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nt로 버무려서 본 영화 <트로이>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라는 책을 보다가 ‘실천의 근본형식들’이란 장을 읽었는데 기가 막히게 도 어제 본 영화 <트로이>의 인물들의 구도와 들어맞는 것 같다.


" 칸트의 실천철학은 그 출발에 있어서 기술적 기량, (행복을 추구하는) 실용적 수완 그리고 도덕적 행위가 인간 삶에서 궁극적으로는 결코 부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양될 수 없는 서로 간의 긴장 관계 속에 서 있다는 근본 신념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인간 행위가 전혀 상이하고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근본 원칙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은 [...] 인간 삶의 실제 상황이다."


" 칸트 사상이 지향하는 바는, 행복과 성공만으로는 인간 실존의 크기를 채울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만약에 우리가 스스로의 요구에 견뎌낼 수 있으려면, 이것들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들은 결코 충분한 확보가 아니다. 이것들은 부족함, 즉 칸트의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에서의 표현을 빌리면 "공허함"(A 393)을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공허함은 보다 높은 차원의 행위 영역에서 채워질 수 있다. 단순한 전략가 또는 실용주의자의 행위가 최후에는 피할 수 있는 그 어떤 실패에서 좌절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는 인간 행위의 온 의미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한 실용적 행위에서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그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한다." 


"기술적인 것의 차원은 결코 자체 목적이 아니며, 항상 단지 수단으로서의 기능만을 갖는다. 그것은 일단 행위를 가능하도록 만들지만 아직 그 행위를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 기량의 명법들은 단지 가언적으로만 명령한다. 수단의 사용이 갖는 필연성은 언제나 목적이라는 조건하에 제약된 것이기 때문이다. [...] 실천철학은 기량의 규칙들이 아니라 수완의 규칙과 도덕성의 규칙을 포함한다. [...] 이제 여기서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임의적인, 관심의 전면에 놓여있는 의도보다는, 이른바 모든 의도들의 의도, 즉 행복이 문제시된다. [...] 수완의 명법들은 ..... 개연적인 조건하에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실연적이고,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조건하에서, [...] 임의적 목적들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부과된 목적들에 관계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행복해지고자 한다. 이는 행위의 기본 전제로서 주어져 있다. 그러나 칸트는 분명히 강조한다. "나는 '네가 마땅히 행복해야만 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의욕하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것을 행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실용적 명법들은 가언적으로 강요하지 절대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도덕성의 도덕적 규칙은 어떤 가능한 (개연적) 의도들이나 실제로 주어져 있는 (실연적) 의도들의 전제하에서 타당할 뿐 아니라 "정언적이고 단적으로 명령한다." 그것은 기술적이거나 실용적인 고려는 도달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엄숙함을 인간 행위 안으로 가져오며, 그 행위에 "직접적이며 내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면 "그 행위는 마치 천상에서 이뤄지는 것같이 그렇게 순수하다."


 

위의 인용문을 나름대로 모식화해 보았다.


<----------------A/a의 공허------------------------>


<---------B/b의 공허------------->


 

         X절대적/필연적 

 

    B실연적

 

   A개연/임의적

     x지혜/도덕적 명법 

 

 

    b수완의 명법

   a기량의 명법

 

 


<--------------------------------------------------------------------->

                          완전한 의미  (“인간 행위의 온 의미의 충족”)


A/a와 B/b는 각각 실존을 다 커버하지 못하는 “공허”를 수반한다.



아가멤논, 오딧세우스, 아킬레우스 비교해 보기


아가멤논은 기량의 명법에 충실하고 임의적 목적에 좌우된다. 그는 무도덕과 변덕스런 탐욕의 전형으로 그의 아비부터 자식들까지 모두 임의적 목적에 의해 변덕스레 휩쓸려 초래된 파국으로 고통받는다. 아킬레우스는 자기 준칙이 절대적 규칙이 되게 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 기준을 절대자, 즉 신에게 맞추고 신과 경쟁한다. 그는 절대적이고 단적인 목적에 충실하다. 실존의 온 의미를 충족시키고자 하며 이로써 자기 정체성 발견에 이른다. 오디세우스는 주어진 목적(실연적 목적)에 충실하다. 그는 이타카 약소국 출신으로 주어진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여 효과를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인용문에도 보듯, 주어진 의도는 그 자체로 마땅한 것은 아니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수완을 발휘해 트로이 원정에 결정적 승리를 공헌했으나 자기 실존의 온 의미는 모르며 자기 정체성 발견에도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에서) 풍랑 속의 바다와 섬들 사이에서 난파당하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돈다. 자궁같은 칼립소에 잠겨있다가 거기서 탈출하고, 사이렌의 자아를 삼키는 유혹을 극복하는 과정은 자기 의식으로 한 단계 씩 전진하는 모습일런지 모른다.


자기만의 욕동의 좁은 세계에서 나온 임의적(개연적) 목적에 휩쓸린 아가멤논은 짐승처럼 사라진다. A/a너머에는 그것보다 월등히 드넓은 ‘공허’가 펼쳐지나 아가멤논은 그 공허를 자각할 만큼 나아가지 못하고 사라진다. 반면 오딧세우스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얻어진 세계(주어진 세계)에서 나온 실연적 목적에 충실한다. 그는 아가멤논이 요구한 출병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리스 연합군의 트로이 원정에 참가한다. 그것은 조국 이타카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아마 세상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딧세우스의 부류일 것이다. 그들은 트로이를 정복해도 정처없는 항해를 멈출 수 없다. 트로이를 정복해서 배의 창고를 채워넣지만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반면 아킬레우스는 신과 대면한다. 신은 절대고 신은 모든 것이다. 절대는 바깥이 없는 것이고 단적인 것이다. 따라서 공허도 없다. 신과 대면하고 신과 씨름하는 일을 칸트는 도덕적인 명령과 연관시켜서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그걸 예술적 유희와 연관시켰다. 아가멤논과 프리아모스의 신은 give-and-take의 신이다. 보통 인간과 별다를 것이 없다. 헥토르의 신은 변덕스런 신이다. 그에게 신이란 인간과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다. 헥토르의 신은 마치 유대교의 신과 유사하다. 그래서 그런지 헥토르는 겸손함과 경건함의 모범이다. 아킬레우스의 신은 질투의 대상이고 경쟁의 대상이다. 아가멤논의 신은 신의 인간화를 통해 인간과 유사해진다면 아킬레우스의 신은 인간의 神化를 통해 인간과 유사해진다.  

