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순수한 허구이므로, 본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국가, 배경, 도시 등은 모두 사실과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19>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읽으시려는 분들은 주의 당부드립니다.

그리고 이 글은 앞의 2016년 1월에 올렸던 것인데, 자료가 심하게 훼손되어 수정하는 차원에서 다시 올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관계한다

선은 악과
관용은 정의와
종교는 정치와...

 <토마스 하디>

 

 


 

 第 一 部

 


 

 

 


<파라나 강>

 


 第 一 章


<파라나 강과 그 지류들>


 ※ 스페인어로 Río Paraná, 포르투갈어로는 Rio Paraná이며, 남아메리카 브라질 중남부를 흐르는 강.
     브라질 남동쪽 고원에서 시작하여 팜파스를 지나 라플라타 강으로 흘러든다. 길이는 4,880km.

 
 <닥터(Doctor) 에드워드(Edward)>는 <파라나 강(江)>의 작은 항구(港口)에서 선로(線路)와 황색(黃色)의 크레인(crane)이 있던 곳 중간에 서서 대안(對岸)의 차코(Gran chaco-남아메리카중남부 Andes산맥과 Paraguay강 사이에 펼쳐지는 평원) 지방(地方) 위로 수평으로 길게 펼쳐졌던 우모(羽毛) 같았던 연기(煙氣)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붉은 석양(夕陽) 속에 있는 어느 나라 국기(國旗)의 줄무늬 같이 보였는데, 그리고 또 그때, 그 근처에는 <해운회관(海運會館)>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수부(水夫) 한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 시각에 그곳에는 자신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엷게 번지는 빛과, 무언가 알 수 없는 식물의 향기 또는 일종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에 말려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또 어쩌면 유년(幼年)의 의식(意識)과 미래(未來)에의 희망(希望) 또는 그때는 완전히 잃어버렸던 지난 일의 의식(意識)을 다시 불러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것은 또 그 석양(夕陽)의 느낌과도 비슷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선로(線路)와 크레인, 그리고 <해운해관>. 그것은 <닥터 에드>가 그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곳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보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세월은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러나 단 하나, 그가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한줄기 연기(煙氣)만이 <파라나 강> 저쪽 편에서 피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 새로웠다면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연기를 뿜어내고 있던 그 <공장(工場)>은 그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그곳으로 처음 왔을 때는 아직 생기지도 않았던 것이었는데, 그러니까 그때 그가 <파라과이(Paraguay-남아메리카 중남부에 있는 나라. 1811년에 에스파냐에서 독립하였다. 목축과 임업이 발달하였으며, 주민은 인디오와 메스티소이고 주요 언어는 에스파냐 어이다. 수도는 아순시온, 면적은 40만 6752㎢)>에서 주(週) 1회 정기선(定期船)을 타고 그곳으로 다니기 시작했던 것은, 벌써 20년도 더 전(前)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때, 그는 <아순시온(Asunción-Paraguay공화국의 수도. 필코마요 강이 합류되는 파라과이 강 연안에 위치한 최대의 무역항이며, 유통과 수출의 중심지)>의 선창(船艙)가에서 헤어졌던 자신의 아버지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작은 배의 좁은 트랩(trap-사다리)에 서서 장신(長身)에다 백발(白髮)을 흩날리면서 기계적(機械的)인 낙천주의(樂天主義)의 어조(語調)로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다.


 <아들아, 우리 금방 다시 만나자!>

 

 그래서 그때, 그는 1개월 아니면 넉넉잡아서 3개월 정도면 다시 아버지와 재회(再會)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의 아버지는 그와 함께 헤어지던 그의 어머니의 귀에다 대고 마치 속삭이듯이 <우리 빨리 다시 만나서 사랑을 나눕시다...> 라고 하면서 그의 어머니에게 경의(敬意)를 다했던 태도로 입을 맞췄을 때는, 당시 14세였던 그에게서도 거의 이국적(異國的)이란 느낌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당시, 그는 자신의 아버지는 분명히 <영국인(英國人)>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는 <스페인(Spain)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의 아버지가 단지 여권(旅券)에 기록된 국적(國籍)을 넘어서, 눈(雪)과 안개에 싸여있는 전설(傳說)의 섬 영국(英國)과, 디킨즈(Dickens, Charles-영국의 소설가, Oliver Twist 등을 썼음)와 코난 도일(Arthur Lgnatius Conan Doyle-Sherlock Holmes로 유명한 작가)이 태어났던 그 섬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10세의 어린 나이에 그곳을 떠났던 그의 아버지가 그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가 영국(英國)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당신의 양친(兩親) 즉, 그의 조부(祖父)와 조모(祖母)가 사주었다던 그림책이 한권 있었는데, 그 책의 제목은 <런던(London)의 파노라마(panorama)>였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헨리>가 자신이 어렸을 자주 보여주었던 책이었는데, 그 안에는 회색(灰色)의 사진으로 <버킹검궁전(Buckingham Palace)>이라든가 <런던탑(the Tower of London)> 그리고 <2인승마차(馬車)>와 <상자마자(箱子馬車)> 그리고 <긴치마를 입은 숙녀(淑女)>의 사진 등, 많은 사진들이 해설과 함께 들어 있었다.

 그 바로 직후에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망명자(亡命者)의 신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곳은 <망명자(亡命者)들의 천국(天國)>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는데, 그래서 또 그곳에는 그의 아버지 외에도 <이탈리아>에서 왔던 사람들과 <체코, 폴란드, 영국> 등, 많은 나라에서 망명을 왔던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는 <디킨즈(Dickens)>를 읽기 시작했던 그 어렸을 때부터, 마치 외국인(外國人)이 그 책을 읽는 것처럼, 그 책에 쓰인 것들은 그 당시에도 전부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또 그 당시의 그로서는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래서 또 그것들은 예를 들어서 <집행관(執行官)>이라든가 <장의사(葬儀社)>들, 또는 <올리버트위스트(Oliver Twist)>가 마치 <러시아인>들의 믿음처럼, 그때 그곳에는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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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73년


 두고(竇固)가 북흉노(北匈奴)를 공격해서 호연왕(呼衍王)을 쳤고
 반초(班超)가 서역(西域)으로 파견되었다



 두고(竇固-?부터 88년)

