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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가까운 말 창비시선 386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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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고통스러워서 어떤 것도 마주하고 싶지 않을때, 또는 모든 것과의 인연을 차라리 놓고 싶어질 때 박소란의 시는 가슴 깊이 파고들어 다독여준다. 시의 존재 가능성 그 가장 근원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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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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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책으로 배웠다. 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4년 내내 다쓰현’(<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민역’(<민중의 역사>)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중학교 시절 학교 운동장에 호외로 뿌려진 신문지가 수북이 쌓이더니 갑자기 단축수업을 했던 이유가 ‘6·29선언때문이었다는 사실도 책을 읽은 뒤에 알게 되었다.

 

 조금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고 내키는 감정대로 20대를 보냈다. ‘광주가 고향인 친구를 만나면 호기를 부리며 밥값을 냈고, 5월이면 망월동에 다녀온 걸 한 달 내내 떠벌리며 자랑했다. 책으로 읽은 역사가 아니라 내가 역사의 현장을 관통하는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책을 보고 그대로 연애를 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렇게 보낸 내 20대는 당연히 모든 면에서 얼치기였다. 책을 읽고 내킨 감정들은 그만큼 쉽게 사그라들었으며, 감정의 찌꺼기만 남아 있다가 때로는 엉뚱한 대상들과 결부되어 변형되거나 왜곡된 형태로 강렬하게 살아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소중한 사람들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한편으로는 역사를 관통하는 문학 작품들을 접하기 위해 노력도 해보았다. ‘교나소’(<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소설>)다쓰현과 같이 가지고 다니느라 가방이 조금 더 무거워졌다. 작가의 숨결을 따라 형상화된 사건들을 읽고 있노라면, 주먹을 쥐기보다 쫙 편 손가락으로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었다. 그러면 나와 같이 주먹을 쥔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조금은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대신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을, 그리고 이 땅에서 분명히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이 즈음부터 문학에 보다 마음을 두게 되었던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되는 학기마다 그만큼의 기대와, 그보다 조금 더 많았던 열패감을 수없이 반복하다보니 교나소에 나왔던 작품들이, 왠지 모르게 숨을 죽이고 읽었던 그 작품들이 교과서에 실리는 시대가 되어 있었다. 소설 속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던 사람들의 삶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 사이에서 환하게 꽃으로 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꽃이 피었었던가.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 어느새 역사는 후일담이 되었고, 죄지은 모든 사람들에게 섣불리 용서를 안겨주었으며, ‘역사를 입에 담으면 또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며 호통을 치면서도 여전히 얼치기인 나는 정작 더 이상 아무에게도 비난받지 않는다. 발전이라는 환상에 온통 사로잡힌 사람들의 눈은 우리 주변에서 철따라 피었다 지는 꽃에 대한 관심을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것으로 만든다.

 

