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8년


 왕망(王莽)이 신왕조(新王朝)를 건립했고, 전한(前漢)이 멸망했다



 ※ 적미(赤眉)의 난(亂)은, 신말(新末)과 후한(後漢) 초기, 중국의 신조(新朝)가 멸하고, 광무제(光武帝)에 의해서 후한(後漢)이 일어나기까지의 편의적인 시대구분이 되었던 사건을 말함.

 <왕망(王莽)의 정치>

 왕망(王莽)은 전한(前漢)의 왕위를 찬탈해서 황제에 즉위했고, 그 후 유교적인 입장과 주대(周代)의 치세를 복고한다는 정책 아래 <정전(井田)법>을 모방하여 전국의 전지(田地)를 국유화했으며, 화폐도 새롭게 개주(改鑄)했던 등, 나름대로 새로운 정책을 펼쳐 나갔다. 하지만 그러 했던 정책은 현실성이 전혀 없었고, 거기다 화폐도 자주 개주(改鑄)했기 때문에 경제에 혼란만 가져다 주었다. 그러자 또 그 결과 지방에서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호족들은 손해를 보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반발도 이어졌다. 그리고 또한 외교정책에서도 과도한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근거해서 흉노(匈奴)와 고구려(高句麗)를 대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에는 그 나라들도 등을 돌리게 되었다.

 <
적미(赤眉)의 난(亂)>

 그러자 그 즈음에, 여러 가지의 불평을 가지고 있었던 농민들로부터 시작된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효시(嚆矢)가 되었던 사람이 바로 랑(낭)사군(琅邪郡) 해곡현(海曲縣=현재의 山東省 青島 부근)에 살고 있던 여모(呂母)라고 불렸던 한 노파였다.


<青島市 현재>


 그녀는 아들은 당시 현청(縣廳)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일로 현재(縣宰=현의 장관)에게 붙들려서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서력(西曆) 17년, 그에 분함을 이기지 못했던 그녀는 돈을 주고 사람들을 모아서 바다에 나가 있던 현재(縣宰)를 덮쳐서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원한을 풀고 저 세상으로 떠나갔지만, 그런데 그때 한번 모여졌던 잡군(雜軍)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어서 번숭(樊崇)이란 자를 우두머리로 삼더니, 당시 산동(山東) 각지로 흘러 다니던 유민들을 흡수해서 그대로 <적미(赤眉) 군>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적미(赤眉)란 이름은 당시 적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눈썹을 염료 등으로 칠해서 붉게 물들였는데, 그런 연고로 적미(赤眉) 군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런 한편 그 <여모(呂母)의 난(亂)>이 조금 지난 후, 다시 왕광(王匡)과 왕봉(王鳳) 등이 녹림산(綠林山=현재의 湖北省 當陽縣)을 근거로 해서 농민들을 흡수했고, 이어서 그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綠林軍의 탄생)


<湖北省>


 하지만 그 후, 그 군(軍)의 내부에서 역병(疫病)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서력(西曆) 21년에 부대는 분열되었다. 그러자 그 결과, 한 무리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하강군(下江軍)으로 불리게 되었고, 다른 한 무리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그대로 하남성(河南省)의 남양(南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신시군(新市軍)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신시군(新市軍)은 남양(南陽)의 호족이었으며 또한 같은 친척이기도 했던 유씨(劉氏)들과 손을 잡았고, 그리하여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 유씨(劉氏)들 중에서는 유수(劉秀)와 그의 형이었던 유연(劉縯) 등이 있었고, 그리고 또 서력(西曆) 23년에는 그 유씨(劉氏)들 중에서 유현(劉玄)을 왕위에 올렸다.(更始帝)


<河南省>


 그러자 왕망(王莽)은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또 서력(西曆) 22년에는 왕광(王匡-綠林軍의 王匡과는 同名異人)을 장군으로 해서 적미(赤眉)군의 토벌을 명했지만, 그러나 그 왕광(王匡)은 적미(赤眉) 군에 패했다.(赤眉軍이 눈썹을 붉게 물들였던 것은 바로 이 싸움부터였다고 한다)

 그런 한편, 신군(新軍)은 곤양(昆陽)의 싸움에서도 졌다.(아래 昆陽의 싸움 참조) 그러자 왕망(王莽)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되어갔다. 그러자 또 그때 누가 다음과 같이 진언을 했다. <옛날부터 나라에 큰 재앙이 있을 때는 큰소리로 통곡을 해서 그것을 풀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늘을 향해서 큰소리로 통곡을 해서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왕망(王莽)은 그 진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이어서 통곡소리가 큰 사람들을 모집해서 그들을 관리로 뽑았다.(5천 명이나 되었다고 함) 그러자 그것을 보고 또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러자 결국 왕망(王莽)은 그 반도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광무제(光武帝)>

 왕망(王莽)이 죽은 후, 갱시제(更始帝) 군은 관중(關中)으로 들어가서 장안(長安)을 제압했다. 하지만 그때 장안(長安)으로 몰려 들어갔던 갱시제(更始帝)군은 단번에 타락을 해서 재보를 마구 약탈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주야장천(晝夜長川) 연회를 여는 등, 전(前) 시대들과 나아진 모습을 전혀 보여주질 못했다. 그러자 적미(赤米)군은 그에 실망을 해서 앞서 맹세했던 갱시제(更始帝)에게 복종하겠다는 약속을 깼고,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독자의 노선을 걷기로 결의하고는 장안(長安)을 치기로 결정했다.

<現 西安市=長安에 상당>



 그리고 또 그 무렵, 유수(劉秀)는 갱시제(更始帝)와 그 측근들에 의해서 살해 당했던 자신의 형 유연(劉縯)의 일도 있었고 해서, 조정(朝廷)으로부터 위험한 인물로 평가되어 원정도 떠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또 당시, 적당한 장군이 없었던 갱시제(更始帝)군에서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를 다시 불러서는 그에게 하북(河北)을 제압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그는 하북(河北)으로 출병해서 그곳의 호족들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당시 왕랑(王郞)과 동마군(銅馬軍)이라고 불리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반도들과 고전(苦戰)을 했고, 이어서 서력(西曆) 24년에 왕랑(王郞)을 멸했다. 그리고 또 그런 다음에 그는 동마군(銅馬軍)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으로 해서 하북(河北)도 통일시켰다.

 그 다음해, 유수(劉秀)는 황제 위에 올라서 원호(元號)를 건무(建武)로 했으며, 낙양(洛陽)을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또 그때, 유수(劉秀)의 부하들 중에서는 동마군(銅馬軍)이 많았으므로, 그래서 그는 동마제(銅馬帝)로 불리기도 했다.


 다음 25년, 적미군(赤眉軍)은 서진(西進)해서 관중(關中)을 공략했다. 그러자 전혀 힘을 쓰지 못했던 갱시제(更始帝)군은 적수가 되지를 못했고, 그러자 또 갱시제(更始帝)는 투항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장안(長安)으로 들어갔던 적미군(赤眉軍)은 전에 갱시제(更始帝)군들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며 약탈을 해나갔고, 나중에는 약탈할 물건이 더 이상 없게 되자 동쪽인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 27년, 광무제(光武帝)의 부하 중 등우(鄧禹)가 대패했다. 하지만 또 그때, 등우(鄧禹)와 함께 싸우다 대패했던 풍이(馮異)가 흩어졌던 부하들을 다시 모아서는 재차 싸웠고, 이어서 대승했다. 그러자 광무제(光武帝)는 적미군(赤眉軍)의 귀도(歸途)를 막았고, 그러자 적미군(赤眉軍)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그 후, 상황을 완전히 장악했던 광무제(光武帝)는 차례로 양(梁=河南省)의 유영(劉永), 서(舒=安微省)의 이헌(李憲), 랑사(琅邪=山東省)의 장보(張步) 등, 군웅세력들을 제압했고, 그 다음 36년에는 촉(蜀=巴蜀)의 땅에 성(成=成家)이란 나라를 건국하고 있던 공손술(公孫述)을 멸하고는 전국도 통일했다.

