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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가(鄭家)가 떠난 밤>


 1.

 그날 밤은 정말 요상한 밤이었다.
 이상하게도 자꾸 몸이 깔아져서는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도 잠이 마구 쏟아졌으며, 그래서 나는 비몽사몽간에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못한 채 그렇게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슨 독한 약이라도 먹고 취해서는 널브러져 있는 상태와도 흡사했는데, 그래서 나는 그때 나의 몸이면서도 무엇에 의해 제압을 당한 것처럼 꼼짝도 못하고 누워서는 누군가 바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마음대로 되질 않아 그것을 확인해보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어도 잘 되지 않았으며, 그 들어온 사람이 방문을 열었을 때야, 그리고 "김 형, 나요!"하고 말을 했을 때야 겨우 비비적거리듯 하며 일어나 불을 켜고는 "아, 정 형(鄭兄). 근데, 이 밤에 어쩐 일로?"라고 말을 했을 정도였던 것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날은 나의 심신이 허해있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 생각해봐도 그 일은 나에게서 아주 특별했던 경험이었고, 그것은 또 마치 꼭 누군가가, 아니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나의 주위에서 서성거리며 기회를 보고 있다, 그날 밤 <그 정가(鄭家) 사건>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 그런 상태로 나를 유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그 일은 나에게서 정말로 희한했던 일이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믿을 수 없는 일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당시에 나는 문을 잠그지 않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또 딱히 무엇을 도둑맞을 것도 없었던 데다, 임시 거처였기 때문에, 그래서 변변한 세간 하나도 없다시피 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그 동네가 아주 조그만 동네라 서로 다 아는 처지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고, 그래서였던지 그 동네의 친구들도 수시로 또는 자기들 편할 때 아무렇게나 나의 거처로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정가(鄭家)>도 그렇게 찾아왔던 모양이었지만, 그러나 그날은 시간이 좀 그랬다. 언뜻 보아 새벽 2시는 넘어있었던 것이다.

 "자고 있었소?"

 정가(鄭家)는 내가 겨우 자기를 알아보고 아는 척을 하자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부엌 겸 입구인 좁은 곳에 서서 이렇게 말을 하곤 나를 노려보듯 하고 있었다.

 "아, 예. 이 시간에야 누구나 자는 것 아뇨?"
 "예..."

 정가(鄭家)는 그때 술을 제법 마신 듯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있어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고 말 것 같은 사람처럼 보이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내 눈으로 선뜻 들어왔던 것은 그의 손에 들린 칼이었다.

 "아니, 이 밤에 무슨 칼이요?"

 내가 그 칼을 보고는 깜짝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면서 이렇게 묻자
 그는 그때서야 손에 들었던 칼을 급히 수습하고는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얼버무리듯이 말을 했다.

 "아, 그냥, 뭐 좀 할 게 있어서."

 '그러나 이 야밤에 칼을 들고 해야 할 일이란 것이 그에게서 도대체 무엇일까?'

 내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그 급히 수습한 칼에 대한 느낌이 선명해 이런 의문이 들고 있었지만, 하지만 나는 그때 그런 것을 그에게 물어볼 마음은 없었다. 그것은 또 아직 다 깨지 않은 나의 정신이 다시 자리로 쓰러지기를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리고 또 그런 저런 이유로, 그리고 또 그와 그런 상태로 그러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그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록 나의 심신이 그때는 그래서 그런 마음이 들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적어도 내 집을 찾아온 손님이었다. 그리고 손님의 예를 갖출 만큼은 아니고, 서로 간에 부담 없이 오가던 처지에 그런 세속적인 것이라곤 내세울 필요도 없는 사이였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내 집을 찾아오는 손님 누구에게라도 지켜야 할 도리 같은 것은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던 중이었고, 그도 그것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나는 나름대로 성의 같은 것을 보여야 했는데, 그리고 또 어쩌면 그는 내가 모르는 무슨 긴한 일로 그런 어려운 걸음을 그 시간에 했을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그의 입장을 고려해서 그를 맞아주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도 느껴졌기 때문에, 무언가 그가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 주제 같은 것으로 내가 먼저 이야기를 내며 그를 편안하게 해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뱉었던 말이 "예, 근데 이 시간에 우리 집엔 어쩐 일로?"라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말을 내놓고 보니 어쩌면 그에게는 경계하는 말로 들렸을 것 같아 금방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나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정색을 하고는 "김 형! 혹시 돈 좀 가진 것 있소?"하고 되물어왔다.

 다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처음과 달리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지만, 그러나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 여전히 다급하다는 느낌이라든가 무언가 쫓기는 느낌 같은 거, 혹은 살기(殺氣) 같은 것이 그의 표정이나 말에 묻어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가 있었고, 더불어 긴장이 되기 시작했던 나는 가능하면 그를 편하게 해주려고 평상시 같이 그를 대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 돈 말이요? 글쎄, 나도 아직 월급을 타지 못해서. 그리고 내일 모래가 월급이니 나도 돈 떨어질 때가 됐죠?"

 그러자 정가(鄭家)는 나의 말을 듣고 약간 실망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상황을 뻔히 알고 있으니 나의 말에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돌려서 한숨을 한번 쉬었다. 그리고는 또 마치 체념한 사람처럼 조금씩 긴장을 푸는 듯도 보였는데, 하지만 그는 이어서 "그렇죠. 그리고 내가 김 형에게는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건데." 하고 말을 하며 고개를 약간 숙이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던 것이다. 그러자 또 내가 이렇게 말을 했다.

 "아, 무슨 소리요? 우리 사이가 어디 그렇습니까?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가진 돈이 하나도 없어요!"

