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BC77


 한(漢)의 부개자(傅介子)가 누란왕(樓蘭王)을 살해하고, 그 동생을 신왕(新王)으로 세웠고, 국명을 선(鄯)으로 고쳤다



 부개자(傅介子-?부터 기원전 65년)는,
전한(前漢) 사람(人)으로, 북지군(北地郡) 의거(義渠) 출신이었다. 그는 원래 종군관(從軍官)이었지만, 원봉(元鳳-昭帝 때) 원년(기원전 80년)에 준마감(駿馬監)이 되자 스스로 대완(大宛)으로 갈 사자(使者)가 될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소제(昭帝)의 명을 받아서 당시, 한(漢)의 사자를 죽였던 누란(樓蘭)과 구자(龜玆)에게 책임을 추궁할 임무를 가지고 그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아래 그림은 타림분지이며, 동그라미 안이 누란과 구자이므로, 참고바랍니다.



 그 후, 그곳에 도착했던 그는 구자(龜玆)의 왕을 불러서 책임을 추궁했다. 그러자 구자(龜玆)의 왕(王)은 죄를 인정하고 사죄했다. 그 후, 그가 대완(大宛)에 갔다가 구자(龜玆)로 돌아왔을 때, 흉노(匈奴)의 사자가 그곳에 있는 것을 알고는 그를 죽였다. 그러자 그 공으로 그는 중랑(中郞)이 되었고, 이어서 평락감(平樂監)이 되었다. 그 후에 또 그는 당시 대장군이었던 곽광(霍光)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누란(樓蘭)과 구자(龜玆)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처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누란(樓蘭)에 갔을 때는 그 왕이 주위에 사람들을 많이 두고 있어서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그에게 한(漢)의 지엄(至嚴)함을 보여주어서 나라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곽광(霍光)은 그에게 모든 일을 일임(一任)했고, 그는 그곳으로 떠났다. 그 후, 그는 많은 보화(寶貨)를 가지고 누란(樓蘭)으로 가서 그곳의 왕을 만났다. 그러나 누란(樓蘭)의 왕이 그에게 불친절했으므로 그는 일부러 서쪽으로 향해서 국경 가까이까지 갔을 때 통역을 하던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는 지금 한(漢)에서 가지고 온 보물들을 제국(諸國)들에 나눠줄 생각인데, 하지만 왕이 거절한다면 서쪽의 나라로 갈 것이오> 그러자 그 통역은 누란(樓蘭)의 왕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고, 그러자 또 누란왕(樓蘭王)은 그것이 탐이 나서 그와 대면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 왕 앞에 자신이 가져갔던 재보(財寶)들을 늘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천자로부터의 전언(傳言)이 있으므로 주위를 물리어주십시오> 그러자 보화에 탐이 났던 누란왕(樓蘭王)은 의심 없이 곧 주위를 물렸는데, 그러자 함께 갔던 자객 2명이 달려들어서 누란왕(樓蘭王)을 죽였다. 그리고 그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누란왕(樓蘭王)은 이미 한(漢)에 지은 죄가 있었으므로, 그에 한(漢)의 황제께서는 나로 하여금 오늘 그를 처벌케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금방 한(漢)의 군사들이 이곳에 도착할 것이므로 제신(諸臣)들은 경거망동을 삼가라! 하지만 만약 불응(不應) 시(時) 이 나라를 멸할 것이며, 그리고 이제 비게 된 왕의 자리는 태자(太子)로 하여금 잇게 할 것이다!> 그 후, 그는 누란왕(樓蘭王)의 머리를 가지고 한(漢)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모두들 그의 공적을 치하했으며, 또 그 공으로 의양후(義陽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함께 갔던 자객들도 시낭(侍郎)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원강(元康) 원년(기원전 65년)에 사망했다.