 공손술(公孫述-?~A.D.36)은, 중국 후한(後漢) 때의 무장으로, 字는 자양(子陽)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왕망(王莽)을 섬겼으나, 후에 청두(成都)에서 병사를 일으켜서 파촉(巴蜀)을 평정했고, 이어서 25년에 천자(天子)라고 칭하고 국호를 성가(成家)라고 하였지만, 그러나 뒤에 광무제(光武帝)에 의해서 멸망했다.(후술 또는 생략)

 ※ 그리고 다음은 그
당시의 군웅(群雄)들에 대한 소개이며, 단, 이름만 밝히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邯鄲의 王郎/ 梁의 劉永琅/ 邪의 張歩/ 東海의 董憲/ 楚黎丘의 秦豊/ 漢中의 延岑
 夷陵의 田戎/ 漁陽의 彭寵/ 涿郡의 張豊/ 郾의 尹尊/ 舒의 李憲/ 真定의 劉楊(劉揚)
 淯陽의 鄧奉/ 堵郷의 董訢/ 安定의 盧芳/ 陳倉의 呂鮪/ 河西의 竇融/ 隴西의 隗囂
 巴蜀의 公孫述


 
 ※ 곤양(昆陽)의 싸움(昆陽之戰)은, 중국 신대(新代) 지황(地皇) 4년(西曆 23년 또는 更始1년) 곤양(昆陽=豫州 頴川郡=現 河南省 平頂山市)에서 신군(新軍)과 녹림군(綠林軍) 간에 벌어졌던 싸움이었다.

 서력 8년, 왕망(王莽)은 신(新)을 개국하고 연호(年號)를 초시(初始)로 하며 왕조를 열었지만, 그러나 그때 그가 채용했던 이상주의와 회고(懷古)주의 정책은 당시의 실정과는 맞지가 않아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당시, 반도들 중에서는 적미(赤眉) 군과 녹림(綠林) 군이 가장 강했는데, 그러자 또 당시 남양(南陽)의 호족이었던 유현(劉玄)도 녹림(綠林) 군에 가세했고, 그리고 또한 동족(同族)의 유연(劉縯), 유수(劉秀) 형제도 반기를 들게 되어, 녹림(綠林) 군은 곧 농민호족 연합군이 되었다.

 그 후, 유연(劉縯)은 신군(新軍)을 격파했고, 이어서 유현(劉玄)이 황제에 올랐으며, 그리하여 유연(劉縯)은 대사도(大司徒)에 그리고 유수(劉秀)는 태상편(太常偏)장군이 되었다.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신(新)에서는 지황(地皇) 4년(23년) 3월에 유(劉) 형제 등, 갱시(更始)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과 대사도(大司徒) 왕심(王尋)이 100만이라는 군사를 인솔해서 출진했다.(그러나 실제로는 40만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동년 5월, 왕읍(王邑) 등의 군사들은 영천군(潁川郡)으로 들어갔고, 그러자 장우(莊尤) 등의 잔군(殘軍)들이 그에 합류했다.

 그러자 또 당시 유수(劉秀)가 이끌었던 군사는 불과 수천밖에는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일단 곤양(昆陽)성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 성내(城內)에는 약 8, 9천정도의 군사밖에는 없었다. 그러자 유수(劉秀)는 일단 왕봉(王鳳)과 왕상(王常)에게 성(城)을 맡기고, 자신은 몇 명의 장군 등 13기(騎)만 이끌고서 성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영천군(潁川郡)으로 가서 군사들을 모집했다.

 그런 한편, 신(新)의 군영에서는 장우(莊尤)가 유연(劉縯)을 먼저 토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진언을 냈지만, 그러나 왕읍(王邑) 등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고, 우선 곤양(昆陽)을 포위했다.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왕봉(王鳳) 등이 항복하려 했지만, 그러나 왕읍(王邑)은 그것도 인정하지 않고 더욱 포위망을 굳혔다. 그러자 장우(莊尤)가 다시 상대를 궁서(窮鼠)로 만들지 말 것을 진언했다. 하지만 그 진언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결과 왕봉(王鳳) 등은 신군(新軍)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게 되어갔다.

 그러던 사이 5월 말에는 유연(劉縯)이 완(宛)을 함락했고, 거기다 6월에는 유수(劉秀)가 수천의 원군들을 모아서 곤양(昆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보병과 기병 1천여 명을 인솔해서 신(新)의 대군이 모여 있던 진영으로부터 불과 4, 5리(里)정도까지 진군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왕읍(王邑)과 왕심(王尋)은 그것을 얕잡아보고 자군(自軍)에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준 다음, 스스로 1만여 군사들을 인솔해서 유수(劉秀) 군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유수(劉秀)의 활약에 힘입어서 왕읍(王邑), 왕심(王尋) 군은 참패했다. 그러자 유수(劉秀)는 결사대(決死隊) 3천 명을 인솔해서 곤양(昆陽)성 서쪽의 강을 건넜다. 그리고는 신(新) 진영의 중핵(中核)으로 돌격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신군(新軍)은 대군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거기서 왕심(王尋)이 전사했다. 그리고 또 그곳에 있던 한군(漢軍)도 유수(劉秀) 군에 호응했기 때문에, 그래서 신군(新軍)은 대혼란을 일으키며 패주했고, 그 사이에 왕읍(王邑)은 도망쳤다. 하지만 또 그때, 기후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아서 그들은 강풍과 호우(豪雨) 속에서 탈출했고, 그러자 신군(新軍)은 완전하게 붕괴했으며, 이어서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또, 그렇게 도망을 갔던 왕읍(王邑)도 가까스로 낙양에 도착했을 때는, 그의 곁에 남아있던 군사는 불과 수천 기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왕망(王莽)은 살해되었고, 신(新)도 그렇게 해서 멸망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신(新)을 멸망시켰던 갱시(更始) 권력 내에서도 금방 주도권쟁탈전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또 갱시제(更始帝)에 의해서 유연(劉縯)이 숙청되었다. 그러자 또 그것을 확인했던 유수(劉秀)는 하북평정(河北平定)이라 칭해지며 그 후로도 스스로 몸을 더욱 낮추는 등, 정권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는 25년에 황제에 즉위했고, 이어서 한(前漢)을 계승했으며, 이후 다시 통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유수(劉秀)왕조, 즉 광무제(光武帝)왕조로부터 <후한(後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25년


 유수(劉秀=光武帝)가 후한(後漢)王朝를 세우다





<光武帝>

 

 

 

 ※ 설명은 위의 내용으로 대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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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BC33


 왕소군(王昭君)이 동흉노(東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鄯于)에게 강가(降嫁)했다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 경)


 



 흉노(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와 그의 아들 복주누약제단우(復株累若鞮單于-呼韓邪單于 제2閼氏의 子) 시대의 알씨(閼氏). 성(姓)은 왕(王), 휘(諱)는 장(嬙)이었다고 반고(班固)가 한서(漢書)에 기록함.(그러나 정확한지는 알 수 없음) 자(字)는 소군(昭君). 출신은 형주(荊州) 남군(南郡-현재의 湖北省 沙市). 양귀비(楊貴妃), 서시(西施), 초선(貂蟬)과 함께 중국 4대(大) 미녀 중 한명으로 여겨지고 있음.

