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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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마이즈루 灣-적색 동그라미 부분이 폭침순난현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키시마마루사건약년표(浮島丸事件略年表)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하며, 그에 이 글을 읽으신 분에게 도움이 되셨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잊혀있었던 또는 관심 밖에 있었던 그 사건에 대해서, 앞으로도 더욱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그럼,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대단히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리면서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을 마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건(事件)

1937

3

15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진수(進水-大阪商船所屬)

1941

9

5

 우키시마마루(浮島丸) 해군(海軍)에 징용(徵用)됨

1945

6

30

 하나오카(花岡) 철산(鐵山)사건 발생.노동력부족으로 하나오카(花岡) 철산(鐵山)에 투입되었던 중국인들이 가혹한 노동에 항의, 봉기(蜂起)했던 사건.

 

8

15

 종전(終戰)

 

 

19

 오오미나토경비부(大湊警備府)가 우키시마마루(が浮島丸)에 출항명령을 내림

 

 

22

 아오모리현(靑森縣) 오오미나토항출항(大湊港出港)

 

 

24

 교토부(京都府) 마이즈루(舞鶴) 만(灣)에서 폭침(爆沈)됨

 

9

16

 마이즈루(舞鶴)에서 조선(朝鮮)으로의 귀국(歸國) 제1편(便) 운젠마루(雲仙丸) 출항.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생존자들 약 900명은 특별열차로 야마구치현(山口縣)의 센자키항(仙崎港)으로 가서, 그곳에서 부산(釜山)항으로 출항함. 그리고 약 2000명 이상의 생존자들은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일본에 잔류(殘留)함.

 

 

18

 부선일보(釜山日報)에서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이 처음으로 보도됨.

1950

3

13

 제1차 인양(引揚), 후반부(後半部)

1954

1

 

 제2차 인양, 전반부(前半部)

 

4

14

 제1회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순난자추도위령제(殉難者追悼慰靈祭)가 마이즈루(舞鶴) 동(東) 공회당(公會堂)에서 열림. 주최(主催)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순난자추도위령제실행위원회(殉難者追悼慰靈祭實行委員會)

1964

3

5

 일조협회(日-朝協會)마이즈루지부결성총회(舞鶴支部結成總會)가 열림, 그리고 이 해부터 노다미키오(野田幹夫) 씨(氏)와 스나가야스오(須永安郞) 씨(氏)가 중심이 되어서 추도(追悼)사업을 병행했으며, 그리고 8월 24일부터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別院. 현재의 至德寺)의 법요(法要)에 참가했고, 빠지는 해에는 추도집회를 개최함.

1965

6

22

 한일기본조약조인(韓日基本條約調印)

 

8

24

 우키시마마루순난(浮島丸殉難) 20주년 추도법요(20周年追悼法要-東公會堂)가 열림.

1970

8

24

 우키시마마루순난(浮島丸殉雛) 25주년 추도위령제가 열림.<마이즈루동노동(東勞動)세틀먼트(settlement)>

1975

7

28

 우키시마마루순난자위령비건립(浮島丸殉難者慰靈碑建立)을 위한 제1회 실행위원회(實行委員會)가 열림.

 

8

24

 우키시마마루순난(浮島丸殉難) 30주년 추도식(舞鶴東勞動세틀먼트)이 열림.

1977

8

13

 NHK에서 다큐멘터리 <폭침(爆沈)>을 방송함.

1978

8

24

 우키시마마루순난추도(浮島丸殉難追悼)의 비(碑) 제막식(除幕式)이 열림. 그 추도(追悼)의 비(碑)는 우키시마마루순난자추도(浮島丸殉難者追悼)의 비(碑) 건립실행위원회(建立實行委員會) 회장(會長-佐谷靖 舞鶴市長)이 건립했으며, 이 해부터 추도집회는 우키시마마루순난자추도실행위원회(浮島丸殉難者追悼實行委員會)가 주최함.

1984

5

15

 김찬정(金贊汀) 씨(氏)가 <우키시마마루(浮島丸) 부산항(釜山港)으로 가지 못하다>를 출판함.

1989

8

24

 추도실행위에서 <우키시마마루의 기록(記錄)>을 출판함.

1992

8

25

 우키시마마루의 생존자와 유족들 약 50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사죄(謝罪)와 손해배상(損害賠償)을 청구하는 소송을 교토지재(京都地裁)에 제소(提訴)함.(第一次提訴)

1993

3

22

 <헤이안천도(平安遷都) 1200년 영화를 제작하는 회(會)>가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을 제재(題材)로 하는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함.

 

8

23

 유족(遺族) 27명이 교토지재(京都地裁)에 제2차 제소(提訴)를 함.

 

11

5

 영화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제작협력마이즈루회(製作協力舞鶴會) 발족(發足).

