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은, 중국 전한(前漢) 기원전 154년에, 오왕(吳王) 외에, 칠국(七國)의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켰던 반란이었으며, 유 씨(劉氏) 가문의 내란(內亂)이었다.
<경위(經緯)>
그래서 경제(景帝)는 과거, 오(吳)의 재상(宰相)을 맡았었고, 직언(直言)을 잘하기로도 유명했으며, 그에 문제(文帝)조차도 <무슨 일이 있으면 그와 상담(相談)하라. 그는 경우(境遇)에 어긋난 말은 결코 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신뢰하고 있었던 원앙(袁盎)을 불러서 오(吳)의 정보와 조언을 구했다.
※ 인물소개
원앙(袁盎-生沒未詳)은, 전한(前漢) 때의 사람으로, 자(字)는 사(絲), 안능(安陵)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초(楚)나라 사람으로 군도(群盜=떼도둑)였는데, 그러다가 안능(安陵)으로 이주했고, 그후 그는 여후(呂后)의 시대에 여록(呂祿-呂后의 조카)의 사인<舍人=주인의 우마(牛馬)를 다루던 직업으로, 일종의 하인(下人)>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러던 중 문제(文帝)가 즉위한 후에는 낭중(郎中)이 되었다. 그 후, 여 씨(呂氏)를 타도하고 승상이 되었던 주발(周勃)은 공신(功臣)에다 문제(文帝)를 황제에 추대(推戴)했던 일도 있었고 해서, 문제(文帝)는 그를 어렵게 대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원앙(袁盎)이 나서서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승상은 여후의 시대에 태위(太尉)가 되어서 병권(兵權)을 손에 쥐고서도 바로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승상은 공신일 뿐, 사직(社稷)의 신하는 못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승상이 우쭐해 하고, 폐하께서는 겸양해 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 후로부터는 황제로서의 위엄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주발(周勃)이 그에게 <나는 너의 형과 사이가 좋은데, 너는 어째서 나를 비방하는가?!>라고 꾸짖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에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 주발(周勃)은 관직을 그만두고 본토(本土)로 돌아갔는데, 그런데 그때 또 누군가가 그를 모함했다. 그래서 주발(周勃)은 반란의 혐의로 옥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그를 변호해줄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었다. 그러자 원앙(袁盎)이 나서서 그를 변호해 주었고, 그러자 또 그 후로부터는 두 사람이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이 심식기(審食其)를 죽이는 등, 아주 교만하게 굴었다.
☆ 심식기(審食其-?부터 기원전 177년)는, 전한(前漢) 때의 사람이며, 출신은 패(沛)였다. 그리고 유방(劉邦)이 패공(沛公)이 되었을 때, 그 전부터 유태공(劉太公)을 많이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유방(劉邦)은 자신의 형 유희(劉喜)와 함께 유태공(劉太公)을 모시게 했다. 그리고 고조(高祖) 2년(기원전 205년)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지고 도주했을 때도 그는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雉)를 돌보았다. 그 후,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雉)는 유방(劉邦)에게로 돌아갔고, 그때 그도 함께 따라갔다. 그리고 그 공으로 고조(高祖) 6년(기원전 201년)에 그는 벽양후(辟陽侯)에 봉해졌다. 그 후, 고조(高祖) 8년(기원전 199년)에 조왕(趙王)이었던 장오(張敖) 측에서 유방(劉邦=高祖)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당시, 원래는 장오(張敖)의 후궁이었지만, 그러나 장오(張敖)가 유방(劉邦)에게 헌상해서 유방(劉邦)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조미인(趙美人)도 함께 연좌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러자 또 그녀의 남동생이 심식기(審食其)를 통해서 여후(呂后)에게 잘 고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러나 여치(呂雉)의 질투로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러자 또 심식기(審食其)도 더 이상은 부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유장(劉長)을 낳고 자살했다.