 공선옥의 장편 소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는 안됐지만 바로 또 그런 이야기. 왜 또 그런 이야기일까. 하지만 질문이 잘못 되었다. ‘역사는 이미 를 포함하고 있다. 문학이 역사를 마주할 때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역사적 사건 그 자체만을 밝히고자 하는 학문적 태도일 뿐이며,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과거를 재구성할 뿐이다. 문학과 역사가 함께 놓인 지금 이 자리에서 과거의 역사를 질문할 때 중요한 것은 문학으로 역사를 반복한다는 사실, 따라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공선옥의 소설은 또 그런 이야기어떻게반복하고 있을까.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는 결국 이 물음에 대한 원형적이고도 난해한, 그러면서도 세밀하고 친숙한 대답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설 속 인물들의 언어 사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많은 화제 속에서 상영되었던 영화 지슬을 본 사람이라면 우리나라 영화임에도 자막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색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나도 영화를 보면서 혹시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몇 번은 일부러 자막을 보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느낀 점은 소위 표준어와 제주 방언의 놀라운 차이점뿐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놓인 상황에서도 천연스럽게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은 그 어감으로 인해서 코믹하게 다가오기까지 했다. 몇 번은 제주를 가봤지만 그때는 잘 들어보지 못했던 영화 속 제주의 말은 절제된 장면 너머에 있는 아픔을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단순히 관광으로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표준어가 기획하고 분배하는 의미에 포획되지 않은 실제 그들 삶의 내면을 엿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방언을 사용하는 이유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으로도 충분치 않았다고 생각한 걸까. 생각해보면 '표준어'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남도'의 방언은 제주의 말과도 달리 TV 속 시트콤 적인 상황의 연출에 완전히 갇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융구 쇼바 슝가 아리따 슈바 슈하가리 차리차리 파파."(9) 결국 소설 속 인물들의 말은 자주 지워지고 형태가 없어지거나, 아예 "꾸에엑 꾸에엑"(19) "꾸루루 꾸루루"(40) 동물 소리를 닮아버리고 만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꼬리를 물고 벌어지는 나쁜 일들은 그것을 저지른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피해 당사자의 이야기는 뜸부기나 가죽나무, 구렁이, 제비등에게만 전달 될 뿐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라면 분명히 실패라고 보아야 할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언어는 하지만 때로 알 수 없는 힘을 갖게 되기도 한다. 가령 소설 속에서 몰락한 집안을 위해 누에를 키우던 어린 소녀가 그 먹이를 구하기 위해 몰래 산뽕을 따러 갔다가 산 임자를 만나 닦달을 당하는 장면이 있다. 누가 봐도 일방적으로 당할 줄 알았던 소녀는 하지만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산뽕을 얻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는 바로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언어가 결국 현실을 얽어매는 온갖 규준들, 그리고 그것에 연결되어 있는 소유의 고리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상징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이 장면이 더 인상적인 이유는 구성이 마치 판소리의 더늠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는 작품 자체가 전체적으로 통일된 전개를 따라가면서도 실제 이야기의 부분 부분은 길이가 짧고 독립적인 장면들로 다소 느슨하게 연결되어 마치 판소리 사설의 구성처럼 보인다. 그 속에서 이 장면을 비롯하여 많은 장면들이 더늠처럼 작용하면서 역사적 풍파에 시달리는 소설 속 인물들이 그 의미까지 현실의 인과관계에 휩쓸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끔 만들어 준다. 결국 이를 통해 작가는 역사를 감당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실제 역사에서는 소외되는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그들 스스로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여러 얼굴, 여러 목소리, 여러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변주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이제 우리도 겨우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마당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그들의 노래는 여기에서 흘러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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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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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의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 크라쿠프(Kraków)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짧은 일정의 여행이 그렇듯 도시 근처의 잘 알려진 여행지들 중 한 두 곳 정도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결국 오시비엥침(Oświęcim), 우리에게는 독일어식 발음으로 잘 알려진 아우슈비츠(Auschwitz)를 여행지에서 제외했었다.

 

 잘 알다시피 이곳은 그리 멀지 않은 오래 전, 마치 여행지를 결정하는 것처럼 단순한 이유들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의 수난의 현장이다. 하지만 나는 당시 그 현장을 외면한 채 먹고 마시며 떠들 수 있는 곳을 선택한 셈이었다. 그곳에서 살아남아 1987년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할 때까지 수많은 소설과 시, 그리고 희곡 등을 통해서 그곳을 단 한 번도 잊지 않은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같은 사람도 있었는데 말이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유대계 가문에서 태어난 레비는 화학자였으나 파시스트 정권에 저항하는 유격대 활동 중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서 1년여의 수용소 생활을 보냈다. 1945년 소련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운 좋게살아남은 그는 다시 고향인 토리노에 돌아와 화학자로서 연구실과 공장에 근무하면서 소설 쓰는 일을 병행한다. 처녀작인 이 작품을 비롯하여 <휴전>, <주기율표> 등의 인상적인 작품들이 바로 이 시기에 쓰여졌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기록문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수용소 경험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작품 역시 작가가 몸소 겪은 수용소 생활의 생생한 기록이다.

 

  이쯤되면 슬슬 지겹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 사건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는 이 사실이 혹시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착한 독일인이나 <더 리더(The Reader)>의 결백하지만 사랑을 위해 자신의 나치 행적을 인정하는 순수한 독일인의 눈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영화 <바스터즈(Inglourious Basterds)>에서 보여진 것과 같은 단순명쾌한 피아관계와 말초적 차원의 통쾌한 복수극에도 아무런 부담없이 열광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때로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절망 그 자체를 직시해야 할 때가 있다. 절망의 극복에 대한 지나친 열망은 자칫 우리의 시선을 편향적이고 과장되게 만들거나, 현실을 왜곡하고 아예 눈감아 버리게 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결국 끝없는 절망의 연속뿐이다.

