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드로잉 : 동물편 나의 드로잉 1
로베르 랑브리 지음, 허보미 옮김 / 바바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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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도의 신'이라 불렸다는 100여 년 전 프랑스 작가 '로베르 랑브리'의 <나의 첫 번째 드로잉 : 동물편>. 미술에서 구도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그의 이력을 읽은 후 호기심과 함께 책을 펼치니, 두 페이지씩 짧게 짚고 넘어가는 '기본 개념'과 '기본 형태'가 있는 책 도입부가 꽤 인상적이다. 드로잉에 관한 책을 몇 권 가지고 있는데 글자가 이렇게 거의 없는 책은 처음이다. 텍스트로 가득 찬 이론이 아닌 실전으로 보여주겠다는 그 구성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래, 그럼 나도 바로 실전으로 들어가 보마! 호기롭게 연필을 들고 '기본 개념'과 '기본 형태'에 나온 선들과 도형을 연습장에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후 본론으로 들어가 왼쪽 페이지에 단계별로 친절히 그려져 있는 동물 드로잉을 오른쪽에 마련되어 있는 연습 페이지에다 천천히 따라 그려보았다.



   타원형, 직사각형, 삼각형, 방추형 등등... 이런 기본 형태로 출발해 점점 구체적인 동물의 모습으로 변모해가는 드로잉 과정을 꼼꼼히 살핀 후, 그대로 따라 그려가기만 하면 어느덧 뿅 하고 완성! 원이나 타원을 이용해 토끼를 그리고, 반원형으로 쥐를 그리는 등 기본 도형을 활용해서 그리는 동물 그리기가 참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 책에 실린 150여 종의 동물 드로잉 중 첫 번째 동물인 '개'를 그린 후 순서대로 '고양이 1', '고양이 2'를 차근차근 그리다 네 번째 동물인 '생쥐' 편까지 단숨에 도착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동물 그리기가 이렇게 쉬웠나?'


   어릴 적에 비해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지금의 나에게 저런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드로잉 가이드를 적절한 구도와 함께 체계적인 단계로 구성해 누구나 쉽게 따라 그릴 수 있도록 한 저자의 내공에 감탄했다. 물론 완성본을 보면 작가의 그것과 나의 그것은 디테일에서 심히 차이가 나긴 하지만(쿨럭) 평소라면 막막해서 그릴 시도도 하지 않을 족제비나 늑대를 그리고 있는 나를 보고 있으려니 참 신기했다. 지우개 가루가 많이 생기는 게 불편해서 3일 차부터는 갤탭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 책과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그리고 있다가 잠들 시각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그만큼 아무 잡생각 없이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있다는 방증인지라, 힐링을 선사해 줄 것이라는 이 책의 광고가 그리 틀린 말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은 구도의 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서 구도 잡기를 통한 드로잉을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비전공자들은 드로잉을 위한 구도를 잡는 일부터 꽤 진땀을 흘리기도 한다. 100여 년 전 로베르 랑브리는 자신의 탁월한 구도 잡기 감각을 담아 만든 이 '단계별 동물 드로잉법 시리즈'를 어린이용 주간지를 위해 제작했지만, 그림과 멀어진 어른에게도 이 책이 유용한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이리라.