 ※ 양귀비(楊貴妃-719~756)는,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의 비(妃)였고, 이름은 태진(太眞)이었다. 그리고 춤과 음악에 뛰어났다고 하며, 총명하여 현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안사의 난 때 살해당했다. 또는 자결 등.


 

<양귀비>



 
※ 서시(西施)는 이미 소개되었지만,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인으로, 오나라에 패했던 월나라 왕 구천이 그녀를 부차에게 보냈고, 그러자 그 부차가 그녀의 용모에 빠져 있던 사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
초선(貂蟬)은 가공(架空)의 인물이며, 중국 후한(後漢)의 충신 왕윤(王允)의 양녀였다고 삼국지(三國志)에 나와 있고, 미인계(美人計=연환계)로 유명했다.




 아무튼, 그녀는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시대에 흉노(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漢)의 여성을 알씨(閼氏)로 맞이하고 싶다고 청해 오자, 원제(元帝)가 그녀를 선택해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주었고, 그러자 그녀는 그 후 일남(一男)을 생산했다.(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오히려 漢 왕조에서 권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 후,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사망했고, 그러자 그녀는 또 그 흉노(匈奴)의 풍습대로 그 아들이었던 복주누약제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알씨가 되어서 2녀(女)를 생산했다. 그러자 또 그 일은 한족(寒族)의 입장에서는 근친상간(近親相姦)에 필적(匹敵)하는 부도덕(不道德)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의 비극과 함께 민간에 전승(傳承)되었다.

 그리고 또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고 하는데, 그래서 또 소개하면, 원제(元帝)는 처음에 흉노(匈奴)로 보낼 여성을 후궁(後宮) 중에서 물색하다가 그 중에서 제일로 못생긴 궁녀를 보내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원제(元帝)는 당시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던 모연수(毛延壽)란 자에게 시켜서 제일로 못생긴 궁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하지만 또 그때, 다른 궁녀들은 모두 그 모연수(毛延壽)란 자에게 잘 봐달라는 뜻으로 뇌물을 주었는데, 그러나 왕소군(王昭君)만은 그에게 아무런 뇌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에 앙심을 품었던 모연수(毛延壽)는 왕소군(王昭君)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러자 왕소군(王昭君)은 어쩔 수 없이 흉노(匈奴)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그때, 왕소군(王昭君)이 흉노(匈奴)로 떠나기 전에 인사차 원제(元帝)를 보러갔는데, 그런데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그녀와 대면했던 원제(元帝)는 그녀의 미색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결정된 일이었고 그리고 또 흉노(匈奴)와의 관계도 생각해서 원제(元帝)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흉노(匈奴)로 보냈다. 하지만 그 후, 원제(元帝)는 모연수(毛延壽)가 부정한 생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격노하고는 그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이미 선술(先述)한 대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죽었고, 그러자 그녀는 그의 아들에게 다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 왕소군(王昭君)은 격심하게 반발했다고 했지만, 그러나 한(漢)으로부터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고 <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또, 그 서경잡기(西京雜記)에 기록된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이설도 있으며, 그것은 또 당시 가장 중요한 외교대상국이었던 흉노(匈奴)에 일부러 못생긴 여성을 보내려 했다는 것은 일종의 무례(無禮)로, 그래서 아마도 그것은 창작이 아니었겠느냐는 설이 그것이다.(그런 사실을 기록한 것은 西京雜記밖에 없으므로) 하지만 또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는 사실에 관계없이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 후 진대(晋代)의 왕소군사(王昭君辭)와 원대(元代) 마치원<馬致遠-중국 원나라의 극작가. ?1250-?1324. 호는 동리(東籬)>의 잡극(雜劇-중국의 고전연극을 이름) 한궁추(漢宮秋) 등으로 작품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현재, 그녀의 무덤은 내몽고 자치구의 후허하오터 시(呼和浩特市)에 있는데, 진위는 알 수 없으며, 그러나 능묘 주위에는 그녀의 고향 집을 재현한 건물과 정원이 정비되어 있고, 그리고 또 그 내부에는 흉노(匈奴)의 박물관 등이 건립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呼和浩特市>

 8년


 왕망(王莽)이 신왕조(新王朝)를 건립했고, 전한(前漢)이 멸망하다


 

 왕망(王莽-B.C.45에서 A.D.23)

 그는 신조(新朝)의 황제(皇帝)였고, 즉위 전의 작위(爵位)는 안한공(安漢公)이었다. 그리고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황후였던 왕정군(王政君=孝元皇后)의 조카였고, 성제(成帝) 외가의 사촌동생이었다. 그리고 또 왕만(王曼)의 차남(次男)이었으며, 왕우(王宇), 왕획(王獲), 왕안(王安), 왕림(王臨), 왕흥(王興), 왕광(王匡) 등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손(孫-王宇의 子)으로는 왕종(王宗)이 있었고, 딸로는 평제(平帝)의 황후였던 왕씨(王氏)와 왕엽(王曄), 왕첩(王捷) 등이 있었다. 그리고 또 정처(正妻)는 의춘후(宜春侯) 왕함(王咸)의 딸이었으며, 그리고 한서(漢書) 등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이름 중 망(莽) 자는 초(艸 또는 草) 관(冠) 아래 큰 대(大) 자가 아니고, 개 견(犬) 자이다.

 아무튼 당시, 황후의 자리에 올랐던 그의 백모(伯母) 왕정군(王政君)의 연고(緣故)로 백부(伯父)들은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가 고관(高官)의 지위와 함께 유복한 삶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러던 중에 갑자기 그의 부(父)와 형(兄) 왕영(王永)이 차례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그의 집만 제후도 되지 못하고 궁핍해졌다.

 그 후, 왕망(王莽)은 공검(恭儉)하게 처신하면서 패군(沛郡)의 진참(陳參)이란 사람에게서 예경(禮敬)을 배웠고, 그 후도로 더욱 몸을 부지런히 하며 배움에 임해서 점점 더 학문을 넓혔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유생(儒生)과도 같은 마음으로 예를 다해서 자신의 어머니와 형수를 모셨으며, 그리고 또 자신의 조카였던 왕광(王光)을 양자로 삼고는 친자식 이상으로 열심히 양육했다. 그러자 또 그의 아내는 그에 대해서 늘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그 후, 그가 장년(壯年-30~40정도)이 되었을 때, 백부(伯父)였던 대장군 왕봉(王鳳)이 병이 들었다. 그러자 그는 그 왕봉(王鳳)의 병간호를 열심히 했고, 그러자 또 왕봉(王鳳)은 죽을 때 성제(成帝)에게 그를 맡겼다.

 그러자 그 후, 그는 왕상(王商)이나 왕근(王根) 그리고 당시 황태후가 되어 있었던 백모(伯母)의 배경으로 순조롭게 출세의 가도를 달려 나갔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친척이었던 순우장(淳于長)을 실각(失脚)시키고 대사마(大司馬)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그때부터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외척을 몰아내려 했던 애제(哀帝)가 즉위하자 그는 파면되었고, 봉국(封國)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또 그 후에 그를 국정에 복귀시켜야 한다는 탄원이 이어져서 그는 다시 장안(長安)으로 불려갔다.

