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연도, 연

사건

 45년


 오환(烏桓), 선비(鮮卑)가 후한(後漢)에 조공(朝貢)했다



 ※ 오환(烏桓)은,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 중국 한(漢)나라 때에 동호족(東胡族) 중, 현재의 내몽골자치구에 존재했던 민족이었으며, 삼국지(三國志) 등에서는 오환(烏丸)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한나라 초기에 흉노(匈奴)에게 쫓겨서 오환산(烏桓山)으로 물러났다가, 후한(後漢) 말 조조(曹操)에게 패하여 쇠퇴하였고, 그 후 점차로 한족(漢族)을 비롯한 다른 여러 민족들과 융합되었다.

 

<내몽골자치구>



 ※ 선비(鮮卑)는, 기원전 1세기에서 6세기, 중국의 북부에 존재했던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으로, 중국의 이민족이었던 오호(五胡) 중, 고대 북아시아에서 살았던 몽골족과 퉁구스족의 피가 섞였던 유목민족이었다.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싱안링(興安嶺)의 동쪽에서 유목생활을 하였으며, 후한(後漢)의 화제(和帝) 때에는 흉노(匈奴)를 대신해서 몽골지방을 차지하였고, 위(魏)나라 때부터 점차로 중국 본토로 들어왔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모용 씨(慕容氏), 우문 씨(宇文氏), 탁발 씨(拓跋氏) 등으로 분열되었으며, 그 중에서 특히 '탁발 씨'는 북위(北魏)를 세우기도 했지만, 그러나 당(唐)과 송(宋) 이후에는 한족(漢族)에 동화되었다.


<동그라미 부분이 鮮卑>

 

 48년


 흉노(匈奴)가 남북으로 분열해서 일축왕비(日逐王比)가 후한(後漢)에 귀순(歸順)했고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가 되었다



 ※ 일축왕비(日逐王比)=해락시축제선우(醢落尸逐鞮單于-?부터 56년)는, 중국 후한(後漢) 시대의 남흉노(南匈奴)의 초대 선우(單于)였고,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의 손자였으며, 오주유약제선우(烏珠留若鞮單于)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성(姓)은 허련제 씨(虛連題氏)였고, 이름은 비(比)였다.

 57년


 왜노국(倭奴國)의 사자가 낙양(洛陽)으로 조공을 왔다
 



 ※ 왜노국(倭奴國=奴国)은, 1세기에서 3세기 전반(前半),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東夷傳)과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나타나는 왜인(倭人)의 나라를 이름이며, 야마토(大和) 時代에 나현(儺縣=나노아가타) 즉, 현재의 福岡市(후쿠오카시) 부근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왜노국(倭奴國)이 후한(後漢)과 외교교섭을 가졌던 것은 아래의 사료(史料)가 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왜노국(倭奴國)의 왕이 후한(後漢)에 조공(朝貢)을 왔다>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사마대국<邪馬臺國(야마타이코쿠)=사마일국(邪馬壹國)>이 위(魏)의 황제에게 사자를 파견했다.

 
사마대국(邪馬臺國)은, 3세기 일본열도에 존재했었다고 여겨지는 나라들 중 하나이며,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서는 <親魏倭王 卑弥呼는 그 나라의 여왕(女王)이며, 약 30개의 나라 중 그 중심이 되는 곳에 살고 있다>라고 했다.