 나의 말이 끝나자 정가(鄭家)는, 이번에는 방 안에 누가 있는가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상반신을 숙이면서 머리를 쑥 들이밀더니 방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는 방 한구석에 놓아두었던 소형녹음기를 보더니 또 이렇게 말을 했다.

 "김 형! 미안한데, 저 녹음기 한 며칠만 빌려줄 수 없겠소?"
 "아, 그러시오! 근데, 녹음기는 왜?!"
 "아, 내가 이번에 영어 회화 테이프를 한 개 구했는데, 그것을 좀 들어보려고."
 "아,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내가 그의 말에 선뜻 응하며 방 한구석에 놓아두었던 소형녹음기를 그에게 건네주자
 그는 갑자기 눈 주위가 더욱 붉어지는 듯 했다. 그리고는 또 이렇게 말을 했다.

 "김 형, 정말 고맙소. 이 은혜는 내 죽어도 잊지 않겠소."
 "네? 그깟 것 가지고 은혜는 무슨! 아무튼, 공부나 열심히 절 하세요!"

 내가 평소와 같이 그를 경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로 이렇게 말을 하자, 그는 간단한 목례만 하고는 급한지 그 녹음기를 들고 바람처럼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정말이지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그리고 내가 참고 있었던 한숨을 내쉬었던 것도 바로 그와 동시의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 와중에도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으로 걱정이 되고 있던 나였고, 그리고 그것으로 그날 밤의 특별했던 나의 경험도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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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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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마이즈루 灣-적색 동그라미 부분이 폭침순난현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키시마마루사건약년표(浮島丸事件略年表)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하며, 그에 이 글을 읽으신 분에게 도움이 되셨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잊혀있었던 또는 관심 밖에 있었던 그 사건에 대해서, 앞으로도 더욱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그럼,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대단히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리면서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을 마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건(事件)

1937

3

15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진수(進水-大阪商船所屬)

1941

9

5

 우키시마마루(浮島丸) 해군(海軍)에 징용(徵用)됨

1945

6

30

 하나오카(花岡) 철산(鐵山)사건 발생.노동력부족으로 하나오카(花岡) 철산(鐵山)에 투입되었던 중국인들이 가혹한 노동에 항의, 봉기(蜂起)했던 사건.

 

8

15

 종전(終戰)

 

 

19

 오오미나토경비부(大湊警備府)가 우키시마마루(が浮島丸)에 출항명령을 내림

 

 

22

 아오모리현(靑森縣) 오오미나토항출항(大湊港出港)

 

 

24

 교토부(京都府) 마이즈루(舞鶴) 만(灣)에서 폭침(爆沈)됨

 

9

16

 마이즈루(舞鶴)에서 조선(朝鮮)으로의 귀국(歸國) 제1편(便) 운젠마루(雲仙丸) 출항.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생존자들 약 900명은 특별열차로 야마구치현(山口縣)의 센자키항(仙崎港)으로 가서, 그곳에서 부산(釜山)항으로 출항함. 그리고 약 2000명 이상의 생존자들은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일본에 잔류(殘留)함.

 

 

18

 부선일보(釜山日報)에서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이 처음으로 보도됨.

1950

3

13

 제1차 인양(引揚), 후반부(後半部)

1954

1

 

 제2차 인양, 전반부(前半部)

 

4

14

 제1회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순난자추도위령제(殉難者追悼慰靈祭)가 마이즈루(舞鶴) 동(東) 공회당(公會堂)에서 열림. 주최(主催)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순난자추도위령제실행위원회(殉難者追悼慰靈祭實行委員會)

1964

3

5

 일조협회(日-朝協會)마이즈루지부결성총회(舞鶴支部結成總會)가 열림, 그리고 이 해부터 노다미키오(野田幹夫) 씨(氏)와 스나가야스오(須永安郞) 씨(氏)가 중심이 되어서 추도(追悼)사업을 병행했으며, 그리고 8월 24일부터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別院. 현재의 至德寺)의 법요(法要)에 참가했고, 빠지는 해에는 추도집회를 개최함.

1965

6

22

 한일기본조약조인(韓日基本條約調印)

 

8

24

 우키시마마루순난(浮島丸殉難) 20주년 추도법요(20周年追悼法要-東公會堂)가 열림.

1970

8

24

 우키시마마루순난(浮島丸殉雛) 25주년 추도위령제가 열림.<마이즈루동노동(東勞動)세틀먼트(settlement)>

1975

7

28

 우키시마마루순난자위령비건립(浮島丸殉難者慰靈碑建立)을 위한 제1회 실행위원회(實行委員會)가 열림.

 

8

24

 우키시마마루순난(浮島丸殉難) 30주년 추도식(舞鶴東勞動세틀먼트)이 열림.

1977

8

13

 NHK에서 다큐멘터리 <폭침(爆沈)>을 방송함.

1978

8

24

 우키시마마루순난추도(浮島丸殉難追悼)의 비(碑) 제막식(除幕式)이 열림. 그 추도(追悼)의 비(碑)는 우키시마마루순난자추도(浮島丸殉難者追悼)의 비(碑) 건립실행위원회(建立實行委員會) 회장(會長-佐谷靖 舞鶴市長)이 건립했으며, 이 해부터 추도집회는 우키시마마루순난자추도실행위원회(浮島丸殉難者追悼實行委員會)가 주최함.

1984

5

15

 김찬정(金贊汀) 씨(氏)가 <우키시마마루(浮島丸) 부산항(釜山港)으로 가지 못하다>를 출판함.

1989

8

24

 추도실행위에서 <우키시마마루의 기록(記錄)>을 출판함.