 
곽광(霍光-?부터 기원전 68년) 2

 그는 전한(前漢)의 정치가였고, 소제(昭帝)와 선제(宣帝) 2대에 걸쳐서 정치를 행했다. 그리고 곽거병(霍去病)의 이모제(異母弟)였으며, 자(字)는 자맹(子孟)이었다. 그는 무제(武帝)의 총신(寵臣)이었으며, 기원전 87년에 무제(武帝)가 사망했을 때, 당시 8세에 불과했던 소제(昭帝)의 보좌를 무제(武帝)로부터 명받았던 3인 중 한명이었다.(나머지 두 명은 金日磾와 上官桀) 하지만 그 후, 곽광(霍光)과 상관걸(上官桀)은 대립했고, 그러자 또 상관걸(上官桀)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러나 실패하고 주살(誅殺) 당했다. 그 후, 소제(昭帝)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그는 신임을 받았으며, 그러자 소제(昭帝)는 치세 13년간 정치를 모두 그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또 그 후, 기원전 74년에 소제(昭帝)가 자식도 없이 사망하자 그는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제위에 올렸다. 하지만 그 유하(劉賀)는 행동거지가 방정치 못하여 불과 27일 만에 물러났고, 그러자 또 그 후위(後位)는 무제(武帝)의 증손(曾孫)이었던 선제(宣帝)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대사마(大司馬)대장군 직을 유지하면서 정치를 펼쳐나갔지만, 그러나 그도 기원전 68년에 죽었다. 그리고 또 그는 생전에 그 높은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행동거지를 조심해서 무탈했지만, 하지만 그의 일족들은 그의 배경을 믿고 오만방자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모반까지 꾀하다가 선제(宣帝)로부터 일족이 몰살되었다.

 BC60


 흉노(匈奴)의 日逐王<선현탄(先賢撣)>이 한(漢)에 항복했다
 그러자 한(漢)은 서역도호(西域都護)를 신설하고, 타림분지의 지배를 개시했다

 BC51


 동흉노(東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鄯于=呼韓邪單于)가 한(漢)에 항복입조(降服入朝)했다



 호한야선우(呼韓邪鄯于-?부터 기원전 31년)

 
※ 또는 <호한사선우>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사전(辭典)의 표현을 따라서 <호한야선우>로 표현함