 영시(永始) 원년(기원전 16년) 그는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고, 이어서 애제(哀帝)가 붕어하자 그 애제(哀帝)의 옥새(玉璽) 지킴이를 맡고 있던 대사마(大司馬) 동현(董賢)으로부터 옥새를 강탈해서 중산왕(中山王) 유간(劉衎=平帝)을 제위에 올렸다.

 그 후, 그는 유학(儒學)과 예언서(豫言書) 등에 근거해서 정책을 폈던 한편,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리고 또 그 와중에 자신의 차남(次男)이었던 왕획(王獲)이 노복(奴僕)을 죽였던 것에 대한 죄를 묻고, 또한 장남(長男)이었던 왕우(王宇) 또한 누구를 모략(謀略) 했던 것으로 해서 둘 다 감옥으로 보내서 함께 자살하게 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자신의 딸을 평제(平帝)에게 시집보내서 황후가 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자신은 재형(宰衡)과 안한공(安漢公)이 된 후, 평제(平帝)를 독살(毒殺)했다.(당시 14세)

 ※ 재형(宰衡)은, 재상(宰相)을 다르게 부르던 말로, 중국 은(銀)나라의 이윤(伊尹)이 아형(阿衡)이 되었고,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이 태재(太宰)가 되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는 먼 친척이었던 광척후(廣戚侯) 유현(劉顯)의 자(子) 유영(劉嬰)을 황태자의 자리에 올렸고, 스스로는 또 가황제(仮皇帝), 섭황제(攝皇帝)를 자칭하면서 조정의 모든 정무를 장악했다. 그리하여 거섭(居攝) 3년(8년)에 왕망(王莽)은 고조(高祖)의 영(靈)으로부터 선양(禪讓)받았다고 고하고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고, 이어서 신(新)을 건국했다.

 그리하여 또 그것은 역사상 첫 선양(禪讓)이었으며, 또한 찬탈(簒奪)이라 할 것이었지만, 하지만 어쨌든 그때, 태황태후(太皇太后)로서 국새(國璽)를 맡고 있었던 효원황태후(孝元皇太后) 왕정군(王政君)은 그 옥새를 수령하러 왔던 왕망(王莽)의 사자 왕순(王舜=王莽의 従兄弟)을 향해서 옥새를 내던지고는 왕망(王莽)을 몹시 나쁘게 매도(罵倒)했다고 사서(史書)에서는 전하고 있다.

 아무튼 그 후, 왕망(王莽)은 주대(周代)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고 정치를 펴나갔지만, 그러나 현실성이 결여되어서 각종의 정책들은 단기간에 파탄이 났다. 그리고 또한 흉노(匈奴)나 고구려(高句麗) 등 이웃 민족들의 왕호(王號)를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근거해서 모멸적인 명칭으로 개명하려했던 것으로부터 큰 반발을 불렀고(예를 들어서 高句麗를 下句麗로 칭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것을 진압하려 했지만, 그도 실패했다. 그리고 또 전매제(專賣制)의 강화 등도 실패해서 신(新)의 재정은 곧 곤궁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체제를 더 이상 견디지 못했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赤眉의 亂 등), 그 후 유사한 반란들이 속출했다.

 그 후, 왕망(王莽)은 남양군(南陽郡)에 옹립되어 있던 유현(劉玄=更始侯)을 치기 위해서 100만이란 대군을 보냈지만, 그러나 <곤양(昆陽)의 싸움>에서 유현(劉玄) 휘하의 유수(劉秀=光武帝)에게 패했고, 그로 인해 전국(全國)은 곧 군웅들이 할거하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장안(長安)으로 갱시후(更始侯)의 군대가 들이닥쳤으며, 그러자 또 왕망(王莽)은 그 혼란 중에 두오(杜吳)란 자에게 살해당했고, 그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리고 또한 그것으로 신(新)은 일대(一代)에 머물며 멸망했다.

 그 후, 그의 머리는 갱시후(更始侯)의 거성(居城) 앞에 전시되었으며, 그의 몸은 공(功)을 얻으려던 자들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망(王莽)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또한 그 후에 그의 치세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가해졌지만, 그러나 그가 행했던 <황제즉위의례>는 광무제(光武帝)에 의해서 재현된 후, 역대 황제들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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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BC77


 한(漢)의 부개자(傅介子)가 누란왕(樓蘭王)을 살해하고, 그 동생을 신왕(新王)으로 세웠고, 국명을 선(鄯)으로 고쳤다



 부개자(傅介子-?부터 기원전 65년)는,
전한(前漢) 사람(人)으로, 북지군(北地郡) 의거(義渠) 출신이었다. 그는 원래 종군관(從軍官)이었지만, 원봉(元鳳-昭帝 때) 원년(기원전 80년)에 준마감(駿馬監)이 되자 스스로 대완(大宛)으로 갈 사자(使者)가 될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소제(昭帝)의 명을 받아서 당시, 한(漢)의 사자를 죽였던 누란(樓蘭)과 구자(龜玆)에게 책임을 추궁할 임무를 가지고 그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아래 그림은 타림분지이며, 동그라미 안이 누란과 구자이므로, 참고바랍니다.



 그 후, 그곳에 도착했던 그는 구자(龜玆)의 왕을 불러서 책임을 추궁했다. 그러자 구자(龜玆)의 왕(王)은 죄를 인정하고 사죄했다. 그 후, 그가 대완(大宛)에 갔다가 구자(龜玆)로 돌아왔을 때, 흉노(匈奴)의 사자가 그곳에 있는 것을 알고는 그를 죽였다. 그러자 그 공으로 그는 중랑(中郞)이 되었고, 이어서 평락감(平樂監)이 되었다. 그 후에 또 그는 당시 대장군이었던 곽광(霍光)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누란(樓蘭)과 구자(龜玆)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처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누란(樓蘭)에 갔을 때는 그 왕이 주위에 사람들을 많이 두고 있어서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그에게 한(漢)의 지엄(至嚴)함을 보여주어서 나라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곽광(霍光)은 그에게 모든 일을 일임(一任)했고, 그는 그곳으로 떠났다. 그 후, 그는 많은 보화(寶貨)를 가지고 누란(樓蘭)으로 가서 그곳의 왕을 만났다. 그러나 누란(樓蘭)의 왕이 그에게 불친절했으므로 그는 일부러 서쪽으로 향해서 국경 가까이까지 갔을 때 통역을 하던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는 지금 한(漢)에서 가지고 온 보물들을 제국(諸國)들에 나눠줄 생각인데, 하지만 왕이 거절한다면 서쪽의 나라로 갈 것이오> 그러자 그 통역은 누란(樓蘭)의 왕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고, 그러자 또 누란왕(樓蘭王)은 그것이 탐이 나서 그와 대면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 왕 앞에 자신이 가져갔던 재보(財寶)들을 늘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천자로부터의 전언(傳言)이 있으므로 주위를 물리어주십시오> 그러자 보화에 탐이 났던 누란왕(樓蘭王)은 의심 없이 곧 주위를 물렸는데, 그러자 함께 갔던 자객 2명이 달려들어서 누란왕(樓蘭王)을 죽였다. 그리고 그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누란왕(樓蘭王)은 이미 한(漢)에 지은 죄가 있었으므로, 그에 한(漢)의 황제께서는 나로 하여금 오늘 그를 처벌케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금방 한(漢)의 군사들이 이곳에 도착할 것이므로 제신(諸臣)들은 경거망동을 삼가라! 하지만 만약 불응(不應) 시(時) 이 나라를 멸할 것이며, 그리고 이제 비게 된 왕의 자리는 태자(太子)로 하여금 잇게 할 것이다!> 그 후, 그는 누란왕(樓蘭王)의 머리를 가지고 한(漢)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모두들 그의 공적을 치하했으며, 또 그 공으로 의양후(義陽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함께 갔던 자객들도 시낭(侍郎)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원강(元康) 원년(기원전 65년)에 사망했다.