 

 

 

우리가 일리아스나 그 밖의 대부분의 그리스 문학에서 듣는 비극적 음조는 이 두 가지 힘, 즉 인생에 대한 정열적인 희열과 변경할 수 없는 인생의 테두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 사이의 긴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나뭇잎의 생명과도 같다. 바람은 나뭇잎을 대지에 뿌린다. 생명력이 넘치는 숲은 다른 나뭇잎을 품게 되어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난다. 그와 같이 인간의 세대는 나타나고 사라진다.

 

이와같은 사상과 이미지는 호메로스에게만 있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그 독특한 심각성은 그 내용에 있으며, 또한 그 내용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장려한 헤브라이의 유사물에서는 이러한 심각성을 찾아볼 수 없다.

 

  인간에 대해서는, 그 나날은 풀잎과도 같다. 들꽃과도 같이 사람은 인생을 보낸다. 바람이 불면 생명은 사라지고, 꽃이 핀 장소는 이제 그 꽃을 알지 못한다.

 

이 시의 색조는 비하와 체념의 색조이다. 즉 인간은 신에 비할 떄 풀잎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이미지는 영웅의 행동이나 업적에서 볼 때 전혀 다른 색조를 띠고 있다. 인간은 無比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고귀한 소질과 찬란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구별이 없는 나뭇잎과 마찬가지로 같은 법칙을 따라야 한다. 거기에는 어떠한 로맨틱한 항의도 있을 수 없으며 -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를 제약하는 제일의 법칙에 대해 어떻게 항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 또한 우리가 중국인에게 보는 바와 같은, 개인은 숲 속의 나뭇잎을 구성해가는 先祖에 불과하다는 체념적인 수용도 없다. 그 대신 비극의 정신인 열정적인 긴장이 있는 것이다.

 

[...] 비극적 긴장을 설명해 줄 것이다. 생명의 위험이 처했을 때만이 가장 가치있는 것을 갖게 된다는 것은 인생의 유한성, 또는 인생 모순의 특징이기도 하다. 영웅은 아마도 죽음에 직면해서만이 용기를 입증하며, 자기의 영광을 획득하는 것이다. 美는 그 이웃으로 위험과 죽음을 가지고 있다.

 

[...] 美는 영광과 같이, 설혹 그 대상이 눈물과 파멸일지라도 추구되어야만 한다. 트로이아 전쟁의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이 생각이 아니었던가. 왜냐하면 그리스 기사도의 완성자인 영웅 아킬레우스는 이 선택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신은 그에게 평범한 생활의 장수와 영광스러운 요절의 양자택일을 주었던 것이다. 이 신화를 처음 만든 자가 누구이든 간에 그는 거기에서 그리스 사상뿐만 아니라, 그리스사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 문화사-문화와 역사와 삶, H.D.키토, 김진경역 (탐구당, 2004) 107-109 

 

[...]중국 주자학과 일본 주자학을 함께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의 경우, 예를 들어 주자 같은 사람들은 과거에 의해 관직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과거라는 것은 중국의 고등문관시험같은 것으로, 당나라시대부터 시작되어 20세기까지 기본적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과거에서는 어쨌든 능력만 있으면 어떤 계급출신자라도 상급관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대부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은 이른바 독서인이자 문인으로, 정치가로서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계급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에게도 똑같이 신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언어와 비극,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도서출판b,2004)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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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6-01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제가 훨 어설프지만 엇비슷한 생각을 한 건 분명한데.. 제 생각은 머리 속에서만 요리조리 맴돌다..." 아 몰라... 브래드 피드가 멋지다 "란 표현 밖에 못하는 데, 님의 글은 ......흐흑
" 아킬레우스는 신과 대면한다. 신은 절대고 신은 모든 것이다. 절대는 바깥이 없는 것이고 단적인 것이다. 따라서 공허도 없다"....." 니체는 그걸 예술적 유희와 연관시켰다."...이래서 제가 저 두 존재를 사랑한다는 거 아닙니까 !!!
아킬레우스의 신은 인간의 神化를 통해 인간과 유사해진다~~ !!! 제가 생각한 게 그거 라니깐요 ....

sunnyside 2004-06-0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트로이] 보고 와서 다시 읽겠습니다~ (본다고 이해할 수 있을랑가는 또 다른 문제이건만. -.- ^^; )

짜우 2004-06-0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이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이지만, 신도 영웅도 인간덕목의 전형을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 애국심과 건실한 덕목에 충실한 헥토르, 명예심에 휩싸인 아킬레스,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패리스와 여인들,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공명심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아가멤논과 그의 형, 내가 그속에 투영될 수 있다면 아가멤논 적이겠지만, 헥토르처럼 살고 싶어할 것 같다. 글구 아킬레스가 마지막 사랑을 찾아 떠남은 좀 짜증났다. 너무 완벽한 전형을 하나 만들어가게 되었기때문에....." 조금씩은 아쉬움이 남는 모델들이 많이 보여서 하나의 영웅이 아니라 모든 영웅들이 만들어졌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