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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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연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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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20 |
무제(武帝), 염철(塩鉄)의 전매제(專賣制)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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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19 |
장건(張騫) 다시 중앙아시아로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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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11 |
무제(武帝), 남월(南越)을 공격해서 현(現) 베트남북부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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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05 |
한(漢)의 公主, 유세군(劉細君)이 오계왕(烏係王) 곤막(昆莫)에게 강가(降嫁)했다
※ 곤막(昆莫-生沒未詳)
그는 중국 전한(前漢)시대, 오손(烏孫)의 곤미<昆彌=오손의 군주(君主)호(號)>였고, 난두미(難兜靡)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곤막(昆莫)은 군주의 호(號)였으며, 이름은 엽교미(獵驕靡)였다.
그는 흉노(匈奴)의 서쪽 경계 지역에 작은 나라의 왕이었던 난두미(難兜靡)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 얼마 후에 흉노(匈奴)에게 난두미(難兜靡)가 살해당하자 그는 들판에 버려졌다. 그러자 새들이 고기를 물어 와서 그에게 먹여 주었으며, 늑대가 와서 젖을 먹여 주었다. 그러자 또 그것을 불가사의하게 생각했던 흉노(匈奴)의 선우(單于)는 그를 신(神)으로 여기고 데려가서 키웠다. 그렇게 해서 흉노(匈奴)에서 자라게 된 그는 후에 군(軍)을 통솔했으며, 가끔씩 공도 세웠다. 그러자 또 선우(單于)는 그의 아버지의 백성이었던 사람들을 그에게 주어서 서역(西域)을 지키게 했는데, 그러자 그 후, 그는 그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습격해서 많은 전리품(弓)들을 챙겼다. 그 후, 선우(單于)가 죽자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멀리 이동해 가서 중립을 지켰다. 그리고는 다시 흉노(匈奴)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또 흉노(匈奴)에서는 그런 그를 못마땅 하게 생각해서 공격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를 이기지 못했다. 그러자 그 후, 그들은 그를 신격화(神格化)하고는 다시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자식을 열 명도 더 두었는데, 그 중에서 대록(大祿)이란 아들이 제일로 강했고, 민중들을 잘 이끌었다. 그래서 곤막(昆莫)은 그에게 백성 약 1만을 주어서 다른 곳에서 살게 했다. 그런데 또 그때, 그 대록(大祿)의 위에는 태자였던 형이 있었고, 그 형에게는 잠취(岑娶)란 아들이 있었는데, 그래서 태자는 요절하면서 곤막(昆莫)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잠취(岑娶)를 태자로 삼고, 그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그러자 곤막(昆莫)은 태자를 불쌍하게 여겨서 태자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대록(大祿)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잠취(岑娶)와 곤막(昆莫)에게 공격을 가해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곤막(昆莫)이 노령이었으므로, 그래서 일단은 약 1만의 백성들을 잠취(岑娶)에게 주어서 다른 곳으로 가있게 했다. 그리고 또 자신도 약 1만의 백성들을 거느리며 대록(大祿)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자 그때부터 오손(烏孫)은 삼국(三國)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 대부분의 영토는 곤막(昆莫)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바로 그때, 한(漢)의 장건(張騫)이 그것을 알고는 흉노(匈奴)와 오손(烏孫)을 분리해서 한(漢)에 복속하게 하도록 무제(武帝)에게 상주했다. 그러자 무제(武帝)는 장건(張騫)을 중랑장(中郞將)에 임명하고는 부절(符節)을 주었다. 그리고는 또 3백 명의 부하와 함께 그리고 또 그 한명 당 두 마리의 말과 그리고 수만 마리의 소와 양, 거기다 수천만의 황금과 견직물을 가지고서, 그리고 또 다수(多數)의 부사(副使)들과 함께 오손(烏孫)으로 파견했다. 그 후, 장건(張騫)이 오손(烏孫)에 도착하자 곤막(昆莫)은 흉노(匈奴)의 선우(單于)에게 하는 것처럼 예를 취했다. 그러자 장건(張騫)이 이렇게 말을 했다. <이것은 선우(單于)가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한(漢)의 황제(皇帝)가 내리시는 것이요. 그러므로 한(漢)의 예를 취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그러자 곤막(昆莫)은 곧 알아듣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공손하게 예를 취했다. 그러자 또 장건(張騫)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만약, 귀국(貴國)이 흉노(匈奴) 혼사왕(渾邪王)의 구 영지로 이주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한(漢)의 공주를 왕의 부인으로 보내드리겠소!