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 디테일로 보는 미술
수지 호지 지음, 장주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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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며칠 전 책을 읽고 있는데 등 뒤에서 "그거 뭘 그린 거야?"란 말이 들려왔다. "무슨 책인데? 현대미술...? 흠. 이건 작가가 뭘 말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어렵네."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의 후반부에 수록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화'를 내 뒤에서 훔쳐본 지인의 반응이다. 리히터의 1986년 작 '추상화'는 선명한 빨간색과 파란색, 애시드 옐로, 그리고 이 색채들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주황색과 초록색이 그림 전체에서 강렬하게 빛나고 있다. 붓으로 물감을 바르고, 긁어내고, 떠내고, 얼룩지게 하거나 번지게 만드는 과정에서 에너제틱한 즉흥성이 표현되었다. 하지만 -작품의 이해를 돕는 설명 부분은 건너뛰고- 그림만 유심히 바라보던 지인은 '엄마와 싸운 뒤 열 받은 어린아이가 주체할 수 없는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의 색칠놀이를 한 후의 그 결과물'이라고 평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저런 평을 하고 있었으려나?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는 전통 서양미술과도 그리 막역한 사이가 못 되는 미술 비전공자로서, 어쩌면 당연한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중략) 다수의 동시대 미술품들은 영구적이지 않고, 전통적인 미술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자주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때문에 많은 현대미술과 동시대미술은 작가의 의도나 감정,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식견 등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이 있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중략) 이 책의 주된 목적은 현대미술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변화와 관점, 접근법과 결과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 작품이 맥락에 맞게 고찰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서 6쪽, '서문'에서-


   현대미술에 대해 살펴보고 싶어 읽어본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에는 19세기 말부터 21세기에 이르는 약 120년의 세월 동안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작가들이 각기 다른 방식-회화, 조각품, 판화, 콜라주, 설치미술 등-으로 완성한 75점의 예술작품이 실려있다. 산업혁명과 사진의 발명, 휴대용 물감 튜브의 발명이라는 격변 속에서 화가들은 새로운 표현 방식에 눈을 뜨거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색다른 표현 방식을 모색해야만 했는데, 그 치열했던 탐구와 고뇌의 흔적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페이지마다 반짝이고 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컨템포러리 미술에 속해 있는 책 속의 작품들은 시대순으로 구분해 크게 다섯 가지 챕터로 나뉘어 있는데,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후반', '21세기'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후기인상주의, 분리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절대주의, 다다, 오르피즘, 구축주의, 초현실주의, 데 스테일,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플럭서스, 개념미술, 신표현주의 등 책 속에 있는 작품들에 영향을 준 미술 운동 또한 등장한다.



   미술사학자인 이 책의 저자 수지 호지는 사학자라는 본업 외에도 정리정돈과 요약의 달인이란 부업이라도 있는지, 책 속 작품마다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작가의 뒷배경을 깔끔히 요약정리해놓은 것도 모자라 작품 자체를 세세하게 구획 짓고 번호를 매긴 다음 이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화가들의 특징적인 기교나 작품에 사용된 재료 및 색채와 색조, 구도 혹은 구조, 영감이나 영향, 상징성 등 다양한 미술 기법과 작품에 관련된 내용들을 말이다. 또한 해당 작품에 영향을 준 사건이나 관련이 있는 작품을 같이 소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미술사에 대해 좀 더 넓은 안목을 가지게끔 도와준다는 인상을 주었다.


