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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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마이즈루 灣-적색 동그라미 부분이 폭침순난현장>
7.
그리고 또, 선체(船體)의 인양(引揚)에 관해서도 살펴보면, 우선 1950년 2월 10일자 <아사히시문(朝日新聞)>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우선, 반(半)만 인양(引揚) - 마이즈루(舞鶴) 만(灣)에서 침몰했던 채로 5년 이상 경과했던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이이노샐비지(飯野-salvage)에 의해서 인양되게 되었다. 동선(同船)은 원(元) 오오사카상선(大阪商船)이 오키나와항로(沖繩航路)에서 사용했던 우수선(優秀船)으로, 종전(終戰) 후(後) 기뢰(機雷)에 의해서 침몰되었을 때, 선체(船體)가 두 동강났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래서 인양을 해도 엔진을 다시 사용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래서 반(半)은 포기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침몰 후, 세 번에 걸쳤던 조사에서, 선체(船體)의 상부(上部) 역시도 두 개로 분리되었지만, 선저(船底)는 원형(原型)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관부(機關部)도 생각만큼의 손상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어쨌든, 일단 후반부(後半部)만 우선 인양(引揚)하기로 했고, 그것으로 재사용 여부를 확인한 다음, 전반(前半)부를 인양해서, 다시 복원시킬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랬으므로 또 당시, 그리고 앞에서도 이미 언급되었지만, 일본정부는 희생자들의 유체(遺體)나, 사고조사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래서 또 당시, 해병단(海兵團)에 매장되었던 유체(遺體)들도 완전히 내팽개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사고가 있었을 때, 조선인(朝鮮人)들 중에는 배를 타는 것에 트라우마를 느껴서 마이즈루(舞鶴)에 그대로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래서 그들은 일본의 그런 처사(處事)들에 대해서 항의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정부는 그 배를 인양하기 전에, 그런 것들을 우선 처리했어야 했음에도, 너무도 당연하고도 당연했던 그런 일조차 외면하고 말았다는 것이며, 그래서 또 당시, 그와 관련되었던 지원(地元-舞鶴)의 한 신문(京都新聞-昭和二五年三月一四日)은 다음과 같이 보도를 하기도 했다.
<우키시마마루(浮島丸)를 인양(引揚), 마이즈루(舞鶴) 만내(灣內)의 침몰선 - 마이즈루(舞鶴) 만내(灣內) 사바카(佐波賀) 바다에 마스트만 남긴 채로 침몰해있는 원(元) 해군징용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4730톤 大阪商船 소속)는, 종전(終戰) 이래(以來) 5년간 방치되어 있었지만, 올해 오오사카상선(大阪商船)에 반환됨에 따라서, 이이노샐비지(飯野-salvage)의 주도로 13일 오후 1시부터 현장에서 착공식 및 조선인(朝鮮人) 사몰(死沒)자들의 위령제(慰靈祭)가 열렸다. 그리고 사고 당시, 해군 측에서 작은 배(舟艇)를 동원(動員)해서 구조에 만전(萬全)을 기해서 대부분의 인명(人命)을 수용(收用)했으나, 일부의 사몰(死沒)자들은 그 배 안에 남아있었다. 그러자 조선인(朝鮮人)들로부터 고의적인 유기(遺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고, 그리하여 또 조선(朝鮮) 측과 세 번에 걸쳤던 교섭이 있었지만, 그러나 승선인 수(數)의 문제로 해결을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또, 지난 2월 1일에 지원(地元) 조선(朝鮮) 측으로부터 촉뢰(觸雷)의 진상(眞相)과 승선인원의 구명(究明) 그리고 사몰(死沒)자들의 취급에 관한 신청이 들어왔으며, 그런 한편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마이즈루(舞鶴) 기항(寄港)은 연합군의 명령으로, 일본 선박의 항행은 24일 오후 6시부터 금지한다는 조항(條項)에 의해서 마이즈루항(舞鶴港)에 기항(寄港)했다는 확실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이이노샐비지(飯野-salvage)에서는 그 선체(船體)의 인양(引揚) 시(時)에, 특히 정중하게 그 사몰(死沒)자들을 취급할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또, 구(舊) 해군 측에서도 그 배의 복원처리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는 했지만, 그러나 또 그 배가 두 동강이 난 상태에다, 그동안 상당히 손상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인양작업은 꽤 힘들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러나 또 어쨌든, 빠르면 7월 말경에는 인양이 완료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위의 신문(地元・京都新聞)에서 그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에 관해서 보도를 했던 것은 위의 기사가 처음이었지만, 그러나 그 내용 역시도, 마이즈루(舞鶴) 복원잔무처리부(復員殘務處理部)의 주장과 비슷한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러나 지금까지도 일본정부의 그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는 미흡한 편이며, 그리고 또 현지(現地)의 위령제(慰靈祭)에, 그것도 형식적이나마 정부(厚生省) 측이 전문(電文)을 보내왔던 것도, 극히 최근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처음의 인양 후에, 조사 결과 기관(機關)의 파괴상태가 심해서 재사용이 곤란하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그래서 인양은 곧 중지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또, 그 침몰원인에 대한 조사도 더 이상 없었으며, 조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사용>에 관한 조사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바다 속에 남아있는 유체(遺體)들은, 현재까지도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8.