1992

8

25

 우키시마마루의 생존자와 유족들 약 50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사죄(謝罪)와 손해배상(損害賠償)을 청구하는 소송을 교토지재(京都地裁)에 제소(提訴)함.(第一次提訴)

1993

3

22

 <헤이안천도(平安遷都) 1200년 영화를 제작하는 회(會)>가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을 제재(題材)로 하는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함.

 

8

23

 유족(遺族) 27명이 교토지재(京都地裁)에 제2차 제소(提訴)를 함.

 

11

5

 영화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제작협력마이즈루회(製作協力舞鶴會) 발족(發足).

1994

8

23

 유족(遺族) 5명이 교토지재(京都地裁)에 제3차 제소함.

1995

5

24~28

 마이즈루로케(舞鶴-location)

 

8

26~27

 영화 <에이지안블루(ASIAN BLUE-우키시마마루(浮島丸) 사건> 마이즈루(舞鶴) 상영회(上映會)가 열렸고, 7회 상영에 약 3600명 정도가 관람함.

1996

3

26

 일본공산당참의원의원(日本共産黨參議院議員) 니시야마토키코(西山登紀子) 씨(氏)가 참의원후생위원회(參議院厚生委員會)에서,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에 대해서 질문함.

 

5

10

 <우키시마마루순난자(浮島丸殉難者)를 추도하는 회(會)> 개조(改組). 그 결과, 회장에 노다(野田幹夫) 씨(氏)가 결정되었고, 사무국장(事務局長)에 스나가(須永安郞) 씨(氏)가 선출(選出)됨.

 

6

23

 우키시마마루통신(浮島丸通信)이 창간(創刊)됨.

 

8

24

 추도집회에 후생대신(厚生大臣)으로부터의 메시지가 처음으로 옴.

1997

8

25~26

 아오모리현(靑森縣)을 방문해서 <우키시마마루시모키타회(浮島丸下北會)와 교류를 가짐.

1998

8

23

 우키시마마루순난자추도(浮島丸殉難者追悼)의 비(碑) 건립 20주년 기념사업(記念事業)의 일환으로 링고좌(りんご座-사과나무극장)에서 <1998년 여름, 해반(海畔)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군상(群像)들의 이야기>를 공연함. 그리고 심포지엄(symposium-토론회)은 <지금,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을 생각한다>

1999

11

 

 추도공원(追悼公園)의 설명판(說明版)에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짐.

2000

4

 

 추도공원의 설명판의 내용 중 <식민지지배(植民地支配)>라는 글자가 삭제됨.

2001

8

 

 영화 <에이지안블루-우키시마마루사건((エイジアン・ブルー浮島丸サコン)>이 한국에서 정식으로 수입허가가 났고, 서울에서 시사회(試寫會)가 열림. 그리고 서울시의 창천교회(滄川敎會)에서 약 500명이 감상함. 그 후, 서울, 부산, 광주 등에서 상영회를 계속함.

 

8

23

 교토지재(京都地裁)가 우키시마마루소송(浮島丸訴訟)을 판결(判決)함. 그 결과, 일본에 배상명령을 내렸지만, 사죄청구는 각하(却下)함.

2002

4

24~28

 한국(韓國) 광주(光州)시를 방문해서, 광주시민연대(光州市民連帶)와 교류함.

 

8

24

 광주시민연대전대표(光州市民連帶前代表)와 정책국장(政策局長)이 추도집회에 참가함.

2003

5

30

 우키시마마루소송(浮島丸訴訟)을 오오사카고재(大阪高裁)가 판결함. 그 결과, 원고패소(原告敗訴)함.

 

8

24

 추도집회에 광주시민이 참가함. 마이즈루시장(舞鶴市長)도 처음으로 참가함.

2004

5

 

 한국광주시를 방문해서, 광주시민연대와 교류함.

 

8

23

 우키시마마루순난(浮島丸殉難) 58주년을 맞이해서, 광주시에서 <"얼쑤"공연- 한국궁정(宮廷)무용전통예능의 모임>을 개최함. 마이즈루시민(舞鶴市民)들과 광주시민들 간의 시민(市民)교류회를 개최함.

 

11

30

 우키시마마루소송에서, 최고재판소가 오오사카고재판결(大阪高裁判決)을 지지(支持)했던 원고(原告)의 상고(上告)를 기각(棄却)함. 그 결과, 원고패소가 확정(確定)됨.

2005

3

14

 중국의 북경대학(北京大學)에서 <에이지안블루>가 상연됨. 이어서 스나가(須永安郞) 씨(氏)가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과 추도사업>이란 제목으로 강연함.

 

8

24

 우키시마마루순난(浮島丸殉難) 60주년 기획(企劃)으로 <동아시아국제심포지엄-우키시마마루사건: 동아시아평화를 위한 조건을 생각한다, 동아시아 시민교류와 문화를 말한다>를 개최함. 주(駐) 오오사카대한민국총영사관(大阪大韓民國總領事館) 김강수(金康壽) 영사(領事)와, 정화진(鄭華秦) 총영사로부터 감사장(感謝狀)을 받음.

 

 

 


 이하, 생략

 

 

 











 

 

 




<舞鶴灣>

 

 

 

 

 

 

 

 

 

 

 

 

 

 

 <浮島丸事件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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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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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마이즈루 灣-적색 동그라미 부분이 폭침순난현장>

 

 

 7.