 자(字)는 맹손(孟孫)이며, 부풍군(扶風郡) 평능(平陵) 출신의 사람이었고, 명문(名門) 두(竇)씨 가문에서 출생해서, 아버지였던 두융(竇融)의 공적에 의해서 광무제(光武帝)의 딸 열양공주(涅陽公主)와 결혼했지만, 그러나 명제(明帝) 시대에 일시 실각(失脚)했고, 그 후에 다시 흉노(匈奴) 전쟁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 후에 북방(北方)과 서역(西域)정책에 성공했던 공적으로 장제(章帝)시대에도 고관(高官)을 역임했으며, 반초(班超)를 발굴해냈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천산(天山)산맥을 넘어서 원정해서 대승리를 거둔 후한(後漢)시대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알려졌으며, 대부호로도 알려졌지만,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아주 검약한 생활을 했던 인물이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도왔던 인물이었다.

 

<반초의 진군 圖>



 
반초<班超-32년부터 102년(建武9년-永元14년)>

 그는 중국 후한(後漢) 때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였으며, 자(字)는 중승(仲升)이었다. 그리고 반고(班固)의 동생이었고, 31년간이나 서역<西域-Xinjiang Weiur-현재의 新疆(신장)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 근처>에서 머물면서 당시, 흉노(匈奴)의 지배 아래에 있던 서역(西域)의 국가들을 정복했고, 그리하여 후한(後漢)의 세력권을 파미르지방 동서(東西)에까지 넓혔으며, 그 공으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후한서(後漢書)에서는 그를 칭해 <연함호발(燕頷虎髮)>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부(父)는 반표(班彪). 여동생은 반소(班昭)였으며, 일가(一家)는 역사가의 집안이었다. 자(子)는 三男 반용(班勇) 등이 있었다.

 반소(班昭-45년?부터 117년? 또는 49년부터 120년)는, 중국 후한(後漢)의 작가(作家) 또는 시인(詩人)이었고, 중국 최초의 여성역사가였다. 그리고 일명(一名) 희(姬), 자(字)는 혜희(惠姬) 또는 혜반(惠班)이었고, 부풍안륙(扶風安陸=湖北省) 출신의 사람이었다.


<晩笑堂竹 荘畫傳에서>



 그녀는 역사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14세에 조세숙(曹世叔)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에 남편이 죽자 그녀의 재명(才名)을 전해들은 화제(和帝)의 초청으로 궁중으로 들어갔고, 그 후, 후궁(後宮)들과 후비(后妃)들의 스승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서 조대가(曹大家)로 불려졌다. 그 후, 오빠였던 반고(班固)가 투옥되어 한서(漢書)를 끝내지 못하고 사망하자 8표(八表) 천문지(天文志)를 자신이 써서 완성시켰다. 그리고 또 다른 저작으로는 <여계(女誡) 7장(章)>과 <속(續) 열녀전(列女傳)> 2권도 그녀가 선정(選定)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한, 그녀 자신의 저서로는 조대가집(曹大家集)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사부(辭賦)에 길이 남을 부(父) 표(彪)의 <북정부(北征賦)>에 답해서 동정부(東征賦)를 지었다고 하며, 그리하여 <문선(文選)>에 수록된 한대(漢代) 여성작가들 중에서 제일로 손꼽혔다고 한다.

 
사부(辭賦)는, 중국의 초사(楚辭) 형식에 의거한 산문에 가까운 운문(韻文)을 말하며, 서정적 시(詩)인 사(辭)와 서사적 시(詩)인 부(賦)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곧 시문(詩文)을 이른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중심으로 해서 한(漢)나라 때 발전하였고, 궁전의 장관(壯觀)이나, 도성의 번화함 그리고 사냥의 호쾌함 등을 노래했다.

 ○
문선(文選)은,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남조(南朝) 양(梁)의 소명(昭明)태자 소통(蕭統)에 의해서 편찬되었던 시문집(詩文集)으로, 전(全) 30권. 춘추전국시대부터 양(梁)까지의(약 천년) 문학자 131명이 썼던 부(賦)와 시(詩) 문장(文章) 800여 작품을 37장르로 분류해서 수록했다.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으나, 거의 안제(安帝)시대였던 원초(元初) 연간(年間) 114년에서 119년 사이에 사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또 그때가 향년(享年) 70여세였다고 후한서(後漢書)는 전한다.


 아무튼, 그는 형 반고(班固)와 함께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배웠다. 그러나 명제(明帝)의 칙명(勅命)에 의해서 두고(竇固)의 흉노토벌군이 조직되자 그도 참전했다.
그 후, 그가 선선국(鄯善國)에 사자로 갔을 때, 그 나라는 처음에는 그를 환대하더니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점차로 분위기가 나빠졌다. 그래서 알아본즉, 그곳에는 흉노(匈奴)의 사자도 함께 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또 그때, 그 때문에 몹시도 두려워 하던 부하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아주 유명한 말을 했다. <不入虎穴焉得虎子!-호랑이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또는 호랑이굴로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새끼를 얻을 수 없다!> 그 다음,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서 무작정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의 숫자는 불과 36명뿐이었다. 그리고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은 그보다 훨씬 더 숫자가 많았는데,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기습을 받았던 때문이었던지 흉노(匈奴)의 사자단(使者團)은 그대로 흩어졌고, 그들은 대승(大勝)했다. 그 후에도 그는 그 근처에 있던 흉노(匈奴)들을 모두 토벌했고, 그리하여 서역(西域)의 남쪽은 완전히 후한(後漢)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75년(永平 18년)에 명제(明帝)가 죽었고, 이어서 장제(章帝)가 즉위하자 그들에게 귀환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또 한군(漢軍)이 철수하면 그곳은 당연히 흉노(匈奴)들의 차지가 될 것이었고, 그리고 또한 그때까지 한(漢)에 협조를 했던 사람들은 몰살을 당할 것이 뻔했다. 그러자 또 그때, 그에 두려움을 느꼈던 서역(西域)의 왕들과 귀족들이 그를 찾아와서 울며불며 매달렸고, 그러자 그는 결국 그곳에 남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음 91년(永元 3년), 그는 흉노(匈奴)의 후원을 받고 있던 구자(龜茲)를 토벌했고, 이어서 조정(朝廷)으로부터 서역도호(西域都護)에 임명되었다.