<조미인(趙美人)은 당시, 옥에 갇혀있으면서 자신이 유방(劉邦)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치(呂雉)의 질투로 인해서 그 소원은 무시되었고, 그러자 또 조미인(趙美人)은 억울해하다 유장(劉長)을 낳고 자살했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유방(劉邦)이 그것을 알고는 그때, 자신이 그녀를 살리지 못했던 것을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아무튼, 고조(高祖) 12년(기원전 195년)에,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란을 기도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했던 유방(劉邦)은 심식기(審食其)와 어사대부였던 조요(趙堯)에게 시켜서 노관(盧綰)을 만나보라고 했지만, 그러나 미리 의심을 했던 노관(盧綰)은 병을 칭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해, 유방(劉邦)이 죽자 여치(呂雉)가 심식기(審食其)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현재, 장군들 중에서는 일찍이 고조(高祖=劉邦)와 같이 일반 백성이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러나 현재는 고조(高祖)의 부하가 되어 있으므로, 속심은 고조(高祖)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린 주군(主君)을 제위에 세우기 위해서는, 그들을 모두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유방(劉邦)의 사망을 당분간 비밀에 붙였다. 그러자 또 심식기(審食其)가 여치(呂雉)에게 이렇게 말을 하면서 설득했다. <하지만 그 장군들을 모두 다 몰살해 버린다면 천하는 더욱 위험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현재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제장(諸將)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여치(呂雉)는 유방(劉邦)의 죽음을 세상에 공표했다. 그리고 다음, 혜제(惠帝) 7년(기원전 188년)에 그는 전객(典客=知客=寺에서, 그러나 여기서는 궁전 내에서 손님 등을 접대하는 직책)이 되었고, 그 다음해(呂后 元年)에는 좌승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낭중령(郎中令=일종의 호위대장)처럼 궁전 내를 감시한다거나, 모든 관료들의 결재를 받는 일을 자청했다. 그 후, 여후(呂后) 8년(기원전 180년)에 여후(呂后)가 죽자 그는 태부(太傅=天子의 師)가 되었다. 그리고 여 씨(呂氏)가 멸한 후, 재차 승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가 즉위할 무렵에 또 파면되었다. 문제(文帝) 3년(기원전 177년) 당시, 회남왕(淮南王)이 되어 있었던 유장(劉長)은 자신의 어머니였던 조미인(趙美人)을 적극적으로 도우지 않았던데 앙심을 품고 그를 방문해서 살해했다. 그러자 그 후, 그에게 유후(幽侯)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또, 그 후국(侯國)은 심평(審平)이 이었지만, 그러나 또 경제 2년(기원전 155년)에 모반의 죄를 받고 그는 자살했다.
아무튼, 그 때문에 원앙(袁盎)은 문제(文帝)에게 그의 영지(領地)를 감(減)하도록 권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회남왕(淮南王)은 더욱 교만해져서 이윽고 반란까지 모의하다 그것이 결국에는 발각되었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를 촉(蜀)으로 유배 보내려고 했다.(이하, 劉長 참조) 그러나 유배를 가던 도중 유장(劉長)은 죽었고, 그러자 또 문제(文帝)는 크게 후회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원앙(袁盎)이 나서서 문제(文帝)의 좋은 점을 거론하면서 문제(文帝)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그 후에 또 어느 때에, 문제(文帝)가 패능(覇陵)에 갔다가 험한 비탈길을 내려가려 했는데, 그러자 원앙(袁盎)이 문제(文帝)를 제지했다. 그러자 또 문제(文帝)가 <왜? 두려운가?>라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또 원앙(袁盎)이 이렇게 대답했다. <원래, 천금(千金)을 가진 자산가는 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자리 끝에는 앉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도 그 만일(萬一)의 경우를 생각하셔서 미리 삼가시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가려던 길을 멈추었다고 한다.
☆ 패능(覇陵)은 한(漢)의 5대(代) 황제 문제(文帝)가 묻혔던 곳으로, 현재 서안(西安)의 서쪽 교외(郊外)에 있다. 그리고 또 장례는 문제(文帝) 자신의 유언에 따라서 박장(薄葬-간단하고, 간소한 장례)으로 치러졌고, 그리고 전한(前漢)의 황제로서는 유일하게 자연 언덕을 이용한 능묘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또 두 황후(竇皇后)는 문제(文帝)가 죽고 20년이나 지나서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합장은 하지 않고 다른 곳에 묻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문제(文帝)가 황후와 총희(寵姬)였던 <신 부인(愼夫人)>을 동반하고 상림(上林)으로 행차했는데, 그런데 그때 황후와 신(愼) 부인이 동석(同席=같은 지위의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원앙(袁盎)이 신 부인(愼夫人)의 자리를 황후의 자리보다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신 부인(愼夫人)이 그것을 보고 화를 내며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원앙(袁盎)은 이렇게 말을 했다. <존비(尊卑)의 질서가 분명하면 상하(上下)가 화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부인은 첩(妾)의 신분인데, 어떻게 황후와 같은 자리에 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폐하께서도 신 부인(愼夫人)을 총애하고 계신다면, 그에 따른 포상만 내리면 되는 것이며, 이런 일을 모른 척하신다면 그것은 신 부인(愼夫人)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禍)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인돈(人豚=呂雉 참조)”의 고사(故事)를 기억해주십시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의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신 부인(愼夫人)에게도 그와 같은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또 신 부인(愼夫人)도 그것을 인정하고 그에게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그는 직간(直諫-윗사람에게 서슴없이 諫하는 것)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곧 조정(朝廷)에서 쫓겨나서 농서(隴西)란 곳의 도위(都尉)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또 그곳 사람들을 자애(慈愛)로 대했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은 그에게 모두 충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오래 있지는 못했고, 이어서 제(齊)로 가서 승상이 되었으며, 또 이어서 오(吳)로 가서도 승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그러니까 그가 오(吳)에 갔을 때, 그의 조카 원종(袁種)이 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오왕(吳王)은 야심(野心)이 많아서 주변에는 전부 간신들뿐입니다. 