   책 속에는 누구나 -이름 정도는- 다 아는 빈센트 반 고흐, 피카소, 샤갈, 모딜리아니, 살바도르 달리, 프리다 칼로, 몬드리안, 백남준, 데미안 허스트 등을 비롯해 내가 미처 들어보지 못했던 작가의 작품도 많았다. 새롭게 알게 된 작가의 작품을 저자의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디테일하게 감상하는 건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울', 게오르게 그로스의 '메트로폴리스', 파울 클레의 '빨간 풍선', 호안 미로의 '경작지', 조셉 코넬의 '약국', 루시언 프로이트의 '반사된 상이 있는 벌거벗은 초상화', 척 클로스의 '자화상' 등. 그중에서도 아웃사이더 면모가 느껴졌던 '헨리 다거(Henry Darger)'가 유독 인상적이었다. 20세기 중반쯤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작가 헨리 다거의 작품 '무제(어린이들이 있는 목가적인 풍경)'는 아웃사이더 아트로 분류되는데, 책 속에 간략히 요약된 그의 삶에 관한 소개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았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밝은 색채와 꽃이 만발한 화사한 배경 속에 서 있는 어린 소녀들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마냥 밝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일주일 가까이 읽으며 매일 밤 내 눈을 즐겁게, 때론 가슴을 뜨겁게 해주었던 모든 작품들. '20세기 후반' 이후의 실험적이고 기발한 개념미술 작품들을 제치고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작품은 바로 오스카 코코슈카의 회화 작품 '바람의 신부 The Bride of the Wind'(1913)이다. 예전에 한 번 스치듯 본 후 잊고 있던 작품인데, 저자 수지 호지의 디테일한 설명으로 재발견한 작품이라고나 할까.

   '폭풍'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바람의 신부'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알마 밀러와 함께 있는 코코슈카의 자화상인데, 마치 '이게 바로 표현주의다아아!'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어둡고 푸른 바다 위에 누워 있는 두 사람, 코코슈카와 알마. 그림 속 세상에는 두 사람밖에 없는 듯하다. 이 둘만 영원할 것 같은, 혹은 둘이 함께 하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들 주위로 거칠게 튀어 오르는 파도는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며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데, 이 생생한 붓 자국은 -저자 수지 호지가 짚어준 것처럼-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연상시킨다. 저자 수지 호지의 설명을 아직 보기 전 이 작품을 쳐다봤을 때 편안히 누워 있는 아름다운 여성에 비해 왼편에 어두운 표정으로 누워 있는 남성의 표정에서 불안한 기운이 계속 느껴졌다. 저자는 '④ 심리적 통찰'에서 이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데, '바람의 신부'는 그들이 헤어지기 직전 완성되었으며 자신에게 싫증이 나 떠나려는 알마를 향한 코코슈카의 불안과 근심이 반영되어 작품 속 남성의 표정이 어둡게 표현되었다고 적혀있다. 한편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 있는 두 사람 뒤로 검은 태양과 부서지는 파도, 보라색 산맥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코코슈카의 괴로움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둔 정치적 혼란을 나타낸다고 설명되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같은 해 작품인 프란츠 마르크의 '동물들의 운명'에서도 나타나 있다.



   '20세기 후반'을 넘어가면서부터 난해한 작품이 점점 더 많아졌지만, 저자 덕에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두 페이지에 걸쳐 번호와 함께 디테일하게 달아놓은 저자의 친절한 작품 설명을 읽은 뒤, 앞으로 한 장 다시 넘겨 큼지막하게 수록된 메인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이 그림을 처음 마주하고 있는 것마냥 새롭게 느껴지는 게 참 신기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홍준 교수의 명문을 이렇게 또 몸소 체험하고 있구나, 싶다. 요약정리의 달인인 저자 수지 호지의 디테일한 식견 -그리고 끊임없이 넘겨 봤던 책 끄트머리의 '용어 해설'- 덕분에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은 더 생긴 것 같아 뿌듯하다. 이 책 말고도 <디테일로 보는 서양미술> 편이 있는 것 같던데, 그 미술서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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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인간 - 타인도 나 자신도 위로할 줄 모르는 당신에게 EBS CLASS ⓔ
권수영 지음 / EBS 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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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눈치 챈 독자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여덟 가지 마음 돌봄의 기술의 영어 앞 글자를 순서대로 모으면, 힐링(H-E-A-L-I-N-G)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다. 이 마음 돌봄의 기술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고 상호작용한다.


-본서 289쪽-


   <치유하는 인간>의 마지막 장에 적힌 위의 구절을 읽는 순간, 나는 또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 책을 읽는 내내 왜 이리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지 스스로 신기하면서 놀랍기도 했다. 주로 슬픔에 가득 찬 눈물이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깜짝 선물을 받고 놀라움과 기쁨에 겨워 흘리는 눈물과도 같았다.