 

 이 책은 우리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절망에 대한 철저하고도 객관적인 기록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이 실상 거짓 희망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작품에 담겨 있는 수용소 생활 기간 내내 유지되는, 지옥과도 같은 절망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이성의 힘을 통해서 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침에 잠을 깨우는 폴란드어 “Wstawać(기상)”이 가장 날카로운 고통이라고 말할 정도로 힘들었던 수용소 생활동안 틈틈이 남긴 실제 메모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개인적 회고를 바탕으로 한 기록문학을, 역사적 희생자의 고백록을 뛰어넘어 인류사에 유례없이 불행했던 역사적 사실에 맞선 인간 이성의 유일한 활동일지가 된다

 

  레비가 겪었던 비이성적인 사건은 이제 인류사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는 그저 한 미치광이의 광기 어리고 우발적인 사건일 뿐이었을까. 하지만 레비가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가 나와 다른 것을 모두 적이라고 생각하는 한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엄밀한 사유를 거친 논리적 결론은 타자를 배제하는 수용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불법 체류자로 전락한 외국인 노동자가 만원 버스 속에서도 혼자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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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한 개비의 시간 -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문진영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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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 남자가, 자신을 관찰하는 전지적 작가의 목소리를 어느날 갑자기 듣게 되면서 겪는 곤경 

을  그린 영화 <Stranger than fiction>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그 목소리가 말하는 것이 일종 

의 스토리라고 여긴 주인공이 문학 전공 교수를 찾아가 상담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 교수는 주 

인공이 듣는 목소리가 어떤 작가인지 알아내고자 일종의 테스트 문항을 만들어내는데, 그렇게해 

서 작가를 알아낼 수 있다면 목소리가 말하는 스토리의 성격도 미리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 

문이다.  

 자, 우리도 한 번 이같은 테스트를 해보자. 

 Q. 백수급 편의점 알바생.                                               
    A. 박민규? 틀렸다. 

 Q. 반지하방이나 옥탑방에 살고 있다.                             
    A. 김애란? 땡. 

 Q. 뭔가 나서기만 하면 비가 오는 날들의 이야기.                
    A. 부코스키, 아니 한재호? 노. 

 Q. 쿨한 유머같은 이야기들. 뼈가 있는 듯도 하지만 싸이 미니홈피들을 랜덤타기 하다가 어디선가 본듯한 대화들. 인물의 갑작스런 죽음.       

    A. 뭐야 이거, 번역소설이었어? 하루키? 

 
 아니, 아니다. 다 틀렸다. 사실은 문진영. 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자이다.  

어떤 작품에 어떤 상을 주어야하는지에 대한 기준의 옳고 그름은 던져두자. 그저 위의 테스트 문 

항을 신뢰한다면, 우리의 소설계는 또 한 명의 개성없는 소설가를 탄생시켰다는 말로 충분하니까.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비롯하여, 어떤 한 세대를 부르는 명칭들에는 그 궁극적인 목적이 숨겨져  

있다. 그 명칭이 궁극적으로는 그 세대를 부를 수 있는 효용의 가치를 잃고 다른 명칭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 운동성을 그 세대에 부여하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88만원 세대'는 "88만원"이 어떤  

한 "세대"의 가치관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자극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그때 '88'이라는 자리에  

그 어떤 숫자이든 또 다른 숫자들이 대체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따라서 '88만원 세대'라는 명찰에는, 어차피 100만원도 안되는 돈을 받느니 그냥 대학 휴학하고  

편의점 알바를 하라는 뜻이 있거나, "쐐-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습관"처럼 살라는 뜻이 들어있 

는 것이 아닐게다. 그런데도 최근 쏟아지는 우리의 젊은 소설들에서는 왜 그 이상의 세계는 없는  

걸까? 왜 88만원 세대라는 명칭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 들이는 걸까? "울 필요가 없다"는 극히 개 