 그리고 또, 선체(船體)의 인양(引揚)에 관해서도 살펴보면, 우선 1950년 2월 10일자 <아사히시문(朝日新聞)>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우선, 반(半)만 인양(引揚) - 마이즈루(舞鶴) 만(灣)에서 침몰했던 채로 5년 이상 경과했던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이이노샐비지(飯野-salvage)에 의해서 인양되게 되었다. 동선(同船)은 원(元) 오오사카상선(大阪商船)이 오키나와항로(沖繩航路)에서 사용했던 우수선(優秀船)으로, 종전(終戰) 후(後) 기뢰(機雷)에 의해서 침몰되었을 때, 선체(船體)가 두 동강났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래서 인양을 해도 엔진을 다시 사용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래서 반(半)은 포기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침몰 후, 세 번에 걸쳤던 조사에서, 선체(船體)의 상부(上部) 역시도 두 개로 분리되었지만, 선저(船底)는 원형(原型)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관부(機關部)도 생각만큼의 손상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어쨌든, 일단 후반부(後半部)만 우선 인양(引揚)하기로 했고, 그것으로 재사용 여부를 확인한 다음, 전반(前半)부를 인양해서, 다시 복원시킬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랬으므로 또 당시, 그리고 앞에서도 이미 언급되었지만, 일본정부는 희생자들의 유체(遺體)나, 사고조사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래서 또 당시, 해병단(海兵團)에 매장되었던 유체(遺體)들도 완전히 내팽개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사고가 있었을 때, 조선인(朝鮮人)들 중에는 배를 타는 것에 트라우마를 느껴서 마이즈루(舞鶴)에 그대로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래서 그들은 일본의 그런 처사(處事)들에 대해서 항의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정부는 그 배를 인양하기 전에, 그런 것들을 우선 처리했어야 했음에도, 너무도 당연하고도 당연했던 그런 일조차 외면하고 말았다는 것이며, 그래서 또 당시, 그와 관련되었던 지원(地元-舞鶴)의 한 신문(京都新聞-昭和二五年三月一四日)은 다음과 같이 보도를 하기도 했다.

 <우키시마마루(浮島丸)를 인양(引揚), 마이즈루(舞鶴) 만내(灣內)의 침몰선 - 마이즈루(舞鶴) 만내(灣內) 사바카(佐波賀) 바다에 마스트만 남긴 채로 침몰해있는 원(元) 해군징용선 우키시마마루(浮島丸-4730톤 大阪商船 소속)는, 종전(終戰) 이래(以來) 5년간 방치되어 있었지만, 올해 오오사카상선(大阪商船)에 반환됨에 따라서, 이이노샐비지(飯野-salvage)의 주도로 13일 오후 1시부터 현장에서 착공식 및 조선인(朝鮮人) 사몰(死沒)자들의 위령제(慰靈祭)가 열렸다. 그리고 사고 당시, 해군 측에서 작은 배(舟艇)를 동원(動員)해서 구조에 만전(萬全)을 기해서 대부분의 인명(人命)을 수용(收用)했으나, 일부의 사몰(死沒)자들은 그 배 안에 남아있었다. 그러자 조선인(朝鮮人)들로부터 고의적인 유기(遺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고, 그리하여 또 조선(朝鮮) 측과 세 번에 걸쳤던 교섭이 있었지만, 그러나 승선인 수(數)의 문제로 해결을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또, 지난 2월 1일에 지원(地元) 조선(朝鮮) 측으로부터 촉뢰(觸雷)의 진상(眞相)과 승선인원의 구명(究明) 그리고 사몰(死沒)자들의 취급에 관한 신청이 들어왔으며, 그런 한편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마이즈루(舞鶴) 기항(寄港)은 연합군의 명령으로, 일본 선박의 항행은 24일 오후 6시부터 금지한다는 조항(條項)에 의해서 마이즈루항(舞鶴港)에 기항(寄港)했다는 확실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이이노샐비지(飯野-salvage)에서는 그 선체(船體)의 인양(引揚) 시(時)에, 특히 정중하게 그 사몰(死沒)자들을 취급할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또, 구(舊) 해군 측에서도 그 배의 복원처리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는 했지만, 그러나 또 그 배가 두 동강이 난 상태에다, 그동안 상당히 손상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인양작업은 꽤 힘들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러나 또 어쨌든, 빠르면 7월 말경에는 인양이 완료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위의 신문(地元・京都新聞)에서 그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에 관해서 보도를 했던 것은 위의 기사가 처음이었지만, 그러나 그 내용 역시도, 마이즈루(舞鶴) 복원잔무처리부(復員殘務處理部)의 주장과 비슷한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러나 지금까지도 일본정부의 그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는 미흡한 편이며, 그리고 또 현지(現地)의 위령제(慰靈祭)에, 그것도 형식적이나마 정부(厚生省) 측이 전문(電文)을 보내왔던 것도, 극히 최근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처음의 인양 후에, 조사 결과 기관(機關)의 파괴상태가 심해서 재사용이 곤란하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그래서 인양은 곧 중지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또, 그 침몰원인에 대한 조사도 더 이상 없었으며, 조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사용>에 관한 조사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바다 속에 남아있는 유체(遺體)들은, 현재까지도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8.

 그리고 또, 그 <이이노샐비지(飯野-salvage)>에서 그 후반부(後半部)를 인양했을 때, 유체(遺體)들의 수용(收用)은 완전히 그 부수적인 작업에 불과했던 것이었으며, 그 숫자도 103주(柱)라고 밝히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곧바로 한국전쟁(韓國戰爭-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이 발발했고, 그러자 또 일본은 그 때문에 미군(美軍)특수(特需)로 인해서 호황기(好況期)를 누렸으며, 그 때문에 또 철재(鐵材)의 가격도 단번에 상승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까지 인양해서 이득을 보려고 했던 것이었고, 그래서 또 그때의 사정(事情)을 신문들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기도 했던 것이다.

