 대한 나의 해석은 이렇다. 아이들은 나찌 다큐에 그다지 큰 관심은 없다. 여기서 나찌는 아이들의 행동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나찌 시대가 가지고 있는 어떤 조건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목한 것은 그 다큐의 멘트 중에서 나찌의 상징이 힌두교에서 온 것이라고 언급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묘하게 영화의 제목도 환기시킨다. (코끼리, 그것은 힌두교에서 매우 중요한 聖獸로 세계를 떠받치는 동물이다.) 나찌와 힌두교라? 나는 그것이 (서구) 근대의 초극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당시엔 서양의 종말에 대한 논의가 무성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를 "모더니즘 (스타일의 지루한) 반복"이라고 언급한다면 맞는 말이다. 모더니즘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서구 근대성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 것이니까... 따라서 (누군가 지루하다고 여기는) 모더니즘 스타일이 이 영화가 추구하는 바와는 딱 맞는 것일 수도 있다. 모더니즘 형식이 모더니즘의 내용과 만난 것이다. 그게 무슨 잘못인가? 그렇다면 전찬일의 비난은 정말 공허해진다.

오히려 민감한 사람이라면 "모더니즘 스타일" 어쩌구하는 판에 박힌(아그리파상이 지루하다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판에 박힌) 비난을 하기 보다는 나찌 - 코끼리 -모더니즘 -근대의 초극 - 콜롬바인 학살 따위를 연결시키고 있는 감독의 사고방식을 비난했어야 하지 않을까? 좀 더 면밀히 읽어보자면 독일이나 일본에서 '근대의 초극'이라 할 때, 여기서 '근대'는 실상 영미식 자본주의 혹은 국제주의를 칭한다. 콜럼바인 하이의 아이들의 삶은 오늘날 전세계를 쥐고 흔드는 영미식 삶이기도 하다. 그리고 학살자-아이들은 그 삶의 파생물이자 그 삶을 종식시키려는 존재다.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이 영화는 매우 위험한, 그리고 동시에 래디컬한 질문은 해대는 영화가 된다. "이대로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은 걸까?"라고 말이다. 아이들의 학살 행위를 이런 식으로 은밀하게 정치화해도 되는 것일까? 나아가 스타일 상으로나 분위기 상으로 매우 초월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이것은 학살 행위를 형이상학화 내지 숭고화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이에 나는 답을 할 수 없다.

간달프 2004-09-11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스 반 산트는 영화 속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적 실험을 하고 있다. (물론 유클리트 기하학에 대한 여집합적 의미에서...) 그의 영화는 그런 면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콜럼바인고 학살 사건)의 외부성을 포착하고자/진입시키고자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윤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its_jazzy 2004-09-12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찬일과 정성일의 논쟁을 읽은 적이 있는데 '모더니즘 스타일의 반복'운운하는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웹상에 띄워져 있는 글들은 논쟁의 일부만을 발췌한 것인가요?

간달프 2004-09-12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 21 대담에서 봤는데요. 웹이 아니라 지면으로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its_jazzy 2004-09-1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달프 님의 지적은 제게도 따끔한 지적이 되었기 때문에 한번 보고 싶어서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찬찬히 다시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