<구자 위치도 - 중앙>


 그 다음 또 97년(永元 9년), 그는 부하였던 감영(甘英)을 사자로 보내서 대진(大秦=로마제국)과 조지(條支=현재의 시리아 지역)에 국교(國交)를 요구하려 했지만, 감영(甘英)은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 감영(甘英-생몰불상)은, 중국 후한(後漢)의 무장으로, 영원(永元) 9년(97)에 반초(班超)의 명을 받아서 대진(大秦)으로 가기 위해 서역(西域)을 거쳐서 시리아에 도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그 후, 중국에 서아시아에 관한 지식을 전했다.(후술)

 아무튼 또 100년, 그는 서역(西域)에서 체류한지 31년 만에 한(漢)나라 땅이 그리워져서 조정(朝廷)에 귀국 탄원서를 냈다. 그러자 102년에 그의 소원은 성취되었고, 이어서 낙양(洛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망했다. 그러자 그 후, 그가 없었던 서역(西域)은 다시 흉노(匈奴)의 독무대가 되었고, 그러자 또 한(漢) 조정(朝廷)에서는 그의 아들이었던 반용(班勇) 등을 파견해서 다시 그곳을 회복해보려 했지만, 그러나 그 후로도 그가 있던 당시만큼의 세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반고<班固-32년부터 92년(建武8年-永元4年)>

 중국 후한(後漢) 초기의 역사가, 문학자.
 자(字)는 맹견(孟堅). 반초(班超)의 兄이었다.




 그는 한서(漢書)의 편찬자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문학자로서 <양도부(兩都賦)> 등으로도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부(父) 반표(班彪)도 역사가로서, 반고(班固) 이전에 벌써 65편을 편찬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반고(班固)는 칙명(勅命)에 의해서 부(父)의 업적을 계승했으며, 그리하여 한서(漢書)를 거의 완성했지만, 그러나 바로 그때에, 사원(私怨)에 의해서 중상(中傷)을 받아서 투옥되었고, 그 옥중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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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45년


 오환(烏桓), 선비(鮮卑)가 후한(後漢)에 조공(朝貢)했다



 ※ 오환(烏桓)은,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 중국 한(漢)나라 때에 동호족(東胡族) 중, 현재의 내몽골자치구에 존재했던 민족이었으며, 삼국지(三國志) 등에서는 오환(烏丸)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한나라 초기에 흉노(匈奴)에게 쫓겨서 오환산(烏桓山)으로 물러났다가, 후한(後漢) 말 조조(曹操)에게 패하여 쇠퇴하였고, 그 후 점차로 한족(漢族)을 비롯한 다른 여러 민족들과 융합되었다.

 

<내몽골자치구>



 ※ 선비(鮮卑)는, 기원전 1세기에서 6세기, 중국의 북부에 존재했던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으로, 중국의 이민족이었던 오호(五胡) 중, 고대 북아시아에서 살았던 몽골족과 퉁구스족의 피가 섞였던 유목민족이었다.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싱안링(興安嶺)의 동쪽에서 유목생활을 하였으며, 후한(後漢)의 화제(和帝) 때에는 흉노(匈奴)를 대신해서 몽골지방을 차지하였고, 위(魏)나라 때부터 점차로 중국 본토로 들어왔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모용 씨(慕容氏), 우문 씨(宇文氏), 탁발 씨(拓跋氏) 등으로 분열되었으며, 그 중에서 특히 '탁발 씨'는 북위(北魏)를 세우기도 했지만, 그러나 당(唐)과 송(宋) 이후에는 한족(漢族)에 동화되었다.


<동그라미 부분이 鮮卑>

 

 48년


 흉노(匈奴)가 남북으로 분열해서 일축왕비(日逐王比)가 후한(後漢)에 귀순(歸順)했고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가 되었다



 ※ 일축왕비(日逐王比)=해락시축제선우(醢落尸逐鞮單于-?부터 56년)는, 중국 후한(後漢) 시대의 남흉노(南匈奴)의 초대 선우(單于)였고,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의 손자였으며, 오주유약제선우(烏珠留若鞮單于)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성(姓)은 허련제 씨(虛連題氏)였고, 이름은 비(比)였다.

 57년


 왜노국(倭奴國)의 사자가 낙양(洛陽)으로 조공을 왔다
 



 ※ 왜노국(倭奴國=奴国)은, 1세기에서 3세기 전반(前半),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東夷傳)과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나타나는 왜인(倭人)의 나라를 이름이며, 야마토(大和) 時代에 나현(儺縣=나노아가타) 즉, 현재의 福岡市(후쿠오카시) 부근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왜노국(倭奴國)이 후한(後漢)과 외교교섭을 가졌던 것은 아래의 사료(史料)가 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왜노국(倭奴國)의 왕이 후한(後漢)에 조공(朝貢)을 왔다>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사마대국<邪馬臺國(야마타이코쿠)=사마일국(邪馬壹國)>이 위(魏)의 황제에게 사자를 파견했다.

 
사마대국(邪馬臺國)은, 3세기 일본열도에 존재했었다고 여겨지는 나라들 중 하나이며,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서는 <親魏倭王 卑弥呼는 그 나라의 여왕(女王)이며, 약 30개의 나라 중 그 중심이 되는 곳에 살고 있다>라고 했다.