   <치유하는 인간>을 읽는 동안 나는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 'empathy(공감)' 챕터에 나온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상담 사례를 읽다가 눈물을 쏟아냈고, 'epoche(판단 중지)' 챕터의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 인용 부분에서 -내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감동적으로 느꼈던 장면을 읽어내려가며 또 눈물을 흘렸으며, 'lamentation(애도)' 챕터에서 한국의 장례문화인 '염'을 설명하는 구절에선 펑펑 울었다. 또한 'network(관계망)' 챕터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 관한 일화를 읽다가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처음 울음을 터뜨렸던 순간은 두 번째 챕터인 'empathy'에서였던 것 같은데, 책을 읽으며 흘렸던 눈물 중 아마 가장 서러운 감정으로 흘린 눈물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내 감정의 웅덩이 밑바닥으로 내려와 같이 공감해준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과 함께.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자신을 뒤돌아보고, 과거 내 경험 속 사건에 연관된 인물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내가 반드시 누려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애도의 시간과, '안전감의 조건(conditions of safety)' 없이 지내오며 제대로 된 해소의 울음 한번 터뜨리지 못한 채 버텨온 나날들, '조건부 자기 존재감' 속에 허우적대야 했던 지난날들이 내 폐부에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내게 상처를 끝없이 안겨주었던 가족, 나에게 깊은 배신감을 안겨주었던 절친과 친구,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조차 몰랐던 예전 연인 등등.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과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표면으로 '거짓 자기'를 만들어놓고 내 안으로 들어가 심연 속으로 한없이 침잠했던 나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렇게 이상하고 미운 가족도,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도, 어쩌면 모두 상처받은 마음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하고 주변인에게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연민 같은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놀라운 내적 변화였다.