 
곽광(霍光-?부터 기원전 68년) 2

 그는 전한(前漢)의 정치가였고, 소제(昭帝)와 선제(宣帝) 2대에 걸쳐서 정치를 행했다. 그리고 곽거병(霍去病)의 이모제(異母弟)였으며, 자(字)는 자맹(子孟)이었다. 그는 무제(武帝)의 총신(寵臣)이었으며, 기원전 87년에 무제(武帝)가 사망했을 때, 당시 8세에 불과했던 소제(昭帝)의 보좌를 무제(武帝)로부터 명받았던 3인 중 한명이었다.(나머지 두 명은 金日磾와 上官桀) 하지만 그 후, 곽광(霍光)과 상관걸(上官桀)은 대립했고, 그러자 또 상관걸(上官桀)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러나 실패하고 주살(誅殺) 당했다. 그 후, 소제(昭帝)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그는 신임을 받았으며, 그러자 소제(昭帝)는 치세 13년간 정치를 모두 그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또 그 후, 기원전 74년에 소제(昭帝)가 자식도 없이 사망하자 그는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제위에 올렸다. 하지만 그 유하(劉賀)는 행동거지가 방정치 못하여 불과 27일 만에 물러났고, 그러자 또 그 후위(後位)는 무제(武帝)의 증손(曾孫)이었던 선제(宣帝)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대사마(大司馬)대장군 직을 유지하면서 정치를 펼쳐나갔지만, 그러나 그도 기원전 68년에 죽었다. 그리고 또 그는 생전에 그 높은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행동거지를 조심해서 무탈했지만, 하지만 그의 일족들은 그의 배경을 믿고 오만방자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모반까지 꾀하다가 선제(宣帝)로부터 일족이 몰살되었다.

 BC60


 흉노(匈奴)의 日逐王<선현탄(先賢撣)>이 한(漢)에 항복했다
 그러자 한(漢)은 서역도호(西域都護)를 신설하고, 타림분지의 지배를 개시했다

 BC51


 동흉노(東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鄯于=呼韓邪單于)가 한(漢)에 항복입조(降服入朝)했다



 호한야선우(呼韓邪鄯于-?부터 기원전 31년)

 
※ 또는 <호한사선우>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사전(辭典)의 표현을 따라서 <호한야선우>로 표현함

 그는 중국 전한(前漢) 시대, 흉노(匈奴)의 선우(單于)였던 허려권거선우(虛閭權渠單于)의 아들이었으며, 질지선우(郅支單于)의 동생이었고, 성(姓)은 련제(攣鞮), 이름은 계후산(稽侯狦) 또는 계후사(稽侯蛳)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한(漢)에 항복했던 일과 함께 <왕소군(王昭君)>의 남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기원전 61년에 부(父) 허려권거(虛閭權渠)가 죽자 그 뒤를 이어서 우현왕(右賢王)이었던 악연구(握衍朐)가 선우(單于)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장인이었던 오선막(烏禅幕)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 오선막(烏禅幕)은 오손(烏孫)과 강거(康居) 사이에 있던 소국(小國)의 군주로 있다가 흉노(匈奴)에 항복한 뒤 일축왕(日逐王)의 누나를 처로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그 일축왕(日逐王)은 악연구(握衍朐)와 사이가 좋지 못해서 부하 수만(數萬) 기(騎)를 이끌고 한(漢)에 투항해서 귀덕후(歸德侯)를 봉(封) 받았다. 그러자 또 그에 악연구(握衍朐)는 격노하고는 일축왕(日逐王)의 동생들을 오선막(烏禅幕)의 구명(求命)에도 불구하고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고 또, 그 악연구(握衍朐)의 태자였던 좌현왕(左賢王)이 동방(東方)의 귀인(貴人)들을 참언(讒言)했기 때문에, 그래서 오선막(烏禅幕)과 동방(東方)의 귀인(貴人)들은 그(呼韓邪單于)를 선우(單于)로 세우고는 악연구(握衍朐)와 싸우게 되었다. 그러자 악연구(握衍朐)는 패배했고, 기원전 59년에 자살했다. 그러자 또 그 후에 다섯 선우(單于-屠耆, 烏藉, 呼掲, 車犁, 呼韓邪)가 난립(亂立)해서 경쟁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또 그의 형이었던 호도오사(呼屠吾斯)도 자립해서 질지선우(郅支骨都侯單于)가 되었고, 이어서 그를 쳤다. 그러자 형에게 패했던 그는 부하였던 좌이질자왕(左伊秩訾王)의 <한(漢)에 도움을 구하라>는 진언을 받아들여서 기원전 53년에 자신의 아들을 한(漢)에 입조(入朝)시켰다. 그러자 또 질지선우(郅支單于)도 그와 똑같이 한(漢)에 도움을 구하는 의미로 자신의 아들을 입조시켰다. 그 다음해, 그는 스스로 오원(五原)의 요새를 방문해서 감로(甘露) 3년(기원전 51년) 정월(正月)에 한(漢)에 입조(入朝)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는 약속대로 그가 한(漢)에 입조하자 선제(宣帝)는 그를 감천궁(甘泉宮)에서 만나서는 일반 제후왕(諸侯王)들보다 상석(上席)에다 앉혔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선제(宣帝)는 그에게 후히 베풀어서 중국의 관(冠)과 의복(衣服) 하사했으며, 금으로 만든 새(璽)도 주었고, 심지어는 병사들과 식량까지도 주며 그를 도왔다. 그런 한편, 그가 한(漢)에 입조(入朝)했다는 것을 알게 된 질지선우(郅支單于)는 그 틈을 타서 우지(右地=西方)를 공격했다. 그러나 오손(烏孫)은 한(漢)이 그를 받아들인 것을 알고는 질지선우(郅支單于)를 도우지 않았다. 그 후, 한(漢)은 원제(元帝=漢의 10대 황제) 대가 되어서도 계속해서 그를 도왔지만, 그러나 그 즈음에 질지선우(郅支單于)가 한(漢)의 사자를 죽인 일이 있어, 그에 그로 하여금 질지선우(郅支單于)를 토벌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그는 곧 북쪽으로 향했는데, 그런데 그때 함께 동행 했던 차기도위(車騎都尉) 한창(韓昌)과 광록대부(光祿大夫) 장맹(張猛)과 함께 월지왕(月氏王)의 머리로 만든 술잔을 나누면서 다음과 같은 맹세를 했다. <지금 이후 한(漢)과 흉노(匈奴)는 일가(一家)가 될 것이며, 그리하여 대대로 서로는 공격할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그가 북쪽으로 들어가자 백성들은 모두 그에게 귀순했으며, 이후 흉노(匈奴)는 평정되었다. 그리고 한(漢) 건소(建昭) 3년(기원전 36년) 질지선우(郅支單于)는 강거왕(康居王)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그러나 서역도위(西域都護) 감연수(甘延壽)와 부교위(副校尉) 진탕(陳湯)에 의해서 멸해졌다. 그러자 그는 그 사실에 기뻐했음과 동시에, 그러나 또 그 후에 한(漢)이 어떻게 나올지를 몰라서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재차 입조(入朝)를 청했고, 그리고는 또 이어서 경녕(竟寧) 원년(기원전 33년)에 한(漢)에 다시 입조(入朝)했다. 그런데 그때, 그는 한(漢)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자 한(漢) 왕족의 사위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자 원제(元帝)는 후궁 중에서 <왕소군(王昭君)>을 그의 알씨(閼氏=匈奴의 왕비를 의미함)로 주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는 북방의 경비를 철폐해 달라는 건의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재위 28년, 한(漢) 건시(建始-漢의 11대 황제 成帝 연호) 2년(기원전 31년)에 사망했고, 그러자 그의 뒤는 복주누약제선우(復株累若鞮單于)가 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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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BC104