   코로나19의 여파로 추석에도 만남 대신 영상통화를 권하는 재난문자가 오고 있는 요즘. 명절 내내 집콕을 할 예정인 나는 이 책과 함께라면 긴 추석 연휴도 두렵지 않을 듯하다. 동그라미와 네모가 동물로 서서히 변하는 기쁨을 느끼며 힐링 추석을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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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모나 에프 그래픽 컬렉션
노엘 스티븐슨 지음, 원지인 옮김 / F(에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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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을 다니며 연재한 웹툰 <니모나>가 큰 인기를 얻어 바로 책으로 출간. 그 후 마블 코믹스, DC 코믹스, BOOM! 스튜디오에서 그래픽 노블을 작업. <니모나>로 아이스너 상과 카투니스트 스튜디오 상을 받았는데, 이 작품은 곧 애니메이션 영화화를 앞두고 있음. 이뿐만 아니라 그래픽 노블 <럼버제인스> 시리즈로 아이스너상, 하비 상, GLAAD 미디어 상까지 수상. 지금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애니메이션 '우주의 전사 쉬라'의 감독으로 활동 중... 믿기지 않겠지만, 이 모든 일이 28살이 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란다. 이 대단한 경력의 주인공은 바로 미국의 아티스트 '노엘 스티븐슨'. 저자 소개와 책 소개란을 통해 위의 경력들을 읽으며, 저자의 이 화려한 경력에 호기심을 느껴 바로 <니모나>를 읽어보았다.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의복이나 건축 -외부- 양식을 보면 서양의 중세 시대인 것 같은데, 마법이 존재하는 걸로 봐선 확실히 판타지 세계이다. 그런데 냉장고에서 꺼낸 캔 음료를 시원하게 마시고 피자를 배달시키며 거대한 화면으로 화상 전화를 하는 등 첨단 과학 기술이 동시에 존재한다. 참 묘한 배경의 판타지 세계이다. 이런 세계에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한 '니모나'가 불쑥 등장한다. 니모나는 변신 능력자이고 그 능력을 보면 꽤나 수준급이다. 작은 새나 여우에서부터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용까지, 존재하는 생명체라면 쉽게 변신할 수 있는데 신기하게도 겉만 흉내 내며 변하는 게 아니라 몸의 질량까지 함께 변한다. 기본적으로 생명이 없는 것으로는 변신할 수 없지만 그게 꼭 불가능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왠지 그쪽으론 웬만하면 변신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무생물로의 변신은 아마도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을 의미하는 듯). 그뿐만 아니라 깊은 상처도 쉽게 치유되는 능력 또한 지니고 있다. 니모나는 악당으로 명성이 자자한 '발리스터 블랙하트'의 조수가 되기 위해 그의 집에 무작정 들이닥친다. 조수가 필요 없다는 블랙하트를 졸졸 쫓아다니다 변신 능력자임을 보이게 되는데, 이에 흥미를 느낀 블랙하트는 니모나를 조수로 채용한다. 잔인한 방식을 좋아하는 니모나와 불필요한 사상자를 원하지 않는 블랙하트는 초반에 의견을 계속 부딪치지만, 여러 일을 함께 겪으며 점점 협력하고 서로를 의지하기 시작한다.



   블랙하트는 악당으로 악명이 높지만 사실 그건 '법의 집행과 영웅적 행위에 관한 협회'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일 뿐, 알고 보면 진짜 악의 축은 협회이다. 이 협회에서 영웅으로 일하고 있는 블랙하트의 옛 연인 '암브로시우스 골드로인'은 협회의 진짜 정체도 모르고 있다. 악당으로 활동하는 블랙하트와 왕국 전사로서 영웅 대접을 받는 골드로인은 과거 한 사건 때문에 하나뿐인 연인에서 지금은 숙적이 되었다. 그래서 서로 마주칠 때마다 으르렁대지만 상대를 해칠 생각은 눈곱만큼도 못하는, 그런 애증의 관계에 놓여있다. (니모나가 골드로인을 죽여도 되냐고 묻자 블랙하트가 숨도 안 쉬고 "안 돼"라고 바로 대답을 할 정도로 이 둘의 관계는 복잡미묘하기 그지없다. 아니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왜 천하의 원수처럼 증오하며 못 죽여서 안달 난 표정인 건데.-_-)


   협회가 흑마법에 주로 사용되는 금지 식물 '제이드루트'라는 맹독성 식물을 다량 보유한 채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블랙하트는 니모나와 함께 협회를 박살 내기로 결심하고 함께 작전을 개시한다. 먼저 방송국으로 가서 뉴스 진행을 가로챈 후 협회가 제이드루트를 다량 비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농작물 오염을 조심하라고 모두에게 경고한다. 그런 뒤 가볍고 치명적이지 않지만 치료는 까다로운 독을 넣은 사과를 사람들 사이에 퍼지도록 심는다. 왕국에 이상한 전염병이 돌자 사람들의 협회에 대한 의혹이 확신으로 바뀌게 되고 결국 협회를 향해 분노하게 된다. 서서히 만천하에 드러나는 협회의 민낯과 음모, 블랙하트와 골드로인을 앙숙지간으로 만든 과거 '그 사건'의 전말, 그 와중에 어렴풋이 드러나는 니모나의 비밀스러운 과거는 과연...?!