 그는 중국 전한(前漢) 시대, 흉노(匈奴)의 선우(單于)였던 허려권거선우(虛閭權渠單于)의 아들이었으며, 질지선우(郅支單于)의 동생이었고, 성(姓)은 련제(攣鞮), 이름은 계후산(稽侯狦) 또는 계후사(稽侯蛳)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한(漢)에 항복했던 일과 함께 <왕소군(王昭君)>의 남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기원전 61년에 부(父) 허려권거(虛閭權渠)가 죽자 그 뒤를 이어서 우현왕(右賢王)이었던 악연구(握衍朐)가 선우(單于)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장인이었던 오선막(烏禅幕)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 오선막(烏禅幕)은 오손(烏孫)과 강거(康居) 사이에 있던 소국(小國)의 군주로 있다가 흉노(匈奴)에 항복한 뒤 일축왕(日逐王)의 누나를 처로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그 일축왕(日逐王)은 악연구(握衍朐)와 사이가 좋지 못해서 부하 수만(數萬) 기(騎)를 이끌고 한(漢)에 투항해서 귀덕후(歸德侯)를 봉(封) 받았다. 그러자 또 그에 악연구(握衍朐)는 격노하고는 일축왕(日逐王)의 동생들을 오선막(烏禅幕)의 구명(求命)에도 불구하고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고 또, 그 악연구(握衍朐)의 태자였던 좌현왕(左賢王)이 동방(東方)의 귀인(貴人)들을 참언(讒言)했기 때문에, 그래서 오선막(烏禅幕)과 동방(東方)의 귀인(貴人)들은 그(呼韓邪單于)를 선우(單于)로 세우고는 악연구(握衍朐)와 싸우게 되었다. 그러자 악연구(握衍朐)는 패배했고, 기원전 59년에 자살했다. 그러자 또 그 후에 다섯 선우(單于-屠耆, 烏藉, 呼掲, 車犁, 呼韓邪)가 난립(亂立)해서 경쟁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또 그의 형이었던 호도오사(呼屠吾斯)도 자립해서 질지선우(郅支骨都侯單于)가 되었고, 이어서 그를 쳤다. 그러자 형에게 패했던 그는 부하였던 좌이질자왕(左伊秩訾王)의 <한(漢)에 도움을 구하라>는 진언을 받아들여서 기원전 53년에 자신의 아들을 한(漢)에 입조(入朝)시켰다. 그러자 또 질지선우(郅支單于)도 그와 똑같이 한(漢)에 도움을 구하는 의미로 자신의 아들을 입조시켰다. 그 다음해, 그는 스스로 오원(五原)의 요새를 방문해서 감로(甘露) 3년(기원전 51년) 정월(正月)에 한(漢)에 입조(入朝)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는 약속대로 그가 한(漢)에 입조하자 선제(宣帝)는 그를 감천궁(甘泉宮)에서 만나서는 일반 제후왕(諸侯王)들보다 상석(上席)에다 앉혔다. 그리고 또 그 후에도 선제(宣帝)는 그에게 후히 베풀어서 중국의 관(冠)과 의복(衣服) 하사했으며, 금으로 만든 새(璽)도 주었고, 심지어는 병사들과 식량까지도 주며 그를 도왔다. 그런 한편, 그가 한(漢)에 입조(入朝)했다는 것을 알게 된 질지선우(郅支單于)는 그 틈을 타서 우지(右地=西方)를 공격했다. 그러나 오손(烏孫)은 한(漢)이 그를 받아들인 것을 알고는 질지선우(郅支單于)를 도우지 않았다. 그 후, 한(漢)은 원제(元帝=漢의 10대 황제) 대가 되어서도 계속해서 그를 도왔지만, 그러나 그 즈음에 질지선우(郅支單于)가 한(漢)의 사자를 죽인 일이 있어, 그에 그로 하여금 질지선우(郅支單于)를 토벌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그는 곧 북쪽으로 향했는데, 그런데 그때 함께 동행 했던 차기도위(車騎都尉) 한창(韓昌)과 광록대부(光祿大夫) 장맹(張猛)과 함께 월지왕(月氏王)의 머리로 만든 술잔을 나누면서 다음과 같은 맹세를 했다. <지금 이후 한(漢)과 흉노(匈奴)는 일가(一家)가 될 것이며, 그리하여 대대로 서로는 공격할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그가 북쪽으로 들어가자 백성들은 모두 그에게 귀순했으며, 이후 흉노(匈奴)는 평정되었다. 그리고 한(漢) 건소(建昭) 3년(기원전 36년) 질지선우(郅支單于)는 강거왕(康居王)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그러나 서역도위(西域都護) 감연수(甘延壽)와 부교위(副校尉) 진탕(陳湯)에 의해서 멸해졌다. 그러자 그는 그 사실에 기뻐했음과 동시에, 그러나 또 그 후에 한(漢)이 어떻게 나올지를 몰라서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재차 입조(入朝)를 청했고, 그리고는 또 이어서 경녕(竟寧) 원년(기원전 33년)에 한(漢)에 다시 입조(入朝)했다. 그런데 그때, 그는 한(漢)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자 한(漢) 왕족의 사위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자 원제(元帝)는 후궁 중에서 <왕소군(王昭君)>을 그의 알씨(閼氏=匈奴의 왕비를 의미함)로 주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는 북방의 경비를 철폐해 달라는 건의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재위 28년, 한(漢) 건시(建始-漢의 11대 황제 成帝 연호) 2년(기원전 31년)에 사망했고, 그러자 그의 뒤는 복주누약제선우(復株累若鞮單于)가 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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