 
친위왜왕(親魏倭王)은, 위(魏)의 황제 조예(曹叡)가 사마대국(邪馬臺國)의 여왕이었던 히미코(卑弥呼)에게 서력(西曆) 238년(239년 설도 있다)에 내려주었던 봉호(封號)를 말하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왜인조(東夷傳倭人條=魏志倭人傳)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히미코(卑彌呼-175년경부터 248년경)는,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등, 중국의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는 왜국(倭國)의 왕(또는 여왕)이었고, 봉호(封號)는 친위왜왕(親魏倭王)이었으며, 후계는 친족이었던 토요(壹興)가 여왕으로 즉위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지(三國志)에서는 <邪馬壹國>이라고 썼고, 후한서(後漢書)에서는 <邪馬臺國>이라고 썼다. 그러므로 사마대국(邪馬台国)이란 통칭은(일본에서) 사마대국(邪馬臺國)의 대(臺) 자(字)를 台 자(字)로 대용한 것이다. 그리고 또 야마대국(耶馬臺國=야마타이코쿠=야바타이코쿠)라고도
쓴다.
그리고 또 그 나라는 야요이시대(弥生時代=彌生時代)였던 1-3세기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여왕이 통치했던 여왕국이었다고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는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나라는 원래 남왕(男王)이 통치를 했었는데, 그러나 나라가 성립(1세기 중반기 무렵부터 2세기 초엽)하고(부족으로 봄) 약 7, 80년 후에, 나라 전체에 장기간에 걸친 소란(騷亂)이 발생했다
(소부족들간의 싸움). 그러자 사마대국(邪馬臺國)도 그 영향을 피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히미코(卑弥呼)라는 여자를 왕으로 공립(共立)시킨 후에야 그 소란은 겨우 진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녀는 자신의 남동생과 함께 통치를 행했는데, 하지만 또 狗奴國(일반적으로 쿠나코쿠라고 읽으며, 당시, 邪馬臺國과는 대립했던 나라)과의 싸움 중에 히미코(卑弥呼)가 죽어버리자(원인불명으로 급사로 추정함) 그의 남동생이 그 자리를 이었지만, 그러나 계속되던 혼란을 억제하지 못해서 다시 토요(壹興)를 여왕에 옹립하자 그 혼란은 수습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나라와 나중의 야마토 왕권(王權)과의 관계는 모호하며, 그 나라의 위치에 관해서도 제설(諸說)이 있다. 그리고 또 일반적으로 읽기로는 <야마타이코쿠>라고 읽지만, 그러나 그에도 제설(諸說)이 있다.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건무중원(建武中元) 2년(57년),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게 왜노국(倭奴國)에서 사신을 보내와서 광무제(光武帝)가 그것을 인정하고 책봉(冊封)되었다는 뜻으로 금인(金印)을 하사했다고 한다.

 

 

<금인의 인면>

 


 그리고 그것은 또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어느 농민이 志賀島(시카노시마)에서 발견했고, 그리하여 그것으로 그 왜노국(倭奴國)이 실재(實在)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발견 당시 상태가 너무 좋았다거나, 발견 장소, 발견자 등, 전체적으로 내용이 너무 허술해서 위조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감정한 결과 진품이란 의견이 大勢라고 했지만 그것은 전부 일본인들의 입장일 뿐이다)

 아무튼, 위의 금인(金印)에는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새겨진 글자에서 왜(倭)가 되어야 할 글자는 위(委)로 되어있으며, 사람 인(人) 변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또한 그렇게 생략법을 사용하는 것을 감필(減筆)이라고 하지만, 그에도 제설이 있고, 그것으로 일본의 억지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리고 또 아래는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열전(東夷列傳) 제75의 내용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 <後漢書 東夷列傳第七十五>

 <해석>

 건무중원(建武中元) 二年(57年)에 倭奴國이 貢物을 받들어서 朝賀(궁중에서 거행되었던 신년하례)했다. 그리고 사신(使人)은 스스로 자신을 大夫라고 칭했으며, 나라는 왜국(倭國)의 제일 남쪽에 있다고 했다. 그러자 광무제(光武帝)는 그 뜻을 받아서 인(印)을 하사했다.

 그 다음, 안제(安帝) 영초(永初) 元年(107年)에 왜국왕(倭國王) 스이쇼우<帥升-야요이시대(彌生時代) 중기에서 후기 사이에 존재했던 왕으로, 소재지는 북 큐슈가 유력하며, 일본역사상 외국 史書에 이름을 남겼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등이 노예(奴隷) 百六十人을 헌상(獻上)하며, 조견(朝見)을 청해왔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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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8년


 왕망(王莽)이 신왕조(新王朝)를 건립했고, 전한(前漢)이 멸망했다



 ※ 적미(赤眉)의 난(亂)은, 신말(新末)과 후한(後漢) 초기, 중국의 신조(新朝)가 멸하고, 광무제(光武帝)에 의해서 후한(後漢)이 일어나기까지의 편의적인 시대구분이 되었던 사건을 말함.

 <왕망(王莽)의 정치>

 왕망(王莽)은 전한(前漢)의 왕위를 찬탈해서 황제에 즉위했고, 그 후 유교적인 입장과 주대(周代)의 치세를 복고한다는 정책 아래 <정전(井田)법>을 모방하여 전국의 전지(田地)를 국유화했으며, 화폐도 새롭게 개주(改鑄)했던 등, 나름대로 새로운 정책을 펼쳐 나갔다. 하지만 그러 했던 정책은 현실성이 전혀 없었고, 거기다 화폐도 자주 개주(改鑄)했기 때문에 경제에 혼란만 가져다 주었다. 그러자 또 그 결과 지방에서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호족들은 손해를 보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반발도 이어졌다. 그리고 또한 외교정책에서도 과도한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근거해서 흉노(匈奴)와 고구려(高句麗)를 대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에는 그 나라들도 등을 돌리게 되었다.

 <
적미(赤眉)의 난(亂)>

 그러자 그 즈음에, 여러 가지의 불평을 가지고 있었던 농민들로부터 시작된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효시(嚆矢)가 되었던 사람이 바로 랑(낭)사군(琅邪郡) 해곡현(海曲縣=현재의 山東省 青島 부근)에 살고 있던 여모(呂母)라고 불렸던 한 노파였다.