인적이고도 개인적인 자각이면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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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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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태어난 땅에 특별한 애착이 없는 나이지만, 모국어가 내 육체적 욕망의 한 부분을 그렇게나 크게 차지하고 있을줄은 몰랐다. 한국을 떠나온지 3개월여 쯤. 나는 거의 미칠듯 모국어로 된 책을 읽고 싶었고, 그러다가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다른 사람(그것도 생판 모르는 사람)의 책을 뻔뻔하게 돌려주지 않은 채 아껴가며 조금씩 조금씩 읽었다. 그 책이 <여행의 기술>이었고, 그렇게 알게 된 알랭 드 보통은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때의 분위기상 내게 약간은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귀국 후 맞은 바쁘고도 지겨운 일상속에서 알랭 드 보통은 어느새 잊혀지고 말았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내 생일에 가까운 후배가 <행복의 건축>을 선물했고 그렇게 다시 알랭 드 보통은 필연인 듯 다가왔다. 모국어로 쓰인 것이라면 감동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로서의 불리한(?) 조건을 벗고 만난 알랭 드 보통은 더욱 놀라웠다. 에세이 방식으로서의 글쓰기를 위해 다양하게 수집한 자료들의 방대함에도 놀랐고, 그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배치한 능력에도 놀랐으며, 그 자료들을 하나로 꿰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야 마는 예술적 감각과 통찰력에도 놀랐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그의 다른 책들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야 말았다. 소위 "가벼움"을 표방한 퓨전 식의 그 어떤 장르도 거부하는 내게 알랭 드 보통은 그 금기를 조금은 넘어도 괜찮지 않냐고 말을 건넨 최초의 작가인 셈이다. 
 세 번째. 삼고초려라는 말도 있듯 어떤 대상을 알기에 충분한 시간으로 비유되는 숫자. 이번엔 거의 신간인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직접 구입해서 알랭 드 보통을 만났다. 물론, 일말의 불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씩 생겨나고 있던 작가에 대한 믿음과 공항에 대한 막연하다고 할 정도의 설렘을 가진 난 어느새 책을 사고 말았는데....

 <공항에서 일주일을>은 자본이 어떻게 예술과 미적인 것을 탐구하는 인간의 사고능력을 지배하고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보여주는 끔찍한 책이다. 오죽했으면, "정말 이 책을 작가가 출간하려 했을까, 혹시 그냥 히드로 공항의 무료 홍보 책자로 발간된 것을 작가의 인기에 영합해서 출판사가(난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다.) 무리하게 판권을 산 뒤 국내 출판을 강행?"이란 생각까지 했을까. 그러나 이건... 진짜.. 책이다. 아마존에서도 팔리고 있고, 작가의 홈페이지에도 버젓이 있더라... 흠...
 7쪽에 달하는 다소 장황한 집필에 대한 변명은 일단 접어두자. 또, 자신의 "고용주"인 브리티시에어라인 사장을 만난 부분의 "용비어천가"도 정말정말 힘들지만 또 접어두자. (사실 그러고나면 책 내용이 얼마 남지도 않지만...) 일주일동안 히드로 공항의 터미널 No.5에서 작가가 한 일이라고는, 소피텔 호텔의 클럽 샌드위치를 작살낸 것, 애프터 버너라는 칵테일을 처 마신 것, 자판기에서 애새끼들마냥 과일맛 하드를 사 처먹은 것, VIP 라운지 식당에서 브리오슈를 바닥에 깐 포르치니 버섯 한 접시를 배불리 처먹고 시계풀 열매 셔벗과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까지 시켜 먹은 것 뿐이다. 아, 하나 일같은 일을 했긴 했다. 공항에서 헤어지는 어떤 연인을 보고 사진기자와 "병력"을 나누어 탑승 게이트 너머까지 뒤쫒아 간 일. 

 작가는, 공항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들을 때깔나고 담아보고도 싶었겠지만 자본이 제한한 장소와 시기 앞에서 작가가 가지고 있었던(가지고 있었던 거 맞는거죠?) 예리함은 그 공간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고 만다. 
 기내식을 만드는 공간을 보고나서 "(기내식을 먹는) 누구도 그 음식을 만든 리투아니아 출신의 스물여섯 살 난 루타는 떠올리지도, 그녀에게 감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 작가는 실상 스스로가 그런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VIP라운지에서 "<월스트리트 저널>을 읽는 운동복 차림의 스물일곱 살짜리 기업가와 욕실을 돌아다니며 국제적 박테리아 군체를 닦아내는 일을 하는 필리핀 청솝의 지위 사이의 상대적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중요한 일이라고 말한 작가는 애써 그 관계를 외면하고 있다. 

 결국, 주급을 받고 써야 할 것을 써야만 했던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고용주를 만난 시간 즉, "노동조합 대표를 만나는 시간과 에어버스 대표를 만나는 시간" 그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버린 채 두 손을 들고 있다.   

 이 책을 사면서 <불안>을 같이 샀다. 이거 읽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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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9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9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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