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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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연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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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04 |
태초력(太初暦)을 시행하다
태초력(太初暦)은, 한(漢)의 무제(武帝) 태초(太初) 원년(元年=기원전104년)의 개력(改曆)에 의해서 채용되었던 태음태양력(太陰太陽歷)의 역법(曆法)을 말하며
※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은, 태음력(太陰曆)과 태양력(太陽曆)을 절충하여 만들었던 역법으로, 태음력(太陰曆)을 태양의 움직임에 맞추기 위하여 회귀년(回歸年)에 따라서 윤일(閏日)이나 윤달(閏月)을 두는 것으로, 19년에 7번의 윤달(閏月)을 두고, 다시 8년에 3번의 윤일(閏日)을 둔다. 우리나라의 음력(陰曆)이나 유대력, 그리스력, 중국력 등이 있다.
등평(鄧平)과 방사(方士) 그리고 낙하굉(落下閎) 등에 의해서 편력(編曆)되었고, 진대(秦代)부터 사용되어 왔던 전욱력(顓頊曆)을 고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삼통력(三統曆)의 보수(補修)를 거치면서 후한(後漢) 장제(章帝) 원화(元和) 2년(85년)의 개력(改曆)에 이르기까지 190년간 시행되었다.
※ 전욱력(顓頊曆)은, 중국력(中国暦)의 하나로, 진(秦)에서 전한(前漢) 원봉(元封) 6년(기원전105년)까지 사용되었던 태음태양력(太陰太陽歷)의 역법(曆法)이었다. 그리고 전욱(顓頊)은 고대 제왕(帝王)의 이름이며, 19년 7윤달(閏月)의 장법(章法)을 채용해서 1태양년(太陽年)을 365⋅1/4일(=365.25일)로, 그리고 1삭망월(朔望月)은 29⋅499/940일(≒29.53086일)로 하는 사분력(四分曆)이었다.
☆ 장법(章法)은 메톤주기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그것은 또 중국에서 19년을 1장(章)으로 불렀던데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메톤주기(Meton週期)란 기원전 433년에 그리스의 천문학자 메톤이 만든 역법의 순환주기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각 도시마다 다른 태음력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나중에는 모두 그 메톤의 역법으로 통일했다고 하며, 그리고 그 내용은 태음력(太陰曆)을 태양의 주기에 맞추기 위해서 19태음(太陰)년에 7번의 윤달을 두었던 것이다.
※ 삼통력(三統曆)은, 기원전 104년 중국 전한(前漢)의 성제(成帝) 때 유흠(劉歆)이 만든 태음력으로, 19년마다 7회의 윤달을 두었던 것이며
☆ 유흠(劉歆-?B.C.53~?B.C.25)은, 중국 전한(前漢) 말기의 학자로 자(字)는 자준(子駿)과 영숙(穎叔)이었다. 유향(劉向)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궁중의 비장서(祕藏書)를 교열했고, 부친의 사후 유업을 계승하였으며, 중국 최초의 분류도서 목록인 <칠략(七略)>을 완성하였던 인물이었다.
19년 7윤월(閏月)의 장법(章法)을 채용해서, 1태양(太陽)년을 365⋅385/1539(≒365.250162일)로, 그리고 1삭망월(朔望月)을 29⋅43/81(≒29.530864일)로 하는 81분법(分法)을 채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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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99 |
흉노(匈奴)전쟁을 재개(再開)했고, 이능(李陵)과 이광리(李廣利)가 흉노(匈奴)에 투항했다
이능(李陵-?부터 기원전 74년)은, 중국 전한(前漢) 때의 군인이었고, 흉노(匈奴)를 상대로 용전(勇戰)했지만, 그러나 적과 내통했다고 오해를 받았던 비운의 장군이었다. 자(字)는 소경(少卿)이었다. 그의 조부(祖父) 이광(李廣)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그리고 무제(武帝)의 신하를 지냈지만, 그러나 그 역시도 비운의 장군으로 알려졌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당호(李當戶)는 무제(武帝)의 총신(寵臣)이었던 한언(韓嫣)이란 자를 구타했을 정도로 강직했던 인물이었지만 요절했고, 그 후에 이능(李陵)은 태어났다.(遺腹子) 그리고 기원전 99년(天漢 2년)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던 이능(李陵)은 무제(武帝)의 명으로 이사(弐師)장군 이광리(李廣利)를 지원하기 위해서 5천의 보병을 인솔해서 출진했다. 그러나 그 이광리(李廣利)와 합류하기도 전에 선우(單于)가 인솔하던 흉노 본대 3만과 조우(遭遇)했고, 이어서 전투에 들어갔다. 그러자 이능(李陵) 군은 6배가 넘었던 흉노(匈奴)군을 맞아서 분투했고, 그리하여 8일간에 걸쳐서 흉노(匈奴)군 1만 명을 죽였다. 그러자 또 이능(李陵)은 진보락(陳步樂)이란 자를 파견해서 무제(武帝)에게 그 전과(戰果)(轉科)를 보고했다. 그러나 그 후, 이능(李陵) 군은 화살 등, 더 이상 싸울 무기가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흉노(匈奴)에 항복했다. 그러자 그 소식을 전해들었던 무제(武帝)는 격노했고, 이어서 진보락(陳步樂)을 다그치자 진보락(陳步樂)은 그에 자결했다. 그러자 또 신하들은 무제(武帝)에게 아부할 목적으로 이능(李陵)을 처벌할 것을 상주했는데, 하지만 그때 사마천(司馬遷)이 나서서 그를 변호했고, 그 결과 사마천(司馬遷)은 궁형에 처해졌다. 그 후, 이능(李陵)의 재능과 인품을 알게 된 차제후선우(且鞮侯單于)는 이능(李陵)에게 자신의 부하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러나 이능(李陵)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런데 또 그 후, 무제(武帝)는 포로로 잡아들였던 흉노(匈奴)군에게서 이(李) 장군이 흉노(匈奴)에서 한(漢)의 군략(軍略)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무제(武帝)는 그 이(李) 장군이 이능(李陵)이라고 오해해서 격노하고는 그의 처자를 비롯해서 그 일족들을 모두 몰살했다.(하지만 실제로는 李陵보다 먼저 匈奴에 투항했던 李緖 장군) 그러자 또 일족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된 이능(李陵)은 그에 격분해서 이서(李緖)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하지만 또 그 후에 그는 차제후(且鞮侯)의 딸과 혼인을 했고 아이까지 낳았다. 그리고 흉노(匈奴)에서 우교왕(右校王)이 되었고, 기원전 74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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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91년 경 |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완성했다
사기(史記)는 너무도 잘 알려진 것이라 설명을 하는 것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것은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 시대에 사마천(司馬遷)에 의해서 편찬되었던 중국의 역사(歷史)서였고, 정사(正史) 중 제일(第一)로 손꼽히는 것이며, 24사(史) 중 하나이다. 합계 52만 6천 5백 자. 저자 자신이 이름 붙인 서명(書名)은 <태사공서(太史公書)>이며, 그러나 후세에 <사기(史記)>라고 불렸고, 그 후 그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책의 구성은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완성된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이며, 그 서술범위는 전설상의 오제(五帝) 중 일인(一人)이었던 황제(黃帝)로부터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까지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의 방법(식)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기술(正史記述)의 모범(양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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