그래서 오왕(吳王)은 누가(中央에서 파견되어온 관리) 와서 엄한 통치를 하려들면 금방 자객을 보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술이나 마시고 근무를 태만히 하시면, 오왕(吳王)도 의심을 버릴 것이니, 부디 저의 말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그는 원종(袁種)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그러자 또 오왕(吳王) 유비(劉濞)도 그를 후대(厚待)했다고 한다. 그 후, 원앙(袁盎)은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는데,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승상(丞相)이었던 신도가(申屠嘉)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신도가(申屠嘉)는 차(車)에 앉은 채로 그에게 인사만 하고 가버렸다. 그러자 또 그는 신도가(申屠嘉)의 집을 방문해서 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천하(天下)의 입(口)을 닫게 하는 태도(일종의 ‘할 말 없음’과 같이, 경우 없는 행동을 해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는 결국 자신을 망치게 할 것이오!> 그러자 신도가(申屠嘉)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결례를 사과하고 그를 귀빈(貴賓)으로 대했다. 하지만 그는 조착(晁錯)과는 사이가 너무도 나빠서 서로 동석(同席)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그런데 그 후,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조착(晁錯)은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고, 그러자 또 조착(晁錯)은 원앙(袁盎)이 오왕(吳王)의 재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원앙(袁盎)을 서민으로 내려버렸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오왕(吳王) 등이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일으켰을 때, 조착(晁錯)은 원앙(袁盎)이 그것을 미리 알고서도 숨기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원앙(袁盎)을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자 또 원앙(袁盎)은 그것을 미리 알아내고는 야간(夜間)에 두영(竇嬰)의 집을 찾아갔다.
☆ 두영(竇嬰) ?-기원전 131년전한(前漢)의 사람으로, 字는 王孫. 漢 文帝의 황후 두 씨(竇氏) 従兄의 子.(상세한 것은 次期 또는 생략함)
그리고는 오(吳)가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에 대해서 소상히 말을 하고는, 경제(景帝)와의 단독 알현(謁見)을 바랐다. 그러자 두영(竇嬰)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해서 경제(景帝)와의 알현이 실현되었다. 그렇게 해서 원앙(袁盎)은 경제(景帝)와의 알현이 성사되자, 주위를 모두 물리게 하고는 이렇게 말을 했다. <오(吳)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조착(晁錯)이 영토삭감 책(策)을 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착만 처형하게 되면 자연 반란군은 명분을 잃게 될 것이므로 그들은 곧 물러갈 것입니다> 그러자 경제(景帝)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원앙(袁盎)을 봉상(奉常=중국 관명의 하나로, 九卿의 하나)에, 그리고 두영(竇嬰)을 대장군에게 임명했는데, 그러자 장안(長安)의 사람들은 모두 그 두 사람을 따랐다고 한다. 그 결과 조착(晁錯)은 원앙(袁盎)의 계책에 넘어가서 처형되었고, 이어서 원앙(袁盎)은 반란군과의 화목을 추진하기 위해서 오왕(吳王)의 조카였던 유통(劉通=德頃侯)과 함께 오(吳)로 가서 교섭했지만, 그러나 당시 우세한 상황에 있었던 오왕(吳王)은 오히려 <지금부터 황제가 될 내가 왜 옛날 왕의 말을 들어주어야 하는가?!>라고 말을 하고는 원앙(袁盎)에게 자신의 장군이 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원앙(袁盎)은 그것을 거절했고, 그러자 오왕(吳王)은 그를 구금(拘禁)하고는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과거 원앙(袁盎)이 오(吳)에 있었을 때 도움을 준 적이 있었던 사람이 은혜를 갚았고, 그리하여 그는 겨우 오(吳)에서 도망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종결된 후, 그는 새로 초왕(楚王)이 되었던 유례(劉禮)에게 가서 승상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는 병을 이유로 사임했으며, 고향 안능(安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후에도 경제(景帝)는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을 시켜서 그의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후, 양왕(梁王)이었던 유무(劉武)가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에서 공적을 올렸던 것을 핑계로 황태자가 되려고 했다. 그러자 또 원앙(袁盎)이 그것을 반대했는데, 그러자 유무(劉武)는 그를 원망해서 자객을 보냈다. 그런데 그 자객(刺客)이 원앙(袁盎)을 죽이러갔다가 먼저 원앙(袁盎)에 대해서 탐문(探聞)을 했는데, 그러자 말하는 사람마다 모두 다 그를 극찬했다. 그러자 또 그 자객은 원앙(袁盎)을 만나서는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양왕(梁王)에게서 돈을 받고 당신을 죽이라는 명을 받아 여기까지 왔지만, 그런데 알고 보니 당신은 아주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마 나로서는 당신을 죽일 수가 없지만, 그러나 내가 가고 나서도 다시 많은 자객들이 또 올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 후, 원앙(袁盎)의 집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많이 생겼고, 그러자 그는 또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점을 치러갔는데,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서 양왕(梁王)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