   내가 받은 상처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깨끗이 지우려고, 마치 상처받은 적이 없던 시절로 돌아가려고 발버둥 쳤던 내 모습이 어리석었다는 걸, 나는 'growth(성장)' 챕터 속에 나온 30대 젊은 부부의 사례를 읽으며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내가 받은 상처들을 제대로 '수용(acceptance)'하지도 못한 채 상처받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거나 특정 일이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가려고만 노력했다(그렇게 하면 내 상처가 없어질 거라는 듯).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런 상처 속에 있는 나를 공감하려고 노력하거나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단 한 명도 없었으니, 그 어떤 상처도 제대로 치유된 적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책은 어설프고 바보 같은 나를 '안아주기(holding)'로 시작해 '성장(growth)'으로 인도하는 8가지 마음 돌봄 기술을 통해 내 안에 있는 '치유하는 힘'을 조금씩 이끌어내며 내가 가진 상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힌트를 주었다. 글 서두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내가 흘린 눈물은 기쁨의 의미인 것 같다고 말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건대 '자조 모임'에 들어온 중독자가 받는 환영의 박수를 나 자신에게 선사하는 의미의 눈물이었을 거란 생각도 든다. 제대로 된 회복의 여정 위에 오른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박수 말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종교인의 천태만상을 봐오며- 종교인에 대해 썩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은 까닭에, 책 속에 종교적인 언급이 살짝만 나와도 눈살을 찌푸리곤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런 구절이 몇 번 나왔음에도 눈살을 찌푸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저자가 적절한 비유를 위해 종교적인 언급을 할 때 요란스럽지 않게 한 것도 한몫했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종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치유'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충분히 느꼈기 때문임이 더 컸다. 달을 보라며 가리킬 때 나는 장미꽃으로 가리키는 걸 즐겨하지만 다른 사람이 국화꽃으로 가리키거나 히아신스로 가리킨다 한들 우리가 바라봐야 할 달의 의미가 퇴색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이 책을 쓴 저자나 만드는 데 도움을 준 모든 사람을 찾아가 힘껏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 감사하다고,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힐링(healing)'에 대해 내가 제대로 알 기회가 과연 있었을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 너무 흔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그 의미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도 불분명한 '힐링'과 '공감'이란 단어에 대해 이렇게 명확하게 이해해본 적이 없다. 지금껏 말이다. 이 세상에 막 태어난 아기가 엄마의 품 안에서 힐링을 느끼는 그 첫 번째 순간처럼, 나도 첫 번째 힐링의 순간을 맞이한 기분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과거의 그림자가 나를 괴롭히고 있는 와중에, 상처를 '수용'하기로 마음을 먹기만 했는데도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기분이 든다. 내 안에 존재하는 치유의 힘, 힐러 본능을 믿고 진정한 치유를 향해 발을 떼는 일이 그리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일단 한 걸음은 뗀 것 같다. 나의 치유와 성장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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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 세계기록 2021 (기네스북) 기네스 세계기록
기네스 세계기록 지음, 신용우 옮김 / 이덴슬리벨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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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깥이 쌀쌀한 11월의 토요일 오후 3시. 마음이 편안해서 왠지 한없이 여유롭게 느껴지는 시각. 코로나19로 인해 외출도 약속도 없는 것에 익숙해져 더더욱 여유로워진 주말 오후. 이럴 때 내가 읽기 좋아하는 책은 컬러풀한 사진과 정보가 가득해 뭔가 끝없이 파고들어 가기 좋은 장르다. 한마디로, <기네스 세계기록 2021>과 같은 기록서를 읽기에 딱 좋은 시간이라는 말씀! 지난 주말 동안 흥미롭고 놀라운 기록들로 꽉 채워진 <기네스 세계기록 2021>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편집자의 편지'를 보면 올해 접수된 신청서가 작년 같은 기간보다 2천~3천 건이 적다고 적혀있다. <기네스 세계기록>도 코로나19의 여파를 비껴갈 수는 없었을 터. 그런데 놀라운 건, 작년보다 신청 건수가 적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편집부는 하루에 무려 90건 정도를 살펴봐야 했다는 거다! 코로나19도 신기록 수립을 위한 전 세계인들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나 보다. 그 열정을 의식이라도 한 것처럼 2019년에는 처음으로 기네스 세계기록의 날에 테마를 정하였는데 그건 바로 '도전 정신'이다. 또한 이번 편의 기록 선별에 영감을 준 주제는 '당신만의 세계를 발견하라'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슬로건은 책 표지에서부터 나와 있다.



   올해 <기네스 세계기록 2021>은 총 12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는데 '태양계/자연계/동물/인간/시간과의 싸움/기록 마니아/문화&사회/모험가들/테크놀로지/게이밍/팝 컬처/스포츠'가 바로 그 주제들이다.

   이번 편의 특별 주제는 챕터 10에 있는 게이밍, 즉 '게임에 관한 놀라운 기록'인데 다양한 게임들이 여러 기록을 수립하거나 경신하고 있었다. '스피드런을 가장 많이 한 게임'은 1966년 닌텐도에서 발매된 [슈퍼 마리오 64]이며(2020년 4월 22일 기준), 이 게임의 캐릭터인 '마리오'는 리메이크와 재발매를 제외한 225개의 비디오게임 타이틀에 등장하며 '가장 많이 등장하는 비디오게임 캐릭터'로 기록됐다(2020년 4월 23일 기준). 몇 해 전 내가 무척 재미있게 플레이했고 감동까지 받았던 [라스트 오브 어스](너티독, 2013년 작)와 그 DLC인 [레프트 비하인드](2014년 작)는 'BAFTA(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 후보에 가장 많이 오른 비디오게임'으로 기록됐는데 무려 12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다. '가장 많이 팔린 비디오게임'은 바로 [마인크래프트](모장/마이크로소프트, 2011년 작)인데 출시 후 지금까지 1억 7,600만 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 기록을 세웠다. 흥미진진한 게이밍 챕터에 관한 소개를 마치기 전 하나만 더! '[오버워치] 월드컵 최다 우승'은 바로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은 [오버워치] 월드컵이 개최되고 3번째 대회까지 연승하다가 2019년에는 3위에 머무르며 연승 기록을 경신하지 못했다(아, 아쉽...).