   '핀과 제이크의 어드벤처 타임'을 연상케 하는 개성적인 작화와 더불어 잔인한 내용이지만 가벼운 표현으로 포장한 다크 유머가 작품 전체에 골고루 자리 잡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밝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무겁지 않게 느껴지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4칸 만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고 빽빽하게 작화를 구성한 1장과 2장은 아마추어티가 좀 나지만, 그다음 장인 3장을 시작으로 챕터를 거듭할수록 시원시원한 만화적 구성으로 작화 실력이 점점 늘어가는 게 확실히 눈에 띈다.


   이렇게 재치가 가득하고 발랄하며 완성도까지 있는 작품이 대학생 때의 것이라니, 다 읽고 나서 하늘을 한참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부러워서. 잘 될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아, 저자가 여자였지... 잘 될 숙녀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니모나에 관한 과거 설정을 두루뭉술하게 해놓은 걸 두고 설정이 쪼오끔 미흡하다는 걸로 단점을 -억지로- 지적해볼 수 있겠지만, 그저 시기하는 자의 질투심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내가 지적한 단점이 설득력이 있을지 과연 의문이다(푸하하하).



   현재 잘 나가고 있는 29살의 아티스트 노엘 스티븐슨의 데뷔작이 궁금한 분들에겐 필독서가 될 만한 작품이다. 뭐 딱히 저자를 잘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그래픽 노블이기도 하다.

   글을 끝맺으려는데 책상 위에 놓여있는 <니모나>의 뒷면에 적힌 추천사 중 이 책의 핵심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을 참 잘 표현한 말인 것 같다. 니모나는 무한대의 강한 힘을 지녔음에도 자신보다 훨씬 미약한 블랙하트에게 접근한다. 외로움을 구원받기 위해서. 과거에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안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면서 또 갈등을 겪지만,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그리곤 블랙하트와 왕국을 구원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도, 가장 유명한 악당도, 유명한 영웅도, 자신을 제대로 이해해주는 존재가 없다면 과연 그 모든 게 소용 있을까. 이 작품에는 서로를 어떻게 구원하는지 그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녹아있다. 이 함의는 책을 두 번째 읽을 때 더 잘 와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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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댄 애리얼리 최고의 선택
댄 애리얼리 지음, 맷 트로워 그림,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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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다양한 선택의 결과로 이루어진 삶을 살고 있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같은 그런 자잘한 선택부터 큰 수술을 하느냐 마느냐와 같은 앞으로의 삶을 관통할 선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선택 하나로 동료나 이웃과의 사이가 틀어지기도 하고, 훗날 큰돈을 거머쥐게 되기도 하며, 선택 하나 잘못해서 삶이 시궁창 속으로 빠지기도 한다. 의사결정을 한 당시에는 분명 그 선택이 최선이었던 것 같은데, 전혀 다른 쪽으로 결과가 생기는 걸 볼 때마다 나는 머리에서 쥐가 나곤 한다. 아아, 선택! 나는 제발 의사결정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만화로 보는 댄 애리얼리 최고의 선택>을 읽은 이유 역시 선택을 잘하고 싶어서였다. 일단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해보건대, 이 책을 '선택'해서 읽은 건 잘한 일인 듯하다. 의사결정에 대해 통찰력 있는 관점으로 접근할 시야를 내게 만들어준 고마운 책이라고나 할까.


   이 책에는 일상 속 의사결정을 현명하게 하지 못해 주변 상황을 계속 엉망으로 만드는 40대 두 아이의 아빠 '애덤'이 등장한다. 애덤은 '사회성 요정'의 말마따나 사회적 교환의 기본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사회성이 결여된 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다. '에스더'는 그런 애덤의 곁에서 묵묵히 조언하는 그의 아내이다. 어느 날 이 바보 같은 애덤에게 '데이나'가 '시장성 요정'과 '사회성 요정'을 데리고 나타난다. 데이나는 이 책의 해설자로서 애덤이 보다 나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그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함께 고민하고, 현명한 의사결정을 위한 근본적인 법칙들을 여러 연구 결과에 기반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해준다.





