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 디테일로 보는 미술
수지 호지 지음, 장주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1월
평점 :
일시품절



   며칠 전 책을 읽고 있는데 등 뒤에서 "그거 뭘 그린 거야?"란 말이 들려왔다. "무슨 책인데? 현대미술...? 흠. 이건 작가가 뭘 말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어렵네."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의 후반부에 수록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화'를 내 뒤에서 훔쳐본 지인의 반응이다. 리히터의 1986년 작 '추상화'는 선명한 빨간색과 파란색, 애시드 옐로, 그리고 이 색채들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주황색과 초록색이 그림 전체에서 강렬하게 빛나고 있다. 붓으로 물감을 바르고, 긁어내고, 떠내고, 얼룩지게 하거나 번지게 만드는 과정에서 에너제틱한 즉흥성이 표현되었다. 하지만 -작품의 이해를 돕는 설명 부분은 건너뛰고- 그림만 유심히 바라보던 지인은 '엄마와 싸운 뒤 열 받은 어린아이가 주체할 수 없는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의 색칠놀이를 한 후의 그 결과물'이라고 평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저런 평을 하고 있었으려나?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는 전통 서양미술과도 그리 막역한 사이가 못 되는 미술 비전공자로서, 어쩌면 당연한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중략) 다수의 동시대 미술품들은 영구적이지 않고, 전통적인 미술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자주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때문에 많은 현대미술과 동시대미술은 작가의 의도나 감정,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식견 등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이 있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중략) 이 책의 주된 목적은 현대미술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변화와 관점, 접근법과 결과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 작품이 맥락에 맞게 고찰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서 6쪽, '서문'에서-


   현대미술에 대해 살펴보고 싶어 읽어본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에는 19세기 말부터 21세기에 이르는 약 120년의 세월 동안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작가들이 각기 다른 방식-회화, 조각품, 판화, 콜라주, 설치미술 등-으로 완성한 75점의 예술작품이 실려있다. 산업혁명과 사진의 발명, 휴대용 물감 튜브의 발명이라는 격변 속에서 화가들은 새로운 표현 방식에 눈을 뜨거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색다른 표현 방식을 모색해야만 했는데, 그 치열했던 탐구와 고뇌의 흔적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페이지마다 반짝이고 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컨템포러리 미술에 속해 있는 책 속의 작품들은 시대순으로 구분해 크게 다섯 가지 챕터로 나뉘어 있는데,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후반', '21세기'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후기인상주의, 분리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절대주의, 다다, 오르피즘, 구축주의, 초현실주의, 데 스테일,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플럭서스, 개념미술, 신표현주의 등 책 속에 있는 작품들에 영향을 준 미술 운동 또한 등장한다.



   미술사학자인 이 책의 저자 수지 호지는 사학자라는 본업 외에도 정리정돈과 요약의 달인이란 부업이라도 있는지, 책 속 작품마다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작가의 뒷배경을 깔끔히 요약정리해놓은 것도 모자라 작품 자체를 세세하게 구획 짓고 번호를 매긴 다음 이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화가들의 특징적인 기교나 작품에 사용된 재료 및 색채와 색조, 구도 혹은 구조, 영감이나 영향, 상징성 등 다양한 미술 기법과 작품에 관련된 내용들을 말이다. 또한 해당 작품에 영향을 준 사건이나 관련이 있는 작품을 같이 소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미술사에 대해 좀 더 넓은 안목을 가지게끔 도와준다는 인상을 주었다.


   책 속에는 누구나 -이름 정도는- 다 아는 빈센트 반 고흐, 피카소, 샤갈, 모딜리아니, 살바도르 달리, 프리다 칼로, 몬드리안, 백남준, 데미안 허스트 등을 비롯해 내가 미처 들어보지 못했던 작가의 작품도 많았다. 새롭게 알게 된 작가의 작품을 저자의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디테일하게 감상하는 건 참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울', 게오르게 그로스의 '메트로폴리스', 파울 클레의 '빨간 풍선', 호안 미로의 '경작지', 조셉 코넬의 '약국', 루시언 프로이트의 '반사된 상이 있는 벌거벗은 초상화', 척 클로스의 '자화상' 등. 그중에서도 아웃사이더 면모가 느껴졌던 '헨리 다거(Henry Darger)'가 유독 인상적이었다. 20세기 중반쯤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작가 헨리 다거의 작품 '무제(어린이들이 있는 목가적인 풍경)'는 아웃사이더 아트로 분류되는데, 책 속에 간략히 요약된 그의 삶에 관한 소개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았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밝은 색채와 꽃이 만발한 화사한 배경 속에 서 있는 어린 소녀들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마냥 밝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일주일 가까이 읽으며 매일 밤 내 눈을 즐겁게, 때론 가슴을 뜨겁게 해주었던 모든 작품들. '20세기 후반' 이후의 실험적이고 기발한 개념미술 작품들을 제치고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작품은 바로 오스카 코코슈카의 회화 작품 '바람의 신부 The Bride of the Wind'(1913)이다. 예전에 한 번 스치듯 본 후 잊고 있던 작품인데, 저자 수지 호지의 디테일한 설명으로 재발견한 작품이라고나 할까.

   '폭풍'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바람의 신부'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알마 밀러와 함께 있는 코코슈카의 자화상인데, 마치 '이게 바로 표현주의다아아!'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어둡고 푸른 바다 위에 누워 있는 두 사람, 코코슈카와 알마. 그림 속 세상에는 두 사람밖에 없는 듯하다. 이 둘만 영원할 것 같은, 혹은 둘이 함께 하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들 주위로 거칠게 튀어 오르는 파도는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며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데, 이 생생한 붓 자국은 -저자 수지 호지가 짚어준 것처럼-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연상시킨다. 저자 수지 호지의 설명을 아직 보기 전 이 작품을 쳐다봤을 때 편안히 누워 있는 아름다운 여성에 비해 왼편에 어두운 표정으로 누워 있는 남성의 표정에서 불안한 기운이 계속 느껴졌다. 저자는 '④ 심리적 통찰'에서 이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데, '바람의 신부'는 그들이 헤어지기 직전 완성되었으며 자신에게 싫증이 나 떠나려는 알마를 향한 코코슈카의 불안과 근심이 반영되어 작품 속 남성의 표정이 어둡게 표현되었다고 적혀있다. 한편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 있는 두 사람 뒤로 검은 태양과 부서지는 파도, 보라색 산맥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코코슈카의 괴로움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둔 정치적 혼란을 나타낸다고 설명되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같은 해 작품인 프란츠 마르크의 '동물들의 운명'에서도 나타나 있다.



   '20세기 후반'을 넘어가면서부터 난해한 작품이 점점 더 많아졌지만, 저자 덕에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두 페이지에 걸쳐 번호와 함께 디테일하게 달아놓은 저자의 친절한 작품 설명을 읽은 뒤, 앞으로 한 장 다시 넘겨 큼지막하게 수록된 메인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이 그림을 처음 마주하고 있는 것마냥 새롭게 느껴지는 게 참 신기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유홍준 교수의 명문을 이렇게 또 몸소 체험하고 있구나, 싶다. 요약정리의 달인인 저자 수지 호지의 디테일한 식견 -그리고 끊임없이 넘겨 봤던 책 끄트머리의 '용어 해설'- 덕분에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은 더 생긴 것 같아 뿌듯하다. 이 책 말고도 <디테일로 보는 서양미술> 편이 있는 것 같던데, 그 미술서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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