 
친위왜왕(親魏倭王)은, 위(魏)의 황제 조예(曹叡)가 사마대국(邪馬臺國)의 여왕이었던 히미코(卑弥呼)에게 서력(西曆) 238년(239년 설도 있다)에 내려주었던 봉호(封號)를 말하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왜인조(東夷傳倭人條=魏志倭人傳)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히미코(卑彌呼-175년경부터 248년경)는,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등, 중국의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는 왜국(倭國)의 왕(또는 여왕)이었고, 봉호(封號)는 친위왜왕(親魏倭王)이었으며, 후계는 친족이었던 토요(壹興)가 여왕으로 즉위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지(三國志)에서는 <邪馬壹國>이라고 썼고, 후한서(後漢書)에서는 <邪馬臺國>이라고 썼다. 그러므로 사마대국(邪馬台国)이란 통칭은(일본에서) 사마대국(邪馬臺國)의 대(臺) 자(字)를 台 자(字)로 대용한 것이다. 그리고 또 야마대국(耶馬臺國=야마타이코쿠=야바타이코쿠)라고도
쓴다.
그리고 또 그 나라는 야요이시대(弥生時代=彌生時代)였던 1-3세기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여왕이 통치했던 여왕국이었다고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는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나라는 원래 남왕(男王)이 통치를 했었는데, 그러나 나라가 성립(1세기 중반기 무렵부터 2세기 초엽)하고(부족으로 봄) 약 7, 80년 후에, 나라 전체에 장기간에 걸친 소란(騷亂)이 발생했다
(소부족들간의 싸움). 그러자 사마대국(邪馬臺國)도 그 영향을 피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히미코(卑弥呼)라는 여자를 왕으로 공립(共立)시킨 후에야 그 소란은 겨우 진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녀는 자신의 남동생과 함께 통치를 행했는데, 하지만 또 狗奴國(일반적으로 쿠나코쿠라고 읽으며, 당시, 邪馬臺國과는 대립했던 나라)과의 싸움 중에 히미코(卑弥呼)가 죽어버리자(원인불명으로 급사로 추정함) 그의 남동생이 그 자리를 이었지만, 그러나 계속되던 혼란을 억제하지 못해서 다시 토요(壹興)를 여왕에 옹립하자 그 혼란은 수습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나라와 나중의 야마토 왕권(王權)과의 관계는 모호하며, 그 나라의 위치에 관해서도 제설(諸說)이 있다. 그리고 또 일반적으로 읽기로는 <야마타이코쿠>라고 읽지만, 그러나 그에도 제설(諸說)이 있다.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건무중원(建武中元) 2년(57년),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게 왜노국(倭奴國)에서 사신을 보내와서 광무제(光武帝)가 그것을 인정하고 책봉(冊封)되었다는 뜻으로 금인(金印)을 하사했다고 한다.

 

 

<금인의 인면>

 


 그리고 그것은 또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어느 농민이 志賀島(시카노시마)에서 발견했고, 그리하여 그것으로 그 왜노국(倭奴國)이 실재(實在)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발견 당시 상태가 너무 좋았다거나, 발견 장소, 발견자 등, 전체적으로 내용이 너무 허술해서 위조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감정한 결과 진품이란 의견이 大勢라고 했지만 그것은 전부 일본인들의 입장일 뿐이다)

 아무튼, 위의 금인(金印)에는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새겨진 글자에서 왜(倭)가 되어야 할 글자는 위(委)로 되어있으며, 사람 인(人) 변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또한 그렇게 생략법을 사용하는 것을 감필(減筆)이라고 하지만, 그에도 제설이 있고, 그것으로 일본의 억지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리고 또 아래는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열전(東夷列傳) 제75의 내용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 <後漢書 東夷列傳第七十五>

 <해석>

 건무중원(建武中元) 二年(57年)에 倭奴國이 貢物을 받들어서 朝賀(궁중에서 거행되었던 신년하례)했다. 그리고 사신(使人)은 스스로 자신을 大夫라고 칭했으며, 나라는 왜국(倭國)의 제일 남쪽에 있다고 했다. 그러자 광무제(光武帝)는 그 뜻을 받아서 인(印)을 하사했다.

 그 다음, 안제(安帝) 영초(永初) 元年(107年)에 왜국왕(倭國王) 스이쇼우<帥升-야요이시대(彌生時代) 중기에서 후기 사이에 존재했던 왕으로, 소재지는 북 큐슈가 유력하며, 일본역사상 외국 史書에 이름을 남겼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등이 노예(奴隷) 百六十人을 헌상(獻上)하며, 조견(朝見)을 청해왔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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