<青島市 현재>


 그녀는 아들은 당시 현청(縣廳)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일로 현재(縣宰=현의 장관)에게 붙들려서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서력(西曆) 17년, 그에 분함을 이기지 못했던 그녀는 돈을 주고 사람들을 모아서 바다에 나가 있던 현재(縣宰)를 덮쳐서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원한을 풀고 저 세상으로 떠나갔지만, 그런데 그때 한번 모여졌던 잡군(雜軍)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어서 번숭(樊崇)이란 자를 우두머리로 삼더니, 당시 산동(山東) 각지로 흘러 다니던 유민들을 흡수해서 그대로 <적미(赤眉) 군>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적미(赤眉)란 이름은 당시 적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눈썹을 염료 등으로 칠해서 붉게 물들였는데, 그런 연고로 적미(赤眉) 군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런 한편 그 <여모(呂母)의 난(亂)>이 조금 지난 후, 다시 왕광(王匡)과 왕봉(王鳳) 등이 녹림산(綠林山=현재의 湖北省 當陽縣)을 근거로 해서 농민들을 흡수했고, 이어서 그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綠林軍의 탄생)


<湖北省>


 하지만 그 후, 그 군(軍)의 내부에서 역병(疫病)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서력(西曆) 21년에 부대는 분열되었다. 그러자 그 결과, 한 무리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하강군(下江軍)으로 불리게 되었고, 다른 한 무리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그대로 하남성(河南省)의 남양(南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신시군(新市軍)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신시군(新市軍)은 남양(南陽)의 호족이었으며 또한 같은 친척이기도 했던 유씨(劉氏)들과 손을 잡았고, 그리하여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 유씨(劉氏)들 중에서는 유수(劉秀)와 그의 형이었던 유연(劉縯) 등이 있었고, 그리고 또 서력(西曆) 23년에는 그 유씨(劉氏)들 중에서 유현(劉玄)을 왕위에 올렸다.(更始帝)


<河南省>


 그러자 왕망(王莽)은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또 서력(西曆) 22년에는 왕광(王匡-綠林軍의 王匡과는 同名異人)을 장군으로 해서 적미(赤眉)군의 토벌을 명했지만, 그러나 그 왕광(王匡)은 적미(赤眉) 군에 패했다.(赤眉軍이 눈썹을 붉게 물들였던 것은 바로 이 싸움부터였다고 한다)

 그런 한편, 신군(新軍)은 곤양(昆陽)의 싸움에서도 졌다.(아래 昆陽의 싸움 참조) 그러자 왕망(王莽)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되어갔다. 그러자 또 그때 누가 다음과 같이 진언을 했다. <옛날부터 나라에 큰 재앙이 있을 때는 큰소리로 통곡을 해서 그것을 풀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늘을 향해서 큰소리로 통곡을 해서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왕망(王莽)은 그 진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이어서 통곡소리가 큰 사람들을 모집해서 그들을 관리로 뽑았다.(5천 명이나 되었다고 함) 그러자 그것을 보고 또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러자 결국 왕망(王莽)은 그 반도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광무제(光武帝)>

 왕망(王莽)이 죽은 후, 갱시제(更始帝) 군은 관중(關中)으로 들어가서 장안(長安)을 제압했다. 하지만 그때 장안(長安)으로 몰려 들어갔던 갱시제(更始帝)군은 단번에 타락을 해서 재보를 마구 약탈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주야장천(晝夜長川) 연회를 여는 등, 전(前) 시대들과 나아진 모습을 전혀 보여주질 못했다. 그러자 적미(赤米)군은 그에 실망을 해서 앞서 맹세했던 갱시제(更始帝)에게 복종하겠다는 약속을 깼고,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독자의 노선을 걷기로 결의하고는 장안(長安)을 치기로 결정했다.

<現 西安市=長安에 상당>



 그리고 또 그 무렵, 유수(劉秀)는 갱시제(更始帝)와 그 측근들에 의해서 살해 당했던 자신의 형 유연(劉縯)의 일도 있었고 해서, 조정(朝廷)으로부터 위험한 인물로 평가되어 원정도 떠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또 당시, 적당한 장군이 없었던 갱시제(更始帝)군에서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를 다시 불러서는 그에게 하북(河北)을 제압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그는 하북(河北)으로 출병해서 그곳의 호족들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당시 왕랑(王郞)과 동마군(銅馬軍)이라고 불리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반도들과 고전(苦戰)을 했고, 이어서 서력(西曆) 24년에 왕랑(王郞)을 멸했다. 그리고 또 그런 다음에 그는 동마군(銅馬軍)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으로 해서 하북(河北)도 통일시켰다.

 그 다음해, 유수(劉秀)는 황제 위에 올라서 원호(元號)를 건무(建武)로 했으며, 낙양(洛陽)을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또 그때, 유수(劉秀)의 부하들 중에서는 동마군(銅馬軍)이 많았으므로, 그래서 그는 동마제(銅馬帝)로 불리기도 했다.


 다음 25년, 적미군(赤眉軍)은 서진(西進)해서 관중(關中)을 공략했다. 그러자 전혀 힘을 쓰지 못했던 갱시제(更始帝)군은 적수가 되지를 못했고, 그러자 또 갱시제(更始帝)는 투항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장안(長安)으로 들어갔던 적미군(赤眉軍)은 전에 갱시제(更始帝)군들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며 약탈을 해나갔고, 나중에는 약탈할 물건이 더 이상 없게 되자 동쪽인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 27년, 광무제(光武帝)의 부하 중 등우(鄧禹)가 대패했다. 하지만 또 그때, 등우(鄧禹)와 함께 싸우다 대패했던 풍이(馮異)가 흩어졌던 부하들을 다시 모아서는 재차 싸웠고, 이어서 대승했다. 그러자 광무제(光武帝)는 적미군(赤眉軍)의 귀도(歸途)를 막았고, 그러자 적미군(赤眉軍)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그 후, 상황을 완전히 장악했던 광무제(光武帝)는 차례로 양(梁=河南省)의 유영(劉永), 서(舒=安微省)의 이헌(李憲), 랑사(琅邪=山東省)의 장보(張步) 등, 군웅세력들을 제압했고, 그 다음 36년에는 촉(蜀=巴蜀)의 땅에 성(成=成家)이란 나라를 건국하고 있던 공손술(公孫述)을 멸하고는 전국도 통일했다.