그리고 또, 그 <이이노샐비지(飯野-salvage)>에서 그 후반부(後半部)를 인양했을 때, 유체(遺體)들의 수용(收用)은 완전히 그 부수적인 작업에 불과했던 것이었으며, 그 숫자도 103주(柱)라고 밝히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곧바로 한국전쟁(韓國戰爭-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이 발발했고, 그러자 또 일본은 그 때문에 미군(美軍)특수(特需)로 인해서 호황기(好況期)를 누렸으며, 그 때문에 또 철재(鐵材)의 가격도 단번에 상승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까지 인양해서 이득을 보려고 했던 것이었고, 그래서 또 그때의 사정(事情)을 신문들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기도 했던 것이다.
<종전(終戰) 직후였던 1945년(昭和二十年) 8월 24일에 조선인(朝鮮人) 370명과 함께 마이즈루(舞鶴) 만내(灣內)에서 촉뢰(觸雷), 침몰해서, 그 후 8년간이나 해저에서 잠들어 있었고, 그래서 인양(引揚)이 될 것인지, 어쩔 것이지 계속해서 문제가 되어왔던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現在 國有)가 드디어 매각(賣却)되게 됨에 따라서, 3일 오후 2시부터 킨키재무국(近畿財務局)에서 불하(拂下) 입찰(入札)이 행해졌고, 그 결과 이이노중공업주식회사(飯野重工業株式会社-元飯野産業株式會社)가 2500만 엔(円)에 낙찰(落札)되었으며, 그래서 가까운 시간 안에 동사(同社)에서 인양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입찰(入札)에는 6사(社-山下汽船, 飯野重工, 川崎重工 등)가 참여했지만, 그러나 결국, 그 <이이노해운(飯野海運)>에 낙찰되었고, 그래서 또 앞으로 해저에서 나오게 될 유골(遺骨) 등에 대해서, 조선인(朝鮮人)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大阪新聞-昭和二八年一二月七日付)>
그리하여 그 신문의 보도대로, 재일(在日) 조선인(朝鮮人-韓國人)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그것은 또, 조선인(朝鮮人) 희생자들에 대한 일말(一抹)의 고려(考慮)도 없이 사태(事態)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으며, 거기다 또 당시, 그 배를 타고 있었던 조선인(朝鮮人)들은, 일본정부의 전쟁수행을 위해서 강제로 징용된 후, 억지로 강제노역에 내몰렸던 피해자들이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리고 또 당시, 그 강제연행지(强制連行地)였던 시모키타반도(下北半島)에서도 강제노역 중에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었는데, 그런데 또 전쟁이 끝나자 다시 일본의 사정에 의해서 강제로 다시 송환(送還)의 길에 올랐다가 그렇게 희생되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당연히, 그 유체(遺體)들은 일본이란 나라의 입장에서 후(厚)하게 처리되었어야 옳았지만,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그런 것은 전혀 고려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이익(利益)에만 눈이 멀어서, 그 일 일체(一體)를 민간(民間)기업에 맡긴 후, 그 기업으로 하여금 이윤(利潤)을 추구하는 형태로 처리를 했기 때문에, 그래서 제2차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인양 때, 재일(在日)한국인(韓國人)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또 그 결과, 재일(在日)한국인(韓國人) 요청단(要請團)은 매일같이 마이즈루지방복원잔무처리부(舞鶴地方復員殘務處理部)와 관계(關係)관청(官廳)으로 몰려가서, 그에 대한 대책(對策)을 요구(要求)했던 항의를 계속했고, 그리고 또 <그 대책에 대한 요구>란 것은, 침몰원인의 구명(究明)과 사몰(死沒)자들의 숫자 확인,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報償)과 함께, 그 희생자들에 대한 성심(誠心) 있는 유골(遺骨) 수용(收用)과 그 후의 진심어린 공양(供養)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그런 그들의 요구를 거의 묵살했고, 폭발원인에 대해서도 촉뢰(觸雷)에 의한 것이란 것을 재확인했을 뿐이었으며, 사망자의 확인도 끝났다고 주장했다. 거기다 또, 보상(報償)에 관해서는 남북한(南北韓) 사이의 국교(國交)가 없었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며, 단지 유골(遺骨)의 수용(收容)과 그 후의 정중한 대우에 대해서만 대충 긍정했던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양자(兩者)의 교섭이 아무런 성과도 없던 중에, 인양작업은 강행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 요구(要求)의 중심에 있었던 조선민족해방구원회(朝鮮民族解放救援會)는, 일본의 제(諸) 단체(團體)들과 사람들에게 그런 사정을 호소해서, 그 투쟁(鬪爭)에 참가해줄 것을 부르짖었지만, 그러나 일본인들의 참여율은 저조했으며, 그것은 현재까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또, 그 중에서도 타무라(田村敬男) 씨(氏)는, 1920년대부터 좌익운동가(左翼運動家)로 활동하면서, 교토(京都)에서는 리츠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의 총장(總長-末川博元) 등과 함께 민주운동(民主運動)에 앞장섰던 바 있었고, 조선인문제(朝鮮人問題)에 대해서도 와세다(早稲田)대학의 교수(敎授) 오오야마이쿠오(大山郁夫) 등과 함께 운동을 펼쳤던 노(老) 투사(鬪士)였는데, 그래서 또 그의 말도 들어보면 다음과 같았다.