   게이밍 챕터를 조금만 소개했을 뿐인데 본문의 양이 이렇게나 늘어나 버렸군(쿨럭;). 아직 나만의 기네스 세계기록 TOP7도 꼽지 못했는데! '내가 꼽은 <기네스 세계기록 2021> TOP7'를 소개하기 전에 올해 <기네스 세계기록 2021>을 읽으며 느꼈던 큰 특징부터 짚어주고 싶다.



   첫 번째, 기네스 세계기록 제작부는 '더 라이온스 셰어'와 파트너를 맺고 자연과 동물을 보전하기 위해 많은 활동을 추진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기네스 세계기록도 자연보호에 동참한다는 사실에 무척 흐뭇하다.

   두 번째, 챕터 끝자락에 '명예의 전당'이라는 섹션을 따로 마련해 신기록 수립자 중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12명의 명사를 기네스 세계기록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는 점이다. 헌액된 명사 중에는 <기네스 세계기록 2017>에서 서문을 맡기도 했던 버즈 올드린 박사도 있다.

   세 번째, 오프라인 참여 인원이 대규모인 기록들은 대부분 코로나19가 심각해지기 전인 2019년이나 2020년 초에 세운 기록이라는 점이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며 내년까지 이어질 거라 예상되는 현시점에서, 내년에 나올 <기네스 세계기록>은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지 왠지 궁금해진다.

   네 번째, 기네스 세계기록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으로 그 뒷이야기를 더 찾아볼 수 있었던 것에 더해 이번 편에선 AR(증강현실)까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증강현실을 처음 체험한 건 아니지만 <기네스 세계기록>에서,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주제인 '태양계'로, AR 카드에서 툭 하고 터져 나오는 행성들을 보고 있으려니 너무 기뻐서 절로 함성이 나왔다. 손가락으로 행성들을 톡톡 건드려보며 내 손 안에 자전하는 행성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껏 즐기다 보니 마치 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런데 소행성 '아로코스'의 AR 카드는 활성화되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태양 AR 카드를 토성으로 적어놓은 오타 부분 역시.)

   다섯 번째, 흥미로운 게이밍 챕터에 뒤지지 않을 만큼 재미있는 '시간과의 싸움' 챕터 역시 매우 볼 만하다. '30초 동안/1분 동안/1시간 동안/하루 동안'이라는 시간 구분 아래 다양한 신기록들이 소개되어 있으며 각 시간대별로 해볼 만한 도전을 추천해놓았다. 물론 이를 도전해볼지 안 해볼지는 당신의 몫이다.

   여섯 번째, 2017년부터 한국어판이 정식 출간되기 시작한 이래 가장 예쁜 표지라는 점이다. <월리를 찾아라>를 연상케 하는 표지를 보며 내 마음은 비닐 커버를 뜯기도 전에 이미 책에 사로잡혀 버렸다! 표지와 면지에 동일하게 프린팅되어 있는 그림을 훑어보다가 '호머 심슨과 마지 심슨이 왜 있을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이 책에 등장하는 신기록 수립자들을 그려놓은 일러스트였다! 책 끝에 있는 '워들로를 찾아라'가 바로 이 아기자기한 책 표지와 관련된 섹션인데 너무 재미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표지&면지를 다시 보면 낯익은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표지가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여섯 가지로 짧게(?) 요약해본 이번 기네스 세계기록의 특징이었다(아앗... 본문이 더 많이 늘어나 버렸어!). 짧게 요약해보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니 이런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경악스러우며,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는' 기록서를 짧게 요약할 수 있다는 게 기네스 세계기록감 아닌감?!



   얼마 전 미국의 유명한 제약회사 화이자에서 코로나19에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백신이 개발되었다는 뉴스가 발표되며 내년 겨울이면 이 지겨운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끝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얼른 이 시국이 끝나서 내년에도 변함없이 다채로운 기록들로 가득한 <기네스 세계기록>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끝으로 책에 있는 약 3,500개의 기록에서 '내가 꼽은 <기네스 세계기록 2021> TOP7'을 발표하며 글을 맺는다(이번엔 정말로 최대한 짧게 나열해보겠습니드앗...!). 책을 완독한 후 다시 읽어내려가며 선정한 최초의 87개에서 또 추려 53개, 다시 추려서 30개, 거기서 또 추려서 12개... 이렇게 긴 과정을 거쳐 뽑아본 것들이니 즐겁게 읽어주길 바란다. (참고로 나열된 순서는 순위와는 상관없는 책 속 출현 순서다.)