 <종전(終戰) 직후였던 1945년(昭和二十年) 8월 24일에 조선인(朝鮮人) 370명과 함께 마이즈루(舞鶴) 만내(灣內)에서 촉뢰(觸雷), 침몰해서, 그 후 8년간이나 해저에서 잠들어 있었고, 그래서 인양(引揚)이 될 것인지, 어쩔 것이지 계속해서 문제가 되어왔던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現在 國有)가 드디어 매각(賣却)되게 됨에 따라서, 3일 오후 2시부터 킨키재무국(近畿財務局)에서 불하(拂下) 입찰(入札)이 행해졌고, 그 결과 이이노중공업주식회사(飯野重工業株式会社-元飯野産業株式會社)가 2500만 엔(円)에 낙찰(落札)되었으며, 그래서 가까운 시간 안에 동사(同社)에서 인양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입찰(入札)에는 6사(社-山下汽船, 飯野重工, 川崎重工 등)가 참여했지만, 그러나 결국, 그 <이이노해운(飯野海運)>에 낙찰되었고, 그래서 또 앞으로 해저에서 나오게 될 유골(遺骨) 등에 대해서, 조선인(朝鮮人)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大阪新聞-昭和二八年一二月七日付)>

 그리하여 그 신문의 보도대로, 재일(在日) 조선인(朝鮮人-韓國人)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그것은 또, 조선인(朝鮮人) 희생자들에 대한 일말(一抹)의 고려(考慮)도 없이 사태(事態)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으며, 거기다 또 당시, 그 배를 타고 있었던 조선인(朝鮮人)들은, 일본정부의 전쟁수행을 위해서 강제로 징용된 후, 억지로 강제노역에 내몰렸던 피해자들이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리고 또 당시, 그 강제연행지(强制連行地)였던 시모키타반도(下北半島)에서도 강제노역 중에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었는데, 그런데 또 전쟁이 끝나자 다시 일본의 사정에 의해서 강제로 다시 송환(送還)의 길에 올랐다가 그렇게 희생되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당연히, 그 유체(遺體)들은 일본이란 나라의 입장에서 후(厚)하게 처리되었어야 옳았지만,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그런 것은 전혀 고려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이익(利益)에만 눈이 멀어서, 그 일 일체(一體)를 민간(民間)기업에 맡긴 후, 그 기업으로 하여금 이윤(利潤)을 추구하는 형태로 처리를 했기 때문에, 그래서 제2차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인양 때, 재일(在日)한국인(韓國人)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또 그 결과, 재일(在日)한국인(韓國人) 요청단(要請團)은 매일같이 마이즈루지방복원잔무처리부(舞鶴地方復員殘務處理部)와 관계(關係)관청(官廳)으로 몰려가서, 그에 대한 대책(對策)을 요구(要求)했던 항의를 계속했고, 그리고 또 <그 대책에 대한 요구>란 것은, 침몰원인의 구명(究明)과 사몰(死沒)자들의 숫자 확인,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報償)과 함께, 그 희생자들에 대한 성심(誠心) 있는 유골(遺骨) 수용(收用)과 그 후의 진심어린 공양(供養)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그런 그들의 요구를 거의 묵살했고, 폭발원인에 대해서도 촉뢰(觸雷)에 의한 것이란 것을 재확인했을 뿐이었으며, 사망자의 확인도 끝났다고 주장했다. 거기다 또, 보상(報償)에 관해서는 남북한(南北韓) 사이의 국교(國交)가 없었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며, 단지 유골(遺骨)의 수용(收容)과 그 후의 정중한 대우에 대해서만 대충 긍정했던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양자(兩者)의 교섭이 아무런 성과도 없던 중에, 인양작업은 강행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 요구(要求)의 중심에 있었던 조선민족해방구원회(朝鮮民族解放救援會)는, 일본의 제(諸) 단체(團體)들과 사람들에게 그런 사정을 호소해서, 그 투쟁(鬪爭)에 참가해줄 것을 부르짖었지만, 그러나 일본인들의 참여율은 저조했으며, 그것은 현재까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또, 그 중에서도 타무라(田村敬男) 씨(氏)는, 1920년대부터 좌익운동가(左翼運動家)로 활동하면서, 교토(京都)에서는 리츠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의 총장(總長-末川博元) 등과 함께 민주운동(民主運動)에 앞장섰던 바 있었고, 조선인문제(朝鮮人問題)에 대해서도 와세다(早稲田)대학의 교수(敎授) 오오야마이쿠오(大山郁夫) 등과 함께 운동을 펼쳤던 노(老) 투사(鬪士)였는데, 그래서 또 그의 말도 들어보면 다음과 같았다.

 <(현장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진은 내가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서 유골(遺骨)을 수습(收拾) 했을 때 참가해서 찍은 것인데, 그때 같이 참가했던 조선인(朝鮮人)들과 조선민족해방구원회(朝鮮民族解放救援會)의 사람들은 선내(船內)에 방치되어 있던 유골(遺骨)들과, 그 침몰원인에 대해서 항의를 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응원을 기대했기 때문에, 그래서 나도 인도적(人道的)인 견지(見地)에서, 그리고 또 일본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 복원국(復員局-당시에는 援護局)에 항의를 했다. 그리고는 또 그들과 함께 그 선저(船底)에 남아있을 유체(遺體)들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는 요망서(要望書)를 제출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또 우리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하면서 그들 수십(數十) 명과 함께 원호국마이즈루지부(援護局舞鶴支部) 앞에 앉아서 연좌데모(連坐-demo)를 계속했다. 그렇게 해서 3일간 항의가 이어지자,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던지, 원호국(援護局)에서 그 우키시마마루사몰자명부(浮島丸死沒者名簿)란 것을 들고 나왔다. 그래서 그때, 우리들은 일본정부가 기록했던 사몰(死沒)자들의 수가 524명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또 위의 증언으로, 그 명부(名簿)가 일본정부로부터 어떻게 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지만, 하지만 결국,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일본정부는 그것을 공개할 생각이 그때까지는 없었다고 생각되며, 그리하여 또 그때부터 각 신문들에서도 그런 보도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때, 그러니까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인양(引揚)과 해체(解體)작업에 참가했던 Y 씨(氏)의 증언을 소개한 것이다.