1994

8

23

 유족(遺族) 5명이 교토지재(京都地裁)에 제3차 제소함.

1995

5

24~28

 마이즈루로케(舞鶴-location)

 

8

26~27

 영화 <에이지안블루(ASIAN BLUE-우키시마마루(浮島丸) 사건> 마이즈루(舞鶴) 상영회(上映會)가 열렸고, 7회 상영에 약 3600명 정도가 관람함.

1996

3

26

 일본공산당참의원의원(日本共産黨參議院議員) 니시야마토키코(西山登紀子) 씨(氏)가 참의원후생위원회(參議院厚生委員會)에서,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에 대해서 질문함.

 

5

10

 <우키시마마루순난자(浮島丸殉難者)를 추도하는 회(會)> 개조(改組). 그 결과, 회장에 노다(野田幹夫) 씨(氏)가 결정되었고, 사무국장(事務局長)에 스나가(須永安郞) 씨(氏)가 선출(選出)됨.

 

6

23

 우키시마마루통신(浮島丸通信)이 창간(創刊)됨.

 

8

24

 추도집회에 후생대신(厚生大臣)으로부터의 메시지가 처음으로 옴.

1997

8

25~26

 아오모리현(靑森縣)을 방문해서 <우키시마마루시모키타회(浮島丸下北會)와 교류를 가짐.

1998

8

23

 우키시마마루순난자추도(浮島丸殉難者追悼)의 비(碑) 건립 20주년 기념사업(記念事業)의 일환으로 링고좌(りんご座-사과나무극장)에서 <1998년 여름, 해반(海畔)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군상(群像)들의 이야기>를 공연함. 그리고 심포지엄(symposium-토론회)은 <지금,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을 생각한다>

1999

11

 

 추도공원(追悼公園)의 설명판(說明版)에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짐.

2000

4

 

 추도공원의 설명판의 내용 중 <식민지지배(植民地支配)>라는 글자가 삭제됨.

2001

8

 

 영화 <에이지안블루-우키시마마루사건((エイジアン・ブルー浮島丸サコン)>이 한국에서 정식으로 수입허가가 났고, 서울에서 시사회(試寫會)가 열림. 그리고 서울시의 창천교회(滄川敎會)에서 약 500명이 감상함. 그 후, 서울, 부산, 광주 등에서 상영회를 계속함.

 

8

23

 교토지재(京都地裁)가 우키시마마루소송(浮島丸訴訟)을 판결(判決)함. 그 결과, 일본에 배상명령을 내렸지만, 사죄청구는 각하(却下)함.

2002

4

24~28

 한국(韓國) 광주(光州)시를 방문해서, 광주시민연대(光州市民連帶)와 교류함.

 

8

24

 광주시민연대전대표(光州市民連帶前代表)와 정책국장(政策局長)이 추도집회에 참가함.

2003

5

30

 우키시마마루소송(浮島丸訴訟)을 오오사카고재(大阪高裁)가 판결함. 그 결과, 원고패소(原告敗訴)함.

 

8

24

 추도집회에 광주시민이 참가함. 마이즈루시장(舞鶴市長)도 처음으로 참가함.

2004

5

 

 한국광주시를 방문해서, 광주시민연대와 교류함.

 

8

23

 우키시마마루순난(浮島丸殉難) 58주년을 맞이해서, 광주시에서 <"얼쑤"공연- 한국궁정(宮廷)무용전통예능의 모임>을 개최함. 마이즈루시민(舞鶴市民)들과 광주시민들 간의 시민(市民)교류회를 개최함.

 

11

30

 우키시마마루소송에서, 최고재판소가 오오사카고재판결(大阪高裁判決)을 지지(支持)했던 원고(原告)의 상고(上告)를 기각(棄却)함. 그 결과, 원고패소가 확정(確定)됨.

2005

3

14

 중국의 북경대학(北京大學)에서 <에이지안블루>가 상연됨. 이어서 스나가(須永安郞) 씨(氏)가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과 추도사업>이란 제목으로 강연함.

 

8

24

 우키시마마루순난(浮島丸殉難) 60주년 기획(企劃)으로 <동아시아국제심포지엄-우키시마마루사건: 동아시아평화를 위한 조건을 생각한다, 동아시아 시민교류와 문화를 말한다>를 개최함. 주(駐) 오오사카대한민국총영사관(大阪大韓民國總領事館) 김강수(金康壽) 영사(領事)와, 정화진(鄭華秦) 총영사로부터 감사장(感謝狀)을 받음.

 

 

 


 이하, 생략

 

 

 











 

 

 




<舞鶴灣>

 

 

 

 

 

 

 

 

 

 

 

 

 

 

 <浮島丸事件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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