<(현장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진은 내가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서 유골(遺骨)을 수습(收拾) 했을 때 참가해서 찍은 것인데, 그때 같이 참가했던 조선인(朝鮮人)들과 조선민족해방구원회(朝鮮民族解放救援會)의 사람들은 선내(船內)에 방치되어 있던 유골(遺骨)들과, 그 침몰원인에 대해서 항의를 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응원을 기대했기 때문에, 그래서 나도 인도적(人道的)인 견지(見地)에서, 그리고 또 일본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 복원국(復員局-당시에는 援護局)에 항의를 했다. 그리고는 또 그들과 함께 그 선저(船底)에 남아있을 유체(遺體)들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는 요망서(要望書)를 제출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또 우리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하면서 그들 수십(數十) 명과 함께 원호국마이즈루지부(援護局舞鶴支部) 앞에 앉아서 연좌데모(連坐-demo)를 계속했다. 그렇게 해서 3일간 항의가 이어지자,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던지, 원호국(援護局)에서 그 우키시마마루사몰자명부(浮島丸死沒者名簿)란 것을 들고 나왔다. 그래서 그때, 우리들은 일본정부가 기록했던 사몰(死沒)자들의 수가 524명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또 위의 증언으로, 그 명부(名簿)가 일본정부로부터 어떻게 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지만, 하지만 결국,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일본정부는 그것을 공개할 생각이 그때까지는 없었다고 생각되며, 그리하여 또 그때부터 각 신문들에서도 그런 보도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때, 그러니까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인양(引揚)과 해체(解體)작업에 참가했던 Y 씨(氏)의 증언을 소개한 것이다.
<힘들었던 우키시마마루(浮島丸) 부상해체작업(浮上解体作業) - 유골보존(遺骨保存)과 작업의 통일(統一) - 우리가 그 작업에 임했던 것은 쇼와27년(昭和二十七年-1952년)경이었고, 그때까지 그 작업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 선체(船體)에 잠들어 있을 많은 유체(遺體)들의 문제와, 그에 대한 배상(賠償) 건으로 인해서 많이 힘들었던 때였다. 그리고 또 그 작업은 우선, 그 배를 인양(引揚)한 다음에, 해체(解體)할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또 문제는, 그 사이에 유체(遺體)들의 안치(安置)보존(保存)이라는 큰 숙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 선체(船體)는 위의 그림처럼 두 동강이 난 상태였고, 앞의 마스트와 뒤의 마스트는 약 6도(度) 정도 틀어져 있었다. 그래서 선체(船體)의 상반부(上半部)가 휘어져있었던 상태였는데, 그래서 우선 뱃머리부분과 뒷부분을 따로 인양하기 위해서, 바다바닥에 가라앉은 선저(船底) 부분을 절단(切斷)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작업으로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려고 했을 때, 조선인(朝鮮人)들로부터 거센 항의가 있었고, 그 이유는 또,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할 경우, 유골(遺骨)들이 산산조각날 것이란 주장과 함께, 그것은 유체(遺體)를 더욱 모독(冒瀆)하는 것이란 주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육지에서처럼 한번에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로 먼저 틀을 만든 다음, 거기다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서, 천천히 분리하는 방법으로 절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배 안에 적재되어있었던 엄청난 양의 자갈을 제거하는 것과, 오랜 기간 방치되어있었던 유골(遺骨)들을 수집(收集)하는 작업이었지만, 그러나 어쨌든, 일단 배를 인양해서 조선소(造船所)에서 물을 뺀 다음, 유골(遺骨)들 하나하나를 씻어서 상자에 담았고, 그리고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에 안치했다. 그리고 그 수는 대충 370체위(體位)였으며, 우리는 그 희생자들을 마음을 다해서 위로했다>
<舞鶴灣>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