 

 

 

 


 <힘들었던 우키시마마루(浮島丸) 부상해체작업(浮上解体作業) - 유골보존(遺骨保存)과 작업의 통일(統一) - 우리가 그 작업에 임했던 것은 쇼와27년(昭和二十七年-1952년)경이었고, 그때까지 그 작업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 선체(船體)에 잠들어 있을 많은 유체(遺體)들의 문제와, 그에 대한 배상(賠償) 건으로 인해서 많이 힘들었던 때였다. 그리고 또 그 작업은 우선, 그 배를 인양(引揚)한 다음에, 해체(解體)할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또 문제는, 그 사이에 유체(遺體)들의 안치(安置)보존(保存)이라는 큰 숙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 선체(船體)는 위의 그림처럼 두 동강이 난 상태였고, 앞의 마스트와 뒤의 마스트는 약 6도(度) 정도 틀어져 있었다. 그래서 선체(船體)의 상반부(上半部)가 휘어져있었던 상태였는데, 그래서 우선 뱃머리부분과 뒷부분을 따로 인양하기 위해서, 바다바닥에 가라앉은 선저(船底) 부분을 절단(切斷)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작업으로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려고 했을 때, 조선인(朝鮮人)들로부터 거센 항의가 있었고, 그 이유는 또,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할 경우, 유골(遺骨)들이 산산조각날 것이란 주장과 함께, 그것은 유체(遺體)를 더욱 모독(冒瀆)하는 것이란 주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육지에서처럼 한번에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로 먼저 틀을 만든 다음, 거기다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서, 천천히 분리하는 방법으로 절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배 안에 적재되어있었던 엄청난 양의 자갈을 제거하는 것과, 오랜 기간 방치되어있었던 유골(遺骨)들을 수집(收集)하는 작업이었지만, 그러나 어쨌든, 일단 배를 인양해서 조선소(造船所)에서 물을 뺀 다음, 유골(遺骨)들 하나하나를 씻어서 상자에 담았고, 그리고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에 안치했다. 그리고 그 수는 대충 370체위(體位)였으며, 우리는 그 희생자들을 마음을 다해서 위로했다>

 

 

 

 

 

 

 

 

 

 

 

 

 


<舞鶴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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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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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마이즈루 灣-적색 동그라미 부분이 폭침순난현장>

 


 6 계속...


 그리고 또, 오오사카(大阪)의 국제신문(國際新聞)에서는

 <우키시마마루(浮島九)는 8월 22일에 오오미나토항(大湊港)을 출항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긴급(緊急)으로 21일에 출항한다고 예고되었고, 거기다 승선(乘船) 자들에게 귀국(歸國)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선내(船內)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 하루꼬박 다이너마이트와 총포(銃砲)류를 선저(船底)에 함께 적재했다...(一九五四-昭和29-年十月九日付)>

 라고 했고, 그리고 또, 조선신보(朝鮮新報)에서는

 <우키시마마루(浮島九)에는 일본해군의 헌병(憲兵)들과 장교들도 함께 승선했다. 그리고 오오미나토(大湊)를 출항하고 얼마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부산(釜山)에 도착하게 되면,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없고, 배도 몰수될 것이라고 하면서, 처음으로 행방(行方)을 분명히 했다. 그런 후에 그들은 배 안에서 기밀회의를 연거푸 열었으며, 그런 다음, 배 안에 적재되어 있었던 많은 양의 모포(毛布)와 의류(衣類), 식료(食料) 등을 바다에 버렸다. 그리고 8월 24일, 우키시마마루(浮島九)는 갑가지 방향을 바꾸었고, 그리고는 "물을 싣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마루즈루(舞鶴)로 향했다. 그런 다음, 그날 오후 5시 20분경에 우키시마마루(浮島九)는 갑자기 폭발, 침몰했다...>

 라는 기사를 냈다.

 그리고 또, 오오사카(大阪) 시(市) 서구(西區) 소재, 국제신문사(國際新聞社-現 大阪夕刊)의 한 카메라맨이, 10월에 폐품(廢品) 또는 철제(鐵製)의 수거(收去) 목적으로 우키시마마루(浮島九)를 해체하던 작업에 참여해서 선저(船底) 촬영에 성공했고, 그래서 또 그때 찍었던 두 장의 사진을 신문에 실으면서 해설을 덧붙였는데, 그래서 또 그 1954년 10월 9일부(付)의 해설 내용도 소개를 하면 다음과 같다.

 <촉뢰(觸雷)였다면, 내측(內側)으로 향하는 구멍이 있어야 했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바깥으로 향해있었으며, 그것으로 선내(船內)에서 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동지(同紙)는

 <생존자들은 침몰 직전에 3번의 폭발음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촉뢰(觸雷)였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라는 기사도 실었다.