 태초력(太初暦)을 시행하다


 

 태초력(太初暦)은, 한(漢)의 무제(武帝) 태초(太初) 원년(元年=기원전104년)의 개력(改曆)에 의해서 채용되었던 태음태양력(太陰太陽歷)의 역법(曆法)을 말하며

 ※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은, 태음력(太陰曆)과 태양력(太陽曆)을 절충하여 만들었던 역법으로, 태음력(太陰曆)을 태양의 움직임에 맞추기 위하여 회귀년(回歸年)에 따라서 윤일(閏日)이나 윤달(閏月)을 두는 것으로, 19년에 7번의 윤달(閏月)을 두고, 다시 8년에 3번의 윤일(閏日)을 둔다. 우리나라의 음력(陰曆)이나 유대력, 그리스력, 중국력 등이 있다.

 등평(鄧平)과 방사(方士) 그리고 낙하굉(落下閎) 등에 의해서 편력(編曆)되었고, 진대(秦代)부터 사용되어 왔던 전욱력(顓頊曆)을 고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삼통력(三統曆)의 보수(補修)를 거치면서 후한(後漢) 장제(章帝) 원화(元和) 2년(85년)의 개력(改曆)에 이르기까지 190년간
시행되었다.

 전욱력(顓頊曆)은, 중국력(中国暦)의 하나로, 진(秦)에서 전한(前漢) 원봉(元封) 6년(기원전105년)까지 사용되었던 태음태양력(太陰太陽歷)의 역법(曆法)이었다. 그리고 전욱(顓頊)은 고대 제왕(帝王)의 이름이며, 19년 7윤달(閏月)의 장법(章法)을 채용해서 1태양년(太陽年)을 365⋅1/4일(=365.25일)로, 그리고 1삭망월(朔望月)은 29⋅499/940일(≒29.53086일)로 하는 사분력(四分曆)이었다.

 
장법(章法)은 메톤주기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그것은 또 중국에서 19년을 1장(章)으로 불렀던데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메톤주기(Meton週期)란 기원전 433년에 그리스의 천문학자 메톤이 만든 역법의 순환주기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각 도시마다 다른 태음력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나중에는 모두 그 메톤의 역법으로 통일했다고 하며, 그리고 그 내용은 태음력(太陰曆)을 태양의 주기에 맞추기 위해서 19태음(太陰)년에 7번의 윤달을 두었던 것이다.

 
삼통력(三統曆)은, 기원전 104년 중국 전한(前漢)의 성제(成帝) 때 유흠(劉歆)이 만든 태음력으로, 19년마다 7회의 윤달을 두었던 것이며

 ☆ 유흠(劉歆-?B.C.53~?B.C.25)은, 중국 전한(前漢) 말기의 학자로 자(字)는 자준(子駿)과 영숙(穎叔)이었다. 유향(劉向)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궁중의 비장서(祕藏書)를 교열했고, 부친의 사후 유업을 계승하였으며, 중국 최초의 분류도서 목록인 <칠략(七略)>을 완성하였던 인물이었다.

 19년 7윤월(閏月)의 장법(章法)을 채용해서, 1태양(太陽)년을 365⋅385/1539(≒365.250162일)로, 그리고 1삭망월(朔望月)을 29⋅43/81(≒29.530864일)로 하는 81분법(分法)을 채용했다.

 BC99


 흉노(匈奴)전쟁을 재개(再開)했고, 이능(李陵)과 이광리(李廣利)가 흉노(匈奴)에 투항했다


 

 이능(李陵-?부터 기원전 74년)은, 중국 전한(前漢) 때의 군인이었고, 흉노(匈奴)를 상대로 용전(勇戰)했지만, 그러나 적과 내통했다고 오해를 받았던 비운의 장군이었다. 자(字)는 소경(少卿)이었다. 그의 조부(祖父) 이광(李廣)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그리고 무제(武帝)의 신하를 지냈지만, 그러나 그 역시도 비운의 장군으로 알려졌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당호(李當戶)는 무제(武帝)의 총신(寵臣)이었던 한언(韓嫣)이란 자를 구타했을 정도로 강직했던 인물이었지만 요절했고, 그 후에 이능(李陵)은 태어났다.(遺腹子) 그리고 기원전 99년(天漢 2년)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던 이능(李陵)은 무제(武帝)의 명으로 이사(弐師)장군 이광리(李廣利)를 지원하기 위해서 5천의 보병을 인솔해서 출진했다. 그러나 그 이광리(李廣利)와 합류하기도 전에 선우(單于)가 인솔하던 흉노 본대 3만과 조우(遭遇)했고, 이어서 전투에 들어갔다. 그러자 이능(李陵) 군은 6배가 넘었던 흉노(匈奴)군을 맞아서 분투했고, 그리하여 8일간에 걸쳐서 흉노(匈奴)군 1만 명을 죽였다. 그러자 또 이능(李陵)은 진보락(陳步樂)이란 자를 파견해서 무제(武帝)에게 그 전과(戰果)(轉科)를 보고했다. 그러나 그 후, 이능(李陵) 군은 화살 등, 더 이상 싸울 무기가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흉노(匈奴)에 항복했다. 그러자 그 소식을 전해들었던 무제(武帝)는 격노했고, 이어서 진보락(陳步樂)을 다그치자 진보락(陳步樂)은 그에 자결했다. 그러자 또 신하들은 무제(武帝)에게 아부할 목적으로 이능(李陵)을 처벌할 것을 상주했는데, 하지만 그때 사마천(司馬遷)이 나서서 그를 변호했고, 그 결과 사마천(司馬遷)은 궁형에 처해졌다. 그 후, 이능(李陵)의 재능과 인품을 알게 된 차제후선우(且鞮侯單于)는 이능(李陵)에게 자신의 부하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러나 이능(李陵)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런데 또 그 후, 무제(武帝)는 포로로 잡아들였던 흉노(匈奴)군에게서 이(李) 장군이 흉노(匈奴)에서 한(漢)의 군략(軍略)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무제(武帝)는 그 이(李) 장군이 이능(李陵)이라고 오해해서 격노하고는 그의 처자를 비롯해서 그 일족들을 모두 몰살했다.(하지만 실제로는 李陵보다 먼저 匈奴에 투항했던 李緖 장군) 그러자 또 일족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된 이능(李陵)은 그에 격분해서 이서(李緖)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하지만 또 그 후에 그는 차제후(且鞮侯)의 딸과 혼인을 했고 아이까지 낳았다. 그리고 흉노(匈奴)에서 우교왕(右校王)이 되었고, 기원전 74년에 사망했다.