1. 최초로 발견된 다이아몬드 안의 다이아몬드(45쪽) : 2019년 10월 러시아 동부에서 발견된 이 특별한 다이아몬드는 지름 4.9mm에 0.62캐럿인 바깥 다이아몬드 속에 지름 2.1mm에 0.02캐럿인 작은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다. 사진을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정말 놀라운 다이아몬드다!


2. 최다 인원이 스머프처럼 입은 기록(106쪽) : 유명한 벨기에 만화인 스머프 속 캐릭터들처럼 입은 2,762명의 파란색 사람들이 2019년 2월 16일 독일 로치링겐에 모여들었다. 실제 사진을 보면 장관이 아닐 수가 없다.


3. 턱수염에 크리스마스 방울 많이 끼우기(116쪽) : 미국의 조엘 스트레서란 사람이 2019년 12월 7일 미국 워싱턴주 올림피아에서 자신의 턱수염에 축제용 방울을 무려 302개나 끼웠다. 사진을 보면 저 풍성한 수염엔 뭔들 못 끼울까 싶다.


4. 경매에서 팔린 가장 비싼 카디건(140쪽) :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이 MTV 언플러그드 어쿠스틱 공연 때 입은 의상인 회색 모헤어 소재의 카디건을 기억하는가? (네!) 그 카디건이 2019년 10월 26일 미국 뉴욕시에서 열린 경매에서 무려 33만 4,000달러에 판매됐다. 커트 코베인이니까, 뭐 그럴 만하다고 본다.


5. 가장 빠른 전기 아이스크림 밴/ 가장 빠른 화장실(1쪽/172쪽) : 영국의 발명가 에드 차이나는 2020년 3월 17일 영국 노스요크셔주 엘빙턴 비행장에서 자신이 직접 개조한 '에드의 전기 아이스' 밴을 최고 118.964km/h의 속도로 몰아 영국 시간기록협회의 인증을 받았다. 이 밴은 원래 디젤엔진을 단 메르세데스 벤츠 스프린터였다. 에드는 2011년 3월 10일 '보그 스탠더드'라는 도로를 달리는 화장실 또한 제작했었는데,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시험한 결과 최고 68km/h를 기록했다. 아이스크림 밴과 달리는 화장실 위에서 즐거워하는 이 아저씨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미소가 번진다.


6. 오스카 국제장편영화상과 작품상을 동시에 받은 최초의 영화/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국제영화(195쪽) : 봉테일이 결국 해낼 줄 알았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블랙코미디 [기생충](2019년 작)은 2020년 2월 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과 작품상을 동시에 받았다! [기생충]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골든글로브상 외국어영화상,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외국어영화상을 받는 등 가장 많은 상을 받은 국제영화이기도 하다. ('최고 수익을 기록한 영화'인 [어벤져스: 엔드게임], 하나도 안 부럽다!)


7. (위에서 언급한 것 외) 기네스 세계기록에 새로이 등재된 대한민국 관련 기록들(그중 4개만!) : 2019년에 '가장 많이 팔린 스마트폰 브랜드'인 삼성전자, '최단 시간 틱톡 100만 팔로워 달성'의 BTS, 'ATP 투어 본선에서 승리한 최초의 청각장애 선수' 이덕희, '가장 높은 고도에 도달한 전기 자동차' 현대자동차(인도법인) 코나 일렉트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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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기예르모 데쿠르헤즈 지음, 윤지원 옮김 / 지양어린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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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친구들과 헤어져 이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싱숭생숭한 남자아이, '로렌조'.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사할 집으로 이동하는 동안 차창 밖에 멋진 풍경들이 스쳐 가고 있음에도 우울한 마음에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네요.