   데이나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시장적 규범의 세상과 사회적 규범의 세상, 이렇게 두 개의 전혀 다른 세상에 발을 동시에 디디고 살아간다. 전자는 '돈'으로 대변되는 '비용과 편익을 따지는 이기심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후자는 '유대·친목'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인간관계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 두 개의 세상은 소소한 의사결정부터 비즈니스적인 선택과 전 지구적 문제에 관한 의사결정에 이르기까지 관여하지 않는 데가 없다. 이 둘은 잘 섞일 수가 없는데, 최고의 선택을 하겠답시고 이 둘을 어설프게 섞었다간 엉망인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특히 사회적인 상황에 시장적 규범인 돈을 들이대면 사회적인 규범은 반드시 밀려나게 되는데, 이렇게 변질된 인간관계를 사회적인 차원으로 다시 돌리는 건 몹시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한번 망가진 친사회적 행동은 쉽게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애덤은 결혼 전 에스더와 데이트를 할 때마다 언제 돈 얘기를 하고 언제 마음을 얘기해야 할지를 몰라 우왕좌왕 실수를 연발하곤 했다. 또한 추수감사절을 맞이해 처가를 방문했을 땐 장모님이 손수 마련한 음식들에 감탄하며 고마움의 표시로 밥값을 내겠다는 황당한 말을 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조카 졸업식에 선물을 고르는 게 고민되어 그냥 현금을 줘버리는 게 좋을지 갈등하고, 시장적 규범이 바탕인 '완전한 계약'과 사회적 규범을 바탕에 둔 '불완전한 계약'을 상황에 알맞게 적용하지 못해 손해를 보기도 하는 등등 집 안팎에서 발생하는 여러 선택의 갈림길에서 문제를 계속 낳는다. 데이나가 책 전반에 걸쳐 설명하고 있는 시장적 규범과 사회적 규범에 관련된 개념들을 애덤이 진즉에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그가 의사결정을 내릴 때마다 좋지 않은 결과를 야기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컸을 텐데 말이다.





   우리가 의사결정을 내릴 때 늘 최고의 선택을 하기란 사실상 힘들다. 이 책에 나오는 행동경제학과 관련된 수많은 연구를 비롯해 '민감도 체감성'의 원리라든지, '내재적인 동기부여/외재적인 동기부여', '보답하는 선순환' 등과 같은 개념을 항상 되뇌며 철저하게 비교·분석하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 다만 의사결정을 할 때 최고의 선택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혹은 인간관계)에서 스스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잘 파악한 후 시장적 규범과 사회적 규범 중 어떤 규범을 적용해서 행동해야 하는지, 이 정도만 잘 숙지하고 있어도 엉망인 결과는 대체로 면하게 되지 않을까.


   텍스트로만 읽으면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행동경제학에 관한 댄 애리얼리의 연구를 만화로 풀어내고 있는 이 책은 만화적 연출 덕에 쉽게 읽힐 뿐만 아니라 재미까지 있다. 나에게 선택에 관한 통찰력을 안겨준 이 책을, 매일 최고의 선택을 내리기 위해 신중히 고민하고 있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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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에 관한 모든 것
피에로 마틴.알레산드라 비올라 지음, 박종순 옮김 / 북스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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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부터 한 한국 대기업에서 새로운 스마트폰 출시를 앞두고 사전예약을 진행 중이다. 이에 대한 기사를 읽자마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오래된 전통인 '계획된 노후화'를 떠올렸다. 이 개념은 얼마 전 읽은 책 <쓰레기에 관한 모든 것>에서도 설명되어 있다.


1930년대, 미국과 세계 일부 국가는 1929년의 대공황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고, 런던에서는 효과적으로 소비자가 물건을 계속 사도록 만들기 위해 오래가지 않고 한정된 횟수만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된 상품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소비지상주의와 더불어 역사상 유례없는 양의 쓰레기 발생에 책임이 있다.


- 본서 42쪽 -


   매일같이 만나는 '쓰레기'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재미있겠다 싶어서 읽어 본 책 <쓰레기에 관한 모든 것>.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한편으론 걱정스럽고 민감한 주제이기도 하기에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이 책은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은 나름의 주제로 묶여 있다. 이 아홉 장에는 우리가 여태까지 만들었던,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쓰레기의 현 실태를 비롯해 쓰레기로 만들 수 있는 자원과 에너지에 관한 이야기, 그에 관련된 기술, 역사·인류학·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쓰레기 이야기,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려는 노력에 관한 사실들, 위생에 관련된 쓰레기와 문화적 측면에서 바라본 쓰레기 등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러 통계와 데이터에 기반해서 말이다.


