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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사월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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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세계화라는 것이 진행되면서 점차 일반적인 것,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계량화될 수 있는 것 등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때문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다른, 다를 수 밖에 없는 체계들간의 차이는 종종 무시될때가 있다. 그리고 이는 세계화라는 미명 속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영어 조기 교육 내지 영어공용화 논쟁이 한창 이슈가 되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카다레는 어쩌면 자신의 조국만의 문제일 수 있는 독특한 풍습, 문화, 역사들만을 고집한다. 알바니아 태생이지만, 정치적 이유로 프랑스에서 망명하여 불어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에게 이런 집착(?)은 모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읽고 있다보면, 처음에는 그저 알바니아가 어떤 나라인가 하며 궁금해하다가 나중에는 나 자신을, 나아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그의 고집스러운 작업이 폐쇄적인 것으로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때 우리사회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저급한 슬로건과는 또 다르다. '나'의 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강요하거나 꾸며서 '우리'앞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의 것이었던 문제를 '나'만의 방식으로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나 할까...

일찌기 니체나 마르크스는 '동일성의 차이'를 발견하여 철학 그 자체를 의문하게끔 하여, 근대의 이성 자체를 의심하게 해 준 선구자들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일반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소재와 방법으로 보여주는 카다레 역시 문학에서는 니체나 마르크스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백과사전에서 알바니아 항목을 뒤지면서 새삼 작가가, 문학이 갖는 힘에 대해 나 스스로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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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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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면서나, 내 좁은 방 안에서 클래식을 듣다보면 문득 예기치 않은 아득함 속으로 빠져들때가 있다. 그건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연주자나, 지휘자, 작곡자까지 그 무엇에도 상관없이 음표들이 연주되어 내 귀에 들리는 그 상호성 속에만 그저 아득하게, 아득하게 빠져들어갈 뿐이다.... 그래서 난 클래식을 좋아한다. 그리고 국악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얼마전에는 아쟁의 연주곡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갓길에 차를 세워두었으니까....

문학작품 속에서 이런 아득함을 만나게 된다면 그건 분명 행운이다. 더구나 산문에서 말이다. 치열하게 읽히고, 생각하게 하는 소설의 매력도 당연히 나를 사로잡지만, 이런 아득함은 모든 스토리를 떠나 읽는이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친구의 소개로 읽게된 바타이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내게 이런 아득함을 안겨주었다. 그게 이 책을 말하는 거의 모든 평자들이 말하듯 유려한 단문에서 나오는 시적인 느낌때문인지, 본질을 추구해나가는 성직자들의 얘기 때문인지, 다소 환상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적 배경인 베트남의 분위기때문인지 난 알지 못한다. 다만, 내게 이 작품은 아득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는 것, 그래서 행복했다는 것, 그래서 자주 뽑아보는 책꽂이 칸에 따로 꽂아두었다는 것 밖에는 할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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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 오늘의 세계문학 2
미셀 투르니에 지음, 신현숙 옮김 / 지학사(참고서) / 198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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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학을 대할때면 부러운 생각이 들때가 있다. 어느새 인류의 보편적인 정서로 자리잡은-그 시비는 뒤로하고-신화나, 역사체험이 보편성을 가진 채 작품 속에서 각종 메타포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오리엔탈리즘이니, 옥시덴탈리즘이니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가치관이라는 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의미를 획득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근현대 이후 한번도 세계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해보지 못한 변방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막연한 부러움을 불러 일으키기도 할 만한 것이다.
다소 앞 사설이 길어졌지만, 투르니에의 마왕은 이러한 엄청난 '교양'을 작품 전반에 각종 메타포로 등장시킨다. 너무나 다양하여 처음 밑줄을 쳐가면 읽던 손짓을 지쳐서 멈추게 할 정도로 말이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스토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문학작품으로서 독자에게 읽히려는 의도 자체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것은 구성상 주인공 티포쥬의 일기를 교차적으로 등장시켜 직접 주인공의 입을 빌리는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또한 이러한 것은 투르니에의 다른 작품 <방드르디...>에서는 다소 무리한 방식-로빈슨의 항해일지-을 통해서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부분에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해지기도 한다. 베스트 셀러가 널뛰듯이 양산되는 우리의 독서계 현실에서 <마왕>같은 작품, <마왕>같은 작품을 쓰는 작가, <마왕>같은 작품에 상을 안겨주는 공통적 교양과 체험을 가진 곳이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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