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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영화 읽기 - 무성 영화부터 디지털 기술까지
마크 커즌스 지음, 윤용아 옮김 / 북스힐 / 2025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에 실린 영화들은 영화 역사의 혁신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그만큼 저자는 혁신성에 초점을 맞추고 이 책을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책을 읽는 내내 틈만 나면 등장하는데, 저자는 서문에서 '단순히 아름답거나 유명하거나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점보다는 혁신성에 중점'을 두고 세계 영화들의 엔진에 접근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저자 본인이 좋아하지만 책에 싣지 못한 영화들이 많다고 한다(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나 영화도 다수 없어서 아쉬웠다).
이 책은 창의적인 영화인들이 어떤 제작 방식으로 혁신적이고 위대한 작품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내용을 '무성 영화(1895년~1928년)', '유성 영화(1928년~1990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영화(1990년~현재)'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담아내고 있다. 영화 혁신가들의 스키마와 변이를 추적하면서 다양한 장르와 세계 여러 나라의 영화감독을 소개하는 영화 역사 개론서이자 카탈로그라고 볼 수 있겠다. 시대별로 영화감독들이 스타일적으로 어떤 스키마를 따르는지 혹은 어떤 새로운 스키마를 정립하는지를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반영하여 설명하고 있어 영화 역사에 포괄적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영화 매체는 특정인이 혼자 창시한 게 아니며 탄생일도 명확하지 않다. 저자의 표현대로 '그 미래가 불투명한 채 갑자기 관심을 끌며'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들었다. '숏'을 발견하고, 숏보다 더 기묘한 '컷'이 소개되고, -조르주 멜리에스에 의해- 다중의 숏이 "편집된" 영화가 소개되며, 영화 기술은 점점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는 순차 편집, 포커스 풀, 클로즈업 숏, 아메리칸 숏, 리버스 앵글 편집, 평행 편집, 시선 일치 등과 같은 기초적인 영화 기법들이 초창기 무성 영화 역사에서 하나씩 발견될 때마다 영화 역사에는 그야말로 대변혁의 물결이 휩쓴다. 기존의 영화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감독도 있는 반면, 새로운 연출로 영화 언어와 스타일을 변형시키거나 획기적인 기술로 전혀 다른 방식의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들도 있다. 그렇게 새로운 스키마가 구축되면 다른 한쪽에선 이를 모방하고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스키마와 변이의 영화 역사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물론 브레송처럼 모든 영화의 스키마를 거절하는 감독도 있다). 무성 영화 역사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영화인 <국가의 탄생 The Birth of a Nation>(미국, 1915)의 감독 데이비드 그리피스는 존 포드의 <순례 여행 Pilgrimage>(미국, 1933)과 일본의 무라타 미노루에게 영향을 끼치고,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감독인 버스터 키튼의 영화 <제너럴 The General>(미국, 1926)은 호주의 명감독 조지 밀러에게 영감을 주어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호주·미국, 2015)의 후반부에 그 영향력이 반영되는 것처럼, 이 책은 영화사 전반에 걸쳐 한 감독이 다른 감독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며 시대를 뛰어넘는 스키마적 유산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아방가르드, 사실주의, 네오리얼리즘, 뉴 웨이브, 도그마 선언, 포스트모더니즘, 초현실주의 등 시대 상황과 영화 고유의 역사가 반영된 다양한 영화 사조와 운동, 영화 스타일이 등장한다. 저자는 특정 감독과 영화 운동이 서로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그 방식에 관해서도 설명한다. 이 책에서 수많은 영화감독과 그들이 탄생시킨 훌륭한 영화들을 만나볼 수 있지만, 많은 내용을 담아야 하다 보니 세부적으로 그리 길게 언급하지는 않는다. 책에서 사진을 포함해 최소 두 페이지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려면 찰리 채플린이나 앨프리드 히치콕, 오즈 야스지로, 로베르 브레송, 장뤽 고다르, 마틴 스코세이지, 페드로 알모도바르, 워쇼스키 자매의 <매트릭스 The Matrix>(미국, 1999) 급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봉준호마저도 책 속의 다른 수많은 영화인들과 마찬가지로 사진도 없이 여덟 줄 정도만 할애되어 있고, 임권택 감독은 열한 줄 정도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점 덕분에 내가 재미있게 봤던 <행복한 라짜로 Lazzaro felice>(이탈리아, 2018)나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줬던 <경계선 Border>(스웨덴, 2018), 그리고 어렸던 나를 끝없는 몽상에 빠뜨렸던 <올란도 Orlando>(영국, 1992)와 같은 영화를 이 책에서 마주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도.... 저자가 오즈 야스지로에게 편애하듯 너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지 않았다면 봉준호에게 사진 한 장 정도는 넣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계 영화 읽기>는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안내서이자 영화 감상의 길라잡이로 삼아도 될 만큼 저자의 열정이 가득 담긴 책이다. 영화에 관해 잘 모르거나, 영화를 자주 보지만 본인의 영화 스펙트럼을 확장하고픈 갈증이 있는 사람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