   예전부터 관심 있던 분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눈을 더 반짝였고, 기발한 아이디어와 웃긴 이야기에 무릎을 치며 읽곤 했다. '똥 와이파이'라고 불리는 멕시코시티의 특별한 개똥 수거 시스템, 현재도 한창 연구 중인 '폐기물 없는 무한한 에너지'인 핵융합 발전(기다린 지 오래됐다고!), 플라스틱을 먹는 애벌레인 '갈레리아 멜로넬라', 익명으로 똥을 보내는 서비스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런 글들을 읽으며 말이다. 이탈리아 작가들이 쓴 책이라 그런가, 통계나 데이터가 대개 이탈리아와 유럽 기준이어서 아쉬웠던 반면 이탈리아식 위트로 보이는 유머가 책 속 여기저기 있어 흥미로웠다. 다만 전체적으로 번역이 매끄럽지가 않은 편인데, 이 점은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산과 들판, 강, 바다, 하늘을 쓰레기로 오염시키는 것도 모자라 달과 우주에까지 폐기물을 만들고 있는 인간들. 그 종류는 너무도 다양하며, 여기엔 배설물처럼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쓰레기도 포함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쓰레기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며 이를 줄이기 위해 나름 노력하는 나와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본인이 만든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전혀 관심 없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 매일 만들어지는 쓰레기의 양은 그 규모가 너무나 커서,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의 노력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회의감이 들 정도다. 내 마음이 이렇든 말든 지구 위에서 번식하며 광범위한 면적에 걸쳐 바글바글 살고 있는 인간이란 종은 이 행성을 점점 쓰레기 천국으로 만들고 있다. '진보'라는 명분 아래.


   현재 인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하며 진보를 향해 나아간다. 그 진보를 통해 우리가 끝내 거머쥘 가치는 무엇일까? 끝없는 성장 속에 쌓여가는 이 막대한 쓰레기양과 맞바꿀 만큼 귀중한 가치일까? 훗날 거대하게 쌓인 쓰레기 더미 위에 서 있을 후손들을 생각하면 유튜버 스티브 커츠(Steve Cutts)의 작품 'MAN'이 자꾸만 떠오른다. 미세먼지를 매일같이 마시며 미세플라스틱과 각종 유해물질 범벅인 식자재로 만든 요리가 식탁 위에 오르고 있는 지금 이 시기, 인간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려면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통계 수치와 데이터가 필요한 걸까? 책 속에는 쓰레기도 자원이 될 수 있고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많이 담겨 있다. 우리는 과연 희망의 봉우리를 향해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될까? 



   불현듯 오래전 보았던 영화 [매트릭스 The Matrix] 속 스미스 요원의 대사가 머릿속에 흩날리듯 돌아다니다 내 귓가에 속삭여온다.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깨닫게 된 사실을 말해주지. 네 종족을 어떻게 분류할지 생각하다 떠오른 거야. 너희는 포유류가 아니었어.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주변 환경과 공존하는데 너희 인간은 안 그래. 어떤 장소로 이동하면 거기서 나는 자연자원이 바닥날 때까지 번식하고 또 번식하지. 너희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장소로 퍼져나가는 거야. 이 지구에는 똑같은 패턴을 따르는 유기체가 또 하나 있어. 그게 뭔지 아나? 바이러스다. 인류라는 존재는 질병이야. 지구의 암이라고.


- 영화 [매트릭스]에서 -


   그런 것일까? 우리는, 인류는, 정말 답이 없는 종인 걸까. 자신이 사는 행성을 쓰레기더미로 만들어가는 주제에 장엄한 우주의 관찰자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평소 관심 있어 하는 주제를 담은 책이어서 그런지, 재미있게 읽고 난 후 쉬 끝나지 않는 사색에 계속 잠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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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밴 어린시절
W. 휴 미실다인 지음, 이석규 외 옮김 / 일므디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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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내재과거아가 시킨 거냐?"

   이 말은 요즘 우리 집에서 종종 사용되는 말이다. 비슷한 의미로 "방금 네 내재과거아가 발현된 거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휘트니 휴 미실다인이 1964년 출판한 <몸에 밴 어린 시절 Your inner child of the past>을 읽은 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내재과거아'라는 말은 예전부터 스치듯 종종 들어와서 알고 있긴 했지만 이 개념이 잘 정리되어 있는 미실다인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잠깐, 내재과거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좋든 싫든 간에, 우리는 지난날의 정서적인 분위기에 묻혀 살면서 현재의 삶에 끼어들고 있는 어린아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오로지 현재에 집착해서 살아가는 어른이기도 하다.