 그랬으므로 또 당시, 재일(在日)조선인(朝鮮人)들이 그런 의문점들을 문제시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아오모리(靑森) 시(市)에서 입수했던 굴강(掘江-인공하천) 자료에는

 <우키시마마루(浮島九)는 부산(釜山)으로 가려던 것을 변경해서, 갑자기 마이즈루(舞鶴)로 향했다. 그리고 그 배에는 헌병(憲兵)들과 해군장교들이 동승했는데, 그들은 부산(釜山)으로 가게 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고, 배도 몰수될 것이라고 하면서 비밀회의를 가졌고, 배에 폭약을 설치해서 폭침시켰다>

 라고, 1954년 4월 24일부(付), 재일조선해방구원회아오모리현본부(在日朝鮮解放救援會靑森縣本部)의 자료에 명기(銘記)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1950년 5월호 <민주조선(民主朝鮮)>의 원용덕(元容德) 씨의 <요시다정부에의 공개장(吉田政府への公開狀)-23페이지>에도 같은 취지의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으로 추론(推論)을 전개했던 것은 조선신보(朝鮮新報)였으며, 그래서 또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서의 폭발은 기관실(汽罐室)에서 일어났다. 그때, 일본군들은 대부분 바로 갑판으로 올라가 있다가, 폭발과 동시에 보트를 타고 도망갔다. 그러자 동포(同胞)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선실(船室)에서 갑판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그러나 사다리가 하나도 없어서 올라갈 수가 없었고, 그래서 또 결국, 배가 침몰한 후에, 동포들의 사체(死體)가 파도 사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그때, 갑판 위에서는 이상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는데, 그때 조선인(朝鮮人)이었던 일본해군헌병중위(日本海軍憲兵中尉) 백(白-충청북도 출신)이란 사람이 갑자기 바다로 뛰어들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자 또 그와 동시에 일본말로 "저 새끼를 죽여라"는 고함소리가 들렸고, 그러자 또 그와 동시에 일본 수병(水兵) 세 명이 그를 쫓아서 바다로 뛰어들어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그때, 바다 위에는 배에서 새어나왔던 기름(重油)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의 얼굴은 금방 새까매져서,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또 왜 그때, 일본 수병(水兵)들은 그 백(白)을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또 바로 그 전에, 그 백(白)이 동포들에게 "배 안에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미 전선(電線)이 연결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잔인(殘忍)한 일제(日帝)는, 그때 동포들의 생명을 빼앗고, 자신들의 범죄행위의 증거(證據)를 은멸(隱滅)하기 위해서, 기관실(汽罐室)에 폭발물을 장치(裝置)해서, 배를 폭파해서 침몰시키려고 했던, 만행(蠻行)을 저질렀던 것이다-아이고의 바다(海)에서...>

 그리고 또, 그와 같은 취지의 말을 했던 서봉아(徐鳳芽-당시 西舞鶴 大森海岸에 居住) 씨의 증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5년 6월에, 저는 오오미나토(大湊)로 가서 방공호(防空壕)를 파는 일에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중에 해방이 되어서, 우리는 그 배(浮島丸)를 타게 되었고, 우리 가족은 그때 전부 여섯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일본의 앞잡이로 헌병(憲兵) 짓을 하면서 조선인(朝鮮人)들에게 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조선인(朝鮮人)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던 자(者-)가 "일본 놈들이 화약에 불을 붙여서 배를 침몰시키려고 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어디서 "쾅"하는 소리가 났고, 그러자 그 사람()이 갑판으로 뛰어올라가서 이렇게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지금 배가 침몰할 것인데, 그것은 저 일본 놈들이 우리들을 전부 죽이려고, 의도적으로 폭파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일본 수병(水兵) 몇이 그를 죽이려고 같이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그러나 그 뒤의 이야기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마치 악몽(惡夢)을 꾸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니까 또, 위의 증언들로 봐서도, 당시 일본군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던가를 잘 알 수가 있겠는데, 그래서 또, 그것이 희생(犧牲)이었던, 자폭(自爆)이었던,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래서 또 자폭설(自爆說)에 무게가 더 실리는 것이지만, 그런데 또, 그 의혹(疑惑)을 처음으로 밝혔던 것은, 1954년 4월 14일에 열렸고, 오오야마이쿠오(大山郁夫-일본의 정치인, 정치학자) 씨(氏)와, 오오다니(大谷寶潤-일본의 정치인) 씨(氏) 등을 발기인(發起人)으로 했던, 제1회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순난자추도위령제(殉難者追悼慰靈祭) 도중, 당일의 사회(司會)를 맡았던 타무라유키오(田村敬男-당시, 日朝協會 京都府 連合會 理事) 씨(氏)가 밝혔던 보고서(報告書)에 의해서였고, 그 내용은 또 위의 내용과 같았던 것이었다.

 

 

 

 

 

 

 

 

 

 

 

 

 

 

 

 

 


<舞鶴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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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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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마이즈루 灣-적색 동그라미 부분이 폭침순난현장>

 

 