   도심과 떨어져 덩그러니 홀로 자리 잡고 있는 새로운 집에 도착한 로렌조는 자기 방이 될 2층 오른쪽 방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거대한 책상과 마주하게 되는데요. 여기저기 살펴보다 책상의 숨겨진 공간 속에서 미스터리한 노트 한 권을 발견합니다.


   노트 속에는 그림과 함께 색종이를 오려 붙여 완성한, 네 가지의 이야기가 들어 있었어요. '청동 드래곤', '장화와 모자', '공장', '꿈의 여행자'가 바로 그것인데요. 첫 번째 이야기인 '청동 드래곤'을 읽은 직후 로렌조는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어요. 생각에 잠겨 있던 로렌조는 엄마의 부름으로 아래층에 내려가던 차에 문득 천장의 용머리 장식 전등 중 하나가 깨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청동 드래곤' 이야기의 힌트를 얻게 돼요. 그건 바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는 것! 로렌조는 노트 속 몽환적인 이야기를 떠올리며 책상에 앉아 열심히 그림을 그려봅니다. 밤이 깊어지도록요.



   노트 속에서 보았던 청동 드래곤을 마당에서 발견하고, 브로콜리 나무를 실제 거리에서 보는 등등. 노트를 계속 읽어나가며 로렌조는 노트 속에 등장한 사물들을 현실에서도 보는 신기한 체험을 합니다. 그러는 동안 '휴고'라는 친구도 생기고, 이사 온 동네의 과거에 관해서도 알게 되는데요. 매일 노트를 읽으며 그림을 그리고, 모험을 시도하기도 하는 로렌조의 모습은 낯선 곳으로 이사 온 아이답지 않게 무척 신나 보입니다.


   엄마의 부탁으로 따라간 양로원에서 로렌조는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또 다른 모험을 하기로 한 로렌조. 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놀라운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감명 깊게 읽은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은 그림체뿐만 아니라 완성도를 올려주는 디테일까지 멋진 그림동화책이었어요. 노트 속 이야기가 나올 때는 노란색 바탕으로 바뀐다는 설정이 꽤나 매력적이더군요.


   저는 이 책을 읽다가 조금 울적해지기도 했는데요. 책 속에 나오는 네 번째 이야기 '꿈의 여행자'를 읽을 때 코끝이 살짝 시큰해지더니, 로렌조가 노트의 주인과 만나게 되었을 때는 눈시울까지 붉혀버렸지 뭐예요. 훈훈한 해피엔딩인 건 분명한데 왜 이다지도 슬프게 느껴지는 건지, 처음엔 제 마음을 잘 헤아릴 수가 없었어요. 노트 속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처음엔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던 로렌조처럼 말이죠.



   노트를 만든 '그레고리오' 할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이 담긴 노트(더 나아가 외로운 자기 자신)를 누군가가 찾아주길 바라며 그 노트의 마지막 이야기를 완성했을 거란 생각을 하니, 마음이 몹시 저렸어요. 사고로 인해 두 다리를 잃은 후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홀로 외로이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긴' 것 같은 나날들을 보내다 양로원에 가기로 결심하며 노트의 마지막 이야기를 완성한 그레고리오 할아버지의 그 마음이... 아마 제 마음속 깊이 확 들어와 버렸던 것 같아요. 자신의 처지를 성냥갑에 갇힌 채 바다를 표류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할 정도면, 얼마나 힘들었던 걸까요? 할아버지가 만든 노트를 재미있게 읽어준 것도 모자라 손수 그린 그림으로 재해석해 준 로렌조가 저는 -할아버지 못지않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을 정도로, 가슴에 많은 여운을 안겨준 그림책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들>. 안 그래도 요사이 '추억의 힘으로 살아간다'라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던 차에 이 그림책을 읽어서 그런가, 왠지 더 유의미한 사색의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추억도 추억이지만, 그것을 환기할 수 있게끔 만들어줄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고요.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색종이를 잘라 붙이든,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을 오래도록 남길 특별한 방법에 대해 한번 생각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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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살아간다
리즈 마빈 지음, 애니 데이비드슨 그림, 김현수 옮김 / 덴스토리(Denstory)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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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동안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것 같다.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을. 거울을 보며 양치질을 해야 개운하게 닦는 습관을 지녔음에도 이를 닦는 동안 얼굴이 아닌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을 만큼, 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 못했다. 나를 들여다보려고 하질 않으니, 내가 지금 왜 이러는지 당최 그 이유를 알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무심코 한 책에 손이 갔다. <나무처럼 살아간다>. 매번 느끼지만 내 무의식은 나에게 지금 뭐가 필요한지를 참 잘 안다. 내 의식은 바보처럼 허우적대고 있을 동안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나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버티며 계속 생존해야 한다. 이 책은 수억 년 전부터 살아오며 지구에 뿌리내린 이 적응의 귀재들이 가진 능력과 지혜를 정리해놓은 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은 휴식과 더불어 조용한 위로를 받았다. 정갈하게 그린 나무 그림과 자연스럽게 꾸민 텍스트의 색깔들, 그리고 나무들의 이야기가 나를 편안하고 소소한 즐거움에 빠지게 했다. 누드 제본된 책은 이 책으로 처음 접했는데, 스프링 제본된 책처럼 책이 잘 펼쳐져서 좋았다. 제본에 쓰인 초록색 실과 마주칠 때마다 마음은 왜 그리 차분해지던지.