> 하지만 그때, 이미 언급했던 대로 곤막(昆莫)은 당시 노령이었고, 그보다도 그는 한(漢)이 어느 정도의 나라인지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데다, 또 오손(烏孫)도 당시 삼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오손(烏孫)의 신하들은 당시 흉노(匈奴)를 아주 무서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곤막(昆莫)은 단독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선명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장건(張騫)은 곤막(昆莫)의 동의를 얻어서 그 나라 백성 수십 명을 데리고 한(漢)으로 귀국했고, 그 사람들에게 한(漢)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년 후에 장건(張騫)은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또 오손(烏孫)에서 따라왔던 사람들은 다시 귀국해서 자신들이 보고 들었던 것을 곤막(昆莫)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곤막(昆莫)은 한(漢)의 위대함에 놀라고는 그런 사실을 주변국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또 그때부터 서역의 나라들은 한(漢)과 교역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그런 사실을 알게 된 흉노(匈奴)는 오손(烏孫)을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그러자 또 그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던 곤막(昆莫)은 얼른 한(漢)에 사자를 보내서 자신이 한(漢)의 공주와 결혼함은 물론, 한(漢)과 형제의 나라가 되기를 청했다. 그리고 또 그때, 곤막(昆莫)은 그 증거인 결납(結納-약혼예물)으로 말 천 마리를 함께 보냈다. 그 후, 곤막(昆莫)은 한(漢)의 강도공주(江都公主=劉細君)를 우부인(右夫人)으로, 그리고 흉노(匈奴)에서 데려왔던 부인을 좌부인(左夫人)으로 삼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때 이미 노령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강도공주(江都公主)는 곧 손자였던 잠취(岑娶)에게 다시 시집보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 강도공주(江都公主-生沒未詳)
그녀는 강도 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이었고, 이름은 세군(細君)이었다. 그리고 <오손(烏孫)공주>라고도 불렸는데, 그녀의 아버지 유건(劉建)은 당시 음란(淫亂), 잔학(殘虐), 거기다 무제(武帝)에 대해서 모반까지 일으켰다는 죄로 자해(自害=自殺)를 당했던 인물이었다. 그러자 그 후, 원봉(元封) 연간에 강도공주(江都公主)는 한(漢)과 오손(烏孫)과의 우호의 표시로 아득히 먼 땅이었던 오손(烏孫)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고, 오손왕(烏孫王) 엽교미(獵驕靡)의 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엽교미(獵驕靡)는 노령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는 오손(烏孫)의 풍습<역연혼(逆緣婚)>에 따라서 엽교미(獵驕靡)의 손자였던 잠추군(岑陬軍) 수미(須靡=岑娶)에게 다시 시집을 가게 되었다.
※ 역연혼(逆緣婚) 또는 레비레이트(Levirate)혼은, 남편이 사망한 후, 아내가 그 남편의 형제 가운데서 한 사람과 다시 재혼하는 혼인형태를 말함.
그러자 강도공주(江都公主)는 그에 충격을 받아서 한(漢)의 무제(武帝)에게 호소했지만, 그러나 무제(武帝)는 당시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입장에서 그녀에게 그 나라의 풍습에 따르도록 권유했다. 그러자 그녀는 결국 그 나라의 풍습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지만, 어쨌든 그 후에 그녀는 그곳에서 병사(病死)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가 지었다는 망향(望鄕)의 한시(漢詩)는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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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04 |
이광리(李廣利)의 페르가나(大宛) 원정이 시작되다.(~102)
※ 이광리(李廣利-?부터 기원전 88년)
그는 중국 전한(前漢) 때의 군인이었고, 출신은 중산군(中山郡=현재의 河北省 定州市)이었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으로 무제(武帝)의 총애를 받았던 이부인(李夫人)이 있었고, 형은 무제(武帝)의 총신(寵臣)이었던 이연연(李延年)이었다.
그리고 어느 때, 무제(武帝)는 서역(西域)의 대완(大宛)이란 곳에서 한혈지마(汗血之馬)가 생산된다는 말을 듣고는 사자를 파견해서 그것을 구해오도록 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갔던 사자는 살해당했고, 가지고 갔던 돈까지 약탈당했다. 그리고 또 당시, 이광리(李廣利)는 건달로 지내면서 제멋대로 살고 있었지만, 그러나 태초(太初) 원년(기원전 104년)에 무제(武帝)의 배려로 이사(弐師)장군에 봉해졌다. 그리고는 이어서 무제(武帝)의 명을 받아서 군사 수만을 이끌고는 한혈지마(汗血之馬)를 구하기 위해서 그 이사 성(弐師城)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그 원정길은 너무도 멀었던 데다, 또 도중의 성(城)들도 제대로 공략을 하지 못해서 식량이 곧 바닥이 났다. 그러자 병사들은 하나둘씩 죽거나 도망을 갔고, 나중에는 몇 명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이광리(李廣利)는 하는 수 없이 철병하여 둔황으로 들어가서 2년을 보냈다.
※ 둔황(Dunhuang=敦煌)은, 중국 간쑤 성(甘肅省) 북서부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로, 실크로드의 중계무역 기지였으며, 불교 도시로도 유명하다. 남동쪽에 둔황석굴이 있다.