 

 

 BC91년 경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완성했다



 사기(史記)는 너무도 잘 알려진 것이라 설명을 하는 것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것은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 시대에 사마천(司馬遷)에 의해서 편찬되었던 중국의 역사(歷史)서였고, 정사(正史) 중 제일(第一)로 손꼽히는 것이며, 24사(史) 중 하나이다. 합계 52만 6천 5백 자. 저자 자신이 이름 붙인 서명(書名)은 <태사공서(太史公書)>이며, 그러나 후세에 <사기(史記)>라고 불렸고, 그 후 그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책의
구성은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완성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이며, 그 서술범위는 전설상의 오제(五帝) 중 일인(一人)이었던 황제(黃帝)로부터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까지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의 방법()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기술(正史記述)의 모범(양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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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BC120


 무제(武帝), 염철(塩鉄)의 전매제(專賣制)를 실시했다

 BC119


 장건(張騫) 다시 중앙아시아로 파견되었다

 BC111


 무제(武帝), 남월(南越)을 공격해서 현(現) 베트남북부를 점령했다

 BC105


 한(漢)의 公主, 유세군(劉細君)이 오계왕(烏係王) 곤막(昆莫)에게 강가(降嫁)했다



 ※ 곤막(昆莫-生沒未詳)

 그는 중국 전한(前漢)시대, 오손(烏孫)의 곤미<昆彌=오손의 군주(君主)호(號)>였고, 난두미(難兜靡)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곤막(昆莫)은 군주의 호(號)였으며, 이름은 엽교미(獵驕靡)였다.

 그는 흉노(匈奴)의 서쪽 경계 지역에 작은 나라의 왕이었던 난두미(難兜靡)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 얼마 후에 흉노(匈奴)에게 난두미(難兜靡)가 살해당하자 그는 들판에 버려졌다. 그러자 새들이 고기를 물어 와서 그에게 먹여 주었으며, 늑대가 와서 젖을 먹여 주었다. 그러자 또 그것을 불가사의하게 생각했던 흉노(匈奴)의 선우(單于)는 그를 신(神)으로 여기고 데려가서 키웠다. 그렇게 해서 흉노(匈奴)에서 자라게 된 그는 후에 군(軍)을 통솔했으며, 가끔씩 공도 세웠다. 그러자 또 선우(單于)는 그의 아버지의 백성이었던 사람들을 그에게 주어서 서역(西域)을 지키게 했는데, 그러자 그 후, 그는 그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습격해서 많은 전리품()들을 챙겼다. 그 후, 선우(單于)가 죽자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멀리 이동해 가서 중립을 지켰다. 그리고는 다시 흉노(匈奴)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또 흉노(匈奴)에서는 그런 그를 못마땅 하게 생각해서 공격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를 이기지 못했다. 그러자 그 후, 그들은 그를 신격화(神格化)하고는 다시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자식을 열 명도 더 두었는데, 그 중에서 대록(大祿)이란 아들이 제일로 강했고, 민중들을 잘 이끌었다. 그래서 곤막(昆莫)은 그에게 백성 약 1만을 주어서 다른 곳에서 살게 했다. 그런데 또 그때, 그 대록(大祿)의 위에는 태자였던 형이 있었고, 그 형에게는 잠취(岑娶)란 아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태자는 요절하면서 곤막(昆莫)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잠취(岑娶)를 태자로 삼고, 그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그러자 곤막(昆莫)은 태자를 불쌍하게 여겨서 태자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대록(大祿)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잠취(岑娶)와 곤막(昆莫)에게 공격을 가해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곤막(昆莫)이 노령이었으므로, 그래서 일단은 약 1만의 백성들을 잠취(岑娶)에게 주어서 다른 곳으로 가있게 했다. 그리고 또 자신도 약 1만의 백성들을 거느리며 대록(大祿)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자 그때부터 오손(烏孫)은 삼국(三國)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 대부분의 영토는 곤막(昆莫)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바로 그때, 한(漢)의 장건(張騫)이 그것을 알고는 흉노(匈奴)와 오손(烏孫)을 분리해서 한(漢)에 복속하게 하도록 무제(武帝)에게 상주했다. 그러자 무제(武帝)는 장건(張騫)을 중랑장(中郞將)에 임명하고는 부절(符節)을 주었다. 그리고는 또 3백 명의 부하와 함께 그리고 또 그 한명 당 두 마리의 말과 그리고 수만 마리의 소와 양, 거기다 수천만의 황금과 견직물을 가지고서, 그리고 또 다수(多數)의 부사(副使)들과 함께 오손(烏孫)으로 파견했다. 그 후, 장건(張騫)이 오손(烏孫)에 도착하자 곤막(昆莫)은 흉노(匈奴)의 선우(單于)에게 하는 것처럼 예를 취했다. 그러자 장건(張騫)이 이렇게 말을 했다. <이것은 선우(單于)가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한(漢)의 황제(皇帝)가 내리시는 것이요. 그러므로 한(漢)의 예를 취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그러자 곤막(昆莫)은 곧 알아듣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공손하게 예를 취했다. 그러자 또 장건(張騫)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만약, 귀국(貴國)이 흉노(匈奴) 혼사왕(渾邪王)의 구 영지로 이주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한(漢)의 공주를 왕의 부인으로 보내드리겠소!> 하지만 그때, 이미 언급했던 대로 곤막(昆莫)은 당시 노령이었고, 그보다도 그는 한(漢)이 어느 정도의 나라인지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데다, 또 오손(烏孫)도 당시 삼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오손(烏孫)의 신하들은 당시 흉노(匈奴)를 아주 무서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곤막(昆莫)은 단독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선명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장건(張騫)은 곤막(昆莫)의 동의를 얻어서 그 나라 백성 수십 명을 데리고 한(漢)으로 귀국했고, 그 사람들에게 한(漢)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년 후에 장건(張騫)은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또 오손(烏孫)에서 따라왔던 사람들은 다시 귀국해서 자신들이 보고 들었던 것을 곤막(昆莫)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곤막(昆莫)은 한(漢)의 위대함에 놀라고는 그런 사실을 주변국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또 그때부터 서역의 나라들은 한(漢)과 교역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그런 사실을 알게 된 흉노(匈奴)는 오손(烏孫)을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그러자 또 그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던 곤막(昆莫)은 얼른 한(漢)에 사자를 보내서 자신이 한(漢)의 공주와 결혼함은 물론, 한(漢)과 형제의 나라가 되기를 청했다. 그리고 또 그때, 곤막(昆莫)은 그 증거인 결납(結納-약혼예물)으로 말 천 마리를 함께 보냈다. 그 후, 곤막(昆莫)은 한(漢)의 강도공주(江都公主=劉細君)를 우부인(右夫人)으로, 그리고 흉노(匈奴)에서 데려왔던 부인을 좌부인(左夫人)으로 삼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때 이미 노령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강도공주(江都公主)는 곧 손자였던 잠취(岑娶)에게 다시 시집보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 강도공주(江都公主-生沒未詳)

 그녀는 강도 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이었고, 이름은 세군(細君)이었다. 그리고 <오손(烏孫)공주>라고도 불렸는데, 그녀의 아버지 유건(劉建)은 당시 음란(淫亂), 잔학(殘虐), 거기다 무제(武帝)에 대해서 모반까지 일으켰다는 죄로 자해(自害=自殺)를 당했던 인물이었다. 그러자 그 후, 원봉(元封) 연간에 강도공주(江都公主)는 한(漢)과 오손(烏孫)과의 우호의 표시로 아득히 먼 땅이었던 오손(烏孫)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고, 오손왕(烏孫王) 엽교미(獵驕靡)의 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엽교미(獵驕靡)는 노령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는 오손(烏孫)의 풍습<역연혼(逆緣婚)>에 따라서 엽교미(獵驕靡)의 손자였던 잠추군(岑陬軍) 수미(須靡=岑娶)에게 다시 시집을 가게 되었다.