 공손술(公孫述-?~A.D.36)은, 중국 후한(後漢) 때의 무장으로, 字는 자양(子陽)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왕망(王莽)을 섬겼으나, 후에 청두(成都)에서 병사를 일으켜서 파촉(巴蜀)을 평정했고, 이어서 25년에 천자(天子)라고 칭하고 국호를 성가(成家)라고 하였지만, 그러나 뒤에 광무제(光武帝)에 의해서 멸망했다.(후술 또는 생략)

 ※ 그리고 다음은 그
당시의 군웅(群雄)들에 대한 소개이며, 단, 이름만 밝히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邯鄲의 王郎/ 梁의 劉永琅/ 邪의 張歩/ 東海의 董憲/ 楚黎丘의 秦豊/ 漢中의 延岑
 夷陵의 田戎/ 漁陽의 彭寵/ 涿郡의 張豊/ 郾의 尹尊/ 舒의 李憲/ 真定의 劉楊(劉揚)
 淯陽의 鄧奉/ 堵郷의 董訢/ 安定의 盧芳/ 陳倉의 呂鮪/ 河西의 竇融/ 隴西의 隗囂
 巴蜀의 公孫述


 
 ※ 곤양(昆陽)의 싸움(昆陽之戰)은, 중국 신대(新代) 지황(地皇) 4년(西曆 23년 또는 更始1년) 곤양(昆陽=豫州 頴川郡=現 河南省 平頂山市)에서 신군(新軍)과 녹림군(綠林軍) 간에 벌어졌던 싸움이었다.

 서력 8년, 왕망(王莽)은 신(新)을 개국하고 연호(年號)를 초시(初始)로 하며 왕조를 열었지만, 그러나 그때 그가 채용했던 이상주의와 회고(懷古)주의 정책은 당시의 실정과는 맞지가 않아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당시, 반도들 중에서는 적미(赤眉) 군과 녹림(綠林) 군이 가장 강했는데, 그러자 또 당시 남양(南陽)의 호족이었던 유현(劉玄)도 녹림(綠林) 군에 가세했고, 그리고 또한 동족(同族)의 유연(劉縯), 유수(劉秀) 형제도 반기를 들게 되어, 녹림(綠林) 군은 곧 농민호족 연합군이 되었다.

 그 후, 유연(劉縯)은 신군(新軍)을 격파했고, 이어서 유현(劉玄)이 황제에 올랐으며, 그리하여 유연(劉縯)은 대사도(大司徒)에 그리고 유수(劉秀)는 태상편(太常偏)장군이 되었다.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신(新)에서는 지황(地皇) 4년(23년) 3월에 유(劉) 형제 등, 갱시(更始)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과 대사도(大司徒) 왕심(王尋)이 100만이라는 군사를 인솔해서 출진했다.(그러나 실제로는 40만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동년 5월, 왕읍(王邑) 등의 군사들은 영천군(潁川郡)으로 들어갔고, 그러자 장우(莊尤) 등의 잔군(殘軍)들이 그에 합류했다.

 그러자 또 당시 유수(劉秀)가 이끌었던 군사는 불과 수천밖에는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일단 곤양(昆陽)성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 성내(城內)에는 약 8, 9천정도의 군사밖에는 없었다. 그러자 유수(劉秀)는 일단 왕봉(王鳳)과 왕상(王常)에게 성(城)을 맡기고, 자신은 몇 명의 장군 등 13기(騎)만 이끌고서 성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영천군(潁川郡)으로 가서 군사들을 모집했다.

 그런 한편, 신(新)의 군영에서는 장우(莊尤)가 유연(劉縯)을 먼저 토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진언을 냈지만, 그러나 왕읍(王邑) 등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고, 우선 곤양(昆陽)을 포위했다.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왕봉(王鳳) 등이 항복하려 했지만, 그러나 왕읍(王邑)은 그것도 인정하지 않고 더욱 포위망을 굳혔다. 그러자 장우(莊尤)가 다시 상대를 궁서(窮鼠)로 만들지 말 것을 진언했다. 하지만 그 진언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결과 왕봉(王鳳) 등은 신군(新軍)에 필사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게 되어갔다.

 그러던 사이 5월 말에는 유연(劉縯)이 완(宛)을 함락했고, 거기다 6월에는 유수(劉秀)가 수천의 원군들을 모아서 곤양(昆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보병과 기병 1천여 명을 인솔해서 신(新)의 대군이 모여 있던 진영으로부터 불과 4, 5리(里)정도까지 진군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왕읍(王邑)과 왕심(王尋)은 그것을 얕잡아보고 자군(自軍)에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준 다음, 스스로 1만여 군사들을 인솔해서 유수(劉秀) 군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유수(劉秀)의 활약에 힘입어서 왕읍(王邑), 왕심(王尋) 군은 참패했다. 그러자 유수(劉秀)는 결사대(決死隊) 3천 명을 인솔해서 곤양(昆陽)성 서쪽의 강을 건넜다. 그리고는 신(新) 진영의 중핵(中核)으로 돌격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신군(新軍)은 대군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거기서 왕심(王尋)이 전사했다. 그리고 또 그곳에 있던 한군(漢軍)도 유수(劉秀) 군에 호응했기 때문에, 그래서 신군(新軍)은 대혼란을 일으키며 패주했고, 그 사이에 왕읍(王邑)은 도망쳤다. 하지만 또 그때, 기후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아서 그들은 강풍과 호우(豪雨) 속에서 탈출했고, 그러자 신군(新軍)은 완전하게 붕괴했으며, 이어서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또, 그렇게 도망을 갔던 왕읍(王邑)도 가까스로 낙양에 도착했을 때는, 그의 곁에 남아있던 군사는 불과 수천 기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왕망(王莽)은 살해되었고, 신(新)도 그렇게 해서 멸망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신(新)을 멸망시켰던 갱시(更始) 권력 내에서도 금방 주도권쟁탈전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또 갱시제(更始帝)에 의해서 유연(劉縯)이 숙청되었다. 그러자 또 그것을 확인했던 유수(劉秀)는 하북평정(河北平定)이라 칭해지며 그 후로도 스스로 몸을 더욱 낮추는 등, 정권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는 25년에 황제에 즉위했고, 이어서 한(前漢)을 계승했으며, 이후 다시 통일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유수(劉秀)왕조, 즉 광무제(光武帝)왕조로부터 <후한(後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25년


 유수(劉秀=光武帝)가 후한(後漢)王朝를 세우다





<光武帝>

 

 

 

 ※ 설명은 위의 내용으로 대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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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BC33


 왕소군(王昭君)이 동흉노(東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鄯于)에게 강가(降嫁)했다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 경)


 



 흉노(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와 그의 아들 복주누약제단우(復株累若鞮單于-呼韓邪單于 제2閼氏의 子) 시대의 알씨(閼氏). 성(姓)은 왕(王), 휘(諱)는 장(嬙)이었다고 반고(班固)가 한서(漢書)에 기록함.(그러나 정확한지는 알 수 없음) 자(字)는 소군(昭君). 출신은 형주(荊州) 남군(南郡-현재의 湖北省 沙市). 양귀비(楊貴妃), 서시(西施), 초선(貂蟬)과 함께 중국 4대(大) 미녀 중 한명으로 여겨지고 있음.