<둔황 시 위치도>
그러자 무제(武帝)는 격노하고는 <만약 그가 옥문관(玉門關)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온다면 곧 바로 죽여 버려라!>라는 명을 내렸다.
※ 옥문관(玉門關)은, 고대 중국의 서쪽 요지였던 간쑤 성(甘肅省) 둔황 현(敦煌縣) 부근에 배치되었던 관문으로, 한(漢)나라 때, 서관(西關)을 지나서 서역으로 가던 통로였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있다.
그러자 이광리(李廣利)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서 둔황 새(塞-玉門關 부근의 요새로 漢의 武帝 때 건축되었던 長城)까지만 들어왔다. 그리고 또 태초 3년, 무제(武帝)는 다시 대완(大宛)의 공략을 명했고, 그에 정병(精兵) 6만과 소(牛) 10만 마리, 말(馬) 3만 마리, 당나귀와 낙타 1 만여 마리로 양말(糧秣=軍糧)을 운반해서 그에게 보내주었다. 거기다 또 18만의 부대를 후방으로 돌아가게 해서 대완(大宛) 외성(外城)의 공략에 들어갔다. 그러자 그 후 이광리(李廣利)의 대군은 약 40여 일 간 대완성(大宛城)을 포위 공격했고, 그에 무수한 대완 병들이 죽었다. 그러자 또 그때서야 대완(大宛)은 한군(漢軍)이 철병한다는 조건으로 투항했다. 그리고는 3000 마리의 한혈지마(汗血之馬)를 한(漢)에 바쳤다. 그리하여 또 한군(漢軍)은 옥문관(玉門關)까지 철군했지만, 그러나 그 가혹했던 여정으로 인해서 그때 남았던 병(兵)과 말(馬)들은 불과 1만여 명에 1000 필(匹)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이광리(李廣利)는 개선(凱旋)해서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 그 후, 기원전 99년(天漢 2년)에 흉노 토벌을 위해서 출병했던 이광리(李廣利)를 지원하기 위해서 이능(李陵)이 인솔했던 군사 5천이 출병했다. 그러나 그 이능(李陵)은 이광리(李廣利)와 합류하기도 전에 흉노(匈奴)의 3만의 군사와 싸우게 되었고, 그러자 또 병력의 차이와 함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이능(李陵)은 흉노(匈奴)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자 또 무제(武帝)는 격노하여 그의 일족을 몰살해 버렸고, 그를 변호했던 사마천(司馬遷)도 궁형에 처했다. 그 후, 정화(征和) 3년(기원전 90년)에 이광리(李廣利)는 다시 칙명을 받고 오원(五原)에 있던 흉노(匈奴)를 토벌하기 위해서 출병했다. 그런데 그 전야(前夜)에 이광리(李廣利)는 당시 자신의 친척이었으며 또한 승상이었던 팽후(澎侯) 유굴이(劉屈氂=武帝의 조카였으며, 劉勝의 子)와 만났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이광리(李廣利)의 여동생이었으며 무제(武帝)의 총비(寵妃)였던 이부인(李夫人)의 아들 창읍왕(昌邑王) 유박(劉髆)을 황태자로 추천해줄 것을 밀담했다. 그리고 또 위교(渭橋=渭江의 다리. 甘肅省 渭源縣에서 黃河로 흐르는 江)까지 전송을 나왔던 유굴이(劉屈氂)를 향해서 이광리(李廣利)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귀공(貴公)께서 창읍왕(昌邑王)을 황태자에 오르도록 폐하께 청원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되어서 창읍왕(昌邑王)이 황제에 즉위하게만 된다면, 그 이후로는 귀공(貴公)께서도 근심할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또 그 후에, 내자령(內者令=600石의 관리)이었던 곽양(郭穰)이란 자가 무제(武帝)에게 다음과 같이 고했다. <유굴이(劉屈氂)의 부인은 유굴이(劉屈氂)가 황제에게 질책을 받았던 일에 앙심을 품고는 황제를 저주하면서, 이광리(李廣利)와 함께 창읍왕(昌邑王)을 제위에 올리기 위해서 기도(祈禱)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무제(武帝)는 대노(大怒)하여 그 즉시 유굴이(劉屈氂)를 잡아들였고, 그리고는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형벌을 내린 후에 요참(腰斬)의 형에 처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유굴이(劉屈氂)의 처자(妻子)도 함께 처형을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에 연좌되어서 이광리(李廣利)의 처자(妻子)도 함께 처형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이광리(李廣利)는 흉노(匈奴)와 싸우면서 연전연승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 비보(悲報)를 접하자 그는 너무도 낙심하여 괴로워하다가 결국 흉노(匈奴)에 투항했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이광리(李廣利)는 흉노(匈奴)의 왕이었던 호록고(狐鹿姑) 선우(單于)에게 중용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같이 투항을 했던 위율(衛律)이란 자의 중상모략을 받아서 끝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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