-본서 11쪽-

실제로는 부모가 더 이상 곁에서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부모의 태도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으며, 환자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어린 시절에 대응했던 대로 이 태도에 반응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어른에게 그대로 남아 있는 내재과거아란 개념이 생겨났다.

-본서 17쪽-


   내재과거아란 어른이 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가 한때 거쳐 왔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어린이의 모습을 말한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태도를 지닌 부모 아래에서 큰 상처 없이 그럭저럭 잘 자라온 내재과거아는 어른이 된 우리와 별다른 갈등이나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깊은 상처를 주는 태도를 지속해서 겪으며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자라난 어른의 내재과거아는 어른이 된 우리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문제를 일으킨다.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내재과거아는 바로 후자에 속하며, 이러한 내재과거아를 잘 다루지 못해 겪을 수밖에 없는 일상 속 문제들을 더는 반복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을 개선해 나갈 수 있을지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저자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과 내재과거아는 같은 개념이 아니라고 분명히 못박아두었다.





   이런 상처투성이 내재과거아를 그냥 송두리째 뽑아내 버리면 깔끔히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병원에 정신 건강 관련 과가 지금 이렇게나 많아졌을 리가! 그대가 아무리 무시하고 잊으려 해도 그대가 거쳐 온 어린아이는 당신 안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미실다인의 말마따나 그대로 지속되는 걸 넘어 '무럭무럭 자란다'. 감정이나 마음에 관련된 문제는 납으로 만든 관 속에 넣어 시멘트로 묻어버린 방사능 폐기물처럼 다신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묻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가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태도들 기억한다. 그것은 본질적인 태도이며, 우리는 이 태도에 익숙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현재 우리가 자신에게 적용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본서 75쪽-


   미실다인은 부모의 특정한 태도는 처음엔 어린이에게, 나중에는 어른에게 정서적인 장애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의 내재과거아에 영향을 미치는 부모의 태도 중 9가지를 제2부에서 살펴본다. '완벽주의', '강압', '유약', '방임', '건강 염려증', '응징', '방치', '거부', '성적 자극'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이 아홉 가지 부모의 태도는 우리가 부모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는 거다. 다만 이 흔한 태도들이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이유는 '지나치게' 사용되었거나 '무리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아홉 가지 태도를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다 보면 부모의 지나친 태도가 어떻게 확인되는지, 그리고 각각의 태도가 자식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며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저자는 제2부 서두에 실제로는 이 태도들이 혼재되어 나타나지만 독자들이 이러한 태도를 잘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 책에서는 순수한 독립된 형태로 기술해놓았다는 점을 짚어놓았다.





   이 책의 요체는 책 내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제2부라는 생각이 든다. 내재과거아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담고 있는 제1부와 자신에게 '새로운' 부모 역할을 하는 법을 제시하는 제3부도 물론 중요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내가 가장 시간을 들여 읽은 부분은 바로 제2부였다. 나는 제2부의 몇몇 장에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는데, 어느 장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겠다(사생활은 소중하니까요). 부모님의 태도를 되돌아보면서, 나의 내재과거아를 확인하려고 노력하면서, 어떤 날은 60페이지를 3시간에 걸쳐 곰곰이 씹으며 푹 빠져 읽기도 했다. 책을 덮고 나니 나의 내재과거아의 다루기 힘든 감정과 욕구에 대해 이해해야 할 일부터 참 거대하게 느껴졌다. 내 일상생활에 문제를 일으키는 내재과거아의 욕구에 제약을 긋고 한계를 설정하기 전에, 일단 '상호 존중'의 태도로 나의 내재과거아의 감정을 잘 보듬는 일부터가 급선무란 생각이 든다.


   실은 이 책을 잘 요약해주겠답시고 3문단에 걸쳐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과 키워드를 정리하고, 내재과거아에게 새로운 부모 역할을 할 때 어디를 지향해야 할지에 대한 내용까지 책에서 추려내 잘 정리했었다. 이걸 보여준 지인으로부터 내가 정리한 내용만 읽어도 책을 다 읽어본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세 문단을 삭제해버렸다(그리고 위에 있는 내용들 역시 읽어나가며 대폭 삭제하거나 대략적인 내용으로 상당량 수정해버렸다). 내가 삭제한 세 문단은 이 책을 읽으면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알고 있으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심리학 개념을 담은 이 책을 많은 이들이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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