 ※ 양귀비(楊貴妃-719~756)는,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의 비(妃)였고, 이름은 태진(太眞)이었다. 그리고 춤과 음악에 뛰어났다고 하며, 총명하여 현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안사의 난 때 살해당했다. 또는 자결 등.


 

<양귀비>



 
※ 서시(西施)는 이미 소개되었지만,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인으로, 오나라에 패했던 월나라 왕 구천이 그녀를 부차에게 보냈고, 그러자 그 부차가 그녀의 용모에 빠져 있던 사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
초선(貂蟬)은 가공(架空)의 인물이며, 중국 후한(後漢)의 충신 왕윤(王允)의 양녀였다고 삼국지(三國志)에 나와 있고, 미인계(美人計=연환계)로 유명했다.




 아무튼, 그녀는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시대에 흉노(匈奴)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漢)의 여성을 알씨(閼氏)로 맞이하고 싶다고 청해 오자, 원제(元帝)가 그녀를 선택해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주었고, 그러자 그녀는 그 후 일남(一男)을 생산했다.(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오히려 漢 왕조에서 권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 후,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사망했고, 그러자 그녀는 또 그 흉노(匈奴)의 풍습대로 그 아들이었던 복주누약제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알씨가 되어서 2녀(女)를 생산했다. 그러자 또 그 일은 한족(寒族)의 입장에서는 근친상간(近親相姦)에 필적(匹敵)하는 부도덕(不道德)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의 비극과 함께 민간에 전승(傳承)되었다.

 그리고 또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고 하는데, 그래서 또 소개하면, 원제(元帝)는 처음에 흉노(匈奴)로 보낼 여성을 후궁(後宮) 중에서 물색하다가 그 중에서 제일로 못생긴 궁녀를 보내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원제(元帝)는 당시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던 모연수(毛延壽)란 자에게 시켜서 제일로 못생긴 궁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하지만 또 그때, 다른 궁녀들은 모두 그 모연수(毛延壽)란 자에게 잘 봐달라는 뜻으로 뇌물을 주었는데, 그러나 왕소군(王昭君)만은 그에게 아무런 뇌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에 앙심을 품었던 모연수(毛延壽)는 왕소군(王昭君)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러자 왕소군(王昭君)은 어쩔 수 없이 흉노(匈奴)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그때, 왕소군(王昭君)이 흉노(匈奴)로 떠나기 전에 인사차 원제(元帝)를 보러갔는데, 그런데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그녀와 대면했던 원제(元帝)는 그녀의 미색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결정된 일이었고 그리고 또 흉노(匈奴)와의 관계도 생각해서 원제(元帝)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흉노(匈奴)로 보냈다. 하지만 그 후, 원제(元帝)는 모연수(毛延壽)가 부정한 생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자 격노하고는 그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이미 선술(先述)한 대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죽었고, 그러자 그녀는 그의 아들에게 다시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 왕소군(王昭君)은 격심하게 반발했다고 했지만, 그러나 한(漢)으로부터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고 <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또, 그 서경잡기(西京雜記)에 기록된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이설도 있으며, 그것은 또 당시 가장 중요한 외교대상국이었던 흉노(匈奴)에 일부러 못생긴 여성을 보내려 했다는 것은 일종의 무례(無禮)로, 그래서 아마도 그것은 창작이 아니었겠느냐는 설이 그것이다.(그런 사실을 기록한 것은 西京雜記밖에 없으므로) 하지만 또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는 사실에 관계없이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 후 진대(晋代)의 왕소군사(王昭君辭)와 원대(元代) 마치원<馬致遠-중국 원나라의 극작가. ?1250-?1324. 호는 동리(東籬)>의 잡극(雜劇-중국의 고전연극을 이름) 한궁추(漢宮秋) 등으로 작품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현재, 그녀의 무덤은 내몽고 자치구의 후허하오터 시(呼和浩特市)에 있는데, 진위는 알 수 없으며, 그러나 능묘 주위에는 그녀의 고향 집을 재현한 건물과 정원이 정비되어 있고, 그리고 또 그 내부에는 흉노(匈奴)의 박물관 등이 건립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呼和浩特市>

 8년


 왕망(王莽)이 신왕조(新王朝)를 건립했고, 전한(前漢)이 멸망하다


 

 왕망(王莽-B.C.45에서 A.D.23)

 그는 신조(新朝)의 황제(皇帝)였고, 즉위 전의 작위(爵位)는 안한공(安漢公)이었다. 그리고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황후였던 왕정군(王政君=孝元皇后)의 조카였고, 성제(成帝) 외가의 사촌동생이었다. 그리고 또 왕만(王曼)의 차남(次男)이었으며, 왕우(王宇), 왕획(王獲), 왕안(王安), 왕림(王臨), 왕흥(王興), 왕광(王匡) 등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손(孫-王宇의 子)으로는 왕종(王宗)이 있었고, 딸로는 평제(平帝)의 황후였던 왕씨(王氏)와 왕엽(王曄), 왕첩(王捷) 등이 있었다. 그리고 또 정처(正妻)는 의춘후(宜春侯) 왕함(王咸)의 딸이었으며, 그리고 한서(漢書) 등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이름 중 망(莽) 자는 초(艸 또는 草) 관(冠) 아래 큰 대(大) 자가 아니고, 개 견(犬) 자이다.

