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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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의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 크라쿠프(Kraków)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짧은 일정의 여행이 그렇듯 도시 근처의 잘 알려진 여행지들 중 한 두 곳 정도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결국 오시비엥침(Oświęcim), 우리에게는 독일어식 발음으로 잘 알려진 아우슈비츠(Auschwitz)를 여행지에서 제외했었다.

 

 잘 알다시피 이곳은 그리 멀지 않은 오래 전, 마치 여행지를 결정하는 것처럼 단순한 이유들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의 수난의 현장이다. 하지만 나는 당시 그 현장을 외면한 채 먹고 마시며 떠들 수 있는 곳을 선택한 셈이었다. 그곳에서 살아남아 1987년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할 때까지 수많은 소설과 시, 그리고 희곡 등을 통해서 그곳을 단 한 번도 잊지 않은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같은 사람도 있었는데 말이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유대계 가문에서 태어난 레비는 화학자였으나 파시스트 정권에 저항하는 유격대 활동 중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서 1년여의 수용소 생활을 보냈다. 1945년 소련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운 좋게살아남은 그는 다시 고향인 토리노에 돌아와 화학자로서 연구실과 공장에 근무하면서 소설 쓰는 일을 병행한다. 처녀작인 이 작품을 비롯하여 <휴전>, <주기율표> 등의 인상적인 작품들이 바로 이 시기에 쓰여졌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기록문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수용소 경험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작품 역시 작가가 몸소 겪은 수용소 생활의 생생한 기록이다.

 

  이쯤되면 슬슬 지겹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 사건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는 이 사실이 혹시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착한 독일인이나 <더 리더(The Reader)>의 결백하지만 사랑을 위해 자신의 나치 행적을 인정하는 순수한 독일인의 눈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영화 <바스터즈(Inglourious Basterds)>에서 보여진 것과 같은 단순명쾌한 피아관계와 말초적 차원의 통쾌한 복수극에도 아무런 부담없이 열광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때로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절망 그 자체를 직시해야 할 때가 있다. 절망의 극복에 대한 지나친 열망은 자칫 우리의 시선을 편향적이고 과장되게 만들거나, 현실을 왜곡하고 아예 눈감아 버리게 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결국 끝없는 절망의 연속뿐이다.

 

 이 책은 우리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절망에 대한 철저하고도 객관적인 기록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이 실상 거짓 희망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작품에 담겨 있는 수용소 생활 기간 내내 유지되는, 지옥과도 같은 절망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이성의 힘을 통해서 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침에 잠을 깨우는 폴란드어 “Wstawać(기상)”이 가장 날카로운 고통이라고 말할 정도로 힘들었던 수용소 생활동안 틈틈이 남긴 실제 메모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개인적 회고를 바탕으로 한 기록문학을, 역사적 희생자의 고백록을 뛰어넘어 인류사에 유례없이 불행했던 역사적 사실에 맞선 인간 이성의 유일한 활동일지가 된다

 

  레비가 겪었던 비이성적인 사건은 이제 인류사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는 그저 한 미치광이의 광기 어리고 우발적인 사건일 뿐이었을까. 하지만 레비가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가 나와 다른 것을 모두 적이라고 생각하는 한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엄밀한 사유를 거친 논리적 결론은 타자를 배제하는 수용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불법 체류자로 전락한 외국인 노동자가 만원 버스 속에서도 혼자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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