나무는 (중략) 우주가 무엇을 던져주든 받아들이면서

예상치 못한 일에 적응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나무는 무척 유연한 존재로 진화해왔다.

- 본서 55쪽 -


나무로부터 배울 수 있는 큰 교훈 중 하나는

삶에서 벌어지는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모든 현상을 받아들이고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본서 107쪽 - 


   '스코틀랜드 소나무'는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1만 년 이상 굳건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서 있다. 수천 년 동안 자기 모습을 온전히 지키며 그 자리에 꿋꿋이 서 있는 '서어나무'처럼 말이다. 이 두 나무는 온전히 나다운 게 무엇이며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는 게 어떤 건지를 잘 보여준다.

   '검은호두나무'의 심재(나무 몸통의 중심부)는 어마어마한 힘에도 훼손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마치 내면의 힘을 잘 기른 사람처럼. 

   뉴칼레도니아에 사는 '세브 블뢰'는 바꿀 수 없는 척박한 주변 환경을 놀라운 방법으로 감당한다. 토양 속에 니켈 농도가 높은 뉴칼레도니아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구연산을 활용해 니켈을 수액에 아주 안전하게 저장한 것이다. 세브 블뢰의 아름다운 파란색 수액은 어쩔 수 없는 건 받아들여야 함을 일깨워주는 적절한 수용적 자세의 상징과도 같다.

   '구아레아'는 열대 폭풍에 쓰러져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는다. 누운 상태에서 새로운 싹을 틔운 후 품고 있는 식량과 수분을 싹에 공급한다. 구아레아의 이 끈질긴 생명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과 긍정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이뿐만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시나무'와 '미송', '사탕단풍', '연필향나무'. 그리고 봄이면 만개하는 '왕벚나무'와 해마다 2주간 벚꽃 개화와 비슷한 시기에 '심장이 터지도록' 꽃을 활짝 피우는 '라일락'은 행복은 선택하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온몸으로 말해준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나무들과 내용을 위에 몇 개 나열해봤는데, 이외에도 소개하고픈 나무가 많지만 내용이 더 길어질 것 같아 줄였다(그렇다, 줄인 게 이 정도다).



   다양한 방법과 모습으로 환경에 적응한 나무들이 가진 지혜를 읽으며, 한동안 내가 왜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이 고마웠다.


   예측불가능한 이 고단한 삶 속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삶을 계획하며 살아가는 '맹그로브'의 능력을 닮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정면 돌파하며 극복해가는 수많은 나무처럼 나도 그렇게 용감해지고 싶고, 의연해지고 싶다. 책 속 '황연목' 편에 적힌 말마따나, "나무들처럼 우리도 가장 어려운 시기를 건강하게 버틸 수 있는 방법들을 개발해나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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