 아무튼 당시, 황후의 자리에 올랐던 그의 백모(伯母) 왕정군(王政君)의 연고(緣故)로 백부(伯父)들은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가 고관(高官)의 지위와 함께 유복한 삶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러던 중에 갑자기 그의 부(父)와 형(兄) 왕영(王永)이 차례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그의 집만 제후도 되지 못하고 궁핍해졌다.

 그 후, 왕망(王莽)은 공검(恭儉)하게 처신하면서 패군(沛郡)의 진참(陳參)이란 사람에게서 예경(禮敬)을 배웠고, 그 후도로 더욱 몸을 부지런히 하며 배움에 임해서 점점 더 학문을 넓혔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유생(儒生)과도 같은 마음으로 예를 다해서 자신의 어머니와 형수를 모셨으며, 그리고 또 자신의 조카였던 왕광(王光)을 양자로 삼고는 친자식 이상으로 열심히 양육했다. 그러자 또 그의 아내는 그에 대해서 늘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그 후, 그가 장년(壯年-30~40정도)이 되었을 때, 백부(伯父)였던 대장군 왕봉(王鳳)이 병이 들었다. 그러자 그는 그 왕봉(王鳳)의 병간호를 열심히 했고, 그러자 또 왕봉(王鳳)은 죽을 때 성제(成帝)에게 그를 맡겼다.

 그러자 그 후, 그는 왕상(王商)이나 왕근(王根) 그리고 당시 황태후가 되어 있었던 백모(伯母)의 배경으로 순조롭게 출세의 가도를 달려 나갔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친척이었던 순우장(淳于長)을 실각(失脚)시키고 대사마(大司馬)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그때부터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외척을 몰아내려 했던 애제(哀帝)가 즉위하자 그는 파면되었고, 봉국(封國)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또 그 후에 그를 국정에 복귀시켜야 한다는 탄원이 이어져서 그는 다시 장안(長安)으로 불려갔다.

 영시(永始) 원년(기원전 16년) 그는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고, 이어서 애제(哀帝)가 붕어하자 그 애제(哀帝)의 옥새(玉璽) 지킴이를 맡고 있던 대사마(大司馬) 동현(董賢)으로부터 옥새를 강탈해서 중산왕(中山王) 유간(劉衎=平帝)을 제위에 올렸다.

 그 후, 그는 유학(儒學)과 예언서(豫言書) 등에 근거해서 정책을 폈던 한편,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리고 또 그 와중에 자신의 차남(次男)이었던 왕획(王獲)이 노복(奴僕)을 죽였던 것에 대한 죄를 묻고, 또한 장남(長男)이었던 왕우(王宇) 또한 누구를 모략(謀略) 했던 것으로 해서 둘 다 감옥으로 보내서 함께 자살하게 했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자신의 딸을 평제(平帝)에게 시집보내서 황후가 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자신은 재형(宰衡)과 안한공(安漢公)이 된 후, 평제(平帝)를 독살(毒殺)했다.(당시 14세)

 ※ 재형(宰衡)은, 재상(宰相)을 다르게 부르던 말로, 중국 은(銀)나라의 이윤(伊尹)이 아형(阿衡)이 되었고,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이 태재(太宰)가 되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는 먼 친척이었던 광척후(廣戚侯) 유현(劉顯)의 자(子) 유영(劉嬰)을 황태자의 자리에 올렸고, 스스로는 또 가황제(仮皇帝), 섭황제(攝皇帝)를 자칭하면서 조정의 모든 정무를 장악했다. 그리하여 거섭(居攝) 3년(8년)에 왕망(王莽)은 고조(高祖)의 영(靈)으로부터 선양(禪讓)받았다고 고하고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고, 이어서 신(新)을 건국했다.

 그리하여 또 그것은 역사상 첫 선양(禪讓)이었으며, 또한 찬탈(簒奪)이라 할 것이었지만, 하지만 어쨌든 그때, 태황태후(太皇太后)로서 국새(國璽)를 맡고 있었던 효원황태후(孝元皇太后) 왕정군(王政君)은 그 옥새를 수령하러 왔던 왕망(王莽)의 사자 왕순(王舜=王莽의 従兄弟)을 향해서 옥새를 내던지고는 왕망(王莽)을 몹시 나쁘게 매도(罵倒)했다고 사서(史書)에서는 전하고 있다.

 아무튼 그 후, 왕망(王莽)은 주대(周代)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고 정치를 펴나갔지만, 그러나 현실성이 결여되어서 각종의 정책들은 단기간에 파탄이 났다. 그리고 또한 흉노(匈奴)나 고구려(高句麗) 등 이웃 민족들의 왕호(王號)를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근거해서 모멸적인 명칭으로 개명하려했던 것으로부터 큰 반발을 불렀고(예를 들어서 高句麗를 下句麗로 칭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것을 진압하려 했지만, 그도 실패했다. 그리고 또 전매제(專賣制)의 강화 등도 실패해서 신(新)의 재정은 곧 곤궁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체제를 더 이상 견디지 못했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赤眉의 亂 등), 그 후 유사한 반란들이 속출했다.

 그 후, 왕망(王莽)은 남양군(南陽郡)에 옹립되어 있던 유현(劉玄=更始侯)을 치기 위해서 100만이란 대군을 보냈지만, 그러나 <곤양(昆陽)의 싸움>에서 유현(劉玄) 휘하의 유수(劉秀=光武帝)에게 패했고, 그로 인해 전국(全國)은 곧 군웅들이 할거하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장안(長安)으로 갱시후(更始侯)의 군대가 들이닥쳤으며, 그러자 또 왕망(王莽)은 그 혼란 중에 두오(杜吳)란 자에게 살해당했고, 그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리고 또한 그것으로 신(新)은 일대(一代)에 머물며 멸망했다.

 그 후, 그의 머리는 갱시후(更始侯)의 거성(居城) 앞에 전시되었으며, 그의 몸은 공(功)을 얻으려던 자들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망(王莽)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또한 그 후에 그의 치세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가해졌지만, 그러나 그가 행했던 <황제즉위의례>는 광무제(光武帝)에 의해서 재현된 후, 역대 황제들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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