 5. 그리고 또 당시, 미군(美軍)의 기뢰(機雷)들은 전부 침저형(沈底型)으로, 그래서 수심(水深) 18미터의 해저(海底)에서 그것이 폭발했다면, 분명히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선저(船底)나, 현(舷) 측의 선저(船底) 부근에 큰 구멍이 생겨야 했지만, 그러나 그런 것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별 큰 손상도 없었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것은 분명히, 기뢰(機雷)에 의한 폭발이었다고 보기가 힘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침몰했던 배를 인양해서 독(dock)에 넣었을 때, 유골(遺骨)의 수용(收容)작업과 함께, 한국인 관계자들도 참여해서 그 배의 침몰원인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조사를 했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모두 아마추어들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 대한 원인을 충분히 구명(究明)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러던 중에, 그들은 이상한 점을 한 가지 발견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또 후일(後日)의 증거로 하기 위해서 그 선체(船體)의 각(各) 각도(角度)로 사진을 찍던 중에 발견했던 것이라고는 했지만, 아무튼 그때, 그들은 그 선체(船體)의 일부(一部) 선저(船底)에서 가까운 부분의 철판(鐵板)이 밖으로 향해진 채, 크게 파손되어 있었던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것이 이상했던 그들은 의견을 나누었던 결과, 무엇인가 그 배 안에서부터 폭발이 있었던 결과였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또 당시, 그 현장에서 같이 조사를 실시했던 일본인(田村敬男)의 증언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키시마마루(浮島丸)를 독(dock)에 에 넣었을 때, 한국인들이 그 배를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전문가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폭발원인에 대해서 알지 못했는데, 그러자 그들은 사진을 찍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러던 중에 선체(船體)의 일부분이 파열(破裂)되어 있던 것을 확인했고, 그래서 그 부분의 철판(鐵板)이 밖으로 향해있던 것을 저 역시도 확인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보시다시피 다리가 불편해서 상세하게 검증(檢證)을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또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전문가들이 같이 참가해서 그것을 확인을 했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겠는가 하는 마음도 있지만, 하지만 또,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조금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또 역시, 당시의 일본정부는 그에 대해서 성의(誠意)를 전혀 보이지 않았었고, 그래서 또 그 현장에는 어떤 전문가도, 의학자(醫學者)도 파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위의 타무라 씨(田村敬男氏) 등의 증언과 함께, 그때 약 3백 수십(數十) 정도의 유체(遺體)를 수용(收容)했다고 하는 기억만 남아있는 것이다.

 6. 그런데 또,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폭파(爆破)될 것이란 소문은, 오오미나토(大湊) 출항(出航) 전에 이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에 대한 증언(證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사사키유우키치(佐々木勇吉) 씨(氏)의 증언에 의하면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원래, 일본우선(日本郵船-니폰유우센-日本의 대표적인 海運회사 중의 하나) 소속의 오키나와(沖繩) 항로(航路) 연락선(連絡船)으로, 치시마(千島=千島列島) 항로의 타카시마마루(高島丸)와 자매선(姉妹船)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쨌든 저의 아버지는 종전(終戰) 직전에 오오미나토(大湊) 해군공작부(海軍工作部)의 조기과(造機科-艦船의 엔진담당)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즉 오오미나토(大湊) 출항 전에,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공작부(工作部)에 의해서 폭뢰장치(爆雷装置)를 설치해서 출항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니혼카이(日本海-우리의 東海) 어디에서 폭파될 예정이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 뒤에 저는 마이즈루(舞鶴) 만내(灣內)에서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당시,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는 특별한 해도(海圖)도 없었고, 연료도 충분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거기다 조선(朝鮮)에는 이미 소련군이 진군해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군인들은 조선(朝鮮)으로 갔다가는, 모두 포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군인들은, 이제 전쟁이 끝난 마당에, 뭣 때문에 그런 위험한 짓을 해야 하는가 하는 출항반대의 움직임도 강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당시,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 승선할 예정이었던 군인들은 <부산(釜山)행 항해를 저지(沮止)> 또는 <운항거부>의 의사표시로, 각 계급(階級)에서 여러 가지의 모의(謀議)가 진행되었다고 했는데, 그 중에서 제일로 첫 번째는 탈주(脫走)였다고 한다. 그래서 또 실제로, 수병(水兵) 중에서 탈주를 했던 사람이 몇 명이 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때, 비록 종전(終戰) 직후였지만, 그래도 군사재판(軍事裁判) 등이 두려워서 결행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들이 선택했던 것은,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운항능력(運航能力)을 손상(損傷)시키는 것이었고, 그것으로 출항(出港) 자체를 못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野澤忠雄 元少佐의 계획)

 그러나 실제로 기관(機關)을 파괴 또는 손상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실행되었다면, 아마도 다른 사관(士官)들 또는 군인들의 그룹에서 했을 것이란 추측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출항 전에, 그러니까 츠가루해협(津輕海峽-本州와 北海道 사이의 해협)에서 누군가 그런 실행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승조원(乗組員)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런 소문들이 무성했다고 하고, 그것은 또 함(艦) 내(內)의 군대질서가 붕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당시,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서는 하사관(下士官)을 중심으로 해서, 거의 반란(反亂) 직전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그 불안과 공포심을 이기지 못해서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었던가 하면, 야간(夜間)에 탈주(脫走)를 선언하고 배를 떠났던 사람도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그 당시, 오오미나토(大湊) 시내(市內)에서는, 시민들 사이에서도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 관한 괴담(怪談)이 나돌았다고 하고, 그 내용은 또 거의가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바다 위 어딘가에서 <자폭(自爆)>할 것이란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나중에 그때의 상황 또는 소문에 대해서 증언을 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그 중에서는 또 조선인(朝鮮人)으로 증언을 했던 사람들(金東經, 申美子)도 있었는데, 그래서 또, 그의 이야기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키쿠치산바시(菊地棧橋-또는 산쿄우)에서 4일정도 기다린 다음에 배를 탔는데, 그 후에 배는 출항했지만, 그런데 그때부터 그런 소문이 배 안에서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했었는데, 그러자 또 그 중에서는 "이왕에 죽을 것, 돈 같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하겠나?!"하고 자포자기하고는, 도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한바(飯場-노무자합숙소)를 운영했던 아버지 외, 가족들 전원과 함께 그 배에 탔었는데, 그런데 그 배에 오르고 난 후에, 금방 그 배가 침몰할 것이란 소문이 조선인(朝鮮人)들 사이에서 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일본인들에 의해서 살해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면서 동요하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우리도 불안하기는 했었지만, 하지만 또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가족 전부가 같이 죽을 것이기 때문에, 괜찮지 않겠냐고 하면서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舞鶴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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