 ※ 역연혼(逆緣婚) 또는 레비레이트(Levirate)혼은, 남편이 사망한 후, 아내가 그 남편의 형제 가운데서 한 사람과 다시 재혼하는 혼인형태를 말함.

 그러자 강도공주(江都公主)는 그에 충격을 받아서 한(漢)의 무제(武帝)에게 호소했지만, 그러나 무제(武帝)는 당시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입장에서 그녀에게 그 나라의 풍습에 따르도록 권유했다. 그러자 그녀는 결국 그 나라의 풍습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지만, 어쨌든 그 후에 그녀는 그곳에서 병사(病死)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가 지었다는 망향(望鄕)의 한시(漢詩)는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BC104


 이광리(李廣利)의 페르가나(大宛) 원정이 시작되다.(~102)



 ※ 이광리(李廣利-?부터 기원전 88년)

 그는 중국 전한(前漢) 때의 군인이었고, 출신은 중산군(中山郡=현재의 河北省 定州市)이었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으로 무제(武帝)의 총애를 받았던 이부인(李夫人)이 있었고, 형은 무제(武帝)의 총신(寵臣)이었던 이연연(李延年)이었다.

 그리고 어느 때, 무제(武帝)는 서역(西域)의 대완(大宛)이란 곳에서 한혈지마(汗血之馬)가 생산된다는 말을 듣고는 사자를 파견해서 그것을 구해오도록 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갔던 사자는 살해당했고, 가지고 갔던 돈까지 약탈당했다. 그리고 또 당시, 이광리(李廣利)는 건달로 지내면서 제멋대로 살고 있었지만, 그러나 태초(太初) 원년(기원전 104년)에 무제(武帝)의 배려로 이사(弐師)장군에 봉해졌다. 그리고는 이어서 무제(武帝)의 명을 받아서 군사 수만을 이끌고는 한혈지마(汗血之馬)를 구하기 위해서 그 이사 성(弐師城)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그 원정길은 너무도 멀었던 데다, 또 도중의 성(城)들도 제대로 공략을 하지 못해서 식량이 곧 바닥이 났다. 그러자 병사들은 하나둘씩 죽거나 도망을 갔고, 나중에는 몇 명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이광리(李廣利)는 하는 수 없이 철병하여 둔황으로 들어가서 2년을 보냈다.

 ※ 둔황(Dunhuang=敦煌)은, 중국 간쑤 성(甘肅省) 북서부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로, 실크로드의 중계무역 기지였으며, 불교 도시로도 유명하다. 남동쪽에 둔황석굴이 있다.

<둔황 시 위치도>


 그러자 무제(武帝)는 격노하고는 <만약 그가 옥문관(玉門關)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온다면 곧 바로 죽여 버려라!>라는 명을 내렸다.

 옥문관(玉門關)은, 고대 중국의 서쪽 요지였던 간쑤 성(甘肅省) 둔황 현(敦煌縣) 부근에 배치되었던 관문으로, 한(漢)나라 때, 서관(西關)을 지나서 서역으로 가던 통로였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있다.

 그러자 이광리(李廣利)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서 둔황 새(塞-玉門關 부근의 요새로 漢의 武帝 때 건축되었던 長城)까지만 들어왔다. 그리고 또 태초 3년, 무제(武帝)는 다시 대완(大宛)의 공략을 명했고, 그에 정병(精兵) 6만과 소(牛) 10만 마리, 말(馬) 3만 마리, 당나귀와 낙타 1 만여 마리로 양말(糧秣=軍糧)을 운반해서 그에게 보내주었다. 거기다 또 18만의 부대를 후방으로 돌아가게 해서 대완(大宛) 외성(外城)의 공략에 들어갔다. 그러자 그 후 이광리(李廣利)의 대군은 약 40여 일 간 대완성(大宛城)을 포위 공격했고, 그에 무수한 대완 병들이 죽었다. 그러자 또 그때서야 대완(大宛)은 한군(漢軍)이 철병한다는 조건으로 투항했다. 그리고는 3000 마리의 한혈지마(汗血之馬)를 한(漢)에 바쳤다. 그리하여 또 한군(漢軍)은 옥문관(玉門關)까지 철군했지만, 그러나 그 가혹했던 여정으로 인해서 그때 남았던 병(兵)과 말(馬)들은 불과 1만여 명에 1000 필(匹)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이광리(李廣利)는 개선(凱旋)해서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 그 후, 기원전 99년(天漢 2년)에 흉노 토벌을 위해서 출병했던 이광리(李廣利)를 지원하기 위해서 이능(李陵)이 인솔했던 군사 5천이 출병했다. 그러나 그 이능(李陵)은 이광리(李廣利)와 합류하기도 전에 흉노(匈奴)의 3만의 군사와 싸우게 되었고, 그러자 또 병력의 차이와 함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이능(李陵)은 흉노(匈奴)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자 또 무제(武帝)는 격노하여 그의 일족을 몰살해 버렸고, 그를 변호했던 사마천(司馬遷)도 궁형에 처했다. 그 후, 정화(征和) 3년(기원전 90년)에 이광리(李廣利)는 다시 칙명을 받고 오원(五原)에 있던 흉노(匈奴)를 토벌하기 위해서 출병했다. 그런데 그 전야(前夜)에 이광리(李廣利)는 당시 자신의 친척이었으며 또한 승상이었던 팽후(澎侯) 유굴이(劉屈氂=武帝의 조카였으며, 劉勝의 子)와 만났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이광리(李廣利)의 여동생이었으며 무제(武帝)의 총비(寵妃)였던 이부인(李夫人)의 아들 창읍왕(昌邑王) 유박(劉髆)을 황태자로 추천해줄 것을 밀담했다. 그리고 또 위교(渭橋=渭江의 다리. 甘肅省 渭源縣에서 黃河로 흐르는 江)까지 전송을 나왔던 유굴이(劉屈氂)를 향해서 이광리(李廣利)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귀공(貴公)께서 창읍왕(昌邑王)을 황태자에 오르도록 폐하께 청원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되어서 창읍왕(昌邑王)이 황제에 즉위하게만 된다면, 그 이후로는 귀공(貴公)께서도 근심할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또 그 후에, 내자령(內者令=600石의 관리)이었던 곽양(郭穰)이란 자가 무제(武帝)에게 다음과 같이 고했다. <유굴이(劉屈氂)의 부인은 유굴이(劉屈氂)가 황제에게 질책을 받았던 일에 앙심을 품고는 황제를 저주하면서, 이광리(李廣利)와 함께 창읍왕(昌邑王)을 제위에 올리기 위해서 기도(祈禱)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무제(武帝)는 대노(大怒)하여 그 즉시 유굴이(劉屈氂)를 잡아들였고, 그리고는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형벌을 내린 후에 요참(腰斬)의 형에 처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유굴이(劉屈氂)의 처자(妻子)도 함께 처형을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에 연좌되어서 이광리(李廣利)의 처자(妻子)도 함께 처형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이광리(李廣利)는 흉노(匈奴)와 싸우면서 연전연승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 비보(悲報)를 접하자 그는 너무도 낙심하여 괴로워하다가 결국 흉노(匈奴)에 투항했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이광리(李廣利)는 흉노(匈奴)의 왕이었던 호록고(狐鹿姑) 선우(單于)에게 중용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같이 투항을 했던 위율(衛律)이란 자의 중상모략을 받아서 끝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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